2022년 2월 8일 화요일
어마어마하게 두꺼운 '선비' 를 다 읽었다. 김기현 전북대 윤리교육과 교수의 저서다. 고등학교 때 윤리선생님이 들려주신 퇴계의 '이기이원론' 과 이이의 '이기일원론' 의 대립을 얄팍하게 알고 있었다. 이 책으로 근본적인 '이' 와 '기' 를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선비의 자연관과 사회관을 포괄적으로 공부하였다. 제일 놀라운 것은 <주역>이었다. 자연의 순환과 반복을 통해 인간의 삶을 조망하였다. <주역>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6쪽
오늘날의 학문 풍토와는 달리, "온몸으로 인식하고 성찰하며 온몸으로 시험하고 온몸으로 실천함" 으로써 학문과 삶을 일치시켰던 선비의 세계를 탐색하는 데에는 역시 '온몸' 으로 느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자세가 요구되었기에 말이다.
* 49 쪽
이처럼 사물의 복합적인 본질구조를 시간적 관점에서 살피면, 모든 사물은 존재의 연쇄 질서 속에 있는 것으로, 또는 존재의 끊임없는 맞물림 속에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종시(終始)' 라는 말에 깊이 담긴 존재론적 함의가 여기에서 밝혀진다. [주역] 은 말한다. "끝이 있으면 시작이 있는 것이 하늘의 운행법칙이다. " "혼인은 사람의 끝이자 시작이다." 또한 그 책은 8괘 가운데 하나인 <간(艮)> 에서 만물의 완성을 말하면서, "만물의 끝이자 시작이 된다 (설괘전)" 고 한다. 그러므로 한 사물은 필연적으로 그에 앞서 있는 타자를 그 역사 속에 갖는다. 예컨대 퇴계는 한 사람의 현우(賢愚) 를 해명하는데 그 개인의 촐생 이전 어머니의 수태시에 내외 환경이라고 하는 선사적(先史的) 요인을 적극적으로 고려하였다. 이러한 존재연쇄의 관념 속에서 살필 때 한 사물의 시작은(始) 은 그것의 촐현과 더불어 기산되지( 일정한 시간이나 장소를 기점으로 하여 셈이나 계산을 하다) 않는다. 그것은 앞선 사물과 맞물린 부분, 즉 앞선 사물의 끝(終) 에서부터 헤아려진다. 이렇게 살피면 '시종' 이라는 말은 존재의 내막을 드러내는데 미진한 표현이 될 수밖에 없으메 '종시' 야말로 존재의 복합적이고 연쇄적인 구조를 직시해 주는 매우 함축적인 어법이 아닐 수 없다.
* 78 쪽
퇴계는 이를 다음과 같이 부연하였다.
리(理) 는 본래 하나인데 그 덕이 네 가지로 나뉘는 것은 어째서인가? (ㆍㆍㆍㆍㆍㆍ) 만물의 생성 변화의 과정 속에서 살피자면 모든 사물은 반드시 그 시작이 있는 법이요, 시작이 있으면 성장이 있는 법이며, 성장이 있으면 결실이 있으면 완성이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그 시작과 성장과 결실과 왼성의 과정에 네 가지 덕의 명칭이 정립된 것이다. 따라서 총괄적으로 말하면 하나의 리(理) 일 뿐이지만 나누어 말하면 네 개의 리(理) 가 있는 셈이다.
* 106 쪽
선비가 추구했던 존재 열락의 세계가 여기에서 열린다. 참자아의 실험을 통해 타자의 성취와, 나아가 만물의 생성 빌육을 도움으로써 천지와도 짝할 만한 존재의 풍요를 누리러 하였다. 맹자는 말한다. "만물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으니, 그 이치를 돌이켜 성실히 행하면 이보다 큰 즐거움이 없을 것이다. " 여기에서 '그 이치' 란 곧 '나에게 갖추어져 있는 만물' 의 의미와 가치를 뜻한다. 그러므로 그가 이어 "서(恕) 의 노력만큼 사람을 얻는데 간절한 것은 없다" 고 말한 것은 이(理)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역지사지의 사고 속에서 상대방의 저지를 이해하고 그를 배려하려는 '서(恕) ' 의 정신은 자타 분별의 개인을 벗어나 만물의 생성 발육을 돕고자 하는 몰아일체의 사랑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이는 선비의 사랑의 이념이 규범적인 요구를 넘어서 존재론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 120 쪽
자연을 준법하려는 선비의 문화의식은 [주역] 의 공부를 통해서 더욱 강화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선비의 마음 속에서 범자연의 문화관을 심어 주는 핵심 경전이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음양의 자연현상에서 양을 제고하고 음을 억제하는 부양억음(扶陽抑陰) 의 인문 가치를 추출하여 제시하고 또한 8괘 건(乾), 태(兌), 이(離), 진(震), 손, 감(坎), 간(艮), 곤(坤) 의 자연적인 상징 (하늘, 연못, 불, 우레, 바람, 물, 산, 땅) 에 인문적인 가치(구드건함, 기쁨, 밝음, 움직임, 공손함, 험난함, 머무름, 유순함) 를 마치 그것들의 속성인양 덧붙여 자연이 이치에 따라 살도록 가르친다. 더 나아가 64괘의 [대상(大象)들은 저러한 상징들의 복합적인 상호 작용이 함의하는 자연의 교훈을 각양으로(여러가지 모양이나 태도) 인문 가치화하고 있다.
* 140 쪽
일반적으로 말하면 심성(心性)에 관한 논의가 심화될수록 천지 만물을 향해 열려 있는 도덕생명에 대한 지각과 그 실천은 약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계와 만물, 그리고 인간이 이(理). 기(氣), 심(心), 성(性) 등 몇몇의 암호언어로 압축되어 공식화되면서 그것들의 존재들의 존재는 추상적인 언어 문자로 박제화되어 일상의 현실에서 직접 체험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16세기 초엽 사화로 얼룩진 도학 시대를 지나 이후로 일기 시작한 성리학계의 이기심성론은 점점 그 치밀함을 더하면서 한편으로 이와 같은 문제점을 갈수록 키워 갔던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퇴계의 말을 들어보자. "인(仁)과 의(義)를 성(性) 의 관점에서 말하면 모두 체(體)요 정(情)의 관점에서는 모두 용(用) 이며. 음양(陰陽) 으로 말하면 의체인용(義體仁用) 이요, 마음과 일로는 인체의용(仁體義用) 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가지 가정적인 문제를 논의해 볼 만하다. 우주 자연 속에서 인간의 좌표를 찾고 도덕생명에서 자신의 본질을 발견했던 그들이 만약 심학에 경주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인간의 존재공동체적인 본질 또는 도덕생명의 실현을 차단하는 현실 앞에서 삶의 행로를 과연 어떻게 잡았을까 하는 것이다. 만약 심성의 내면의 세계로 퇴각하여 비밀스러운 자족을 구하는 길을 알지 못했더라면 그들은 자신의 인간관을 수정하지 않는 한 자기 부정의 혼란과 고통을 면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하여 퇴로를 갖지 못한 막다론 골목에서 그들은 부조리한 사회 현실에 끊임없이 저항하면서 개혁을 꿈꾸는 적극적인 사고를 보였을지도 모른다. 맹자의 혁명 사상은 그 대표적인 예에 해당할 것이다. 물론 성리학의 도덕성 관념이 일면 맹자에 연원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당시 무도한 사회로부터 물러나서 열락을 누릴 수 있는 내밀한 심학의 은둔처를 깊이 마련하지 못했던 점에서 성리학자들의 태도와는 사뭇 다르다.
* 283 쪽
퇴계는 임금에게 올린 [성학십도] 에서 그것을 분명히 밝힌다. 그는 그림의 웟면에 오륜을 적어 놓고 그 아래에는 박학(博學), 심문(審問),신사(愼思), 명변(明辯), 독행(篤行) 의 다섯 가지 공부 방법론을 나열하고 있는데, 그중 독행의 조항에는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요점을 덧붙인다.
수신의 요점
말은 진실하고 신의가 있으며, 행동은 무게 있고 경건할 것
분노를 다스리고 욕심을 막으며, 선을 따르고 잘못을 고칠 것
처사의 요점
의로움을 올바로 행할 뿐 이득을 도모하지 말 것
도리를 밝힐 뿐 공명을 계산하지 말 것
대인의 요점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행하지 말것
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거든 돌이켜 자기 자신에게서 문제점을 찾을 것
* 340 쪽
개인과 사회에 관한 선비의 인식을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한번 확인한다. 그에 의하면 사회는 원자처럼 고립된 개인들의 집합체에 불과한 것이거나 개인 뒤에 사회가 있는 것이마니다. 사회는 개인들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을 염려하여 이루어 낸 요청적인 형식이거나 타협적인 계약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들의 삶을 법적, 제도적으로 보장해주는 힘을 갖기 때문에 필요한 것도 아니다. 사회는 인간의 출현과 함께 시작되며, 그의 존재를 유지시켜 주고 성취시켜 주는 사람들의 유기적인 관계망이다. 그 어떤 사회에도 속하지 않는 개인을 우리는 도대체 상상한 수 없다. 그러한 자는 존재의 진공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사람은 사람 사이(人間) 에서만 사람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존재다. M.셜러 또한 말한다. "모든 개인에게는 의식의 본질적인 부분일 뿐만 아니라, 또한 사회는 관련 영역으로서 그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나'가 '우리' 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우리' 가 또한 '나'의 필연적인 구성요소다. "
* 468 쪽
우리는 여기에서 제사가 갖는 생사로적인 의의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앞서 살핀 것처럼 조상에 대한 배려의식이요, 선조와의 성스러운 만남이다. 그런데 후손 제사를 통해 만나고 배례하는 조상은 그의 자아 밖에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대상(집단) 이 아니다. 깨끗하고 맑게 재계된 자손의 정신은 그의 존재 내부에서 역사적인 뿌리로 여전히 작용하는 선조의 정신을 느끼고 그와 통한다. 그와 같은 감응은 현재의 세계 속에 내던져져 고립된 그의 무상한 실존을 일순간 가문의 역사만큼이나 확대할 것이다. 그렇게 확대된 그의 멱사적 자아는 자신의 살의 징후에 놓인 공무(空無) 의 세계를 알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조상을 자기 존재의 거대한 뿌리로 믿으며, 또한 자신도 역시 가문의 일원으로서 훗날 후손들의 배례를 받으며 그들의 삶 속에서 영원히 살아가리라고 기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앞 물결이 둿 물결과 다르고 둿 물결이 앞 물결과 다르지만 그러나 하나의 물결임에는 다름이 없는" 것처럼, 그는 자신의 앞뒤로 흐르는 '종족 생명의 물결' 을 현재의 자신 안에서 발견하고 확인하면서 순간의 삶 속에서도 영원의 생명 의식을 가질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또한 선비 특유의 불멸 의식을 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