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심 재판, 윤석열 징계 논란 :
계급 착취 왜곡하는 검찰개혁이 아니라 부르주아 국가기구 폐지!
지난 12월 23일(수) 서울중앙지법은 자녀 입시 비리와 사모펀드 등의 의혹을 대부분 인정하며 정경심 동양대 교수에게 징역 4년에 벌금 5억 원을 선고했다. 여기에 미공개 정보를 이용해 시장경제 질서를 흔드는 중대 범죄와 증거 인멸 지시 등의 수사 방해를 덧붙였다. 이른바 ‘조국 사태’에서 비롯된 정경심 동양대 교수 재판은 1년여 이상을 끌어오면서 지지자와 반대자 사이의 치열한 여론전뿐만 아니라 검찰개혁, 사법개혁 등의 이슈를 부각시켰다. 정 교수 측은 재판 내내 "가족이 비판 없이 혜택을 누렸던 건 반성하지만, 조 전 장관 낙마를 위한 표적 수사"였다며 무죄를 주장해왔다. 즉, 검찰개혁의 이면에는 국가 권력 기구에 대한 지배계급 내부 분파 간의 권력 투쟁이 진행되고 있다. 그 싸움은 그들이 계급 이해관계에 얼마나 투철한지를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문재인 정부의 검찰 개혁 요구는 환상이다. 그것은 막강한 검찰권을 행사하는 억압적 국가기구에 대한 노동자의 민주적 통제가 아니라 ‘검찰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정권의 입맛에 맞게 검찰을 통제하려는 시도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검찰을 개혁하는 것, 즉 검찰을 ‘덜 독점적이고 덜 부패한’ 기관으로 바꾸겠다는 것은 지배계급 안에서의 통제 방향만 바꿀 뿐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생산, 소비, 분배는 겉으로는 폭력을 배제하고 자유와 평등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자본 임노동 관계는 계급 적대적이고 자본의 재생산을 위해서는 강권을 확보해야 한다. 이 모순이 겉으로는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분리된 공적 권력체계인 국가기구로 조직되었다. 이는 자본주의 국가를 초계급적 성격으로 왜곡하게 된 근원이고 국가 참여를 통한 사회개혁과 변혁이 가능하다는 오류에 빠지게 만든다. 따라서 이러한 적대적 계급 관계가 사라지지 않은 한 자본주의 국가기구는 노동자민중의 요구에 따라 ‘개혁’될 수 없다.
지금과 같은 지배계급 내부 분파 간의 권력 투쟁에서 노동자들은 어느 편도 들어서는 안 된다. 반(反)노동자/반민주적 검찰 권력을 비판하면서 문재인 정부의 가짜 검찰개혁을 지지해서는 안 되고. 반대로 부르주아 정권인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면서 검찰과 언론의 논리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누가 이기든 노동자들은 이용만 당할 뿐이고, 노동자의 통제력 강화가 아닌 지배계급의 독재(부르주아 민주주의) 안에 갇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가 주장하는 공정성 – 부르주아 이해관계의 수단
권력 기구에 대한 (민주당 주도권을 보장하는) 개혁안을 갖고 법무부 장관에 취임했던 조국 전(前) 법무부 장관과 문재인 정권은 개혁의 근거로 공정성을 내세웠다. 공교롭게도 검찰 역시 정경심 재판에서 같은 근거를 내세우고 있다. 정경심 재판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이번 사건을 특권층의 반칙이자 신종 정경유착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면서 "형사재판에서 평등의 원칙은 사회 고위층에도 똑같이 적용돼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부르주아 분파의 공정성? 그 공정성의 실체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부르주아 분파의 밥그릇 싸움이자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착취의 수단에 불과하다. 계급사회인 자본주의에서 기회와 과정과 결과의 공정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부르주아 정당들이 공정성을 제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물음 속에는 당연히 기회, 과정, 결과에서 모든 개인은 평등하다는 논리를 전제로 깔고 있다. 이러한 전제에서 생산수단을 소유하기 때문에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있기 때문에 지배한다는 부르주아의 허구가 재생산되고, 그것은 이데올로기로 노동자들에게 강요되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탄생 자체가 인민을 폭력적으로 생산수단에서 분리해 무산자를 양산하면서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회에서 노동자계급은 기회와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될 수밖에 없다. 지배계급의 아주 작은 일상만을 보여주는 조국의 사례에서만 보아도 조국 딸은 고등학생 때 의대 실험실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의대 교수와 함께 논문을 작성해 제1 저자가 되었다. 하지만 노동자계급의 자식들은 꿈도 꿀 수 없는 상상 너머의 현실이다. 즉 공정성은 계급 간 불평등을 덮으려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장치일 뿐이다. 부르주아 공정성의 범위에 노동자는 처음부터 철저히 배제되었다.
부르주아의 공정성은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공격수단이자 계급지배 수단이다. 결국 노동자들 스스로 무능력을 체화시킴과 동시에 노동자의 잠재력을 무력화시키고, 단결과 연대보다는 치열한 생존경쟁에 내물리게 한다. 이렇게 해서 부르주아는 자본주의 논리 속으로 단결된 노동자계급이 아닌 개별적 노동자로 포섭한다.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이 검찰개혁의 유일한 적임자라고 호명한 조국의 행태는 부와 지위를 세습하려는 부르주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검찰개혁의 대상인 검찰이든 수사권 독립의 혜택을 얻게 될 경찰이든 본질적으로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방어하고 노동자를 억압하는 역할에서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그런데도 문재인 정권은 사법개혁이 마치 공정한 국가, 정의로운 국가의 밑거름인양 떠들면서 사회적 불평등은 철저하게 침묵과 왜곡으로 일관한다. 이처럼 사법개혁의 본질은 계급 지배의 정당성을 공고하게 할 부르주아의 철옹성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떠한 검찰/경찰/사법기관도 친자본-반노동자적 억압 기구일 뿐이다.
검찰 개혁이 아니라 부르주아 억압 기구 폐지!
지난 16일 문재인 대통령이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제청을 받아 재가한 징계 결정에 대해 윤석열 총장은 집행정지 신청을 법원에 제기했고, 서울행정법원은 이를 일부 인용했다. 이에 따라 직무에서 배제된 윤 총장은 8일 만에 직무에 복귀했다. 직접선거로 선출되고 의회의 압도적 다수파까지 차지한 문재인 정권이 통제할 수 없는 검찰 권력을 ‘선출되지 않은’ 또 다른 국가기구인 공수처에서 견제할 수 있을까? 검찰 개혁은 추미애-윤석열 갈등에서 보여준 것처럼 인적 청산으로 가능한 것인가?
부르주아적 개혁은 코뮤니즘으로 향하는 ‘점진적 변화'가 아니다. 정치 검찰, 부패한 검찰을 민주적이고 청렴한 기구로 바꾸는 것으로는 검찰의 반노동자성이나 노동자계급에 대한 국가 폭력을 종식할 수 없다. ‘덜 해로운’ 정치인을 권력의 자리에 앉힌다고 부르주아 정부가 기능하는 방식을 바꿀 수 없듯이, 검찰을 개혁하고 그것에 새로운 위상을 부여한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자본의 이해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구라는 사실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사회의 다수인 노동자민중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폭력으로 통치하는 그들은 견인이나 포섭의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그동안 검찰과 사법기관이 구조적으로 저질러 온 범죄행위는 '사건 재조사와 진상 규명',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는 것과 책임자 처벌'만으로는 종식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그들과 적대하는 사회 계급인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물리적 힘과 집단 이성으로 그들이 독점하고 남용하는 모든 특권을 폐지해야 가능하다. 따라서 검찰 개혁, 사법개혁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대안은 코뮤니스트 혁명을 통해 모든 억압적 국가기구를 폐지하고, 노동자평의회/프롤레타리아트 총회 같은 계급 조직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새로운 세상에서도 특권계층이 존재하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개인과 특정 집단이 갖는 모든 특권을 폐지하고, 모든 공직자가 노동자 평균 급여를 받으며, 사회 전체의 통제(선출자의 소환) 속에서 노동자민중의 이해관계에 복무하게 하는 것이다.
검찰개혁을 둘러싼 현재의 갈등과 논쟁은 자본주의 위기, 코로나19 팬데믹 재앙의 고통 속에 살아가는 노동자민중의 삶과는 전혀 관계없는 지배계급 내부의 권력투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지배계급이 현재의 위기를 노동자민중에게 전가하면서 대중의 시선을 돌리는 데 유효했고, 계급의식을 왜곡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지배계급 내의 여러 분파와 그들의 계급적 본질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들을 개혁할 수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노동자민중에게 진정한 검찰개혁은 오직 자본주의 억압적 국가기구와 착취 체제의 폐지뿐이다. 그것은 어떠한 급진적 부르주아적 개혁으로도, 어떠한 부르주아 진보좌파의 집권으로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노동자계급의 근본적인 사회혁명은 그들의 개혁보다 훨씬 힘들고 엄청난 힘이 필요하다. 노동자계급은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어떠한 권력보다 더 큰 힘이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에 포섭되고 분열되어 있는 한 그 힘은 지배계급을 위해 쓰일 뿐이다. 따라서 비록 지금은 소수일지라도 부르주아 국가기구와 정치세력에 의탁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투쟁하는 노동자계급! 부르주아 공정성/민주주의의 위선을 넘어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 싸우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우리의 미래다.
2020년 12월 28일
국제코뮤니스트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