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 로마서12장9~21절
제목 :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
로마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하나는 어떻게(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교리1~11장)이고,
또 하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윤리12~16장)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믿는다는 문제가 먼저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는 그 다음이라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항상 교리(무엇을 믿느냐), 문제를 먼저 말씀하고,
다음은 윤리(어떻게 사느냐)의 순서로 말합니다.
어제는 윤리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합당한 예배, 지체됨의 원리, 많은 지체들의 기능과 역할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를 드리는 것이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고,
우리에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를 사용하되 즐거움으로 하라고 하십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분별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며,
공동체 안에서부터 실현되어, 모든 사람에게 흘러가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삶(12장 1절)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설명합니다.
1. 공동체에서 구현해야 할 영적 예배(9~13절)
1)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함, 우애와 존경(9~10절)
(1) 사랑하고 선에 속하라(9절).
“[9]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 '사랑'의 헬라어 표현인 '아가페'는 본서를 제외한 바울 서신 전체에서는 주로 신자들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을 나타내는데(Ridderbos) 사용된 반면 본서에서는 주로 신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데 쓰였습니다.(5:5,8; 8:35,39; 15:30; 단 8:28은 예외;Cranfield, Dunn).
그러므로 '아가페'는 10절에 나오는 '형제 사랑'을 나타내는 헬라어 '필라델피아'보다 더 넓은 의미의 사랑인 것이 확실합니다.
'거짓이 없나니'는'위선없이'를 나타내며 '진실한', '성실한'의 뜻을 가졌습니다(고후 6:6;벧전 1:22). -'숨김없이','위선 없이'로도 번역됨
사랑은 꾸밈없이 진실해야 함을 나타냅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 '미워하다'는 '몹시 미워하다', '혐오하다'의 뜻이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악을 미워하고 선한 것에 연합하라는 가벼운 명령 혹은 권고입니다.
이는 결정이 요구되는 삶의 길목길목에서 확실하게 선을 택하는 생활 원리를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에 속하기 위해 악은 그 모양이라도 미워하고 버리는 태도가 필요합니다(살전 5:22).
*살전5:22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진정한 사랑은 거짓이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맹목적인 사랑이 아니라 선과 악을 분별하는 사랑입니다.
선을 추구하고 악을 멀리하는 것이 곧 사랑입니다.
(2) 형제를 사랑하며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먼저 하라(10절)
“[10]형제를 사랑하며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 '형제를 사랑하여'를 가리키는 '필라델피아'는 형제 자매간의 사랑을 나타내며, '우애하고'를 가리키는 '필로스톨고이'는 혈육(血肉)간에 주고 받는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Dunn).
'필라델피아'라는 단어를 구성하는 '아델포스'('형제')는 교회 생활에서 신자들에게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단어입니다.
'필로스톨고이'는 신약성경에서 이곳에서만 나오지만 본서가 기록 될 당시의 헬라 문헌에 자주 나오며 특히 가족간의 '지극한 애정'을 나타낼 때 사용됐습니다.
따라서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들로 이뤄진 가족으로 그 공동체 안에서 가족 간에 느끼는 지극한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마 12:46-50;갈 4:5;엡 3:17).
사도 바울은 사랑이 단순한 이념으로 간주되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이제 사랑의 실천을 위한 구체적인 대안(지침)을 언급한 것입니다.
즉, 사랑은 이론으로만 베풀어져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도는 그 사랑이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가족에 속한 성도들 간의 관계에서 표현되기를 요구한 것입니다.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 이는 상대방을 인정해 주고 높이 평가해 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서로 먼저 존경할 수 있는 이유는 상대방의 개인적 인격이나 능력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셔서 그리스도의 크신 구속의 은혜를 입혀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는데 있습니다.
그리하여 함께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아,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사는 거룩한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인 것을 생각할 때 그 형제의 인간적인 모든 조건을 떠나서 진실하게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우러러 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인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고후 5:17)되게 한 하나님의 크신 은혜 베풂에 근거를 둔 권면인 것입니다(빌 2:13).
*빌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2) 열심히 주를 섬김, 환난 중 소망과 기도(11~12절)
(1) 열심을 품고 주을 섬기라(11절)
“[11]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부지런하여 - 바울이 주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특별히 근면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신앙생활의 나태를 경계하기 위함입니다.
보통 성도들은 처음 믿을 때에는 매우 열심이다가도 어느 정도 연륜이 쌓이게 되면 주를 향한 처음 사랑을 잃고 영적인 타성에 빠져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계 2:4;3:15).
*계2:4,3:15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에베소교회에/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라오디게아 교회에 ”
게으르지 말고 - '게으르지'는 근심이나 걱정 또는 부끄러움으로 늑장부리는 것을 의미합니다(잠 6:6, 9:21:25;마 25:26).
진정 새로운 마음으로 변화된 삶은 게으르거나 나태할 여유가 없습니다.
열심을 품고 - 이는 “성령과 함께하는 열심을 품고”입니다.
주를 섬기기 위한 열심은 성령의 감화가 아니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를 섬기라 - '주를 섬기라'는 '주께' 섬김을 다하라의 의미입니다.
'섬기다'의 헬라어 표현은 '둘류온테스'로 '종노릇하다', '섬기며 충성하다', '종되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신자들은 주인의 종으로서 충성을 다해 주인을 섬겨야 함을 의미합니다.
(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12절)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 죄의 형벌 아래에서 인간은 참된 소망도 즐거움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소망만이 참된 즐거움을 줄 수 있습니다. 영생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소망의 근거이며 근본이 되시므로 영원한 즐거움을 주시는 자이십니다.
‘환난 중에 참으며’. - 환난은 모든 인간이 당하지만 특히 신자에게는 복음으로 인한 환난이 있습니다.
참으며는 초기 기독교 문헌에는 '참다', '끝까지 견디다', '굽히지 않다'의 뜻으로 나타 남니다(고전 13:7;딤후 2:10;히 10:32;약 1:12).
이는 단순한 인내를 의미하기 보다는 소망을 바라보고 참는다는 의미로서 종말에 취할 것에 대한 선취(先取)를 근거로 참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말에 대한 소망과 그 선취로 인한 확신으로 성도는 끝까지 견디는 힘을 공급받습니다(히 7:19).
‘기도에 항상 힘쓰며’. - "항상 힘쓰며"는 '전심 전력하다', '헌신하다', '견디다'의 뜻이 있습니다. 이 단어는 기도를 언급할 때 주로 쓰입니다(행1:14;2:42;골 4:2).
종말이 가까워 올수록 하나님과 기도로 그 긴장을 표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또한 본 구절에서 현재 분사형을 사용한 것은 기도에 힘쓰는 것이 계속적이고 반복적으로 행해져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3) 성도 간의 나눔과 손님 환대(13절)
“[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1)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성도들은 로마에 있거나 예루살렘에 있거나(15:25)를 막론하고 곳곳에 흩어져 있는 모든 신자들을 일컫습니다.
쓸 것 공급하며 -성도들에게 서로 어려운 성도의 필요와 궁핍을 도와줄 뿐 아니라, 어려움에 함께 동참하라는 권면입니다.
당시의 로마 제국은 식민지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고 토지를 몰수하는 등 많은 재정적인 압박을 가했다.
그래서 일부 귀족층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따라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었다.
거기다 성도들은 신앙에 대한 박해도 감수해야 하는 형편이었으므로 성도간의 곤경(困境)을 도우며 동참하는 것은 서로에게 용기를 주며 위안과 격려가 되는 것입니다.
(2)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필롸세니안'은 '필'과 '크세노스'의 합성어입니다.
'필'은 '사랑하는', '좋아하는'의 뜻이며,
'크세노스'는 '손님', '이방인', '객'을 뜻합니다.
따라서 '필롸세니아'는 '손님이나 이방인, 즉 나그네를 사랑하는 것'으로 손님을 환대함을 일컫습니다.
애굽에서 '객'으로 있었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과거 역사를 생각하면서
'손 대접'하기를 강조하곤 했습니다.
또한 초대 교회 당시 성도들에 대한 핍박이 심했으므로 이곳저곳 나그네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여행하는 자들(바울과 그의 동료들)과 핍박으로 도망하는 자들,
돈 때문에 심부름 다니는 자들은 곳곳에서 신자들에게 대접을 잘받았습니다.
신자들은 한 가족이면서(10절) 모두 나그네이므로(히 11:13),
서로를 손님으로 여기고 합심하여 서로를 돌 본 것이다.
힘쓰라는 '추구하다', '좋다', '노력하다'를 뜻합니다.
여기서는 현재분사형 '디오콘테스'가 사용되어 계속적으로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는 권면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하라 하십니까?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고, 섬기고, 즐거워하며,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쓸것을 공급하며,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2. 세상에서 구현해야 할 영적 예배(14~21절)
1)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함(14절)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축복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로게이테”의 원형 '율로게오'는
'좋게 말하다', '칭찬하다'의 뜻입니다.
이 말을 신자가 하나님에 대해 쓸 때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되며(눅 1:64;2:28;약 3:9),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사용하면 복주신다는 뜻이며(마25:34;행3:26;갈3:9;엡 1:3),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 사용하면 축복하는 것이 됩니다(눅2:34;고전10:16;히11:20).
본문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영향 받은 것입니다(마 5:44;눅 6:28).
핍박하는 자, 즉 원수를 축복한다는 것에는 용서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내용도 포함됩니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 자체로는 이것을 행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나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을 내가 하기 위해서는 나의 본성의 법이 아닌 성령의 법에 따라 행해야 합니다(갈 5:16).
*갈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2) 서로 마음을 같이함(15~16절)
(1)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권면합니다(15절)
“[15]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4절과 본절은 자신을 잊어버려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본절은 우리가 슬픔 중에 있을 때에도 즐거워하는 자들과 즐거워하며,
우리가 즐거울 때에도 슬픔 가운데 있는 자들과 슬퍼하라는 권면입니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동정하는 것, 즉 감정과 처지와 조건을 같이 하는 것은 사랑으로써 가능하며(눅 10:27), 성령으로 인도받아야(갈 5:16)
한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빌 2:2).
이와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은
신자들 사이에서 뿐 아니라(고전 12:26;빌 2:17, 18),
14절과 관련하여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과의 사이에서도 필요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셨다(요 11:33-35).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선한 것을 즐거워하는 자들과 선한 것을 함께 즐거워하며(빌 2:18) 곤경과 불행으로 우는 자들에 대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지체로서 같은 슬픔을 갖습니다(마 5:4;눅 6:21).
(2) 높은 데 마음을 두지 않고, 낮은 곳, 낮은 자들과 함께 하는 자세즐 주문합니다(16절)
“[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 '마음을 같이한다'는 표현은 15:5;고후 13:11;빌 2:2;4:2에 나오는데,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아우토 프로네인'은 '같은 마음이 되는 것'이나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을 뜻합니다.
'서로'를 나타내는 헬라어 '에이스 알렐루스'('toward one another')는
'서로를 향하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외부로 나타나는 행동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같은 목적을 지향하고 같은 생각을 갖는 것은 빛 된 선행으로 나타나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될 것입니다(마 5:16).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 '높은 데 마음을 두는 것‘은 인간이 자기의 수준을 망각하고 분에 넘치는 기이한 일에 뜻을 품는 것입니다(시 131:1).
*시131: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낮은 데'는 '비천한'(눅 1:52;약1:9), '겸손한'(마11:29;고후10:1)의 뜻입니다.
따라서 '낮은 데' 처하라는 것은 자신을 생각함에 있어서 겸비(謙卑)하라는 것이며, 3절의 '분에 넘치는 생각을 하지 말고 지혜롭게 생각하며 처신하라'는 권유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 스스로 지혜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련한 자들 즉 지혜 없는 자들의 생각입니다(잠 3:7).
*잠3:7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높은 것에 대해 심사 숙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남들보다 뛰어나길 원하고 우월 의식을 갖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진중(珍重)하게 대하고 온순함을 가져야 할 것을 보여줍니다(Calvin).
그렇지 않고 스스로 지혜있다 하는 오만함은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3) 선으로 악을 이김(17~21절)
(1)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합니다(17절)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 이는 인간이 가진 본성을 제한시키는 가르침입니다.
일반적으로 악행하는 자에게 보다 큰 악으로 갚으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인데, 이는 이러한 인간의 자연 욕구를 제재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눈은 눈으로...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출 21:24, 25)는 공식적인 형벌을 말한 것이며 이런 규정을 세운 것도 개인적으로 보복하는 것들을 금하기 위한 것입니다(잠 20:22;24:29).
바울은 인간의 어두워진 마음(1:21)을 잘 알았으므로 인간에게 이런 교훈이 필요함을 느낀 것입니다.
또한 본문과 살전5:15; 벧전 3:9은 서로 유사한데,
*살전5:15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벧전3: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예수의 가르침(마5:38ff.)을 따라,
일정한 교리가 형성되어 전승되어 왔음을 보여줍니다.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이제 적극적인 권면으로 나아갑니다.
'모든 사람'은 '아무에게도'에 대칭되는 말로 신자나 불신자 모두를 가리킵니다. '모든 사람 앞에서'는 또한 '주님 앞에서'(고후 8:21)와 버금가는 권위를 갖습니다.
*고후8:21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
왜냐하면 주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사람들과의 현상적인 관계와 별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일에 반응하여 선을 행하라는 소극적인 명령이 아니고,
미리 솔선 수범하여 선을 행하라는 적극적인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선한 일'에 너희 자신을 몰두하라는 뜻이 됩니다.
(2)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복할고 주문합니다(18절).
“[18]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는 것이 어려울 때도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할 수 있거든'이란 표현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화합(和合)을 향한 욕구가 아무리 강력해도 소용이 없는 경우가 있음을 시사합니다(Harrison).
진정한 평화는 인간의 애씀만으로는 이뤄지지 않습니다.
평화를 위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으며(눅 2:14),
하나님과 죄악 된 인간을 화목케 하시려고(골 1:20, 22)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루면서 평화를 이루어야하는 궁극적인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죄악된 인간과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처럼 신자들도 평화를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골 3:15). 그러므로 신자들은 화평케하는 자들입니다(마 5:9).
(3)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19절)
“[19]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 이에 대해 1절을 보라(1:7;16:5, 9, 12;고전 4:14, 17;고후 7:1;엡 5:1).
이는 1절의 '형제들아'와 비슷한 애정이 담긴 호칭이며,
이런 호칭들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고전 10:14;고후 7:1;빌 2:12).
진노하심에 맡기라. 직역하면 '진노의 자리를 주라'입니다.
신약성경에서'진노'가 수식어 없이 나올 때는 대개 '하나님의 진노'로 봅니다. 본문에서도 수식어가 없으므로 하나님의 진노임이 분명합니다.
(3:5;5:9;9:22;13:5;엡 2:3;살전 5:9).
하나님의 진노는 절대 공정하게 나타나는 것이므로 지나치게 관대하거나 치나치게 냉혹하지 않습니다.
또한 심판의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유래하고 악인을 심판하는 주권은 하나님께만 속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원수를 개인적으로 보복하는 것은 공정성(公正性)면에서도 문제가 되지만 하나님의 주권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됩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 바울이 자주 그러했듯이 본 구절에서도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이 정당하다는 것을 뒷받침합니다(4:7;8:36;9:33;10 :19;11:26).
구약성경의 본문 신 32:35에는 "보수는 내 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때에 갚으리로다"로 되어 있습니다.
신명기의 문맥에 비추어 보면, 적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능욕하며 기뻐하면,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원수를 갚기 위해 개입하실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복수는 자신의 적들에게 뿐만 아니라 그들이 섬기는 거짓 신에게까지도 미칩니다(Harrison).
이처럼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입니다(마 12:18, 요 5:30; 9:39; 살후1:5;히 9:27).
예수께서는 이 권한과 권위를 확실히 인식함으로써 많은 수욕(受辱)과 고난(苦難)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보복하지 않고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벧전 2:23).
우리에게 대한 진노를 그리스도로 인해 거둬가심(8:1)을 생각하며,
우리의 억울함에 대한 보복은 포기되어야하는 것입니다.
(3)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20절)
“[20]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원수가 궁핍하며 곤경에 처했을 때 선행과 친절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원수를 먹이고 마시우는 것은 생명과 관계되는 행위이며 궁극적인 마시움과 먹임은 생수의 근원,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입니다(요 6:35).
숯불 - 대체로 숯불을 쌓는 것은 은혜를 베푸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것만이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허락하신 유일한 복수 방법입니다.
은혜를 베풀므로써 원수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와 부끄러움을 갖게 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죄악에서 돌이키게 되어 서로에게 평화와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4) 선으로 악을 이기라(21절)
“[21]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는 17절에서부터 계속 진행되어 온 내용의 요약이며 결론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 '악에게 진다'는 것은 원수의 악한 행위로 번민하거나 원수에 대해 악으로 갚으려고 악한 행위를 계획하는 것입니다.
즉 원수의 악한 행위로 인해 선한 상태를 떠난 것을 의미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 이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삶으로 곧 선행 구절에서 말한 겸손(3, 16절), 봉사(6-8절), 평화를 유지하는 것(18절)을 가리킵니다.
또한 20절의 원수에게도 친절을 베푸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현재 삶에서 승리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이 승리는 자신의 노력, 열심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믿는 믿음과 우리를 인도하는 성령의 힘으로 이뤄집니다.
*딤후 2:5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의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이기는 자입니다.
선이 악을 이기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우리의 원수를 친히 갚아주십니다(14,17~21절).
인간끼리의 복수는 악을 악으로 갚는 것에 불과하고 또 다른 복수심과 원수관계를 양산할 뿐이므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홀가분히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바는 원수가 했던 대로 똑같이 행하는 ‘보복’이 아닌, 예수님이 하셨던 대로 똑같이 행하는 ‘사랑’입니다.
보복은 겨우 원수 한 사람에 대한 앙갚음에 그치지만, 사랑은 악한 사탄의 세력을 무너뜨리는 통쾌한 승리를 이룹니다.
요즘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 아예 관계를 끊어버리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나에게 맡기신 십자가가 바로 그 사람일 수 있습니다.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거나, 상처 주거나, 억압하는 것은 우리가 미워하고 버려야 할 위선적 사랑입니다(9절).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에게 정직하며, 내게 좋은 것이 아니라 그에게 좋은 것을 주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악한 것까지 합리화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2)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랑이 잘 드러나야 합니다(10~13절).
형제자매가 서로 사랑하며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안에 있는 사랑으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랑을 실천할 수 없으므로, 사랑의 능력을 공급받기 위해 주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일에도 열심을 내야 합니다. 요즘 내 신앙생활은 어떻습니까?
어그러진 교우 관계는 없습니까? 바쁘다는 핑계로 봉사와 기도의 자리를 멀리하지는 않습니까?
3) 나 자신만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과 함께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15,16절). 즐거워하는 자와 같이 웃고, 슬퍼하는 사람과 함께 우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재난과 어려움을 당한 사람의 소식을 들었습니까? 필요하다면 함께할 시간을 냅시다. 옆 사람의 좋은 소식을 들었습니까?
시기하지 말고 진심에서 우러나는 기쁨을 표현합시다.
기도
공동체-불가능한 길이라고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이 가신 사랑의 길을 따르게 하소서.
열방-스마트폰의 보급과 과도한 이용이 인간의 사회적 관계 발달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며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이 늘고 있다. 정부와 사회와 기업이 이러한 문제 해결에 적극 협력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