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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효남(姜孝男)
선조 69권, 28년(1595 을미/명만력(萬曆) 23년) 11월 1일 기사 5번째기사
청주의 곽희정등이 이성남, 강효남, 신영옥등의 모반을 진고하다
충청도관찰사 윤승순(尹承勳)이 치계하기를,
“청주목사 이암(李巖)의 치보(馳報)에 의거하면, 본주에 사는 곽희정(郭希貞), 곽응수(郭應水)의 진고(進告)에 ‘본주 서강밖에 거주하는 학생(學生) 이성남(李成男)이 강효남(姜孝男), 신여옥(申汝沃), 한담(韓淡), 이경상(李景詳) 및 청안(淸安)에 거주하는 전대로(全大老), 진천(鎭川)에 거주하는 남응신(南應信), 회덕(懷德)에 거주하는 박생원(朴生員)이라 부르는 사람등과 모반하였다.’하였습니다.”하였는데, 의금부에 내렸다.
○忠淸道觀察使尹承勳馳啓曰: “據淸州牧使李巖馳報: ‘州居郭希貞、郭應水進告內: 「州西江外居學生李成男, 與姜孝男、申汝沃〔申汝玉〕,韓淡,李景詳,淸安居全大老,鎭川居南應信,懷德居朴生員稱名人等,謀叛事。」’” 下義禁府。
선조 69권, 28년(1595 을미/명만력(萬曆) 23년) 11월 9일(정축) 3번째기사
이성남의 공초 내용
이성남(李成男)의 공초는 다음과 같다.
“나이는 38세이고, 아버지는 가인의(假引儀)응장(應璋)이며 어머니는 진씨(陳氏)입니다. 대대로 청주(淸州) 서면(西面)에 살았는데 집안이 본디 가난하였습니다. 지리를 대강 배워 족친간에 혹 왕래하며 산을 보아주었습니다.
한담(韓淡)이 지난해 7월 사이에 병이 중하였다가 금년 3월에야 나았습니다. 4월에 화적(火賊)을 당한 뒤에 한담이 강효남(姜孝男)의 집에 가니,
강효남이 ‘네가 병과 화재를 겪었으니 어찌 아내를 데리고 오지않는가?’하고 올 때에 신을 데리고 오라 하였습니다.
7월에 한담의 부처(夫妻) 및 신의 부처(夫妻)가 일시에 나아갔더니 강효남이 이웃에 사는 신여옥(申汝玉) 및 신여옥의 매부 이경상(李景祥) 및 조덕보(趙德輔)의 첩등과 내청(內廳)에 있었고, 한종운(韓從雲)·한중운(韓仲雲) 조덕보등은 외청에 있었습니다.
신이 사들인 종 애손(愛孫)이 따라갔고 청주 기생 내은아(內隱娥)·여향(女香) 역시 빌어먹기 위해 갔습니다. 그날은 강효남의 집에서 술을 마시고 다음날은 전일 같이 갔던 사람들과 신여옥의 집에서 술을 마셨는데, 한종운·한중운도 초청해와서 술을 마시다가 이튿날에 각기 흩어졌습니다.
이 때문에 곽희정(敦希貞)·곽응수(敦應水)등이 무뢰한 사람들이 도당을 결성하였다고 가리켜 말한 것이지, 풍운 변화(風雲變化)하고 둔갑장신(遁甲藏身)하는 도술은 전혀 알지못하며, 진을 치고 군사를 숨기는 등의 일은 더욱이 알지 못합니다.
지난 신사년3095) 겨울에 신도(新都)의 뒤 갑사(岬寺)에서 독서하고 여기 저기 오가며 지리를 보며 유람하러 다녔습니다. ‘신도의 장수가 전라에 있는데 이듬해 2월에서 6월 사이에 거사하려한다.’는 등의 말은 모두 헛말입니다.
신은 점술을 대강 압니다.
임진년 분탕질할 때에 왜적이 5월에 청주를 함락하였습니다.
연기현감(燕岐縣監) 임태(任兌)가 신에게 ‘왜적이 올지 오지않을지에 대해 네가 모름지기 점을 쳐보라.’하기에, 신이 ‘적이 오기는 하나 현의 지역에는 정녕코 들어오지않을 것입니다.’하였더니, 수령이 ‘무슨 말인가?’ 하므로, 신이 추수(推數)하여 답하기를 ‘왜적이 목방(木方)3096)에 있고 경인·신묘의 목년(木年)에 군사를 훈련했으며 수년(水年)인 임진년에 나와서 마침내 청주를 함락하였으니 청주는 곧 목방(木方)이다.
연기(燕岐)의 연(燕)자는 새(鳥)의 무리이다.
새는 금(金)에 속하고 태수의 이름이 태(兌)이니 태(兌)도 금에 속하며,
수령이 임인생(壬寅生)이니 금생(金生)이다.
현지(縣地)의 사방이 또 모두 금에 속한다. 현지(縣地)의 북쪽에 관동(鸛洞)이 있으니 관(鸛)자는 금에 속하고, 동면에 부곡(釜谷)이 있고 서면에 부동(釜洞)이 있고 남면에 또 금사역(金沙驛)이 있으니 모두 금지(金地)이다.
저 왜적은 모두 목방(木方)의 사람으로 목년(木年)에 군사를 훈련하여 청주 목지(木地)를 먼저 함락하고 목왕(木旺)의 기운을 타고 왔다.
그런데 현지(縣地)가 모두 금지(金地)이니 저 왜적은 관청문밖에 이르기는 하나 들어오지 못하고 도로 물러간다.’하였습니다.
그 뒤 왜적이 과연 관문을 범하지는 않았습니다.
태수가 이러한 일들을 항상 순찰사 및 제진(諸陣)에 말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내가 도술이 있다고 의심한 것입니다.”
註3095]신사년:1581 선조14년.註3096]목방(木方): 동방
○李成男供稱: “年三十八。 父假引儀應璋。 母陳氏。 世居淸州西面。 家世素貧。 粗學地理, 族親間或往來看山。 韓淡, 前年七月間, 病重, 今年三月, 始歇。 四月, 見火賊後, 韓淡往姜孝男家, 則孝男曰: ‘汝經病與火災, 盍挈妻以來?’ 來時, 令率臣身而來。 七月, 韓淡夫妻及臣夫妻, 一時進去, 則姜孝男隣居申汝玉及汝玉妹壻李景祥、趙德輔妾等在內廳; 韓從雲、韓仲雲、趙德輔等在外廳。 臣買奴愛孫隨從, 淸州妓內隱娥、女香, 以乞食亦往。 其日, 則飮于孝男家; 次日, 則與前日同往人, 飮于申汝玉家。 從雲、仲雲, 亦請來飮, 翌日各散。 以此郭希貞ㆍ應水等, 指以無賴人結黨云, 風雲變化、遁甲藏身道術, 專不得知, 結陣藏兵等事, 尤爲不知。 去辛巳年冬, 新都後岬寺, 讀書, 橫行相地, 遊觀新都。 將帥在全羅, 明年二月六月間, 欲擧事等語, 皆爲虛事。 大槪臣粗解占術。 壬辰焚蕩之時, 倭賊五月陷淸州, 燕歧縣監任兌, 謂臣曰: ‘倭賊來否, 汝須占之。’ 臣曰: ‘賊雖來, 縣地則丁寧不入’ 云。 其後, 賊入燕歧東北面, 太守謂曰: ‘初言倭賊不入縣地, 今何來耶?’ 對曰: ‘賊雖遍滿國中, 太守所在處則不入矣。’ 太守曰: ‘何謂?’ 臣推數答之曰: ‘倭賊在木方, 庚寅、辛卯, 木年, 鍊兵; 壬辰, 水年, 出來。 遂陷淸州, 淸州乃木方也。 燕歧之燕字, 鳥屬也。 鳥則屬金。 太守之名兌也, 兌亦屬金; 太守, 壬寅生, 金生也。 縣地四方, 又皆屬金; 縣地北有鸛洞, 鸛字屬金; 東面有釜谷, 西面有釜洞, 南面又有金沙驛, 皆金地也。 彼賊皆以木方之人, 木年鍊兵, 先陷淸州, 木地, 乘木旺之氣以來。 縣地, 皆金地, 則彼賊雖至官廳門外, 不入還退’ 云。 其後, 賊果不犯官門, 太守此等事, 常言於巡察使及諸陣, 故人皆疑我有道術云。”
선조 69권, 28년(1595 을미/명만력(萬曆) 23년) 11월 9일 정축 4번째기사
강효남의 공초 내용
강효남(姜孝男)의 공초는 다음과 같다.
“대대로 청주 동면에 살았는데, 곽희정, 곽응수등과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살았습니다. 계사년에 염병(染病)으로 누워앓을 때에 신의 보리밭 이틀갈이쯤을 곽응수의 형제가 대낮에 몰래 베어갔으므로 관가에 소송을 내어 그 반을 도로 징수하였더니, 이 때문에 서로 다투어 혐의를 품게 되었습니다.
대개 이성남(李成男)은 지리에 정밀하다고 들었습니다.
집안이 대대로 독자로 전해오므로 혹 불길할까 염려하여 이장하려 하였는데, 마침 이성남과 선봉장(選鋒將) 권인룡(權仁龍)의 진중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위인을 보니 가볍고 미친 듯하여 미덥지 아니하였으므로 함께 오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전부사(府使) 정사호(鄭賜湖)도 이성남에게 지리를 물었다는 기별을 듣고는 이성남의 술업(術業)이 반드시 정밀할 것이라고 여기고 한담(韓淡)을 위문할 때에 이성남의 부처도 아울러 청해와서 술을 대접하고 파하였습니다. 흉모(兇謀)에 관한 사상(事狀)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姜孝男供稱: “世居淸州東面, 與郭希貞及應水等, 隔籬居生。 癸巳年, 染病臥痛時, 臣牟田二日耕處, 應水兄弟, 白晝偸刈, 呈官接訟, 還徵其半。 以此相詰懷嫌。 大槪聞李成男精於相地。 家世獨子傳來, 恐或不吉, 欲爲移葬, 適與成男, 相値於選鋒將權仁龍陣中。 見其爲人輕狂, 不信, 不與偕來。 又聞前府使鄭賜湖, 亦問地理於成男之奇, 意謂成男術業必精, 韓淡慰問時, 成男夫妻, 竝爲請來。 饋酒而罷, 兇謀事狀, 專不得知。”
선조 69권, 28년(1595 을미/명만력(萬曆) 23년) 11월 9일(정축) 5번째기사
한담의 공초 내용
한담의 공초는 다음과 같다.
“신이 임진년 이후로 오랫동안 종군(從軍)하다가 금년 4월에 화적을 당하여 머리가 으깨어졌으며, 6월에는 누워앓기에 이르렀습니다.
3촌 아저씨 강효남이 우봉(牛峰)땅의 소를 공물로 거두어서 상의하여 도살하고, 신의 부처를 청하여 수삼일동안 그 집에 와서 머무르라 하였습니다.
금년 7월 24일 아내를 데리고가니, 강효남이 ‘집안이 대대로 독자로 전해오니 이는 반드시 묘지가 불길한 것이므로 이성남에게 물어서 개장(改葬)하려한다. 그의 부처를 아울러 청해오라……’하였습니다.
신도(新都)가 도읍할 만하다는 말 및 박중선(朴仲宣)의 집 북쪽에 진을 친다는 등의 일은 전혀 알지못합니다.”
○韓淡供稱: “臣自壬辰以後, 長立從軍, 今年四月, 被火賊, 頭?盡破, 六月至臥痛。 三寸姜孝男, 牛峰地牛隻收貢, 相議屠殺, 孝男請臣夫妻, 數三日, 來住其家。 今年七月二十四日, 率妻歸到, 孝男曰: ‘家世獨子相傳, 此必葬山不吉。 欲問於李成男改葬, 其夫妻竝爲請來。’ 云云。 新都可都之言及朴仲宣家北結陣等事, 專不得知。”
선조 69권, 28년(1595 을미/명만력(萬曆) 23년) 11월 9일(정축) 6번째기사
한종운의 공초 내용
한종운(韓從雲)의 공초는 다음과 같다.
“금년 4월 청주 월로동(月老洞)의 종 훈세(訓世)의 집으로 내려갔더니 그 종은 이미 죽고 논 다섯 마지기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를 손수 경작하고, 간혹 소금을 팔아서 생활의 밑천으로 삼았습니다. 7월경에 강효남이 주연을 베풀었기에 동복아우 중운(仲雲)에게 ‘저 집에서 술상을 차려놓고 손을 초청하면서 우리들은 빈한(貧寒)하다하여 부르지아니하니 극히 부끄럽다. 그러나 올라가면 어찌 술을 대접하지 않겠는가?’하고,
드디어 강효남의 집에 갔더니, 술 반병과 청태(靑太) 한 바구니를 내어 보냈으므로 마시고 왔습니다.
신이 이성남·한담과는 이날 처음 만나보았으니 도술에 대해서야 어찌 언급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웃집에서 개를 잡아도 오히려 남에게 함부로 말하지 않는데, 하물며 작지않은 일죄(一罪)의 일에 대해서이겠습니까? 강효남등이 같이 모반한 정상은 모두 알 수 없습니다.”
○韓從雲供稱: “今年四月, 淸州月老洞奴訓世家下歸, 其奴已死, 只有畓五斗落。 手自耕種, 間或販鹽資生。 七月間, 姜孝男設酒。 語同生弟仲雲曰: ‘彼家致酒速客, 而吾等以貧寒之故不招, 極爲慙愧。 然若上去, 則豈不饋酒乎?’ 遂往孝男家, 酒半甁、靑太一笥出送, 遂飮以來。 臣與李成男、韓淡, 初見於是日, 有道術之事, 豈得語及乎? 隣家捉犬, 尙不妄言於人, 而況不小一罪之事乎? 姜孝男等同謀情狀, 竝知不得。”
선조 69권, 28년(1595 을미/명만력(萬曆) 23년) 11월 9일(정축) 8번째기사
조덕보의 공초 내용
조덕보(趙德輔)의 공초는 다음과 같다.
“신은 난리 초기부터 미조항첨사(彌助項僉使)의 군관으로 적을 토벌하였습니다. 금년 3월에 청주 남일리(南一里) 여종 정금(井今)의 집으로 가니, 외6촌 한종운·한중운이 종의 집에 와서 살고 있었습니다.
신이 초면으로 서로 만났고 그 뒤에는 각기 쌀되씩이나 내어 세 차례 술을 빚어 서로 마셨는데, 강효남이 한 번 와서 참여하였습니다.
7월에 강효남의 집에 술자리를 베풀었다는 말을 듣고 한종운·한중운과 같이 갔더니 한담·이성남·이경상(李景祥)이 그의 집에 먼저 와있었습니다.
한담등은 처자가 안에 있다하여 모두 들어가고 신들은 외정(外亭)에 있었습니다. 안으로부터 술을 보내왔으므로 함께 마시고 헤어져서 먼저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성남이 한 일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趙德輔供稱: “臣自亂初, 彌助項僉使軍官討賊。 今年三月, 往淸州南一里婢井今家, 外六寸韓從雲、仲雲, 來接于奴家, 臣初面相見。 厥後各出米升, 三次釀酒相飮, 姜孝男一番來參。 七月, 聞孝男家設酌, 與從雲、仲雲同往, 則韓淡、李成男、李景祥, 先在其家。 韓淡等, 以其妻子在內, 皆入去, 臣等在外亭。 自內送酒, 相與飮罷, 先爲出來。 李成男所爲之事, 專不得知。”
선조 69권, 28년(1595 을미/명만력(萬曆) 23년) 11월 9일(정축) 9번째기사
신여옥의 공초 내용
신여옥(申汝玉)의 공초는 다음과 같다.
“처음에 청주 서면에 살았는데, 지난해에 월로동(月老洞)으로 옮겨살았습니다. 신은 이성남과 한두 번 서로 만나보았습니다. 금년 7월에 신 및 아내를 청하였는데 질서(姪壻) 이경상이 마침 신의 집에 왔으므로 같은 날 데리고 가서 술자리에 참석했다가 파하여 왔습니다.
이성남이 지리와 음양의 일에 정밀하다는 것은 강효남에게 들었고, 한번도 왕래하며 통서(通書)한 적이 없으므로 도술이 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신이 자식이 없어 소첩을 얻었는데, 곧 곽희정의 친족이었습니다.
금년 8월에 신이 첩과 서로 싸웠는데, 첩이 성난 김에 곽희정의 집으로 달아나자, 곽희정이 자기 고공(雇工)에게 시집보내어 한달동안 나오지않았습니다. 신이 근근이 엿보아서 빼앗아왔는데 이 때문에 원혐을 맺어 거짓 고소한 것입니다. 신도 등에 관한 말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申汝玉供稱: “初居淸州西面, 前年月老洞移居。 臣與李成男, 一再相見。 今年七月, 請臣及妻。 姪女夫李景祥, 適來臣家, 同日率去, 參設酌罷來。 李成男精於相地陰陽之事, 聞於姜孝男處, 一無往來通書, 有道術之事, 得知無路。 臣無子, 得少妾, 乃希貞族也。 今年八月, 臣與妾相鬪, 妾乘怒奔往希貞家, 希貞嫁以其雇工, 一月不出。臣僅僅窺伺奪來,以此構嫌誣訴。新都等語,專不得知。”
선조 69권, 28년(1595 을미/명만력(萬曆)23년) 11월 9일(정축) 10번째기사
한량 이경상의 공초 내용
한량(閑良) 이경상(李景祥)의 공초는 다음과 같다.
“이성남이 도술이 있는 일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만, 지리와 음양을 잘 아는 것은 소문을 들었습니다.
7월에 강효남이 그 조카 한담을 위문하였는데, 신의 아내는 강효남의 첩과 7촌 친척입니다. 그러므로 초청하기에 부처가 일시에 나아갔더니, 이어서 술자리를 베풀었습니다.
신이 이성남과는 5촌 친척이나, 한종운·한중운·조덕보·박중선등은 모두 초면이었습니다. 신도등에 관한 말은 전혀 알지못합니다.”
○閑良李景祥供稱: “李成男有道術之事則不得知, 而但善於地理、陰陽則聞之矣。 七月, 姜孝男慰問其姪子韓淡, 臣妻與孝男妾, 七寸親也, 故請之。 夫妻一時進去, 仍爲設酌。 臣與李成男五寸親, 韓從雲、仲雲、趙德輔、朴仲宣等, 皆是初面。 新都等語, 專不得知。”
선조 69권, 28년(1595 을미/명만력(萬曆)23년) 11월 9일(정축) 11번째기사
전대로의 공초 내용
전대로(全大老)의 공초는 다음과 같다.
“신은 청안(淸安)에 살았는데 청주와는 60여리 떨어졌으니, 강효남·이성남 등이 체결(締結)하여 왕래하며 소를 잡고 술을 마신 등의 일은 전혀 알 리가 없습니다.
강효남은 처남이기는 하나 이미 의절(義絶)하였습니다.
강효남은 본디 일정한 거주지가 없어, 아내를 얻어 서울에 살기도 하고 수원에 살기도 하고 청주에 살기도 하였습니다.
비록 무상(無狀)한 모역(謀逆)을 하였다하더라도 의절한 매부와 같이 모의한다는 것은 만에 하나라도 그럴 리가 없습니다.”
○全大老供稱: “臣居淸安, 距淸州六十餘里。 姜孝男、李成男等, 締結往來, 屠牛飮酒等事, 萬無聞知之理。 姜孝男, 雖是妻娚, 而已爲義絶。 孝男本無定居, 或娶妻居京, 或居水原, 或居淸州, 雖無狀謀逆, 與義絶妹夫同謀, 萬萬無理。”
선조 69권, 28년(1595 을미/명만력(萬曆)23년) 11월 9일(정축) 12번째기사
박중선의 공초 내용
박중선(朴仲宣)의 공초는 다음과 같다.
“대대로 보은에 살다가 임진년에 왜적을 피해 홍주로 가서 오늘날까지 빌어먹었습니다. 금년 2월에 소를 올리러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청주 정좌산(正坐山)에 있는 이름을 모르는 집에 묵었는데, 곧 양반인 한담의 집이었습니다. 한담은 병으로 나와보지않고 밥을 지어 먹여주고는 양곡 두어되를 허급(許給)하였습니다.
이성남이란 사람이 서울 올라가는 유생이 왔다는 말을 듣고는 와서보고 양곡을 주었습니다. 서울에 올라가서 상소를 올리고 4일간 유숙한 뒤 도로 내려가다가 청주 무릉정(茂陵亭)에 이르러 곽란이 걸려 월로동에 갔더니, 인가가 분탕(焚蕩)되었고 오직 서울 사람 조덕보(趙德輔)의 막차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투숙하기를 애걸하였더니, 조덕보가 ‘이 마을에 인가가 있다.’하므로 가서 걸식하였던 바, 곧 강효남의 집이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또 신여옥의 집에 나아가 얻어먹고 회인(懷仁)으로 향하였습니다. 정미를 얻어 제사를 지내려고 무릉정으로 가는데 마을길에서 한담·이성남을 만났더니, 그들은 ‘우리들은 강효남의 집으로 가는 길이니 그대들도 같이 가는 것이 좋겠다.’하고, 마침내 인도하여 강효남의 집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본디 술을 마시지못하여 오직 두어잔만 마시고 파하였습니다.
신은 본디 몹시 곤궁하여 집이 원래 없었으니, 신의 집 북쪽에 진을 친다는 일은 극히 허황한 것입니다. 신도에 지리를 보았다는 등의 일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朴仲宣供稱: “世居報恩。 壬辰避倭, 往洪州, 至今乞食。 今年二月, 陳疏上洛, 止宿淸州正坐山名不知家, 乃兩班韓淡家也。 淡病不出見, 作飯供饋, 糧米數升許給。 李成男稱名人, 聞上洛儒生來到, 來見給糧。 上京呈疏, 留四日, 還下去, 到淸州茂陵亭, 得霍亂, 往月老洞, 則人家焚蕩, 只有京人趙德輔幕, 乞哀投宿。 德輔曰: ‘此里上有人家。’ 因往乞食, 乃姜孝男家也。 其夕, 又就食於(申汝沃)〔申汝玉〕家, 發向懷仁, 欲得精米以祭, 往茂陵亭村。 路逢韓淡、李成男。 曰: ‘吾等將往姜孝男家。 汝亦偕往可也。’ 遂引到孝男家, (木)〔本〕不飮酒, 只飮數杯而罷。 臣本窮甚, 本無家舍, 臣家北結陣事, 極爲荒誕。 新都相地等事, 專不得知。”
선조 69권, 28년(1595 을미/명만력(萬曆)23년) 11월 9일(정축) 13번째기사
한량 한현의 공초 내용
한량 한현(韓絢)의 공초는 다음과 같다.
“대대로 청주 정좌산(正坐山)에 살았는데 4월에 충청병사(忠淸兵使)의 군관으로 자망(自望)되었습니다. 7월에 남포(藍浦)·결성(結城)등의 고을의 궐군(闕軍)을 잡아보내는 일로 나아갔습니다.
그때 공주(公州)의 쇄마(刷馬)로 청양(靑陽)에 도착하여 그 고을의 마부로 체송(遞送)하고 그의 집 고공(雇工)으로 대신 보냈는데 중간에 말을 가지고 도주하였습니다. 쇄마마부(刷馬馬夫)가 말[馬]을 잃은 까닭으로 순찰사에게 고소하여 동주(同州)에 갇혔습니다.
4촌 한담이 술병을 가지고 강효남·이성남등과 옥중으로 와서 위로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성남은 집이 신이 사는 곳에서 7리쯤 떨어져있어 서로 안다고는 하나 그 사람이 어리석고 망령되어 그와 사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혹 지리를 보고 점을 치는 일로 출입이 무상하였으므로 마침 옥중으로 와서 보기는 하였으나, 이성남이 체결하였다는 일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閑良韓絢供稱: “世居淸州正坐山。 四月, 忠淸兵使軍官自望, 七月, 藍浦、結城等官, 闕軍捉送事進去時, 公州刷馬到靑陽, 遞送其官, 馬夫以其家雇工代送, 中間持馬逃走。 刷馬馬夫, 以失馬之故, 訴于巡察使, 同州被囚。 四寸韓淡, 持酒(壼)〔壺〕, 與姜孝男、李成男等, 往慰於獄中。 成男則家在臣居七里許, 雖曰相知, 以其人愚妄, 不與之交。 或以相地賣卜, 出入無常, 適來見於獄中, 成男締結事, 專不得知。”
선조 69권, 28년(1595 을미/명만력(萬曆)23년) 11월 9일(정축) 14번째기사
사노 삼종의 공초 내용
사노(私奴) 삼종(三從)의 공초는 다음과 같다.
“수원 황여필(黃汝弼)의 종으로 연기(燕岐)에 살았는데, 금년 2월 청주 강효남의 집 문밖에 옮겨살았습니다.
한담·이성남·이경상등이 강효남의 집에 술을 빚어놓고 세 차례 모여 마신 일은 들어 알고 있으나, 품팔이로 먹고 살아가므로 다른 일은 알지 못합니다.”
○私奴三從供稱: “以水原黃汝弼奴子, 居於燕歧。 今年二月, 移居淸州姜孝男家門外。 韓淡、李成男、李景祥等, 姜孝男家, 釀酒三度會飮事, 聞知。 傭食資生, 他餘事不得知。”
선조 69권, 28년(1595 을미/명만력(萬曆)23년) 11월 9일(정축) 15번째기사
애손의 공초 내용
애손(愛孫)의 공초는 다음과 같다.
“정랑 한연(韓淵)의 종으로 상전을 따라 의주(義州)에서 어가(御駕)를 호종하였는데, 상전이 죽은 뒤에 이성남의 집에 방매되었습니다. 7월에 상전의 부처와 강효남의 집에 함께 갔는데 아는 사람은 신여옥·한담·이경상뿐이었습니다. 술마시기를 파하자 각기 흩어졌으나 상전은 하룻밤 묵고 이튿날 집에 돌아왔습니다. 이경상이 저에게 ‘속임수로 종정도(從政圖)를 이겨 남녀의 벼슬을 도박하여얻으니 이처럼 가을일이 한창 다급한 때에 마침내 무익한 모임을 만들었다’하였습니다. 이 말만들었을 뿐 다른 일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愛孫供稱: “以正郞韓淵奴子, 隨上典, 義州扈駕, 上典身死後, 放賣於李成男家。 七月, 上典夫妻, 俱往于姜孝男家, 所知者, (申汝沃)〔申汝玉〕、韓淡、李景祥而已。 飮罷各散, 上典則留一宿, 翌日還家。 李景祥謂奴曰: ‘詭勝從政圖,賭得男女仕官,如此秋事方急之時,遂成無益之會。’只聞此語,他事專不得知。”
선조 69권, 28년(1595 을미/명만력(萬曆)23년) 11월 9일 정축 16번째기사
강효남의 첩 순옥의 공초 내용
강효남의 첩 순옥(順玉)의 공초는 다음과 같다.
“10년전 강효남에게 시집가서 왕래하면서 아는 사람은 언남(彦男)이라고도 부르는 이성남과 이경상, 한담, 신여옥, 한종운, 한중운입니다.
한담이 병을 앓은 뒤에 위문하려고 아내까지 아울러 초청하였으며, 이성남은 지리에 밝으므로 후히 대우하려고 초청하여 왔습니다.
여자 손은 내청에 있고 남자는 외청에 있었는데, 파할 무렵에 이경상, 이성남, 한담이 내청에 들어와서 각기 한잔씩 마시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영의정 칭호에 대한 말은 종정도에서 영의정이니 좌의정이니하고 불렀으므로 이 때문에 운운한 것입니다.
저의 남편이 지난 9월 22일에 신여옥과 나갔다가 3일이 지나서야 돌아왔는데, 미열한 여인이라 갔다온 곳을 모릅니다. 전라도 장수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姜孝男妾順玉供稱: “十年前, 姜孝男交嫁往來, 所知人, 則李成男, 或稱彦男, 李景祥、韓淡、申汝沃〔申汝玉〕、韓從雲、仲雲。 韓淡病後, 欲爲慰問, 竝請其妻。 李成男, 則以善於地理, 欲厚遇而請來。 女賓在內, 男子在外, 臨罷, 李景祥、李成男、韓淡入內, 各飮一杯, 各還其家。 領議政稱號事, 則從政圖稱領議政、左議政, 故以此云云。 女夫, 去九月二十二日, 與申汝沃〔申汝玉〕出去, 過三日乃還, 迷劣女人, 不知往還處。 全羅道將帥人, 專不聞知。”
선조 69권, 28년(1595 을미/명만력(萬曆) 23년) 11월 9일(정축) 17번째기사
추국청에서 본도로 하여금 정인길을 붙잡아 가두고 계문하게 했다고 아뢰다
추국청(推鞫廳)이【영의정 유성룡, 좌의정 김응남, 행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 정탁(鄭琢), 판의금부사 김명원(金命元), 지의금부사 윤자신(尹自新)·권율(權慄), 동부승지 윤담무(尹覃茂), 장령 우준민(禹俊民), 헌납 김택룡(金潭龍)임】아뢰었다.
“삼가 충청감사 박홍로의 장계를 보건대, 강효남의 서간(書簡)에 나온 정인길(鄭仁吉)이라는 사람을 잡지못하였습니다.
그 아우 의길(義吉)의 공초에 ‘인길이 고변할 일로 이달 6일 곧장 경성으로 갔다.’하였는데, 와서 머무를 만한 곳을 찾아 온갖 방법으로 체포하게 하였으며, 또한 본도로 하여금 철저히 조사하여 뒤쫓아 잡아서 단단히 가두고 계문(啓聞)하도록 하였습니다.
천안(天安)에 사는 육장생(陸長生)은 이미 곽희정의 진고(進告)에서 나왔는데 잡아서 가두었다하므로, 본도로 하여금 형틀에 묶어 올려보내도록 하였습니다.”
○推鞫廳【領議政柳成龍、左議政金應南、行知中樞府事鄭琢、判義禁府事金命元、知義禁府事尹自新ㆍ權慄、同副承旨尹覃茂、掌令禹俊民、獻納金澤龍。】啓曰: “伏見忠淸監司朴弘老狀啓, 姜孝男書簡現出鄭仁吉稱名人, 不得捕捉。 其弟義吉招內, ‘仁吉, 以告變事, 今月初六日, 直往京城’ 云。 來接可疑處, 多般捕捉, 亦令本道, 窮極跟捕, 堅囚啓聞。 天安居陸長生, 旣發於郭希貞進告, 而已爲捉囚云, 令本道繫械上送。”
선조 69권, 28년(1595 을미/명만력(萬曆)23년) 11월 10일(무인) 4번째기사
이성남등에게 별다른 역모 단서가 없자 곽희정과 면질시키도록 하다
추국청이 아뢰기를,
“이성남(李成男)·강효남·한담·한종운·한중운·조덕보·신여옥·이경상·전대로·박중선·한현(韓絢), 노(奴) 삼종(三從)·애손·순옥등을 곽희정이 진고(進告)한 사연으로 추문하였더니, 별다른 단서가 없습니다.
다만 곽희정등을 본도에서 다시 추문한 초사(招辭)에서는 ‘7월경 밭머리에 나갔다가 돌아와서 강효남에게「너희들이 결약(結約)하여 큰일을 이루려하나 남쪽과 북쪽에 변란이 있어 군졸이 정제되지 아니하니 어떻게 성공하겠는가?」하였더니, 강효남은 「군사는 저절로 있다. 그리고 명년 2월이나 6월에 이미 날을 택정하였다」하였다. 9월 26일 강효남이 그의 종 만종(萬從)에게 메밀을 타작하게 하면서 옆에서 보고 있었는데 곽응수가 본주 시장으로부터 돌아와서 같이 앉아서 강효남에게 「전장에는 반드시 무기가 있는 법인데 그대들은 하나도 없다」 하니, 강효남은 「먼저 청주를 치면 어찌 군기(軍器)가 없겠는가?」하였다. 곽응수가 「한강에 수사영(水使營)을 설치하고 있다」하니, 강효남은 「수사도 자리가 편치않을 것이다」하고, 또 「군량은 각 고을에 많이 있으니 거사하면 저절로 얻을 곳이 있다」했다…….’하였습니다. 이 문답은 곧 역모가 분명히 나타난 것이며 곽희정이 진고한 사연도 이처럼 자세히 갖추어지지 아니하였으니, 이 사연으로 강효남을 우선 다시 추문하여 사상(事狀)을 철저히 국문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런 뒤에 또 고발한 자인 곽희정과 면질(面質)시켜 빙핵(憑覈)해서 단서를 얻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推鞫廳啓曰: “李成男、姜孝男、韓淡、韓從雲、仲雲、趙德輔、(申汝沃)〔申汝玉〕、李景祥、全大老、朴仲宣、韓絢、奴三從ㆍ愛孫、順玉等, 以郭希貞進告辭緣, 推問則別無端緖。 但郭希貞等, 本道更推招內以爲: ‘七月分, 田頭出歸, 謂孝男曰: 「汝等雖有結約, 欲成大事, 南北有變, 軍卒不齊, 何以成功?」 孝男曰: 「軍則自有之。 且明年二月、六月, 已爲擇日」 云。 九月二十六日, 姜孝男使其奴萬從, 打木麥而傍觀。 郭應水, 自本州場市, 歸到同坐, 謂孝男曰: 「戰場, 必有戎器, 而汝等無一物」 云, 則孝男曰: 「先攻淸州, 則豈無軍器乎?」 應水曰: 「漢江設有水使營」 云, 則孝男曰: 「水使, 亦不安坐。」 且曰: 「軍糧, 各官多有之, 擧事, 則自有得處」 云云。’ 此問答, 乃是逆謀之明著者, 進告之辭, 亦(不)〔爲〕如是之詳備, 似當以此辭緣, 姜孝男爲先更推, 窮鞫事狀, 然後且與告者郭希貞等, 面質憑覈, 鎰端緖何如?” 答曰: “依啓。”
선조 69권, 28년(1595 을미/명만력(萬曆)23년) 11월 10일 무인 5번째기사
강효남을 다시 추문하자 원혐을 품은 곽희정의 모함이라고 주장하다
다시 추문한 강효남의 초서는 다음과 같다.
“신여옥의 첩은 곽응수의 8촌 누이동생입니다.
신여옥이 데리고 살았는데 곽응수가 그의 집 머슴에게 시집보냈습니다. 신이 곽응수에게 ‘양반의 첩을 까닭없이 불러내어 머슴에게 시집보내는 것은 극히 사리에 당치않다’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원혐을 품어 터무니없는 말을 지어내어 2월이나 6월로 이미 날을 잡았다고 한 것입니다. 좀도둑질도 이 10여인으로는 오히려 마음을 낼 수 없는데 하물며 이 큰 일이겠습니까?
곽희정이 본래 없던 남응신(南應信)의 이름을 지어내어 신과 같은 패당이라고 하였으니, 그 허위의 상황을 이에 의거하여 알 수 있습니다.
곽응수등이 마음속에 원혐을 품고 나를 모반했다는 죄목으로 함정에 빠뜨림으로써 엄형 아래에 핵실할 수 없게 만들었으니, 매우 억울합니다.”
○姜孝男更招內: “(申汝沃)〔申汝玉〕妾, 應水八寸妹也。 (汝沃)〔汝玉〕率畜, 應水嫁與其家雇工。 臣謂應水曰: ‘兩班之妾, 無端招引, 嫁其雇工, 極爲無理’ 云, 以此懷嫌, 做出虛說, 二月、六月, 已爲擇日云。 雖鼠竊狗偸, 以此十餘人, 猶不生心。 況此大事乎? 郭希貞造作南應信, 本無之名, 與臣同倘云。 其虛僞之狀, 據此可知。 應水等懷嫌之心, 以爲陷我於謀叛, 則嚴刑之下, 使不得覈實, 極爲冤枉。”
선조 69권, 28년(1595 을미/명만력(萬曆) 23년) 11월 10일 무인 6번째기사
다시 추문한 강효남이 억울하다 하니 먼저 삼종, 애손을 국문하다
추국청이 아뢰기를,
“강효남에게 곽응수, 곽희정등을 본도에서 다시 추문하여 나타난 일로 낱낱이 들어 다시 추문하였더니 한결같이 억울하다하고 바로 아뢰지 않습니다. 또 곽희정, 곽응수와 면질하여 철저히 추문하였더니, 서로 어지럽게 떠들썩하여 하나로 귀착되지는 않았으나 곽희정, 곽응수의 초사는 전후 또한 자못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큰 옥사이므로 정범(正犯)을 갑자기 형신(刑訊)할 수 없고 고발한 자도 한두 가지 어긋나는 단서로 먼저 국문할 수 없으니, 그 초사중에 나타난 간증(干證)으로 삼종(三從), 애손(愛孫)같은 자를 다시 자세히 캐물어서 기필코 실정을 얻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推鞫廳啓曰: “姜孝男, 以郭應水、郭希貞等, 本道更推現出之事, 枚擧更問, 則一向稱冤, 不直納招。 又與郭希貞、郭應水, 面質窮問, 則雖互相紛拏, 不得歸一, 而希貞、應水之招, 前後亦頗有異同。 此乃大獄, 正犯旣不可遽爲刑訊; 告者又不可一二違端, 先爲鞫問。 其招辭中現出干證, 如三從、愛孫者, 更爲盤問, 期得實情何如?” 答曰: “依啓。”
선조 69권, 28년(1595 을미/명만력(萬曆) 23년) 11월 10일 무인 7번째기사
삼종을 다시 추문하자 강효남의 황당한 형적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하다
다시 추문한 삼종(三從)의 초사는 다음과 같다.
“저는 강효남의 품팔이꾼으로 콩을 거둘 때에 강효남의 밭으로 갔더니, 곽응수도 품팔이꾼으로 왔었습니다.
점심식사를 마친 뒤에 밭가운데 같이 앉았더니, 강효남이 ‘내가 금년에 내년 밀을 일찍 심지않았으니 내년엔 밀떡도 얻어먹기 어렵다.’하고, 또 ‘내년에 왜적이 많이 쳐들어와서 임진년과 같을 것이라고 하니, 밀을 많이 심는다하더라도 피난하여 숲속에 숨어있으면 다른 사람이 다 거두어 먹을 것인데, 내가 어떻게 얻어먹을 수 있겠는가?’하였습니다. 이 말만 들었을 뿐입니다.
7월 이전에는 신여옥이 혼자 왕래하였고, 이후에는 한담, 이성남, 이경상, 조덕보, 한종운, 한중운등이 두 번 외를 따고 술을 빚어 간단히 자리를 베풀어 모여마셨는데, 그 밖의 황당한 형적은 알지 못합니다.”
○三從更招: “奴, 以姜孝男傭役, 收太時, 孝男田歸到, 郭應水, 亦以傭役來到。 點心食罷後, 同坐田中, 孝男曰: ‘吾今年, 不爲早種來牟, 來年, 牟餠, 亦難得食。’ 且曰: ‘來年, 倭賊多來, 與壬辰年同云。 雖多種牟, 避亂隱伏林間, 則他人盡拾食,吾豈能得食乎?’ 但聞此言而已。 七月以前, 則申汝沃〔申汝玉〕獨往來, 以後, 則韓淡、李成男、李景祥、趙德輔、韓從雲、仲雲等, 二番剝瓜釀酒, 粗設會飮。 他餘荒唐形迹, 則不得知。”
선조 69권, 28년(1595 을미/명만력(萬曆)23년) 11월 10일(무인) 8번째기사
애손을 다시 추문하자 종정도를 어디서 얻어왔는지 모른다고 하다
다시 추문한 애손의 초사는 다음과 같다.
“제가 사는 곳은 강효남이 사는 곳과 거의 한 식경(食頃)거리입니다.
이성남은 이름은 상전이나 본래의 상전은 한연(韓淵)이었으며, 이때까지 장사를 지내지 못하여 회를 태우고[燔灰] 곽(槨)을 뜨는 등의 일로 분주하였으므로 이성남의 집에는 자주 가지못하였습니다.
마침 모여 술마시던 날 이성남을 따라 강효남의 집에 한번 잠시 왕래하였을 뿐이며, 한 일은 알지 못합니다.
종정도(從政圖) 승부에 관한 일은 이경상에게 잠시 들었을 뿐이며, 모처(某處)에서 얻어왔는지에 대한 여부는 모릅니다.”
○愛孫更招: “奴所居處, 與孝男所居, 幾至一息程, 成男, 雖名上典, 本上典韓淵, 時未永葬, 燔灰浮槨等事, 奔走, 故成男處, 不得數往。 適會飮之日, 隨成男, 一暫往來於孝男家, 所爲之事, 不得參知。 從政圖勝負之事, 李景祥處暫聞, 某處得來與否, 則不知。”
선조 69권, 28년(1595 을미/명만력(萬曆)23년) 11월 12일 경진 1번째기사
강효남, 곽희정등을 면질했으나 어긋남이 있자 이경상도 다시 추문하다
추국청이 아뢰기를,
“지금 강효남, 곽희정, 곽응수는 면질(面質)한 말로 다시 초사를 받았더니, 곽희정은 ‘강효남을 밭사이에서 만나보았는데 나라를 배반하는 말을 많이 하였다.’하였으나, 강효남은 ‘내가 너를 본 적이 없고 너의 아들과만 서로 만나보았을 뿐이다…….’하였으며, 지금 삼종(三從)의 초사에는 ‘강효남이 콩을 거둘 때에 품팔이꾼으로 가서 곽응수만 보았을 뿐이고 곽희정과 서로 말한 일은 모른다.’하였습니다.
말하는 바가 서로 어긋남이 이와 같으니, 곽희정이 고발한 말은 의심스러운 듯합니다. 그리고 애손(愛孫)의 초사에 종정도 승부에 관한 말은 이경상에게 들었다.’하였으니, 강효남의 온 집안이 모두 영의정이라고 불렀다는 말도 당초 고발한 사람에게서 나왔으므로 그 사이에 물을 만한 일이 없지않습니다. 이경상도 자세히 캐물어서 실상을 얻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庚辰/推鞫廳啓曰: “今以姜孝男、郭希貞、郭應水面質之言, 更爲取招, 則希貞曰: ‘見孝男於田間, 多發叛國之說’ 云, 而孝男則曰: ‘我無見汝之時, 只與汝子相見’ 云云。 今者三從之招則曰: ‘姜孝男收太時, 以傭役歸到, 只見郭應水, 而希貞相語事, 不知’ 云。 所言相違如此, 希貞進告之言, 似涉可疑。 且愛孫招內, ‘以〔從〕政圖勝負之說, 聞於李景祥’ 云。 姜孝男一家, 皆稱領議政之言, 亦出於當初進告之人, 其間不無可問之事。 李景祥, 亦爲盤問, 鎰實狀何如?” 答曰: “依啓。”
선조 69권, 28년(1595 을미/명만력(萬曆) 23년) 11월 13일 신사 1번째기사
이성남의 개명 사연을 이성남, 강효남에게 다시 추문하도록 하다
추국청이 아뢰기를,
“삼종, 애손, 이광헌, 이경상을 어제 자세히 캐물었는데 아직 의심할 만한 단서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당초 본도에서 초사를 받을 적에 곽희정의 공초에는 ‘이성남의 본명은 언남(彦男)이었는데 역적 정여립(鄭汝立)의 여담(餘黨)으로 성남으로 개명하였다…….’하였고, 강효남의 첩 순옥(順玉)의 초사에는 ‘이성남은 혹 언남이라 부르기도 한다.’하였으니, 이성남이 이름을 변경하여 서로 번갈아가며 부르게된 일은 의심할 만한 듯합니다.
이 사연으로 이성남, 강효남을 다시 깊이 추문하여 실정을 알아내고 승복하지않으면 곽희정과 순옥을 면질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아뢴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辛巳/推鞫廳啓曰: “三從、愛孫、李光憲、李景祥, 昨日盤詰時, 可疑端緖, 尙未現出。 當初, 本道取招, 郭希貞所供內, ‘李成男, 本名彦男。 逆賊鄭汝立餘黨, 改名成男’ 云云。 姜孝男妾順玉招內, ‘李成男, 或稱彦男’ 云。 成男變名互稱之事, 似爲可疑。 以此辭緣, 李成男、姜孝男, 更爲窮推得情, 不服則與郭希貞、順玉, 面質何如?” 答曰: “依啓。”
선조 69권, 28년(1595 을미/명만력(萬曆)23년) 11월 13일(신사) 2번째기사
이성남·곽희정을 다시 추문했으나 이성남의 개명 사연이 다르게 나타나다
추국청이 아뢰기를,
“이성남·곽희정을 다시 추문하였더니, 이성남은 공조하기를 ‘언남은 전의 이름이다. 기묘년3098) 전에 전의(全義)향교(鄕校)에서 독서하였는데 교생(校生) 5∼6인이 훈도(訓導) 박연(朴淵)에게 수학하였다. 제배(諸輩) 윤춘량(尹忠良)등이 신의 이름 언남이 음이 얼남(孽男)3099)과 서로 비슷하다하여 얼남(孽娚)이라 농하기도 하였다.
집에 돌아와서 아비에게 의논하였더니, 아비는 「이름때문에 제배에게 웃음을 당하니 고치지 않을 수 없다」하고 드디어 성남으로 고치고 인하여 호적에 넣었다.
이에 앞서 비록 제처(諸處)의 사람과 왕래하기는 하였으나 모두들 「너는 도술이 없지 않다」하였을 뿐이지 「요망하다」는 헐뜯음은 별로 없었는데,
강효남의 집에 왕래한 뒤로 강효남이 곽희정과 큰 원수가 졌으므로 이 같은 말을 지어 낸 것이다.’하였습니다.
곽희정은 공초하기를 ‘7월쯤 강효남의 콩밭에서 김을 맬 때에 강효남의 집 곁에 사는 사람인 만종(萬從)·삼종(三從)·귀필(貴必)등이 「이성남이 서울을 갔다돌아오는데는 반나절밖에 걸리지않는다」하므로, 신이 강효남에게 묻기를 「이성남이 반나절 안에 서울을 갔다돌아온다하니 과연 그런 일이 있는가? 그가 만일 중로에서 돌아온다면 어떻게 알겠는가?」하였더니, 강효남은 「청기와 쪽을 가지고 왔으니 어찌 헛말이겠는가? 이성남의 본명은 언남으로 정여립(鄭汝立)의 난 때에 성남으로 고쳤는데, 능히 안개를 일으키고 둔갑장신(遁甲藏身)하며 노루나 사슴이 되기도 하니 그 몸의 있고 없는 것을 어느 곳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하였다.’하였습니다.
또 곽희정의 초사로써 다시 강효남을 추문하고 그를 면질시켰더니, 서로 발명하는 것이 어긋나서 아직까지 정확히 가리켜 나타난 단서가 없습니다.
이성남의 초명이 언남이었던 일은 세 사람의 공초가 한결같으나 ‘정여립의 여당(餘黨)으로 이름을 변경하여 해를 면하였다.’고 한 말은, 곽희정은 강효남이 말한 것이라 지적하나 참문(參聞)한 사람을 들지않으니, 허실(虛實)을 또한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그의 아들 응수(應水)가 7월쯤에 귀필·삼종·만종에게 들었다고 운운하였으니, 곽응수등을 다시 추문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註3098]기묘년: 1579 선조 12년 註3099]얼남(孽男): 첩의 아들이란 뜻.
○推鞫廳啓曰: “李成男、郭希貞更推, 則所供如此。 李成男供: ‘彦男, 是前名。 己卯前, 讀書于全義鄕校, 校生五六人, 受學於訓導朴淵。 諸輩尹忠良等, 臣名彦男, 以其音相似, 或弄曰: 「孽男。」 或弄曰: 「孽娚。」 歸而議諸父, 父曰: 「以名取笑於諸輩, 不可不改。」 遂改以成男, 因入帳籍。 前此雖往來諸處人, 皆曰: 「汝不無道術而已」, 別無妖妄之毁。 姜孝男家往來後, 孝男與希貞大隻, 故做出如此之言。’ 希貞供: ‘七月分, 孝男太田耘草時, 孝男場邊居人萬從、三從、貴必等言曰: 「李成男, 京城往還, 在半日內。」 臣問於姜孝男曰: 「成男, 半日內, 往還京城云, 果有是事乎? 彼若中路還來, 則何以知之?」 孝男曰: 「靑瓦片持來, 豈虛語乎? 成男本名彦男, 鄭汝立時, 改以成男。 能用身作霧, 能遁甲藏身, 化爲獐鹿, 其身之有無, 何處覓得?」 云。’ 又以希貞所招, 更問於姜孝男, 而與之面質, 則互相發明牴牾, 尙無指的現出之端。 成男初名彦男事, 則三人所供一樣, 而其稱汝立餘黨, 變名免害之言, 則希貞雖指爲姜孝男所言, 而不擧參聞之人, 虛實亦難分辨。 但云其子應水, 七月間, 貴必、三從、萬從處聞知云云, 應水等更問何如?” 答曰: “依啓。”
선조 69권, 28년(1595 을미/명만력(萬曆)23년) 11월 13일(신사) 3번째기사
구금 죄인들에게 별다른 단서가 없자 정인길·정의길을 잡아오도록 하다
추국청이 아뢰기를,
“곽응수를 다시 추문하였더니, 공초하기를 ‘이성남이 정여립의 여당이라는 말은 애당초 내입에서 나오지않았다.
신은 군인으로 선봉장(選鋒將) 권인룡(權仁龍)의 진중으로 돌아가 있었으므로 고변(告變)한 사연은 전혀 알지못한다.
신의 아비가 신을 고한 자로 지적했기때문에 목사가 잡아와서 칼을 씌우고 수갑을 채워 추문하였던 것이다.
전일 신이 강효남에게 들으니 「우리나라에는 장수가 없다. 만일 능히 안개를 일으키고 목마(木馬)를 부릴 수있는 자라야 진짜 장수이다」하였으므로, 이것으로써 승복하였다.
목사는 강효남이 명화강도(明火强盜)라 여기고 잡아들이려 계획하였는데, 신의 아비가 「강효남은 부자이지 강도는 아니다. 소를 잡아 모여서 술을 마시고 여러 곳을 유람하니 수상한 일이 자못 많다.」하였다.
신의 아비는 못난 사람으로 그를 역적으로 고발한 것인데 신은 아비때문에 장차 죽게되었다’하였습니다.
물을 만한 사람은 모두 이미 반복하여 철저히 추문하였으나 하나도 단서가 없습니다. 곽응수는 고발한 자이고 또 곽희정의 자식인데도 공초한 바의 사연이 곽희정과 서로 어긋나며, 귀필이 비록 강효남등이 신도(新都)로 왕래한 일을 말하기는 하였으나 또한 서로 얽힌 사상(事狀)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살펴보면, 고변(告變)한 사연이 허술하여 근거할 수 없을 듯합니다. 다만 이는 막대한 옥사이니 허실의 추핵(推覈)을 자세히 하지않을 수 없습니다. 정인길(鄭仁吉)이 이미 본도의 장계에 나왔고 또 듣건대 고변하려는 일로 서울에 왔다가 돌아갔다하니, 이는 반드시 사유가 있을 것입니다.
신들의 의견으로는 죄인등을 아직은 모두 그대로 가두고 도사(都事)를 급히 보내어 정인길·정의길등을 잡아오되 정인길의 성명이 나타난 서간(書簡)도 아울러 올려보내게하여 그에 빙거하고 참문(參問)하여 처리하면 미진한 일이 없을 듯합니다. 감히 여쭙니다.”하니, 상이 따랐다.
○推鞫廳啓曰: “郭應水更推, 所供如此。 ‘李成男, 鄭汝立餘黨之說, 初不出吾口。 臣以軍人選鋒將權仁龍陣中歸, 在告變辭緣, 專不得知。 臣父, 以臣指的告者, 故牧使捉來, 以加枷杻推問。 前日臣聞於姜孝男, 曰: 「我國無將帥。 如能作霧氣, 能使木馬者, 眞將帥也」 云云, 故以此納(段)〔款〕。 牧使謂姜孝男, 明火强盜, 捕捉計料, 臣父曰: 「孝男富人, 非强盜也。 推牛會飮, 遊觀諸處, 殊常事頗多」 云云。 臣父, 以迷劣之人, 以逆賊進告, 臣身以父之故, 將至死滅矣。’ 可問之人, 皆已反覆窮問, 而無一端緖。 郭應水則以告者, 且爲希貞之子, 而所供之辭, 與希貞相違。 貴必, 雖言孝男等往來新都之事, 而亦不言綢繆事狀。 以此觀之, 則其所告變之辭, 似爲虛疎, 不可爲據。 但此乃莫大之獄, 推覈虛實, 不可不詳盡爲之。 鄭仁吉, 旣發於本道狀啓, 且聞以欲告變事, 來京還去云, 此必有情由。 臣等之意, 罪人等, 姑皆仍囚, 急遣都事, 拿來鄭仁吉、鄭義吉等,竝與仁吉姓名現出書簡上送,憑閱參問處之,則庶無未盡之事。敢稟。” 上從之。
선조 69권, 28년(1595 을미/명만력(萬曆)23년) 11월 18일(병술) 3번째기사
육장생과 곽희정 그리고 신여옥과 정인길을 다시 면질하여 공초하다
추국청이 아뢰기를,
“육장생(陸長生)과 곽희정을 다시 추문 및 면질시켰더니,
공초한 바가 다음과 같았습니다.
육장생의 공초에는 ‘아비는 천수(天壽)이고 어미는 임씨(任氏)인데 대대로 청주에 살았다. 부모가 모두 죽은 뒤에 아내를 얻어 천안(天安)에 이주하였다. 이성남은 애초에 알지못하였고 강효남은 임진년3101) 이전에 한 마을에 같이 살았으므로 서로 아는데, 지금은 이주하였다.
두 사람이 흉모(兇謀)에 관한 사상(事狀)은 전혀 알지못한다.’하였습니다.
곽희정이 당초 고발할 때에 이성남등 11인의 성명만 들어 반역을 모의한다고 하였고 육장생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본도에서 다시 초사를 받을 때에야 고발하였는데, 지금은 당초 11인을 고발할 때에 아울러 써서 바쳤다고 하니, 전후의 초사가 크게 다릅니다.
또 ‘육장생이 난리 뒤에 천안에 살고 강효남의 집에 전혀 왕래하지않았는데 금년부터 시작하여 봄부터 가을까지 5∼6번 왕래하였으며 수상한 듯하였다. 그 안에서 말한 바의 일은 알지못하나 다만 황당한 일이 있을까염려되어 고발한 것이다……’하였고,
그 아들 곽응수는 ‘육장생이 이성남등과 모반한 사연은 원래 고발하지않았다…….’하였습니다. 이로써 살펴보면 곽희정이 육장생을 고발한 일은 매우 허술합니다.
신여옥과 정인길을 다시 추문 및 면질시켰더니, 공초한 바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정인길의 공초에는 ‘아비는 주부(主簿) 순년(舜年)이고 어미는 박씨(朴氏)인데 대대로 청주에 살았다. 신의 아비가 죽어 장지를 가리려하였는데, 이성남이 지리를 잘 안다고 하기에 청해와서 산소를 보았다.
뒤에 신여옥이 신에게 「그는 좋지못한 사람인데 어찌하여 청해와서 산소를 보이는가?」 하므로, 묻기를 「어째서 하는 말인가?」하였더니, 신여옥이 「역적과 같은 사람을 어찌하여 청하는가?」하기에, 그 역적한 사유를 물었더니, 그는 「모른다……」하였다. 신이 고변하러 올라왔으나 일이 근거할 만한 것이 없으므로 도로 내려갔다. 강효남은 애당초 이름을 듣지못하였다. 모반한 정상은 신의 몸이 죽어도 참여해아는 바가 없다.’하였습니다.
정인길이 당초 신여옥의 말을 듣고 서울에 올라와서 고변하려고 하였으나 일이 근거할 만한 것이 없으므로 곧 그만두고 내려갔다고 했습니다만 정인길의 말도 십분 진적(眞的)한 것이 아니므로 반복하여 깊이 힐문하였습니다. 그러나 단서를 얻지 못하였으니 극히 의심할 만합니다.
대개 이성남등의 정적(情迹)에 대해서는 강효남의 종 만종(萬從)이 반드시 자세히 알 것인데, 지금 바야흐로 본도에 갇혀있으므로 이미 도사로 하여금 잡아오게 하였습니다.
그가 올라오기를 기다려 철저히 캐물어서 사실을 알아낼 동안에 정인길등을 아직은 모두 그대로 가두어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상이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註3101]임진년: 1592 선조 25년.
○推鞫廳啓曰: “陸長生、郭希貞, 更推及面質, 則所供如此。 陸長生供稱: ‘父天壽, 母任氏。 世居淸州, 父母俱沒後娶妻, 移居天安。 李成男, 則初不聞知, 姜孝男, 則壬辰以前, 同居一里, 故相知。 今則移居, 兩人兇謀事狀, 專不得知。’ 希貞當初進告時, 只擧李成男等十一人姓名, 謀爲叛逆, 而陸長生之名, 則不及焉。 本道再招時, 乃始進告, 今則曰: ‘當初十一人進告時, 竝爲書納’ 云, 前後之招, 大相不同。 且曰: ‘長生, 亂後, 居于天安, 全不往來於姜孝男家, 今年爲始, 自春至秋, 五六度往來, 似爲殊常。 其中所言之事, 未得聞知, 但慮有荒唐之事, 進告’ 云云。 其子應水則言: ‘陸長生與李成男等, 謀叛辭緣, 則元不進告’ 云云。 以此觀之, 希貞進告陸長生之事, 甚爲虛疎。 (申汝沃)〔申汝玉〕、鄭仁吉, 更推及面質, 則所供如此。 鄭仁吉供稱: ‘父主(夫)〔簿〕舜年, 母朴氏。 世居淸州。 臣父身死, 欲擇葬山, 聞成男善地理, 請來看山後, (申汝沃)〔申汝玉〕謂臣曰: 「彼乃不善人。 何以請來看山乎?」 問曰: 「何以謂之?」 (汝沃)〔汝玉〕曰: 「似逆賊之人。 何以請之?」 問其逆賊之由, 則曰: 「不知」 云云。 臣以告變上來, 而事無可據, 還爲下去。 姜孝男, 則初不聞名。 謀叛情狀, 臣身雖死, 參知無路。’ 仁吉, ‘當初聞(申汝沃)〔申汝玉〕之言, 上京欲爲告變, 而事無可據, 卽止下去。’ 仁吉之言, 亦不十分眞的。 反覆窮詰, 未得端緖, 極爲可疑。 大槪成男等情迹, 姜孝男奴萬從, 必詳知之, 而今方被囚於本道, 已令都事拿來。 待其上來, 盤詰得實間, 仁吉等, 姑竝仍囚何如?” 上曰: “依啓。”
선조 69권, 28년(1595 을미/명만력(萬曆) 23년) 11월 21일 기축 1번째기사
추국청에서 정인길, 정의길, 신여옥을 다시 추문하여 공초한 내용을 올리다
추국청이 아뢰기를,
“정인길, 정의길, 신여옥을 다시 추문하였는데, 공초한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정인길은 공초하기를 ‘지난 10월 22일 쯤에 승지 정구가 신의 집에 와서 묻기를 「이성남은 어떠한 사람이기에 사람들이 추앙하여 보려는 자가 있는가?」하므로, 답하기를 「이성남의 위인이 착하지 아니하여 사류(士類)가 모두 취하지 아니하였다. 이성남이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도술이 있고 또 안개를 일으키며 또 축지술(縮地術)이 있다…….』 하였다…….」하였다.
그가 몰래 역모를 품은 것 및 도내 제적(諸賊)과 교통한 일과, 정여립(鄭汝立)의 한 자식이 아직도 가야산에 있다는 일 및 진법(陣法)을 익혔다는 등의 일은 애초에 알지못하였다.
10월에 신여옥이 와서 신에게 「국도를 설치할 만한 곳은 충주 월학산(月壑山)과 신도(新都)가 가장 좋다. 병신년, 정유년 사이에 국운이 태평해진다」하였고, 또 「이유(李裕)라는 사람은 거사(居士)로 칭호하며 낙영산(落影山)에 은거하는데 유술(儒術)을 환히 안다」하였고, 또 「저 이성남같은 반역하는 사람을 어찌하여 청해 와서 산소를 보는가?」 하였다.
신여옥의 말을 듣고 놀라움을 견디지 못하여 고변하려 하였는데, 마침 서울사는 친족이 침맞는 일로 간청하므로, 겸하여 서울에 올라갔으나 근거할 만한 일이 없어서 도로 내려갔다.
일행의 사람이 모두들 「이성남이 목천땅에 첩을 두었는데 배우지 않고서도 문장에 능하니 극히 수상하다」하였다. 신여옥 한 사람 이외에는 다른 사람은 전혀 알지못하며, 이성남등이 같이 모의한 상황은 더욱이 알지 못한다.’하였습니다.
정의길은 공초하기를, ‘신의 형이 정구에게 「이성남은 도술이 있어 제처(諸處)를 유람하니 만나서는 안될 사람이다.」고만 하였을 뿐이지, 몰래 역모를 품고 제적과 교통한 일 및 정여립의 한 자식이 또한 그 안에 참여하였다느니 가야산에서 진법을 익혔다는 등의 말은 승지에게 당초에 말하지 않았다. 다만 신에게 「이성남이 정여립의 여얼(餘孽)3105)과 서로 왕래한다」하였고, 월학산의 형세가 극히 좋다느니, 병신, 정유년이 좋다느니, 정여립의 한 자식이 또한 그 안에 참여하였다느니, 가야산에서 세 차례 진법을 익혔다느니하는 말은 듣지못하였다.
이성남의 첩이 문장에 능하고 시를 짓는다는 일은 신의 형이 신에게만 발설하였고 승지에게는 고하지 아니하였다.’하였습니다.
신여옥은 공초하기를 ‘이성남은 정인길과 교결(交結)하였다. 신은 정인길의 집 산소자리를 볼 때 및 강효남의 집에서 모여 술마실 때에 잠시 서로 만나보았으니, 역모의 일을 어떻게 알아서 정인길에게 말할 수 있었겠는가?
나머지 다른 각항의 사연은 모두 알지못한다.’하였는데, 황잡하여 분명하지 않을 뿐만아니라 전후 말한 바도 다른 점이 많으니, 깊이 끝까지 캐물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미 밤이 되었고 내일 새벽에 또 거둥이 계시니 명일 예(禮)을 거행한 뒤에 다시 추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상이 따랐다.
註3105]여얼(餘孽): 남은 자손
○己丑/推鞫廳啓曰: “鄭仁吉、鄭義吉、(申汝沃)〔申汝玉〕更推, 則所供如此。 仁吉供稱: ‘去十月二十二日間, 承旨鄭逑來到臣家, 問曰: 「成男何如人, 而人有推見者乎?」 答曰: 「成男爲人不善, 士類皆不取。 成男嘗自言: 『有道術, 又能作霧。 且有縮地之術』 云云。」 潛懷逆謀及道內諸賊交通之事, 與鄭汝立一子, 尙在伽倻山, 習陣等事, 初不聞知。 十月, (申汝沃)〔申汝玉〕來到, 謂臣曰: 「國都可設之地, 則忠州月岳山及新都最好」 云云。 「丙申ㆍ丁酉年間, 國運昇平。」 又曰: 「李裕稱名人, 居士稱號, 隱居落影山, 洞知儒術。」 云。 又曰: 「如彼成男叛逆之人, 何以請來看山?」 云。 聞(汝沃)〔汝玉〕言, 不勝驚動, 欲爲告變, 適京族, 以受針懇請, 故兼爲上京, 而事無可據, 還去。 一鄕之人, 皆稱: 「成男有妾于木川地, 不學而能文, 極爲殊常」 云。 (申汝沃)〔申汝玉〕一人外, 他人專不得知。 成男等同謀之狀, 尤不得知。’ 義吉供稱: ‘臣兄, 鄭逑處, 只說道: 「李成男有道術, 遊觀諸處, 不可見之人也。」 潛懷逆謀, 諸賊交通事及汝立一子, 亦與其中, 伽倻山習陣等語, 則承旨處, 初不說道。 只言於臣曰: 「成男與鄭汝立餘孽, 交相往來。 月岳山形勢極好。 丙申ㆍ丁酉年爲吉。 汝立一子, 亦與其中」 伽倻山三度習陣之言, 不爲聽聞。 成男妾能文ㆍ作詩事, 則臣兄只臣處發說, 承旨處則不告。’ (申汝沃)〔申汝玉〕供稱: ‘李成男、鄭仁吉交結, 臣則鄭仁吉家看山, 及(時)姜孝男家會飮時, 暫爲相見。 逆謀之事, 何鎰知, 而言於仁吉乎? 他餘各項辭緣, 幷不得知。’ 非但荒雜不爲分明, 前後所言, 多有異同。 所當窮極盤詰, 而今已犯夜, 來曉且有擧動。 明日行禮後, 更爲推鞫何如?” 上從之。
선조 69권, 28년(1595 을미/명만력(萬曆) 23년) 11월 25일(계사) 1번째기사
추국청에서 모반 죄인들에게 의심할 바가 없다고 하자 다시 형추토록 하다
추국청이 아뢰기를,
“이성남과 강효남·신여옥·한담·이경상등을 철저히 추문하였으나 끝내 근거할 만한 단서가 없었습니다.
곽응수의 공초를 살펴보면 희정(希貞)이 고한 바가 더욱 진실치 못합니다. 다만 이성남이 한 짓은 괴탄(怪誕)한 일이 많이 있는데 어리석은 백성이 서로 전하고 말하여 반드시 도술이 있다는 것으로 그를 지목하니, 요언(妖言)을 고동(鼓動)시킨 죄를 면하기 어려운 바가 있습니다.
강효남등도 소를 잡아놓고 모여 술을 마신 일이 있었는데, 곽희정이 반역으로 고한 것은 실정에 지나치기는 하나 정인길 또한 고변(告變)하려 하였으니, 피차 의심한 것은 의논하지않고도 같았습니다.
이성남·강효남등이 스스로 자초한 실지가 없지않습니다.
지금 희정에게 대역 반좌율(大逆反坐律)3107)을 가하는 것은 그 본정을 추구해 보건대 또한 미안한 바가 있고 옥체(獄體)로 말하면 사간인(事干人)에게 마땅히 형신(刑訊)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두 마디 말이 서로 어긋남이 있으나 실제로 뚜렷이 의심할 만한 자취는 없으니 반복하여 자세히 참고해보아도 마땅함을 얻지 못하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 큰 옥사를 이처럼 하고 그만두어서는 안된다.
정인길이 이미 이성남등의 사상(事狀)을 알고서 고하려 하다가 그만두었으니 그 정황을 헤아릴 수 없다.
전후 공초 또한 다르니 형추(刑推)하는 것이 마땅하다. 신여옥·만종의 무리 또한 차례로 형추하여 끝까지 깊이 신문하는 것이 가하다.
이성남이란 자는 술수를 가탁하여 화복(禍福)을 점치고 요언으로 대중을 유혹하여 종적이 궤이(詭異)하고 비밀스러우니,
이 자는 끝까지 형을 가하지 않을 수 없다”하였다.
註3107]대역반좌율(大逆反坐律): 고변(告變)함에 있어 대역(大逆)으로 고변한 것이 무고였을 경우에, 무고입은 자에게 과한 죄만큼 무고한 자에게 과죄(科罪)하는 것임.
○癸巳/推鞫廳啓曰: “李成男與姜孝男、(申汝沃)〔申汝玉〕、(韓潭)〔韓淡〕、李景祥等, 窮極推詰, 終無端緖之可據。 以郭應水所招觀之, 希貞所告, 尤爲不實。 但成男所爲, 多有怪誕之事, 愚下之民, 傳相告語, (心)〔必〕有道術目之, 其鼓動妖言之罪, 則在所難免, 姜孝男等, 亦有屠牛會飮之事。 希貞之告以叛逆, 雖過實情, 而鄭仁吉亦欲告變, 彼此致疑, 不謀而同。 成男、孝男等, 不無自取之實。 今若加以大逆反坐之律於希貞, 則原其本情, 亦有所未安; 以獄體言之, 事干當加刑訊, 而雖有一二言語相違, 實無顯然可疑之迹, 反覆參詳, 未得其當。 何以爲之?” 上答曰: “此大獄, 不可如是而止。 鄭仁吉, 旣知其李成男等事狀, 欲告而還止, 其情叵測。 前後供招亦異, 當爲刑推。 (申汝沃)〔申汝玉〕、萬從之輩, 亦可次第刑推窮問。 李成男者, 假托術數, 推占禍福, 妖言惑衆, 蹤迹詭秘, 此人終不可不窮刑。”
선조 69권, 28년(1595 을미/명만력(萬曆) 23년) 11월 26일 갑오 3번째기사
정인길은 형신을 정지하고 이성남은 형추하다
추국청이 아뢰기를
“이 옥사는 반역에 관계되기는 하나 철저히 추문하여도 끝내 뚜렷한 단서가 없으니 실로 의심할 만하다고 하겠습니다.
신들이 반복하여 자세히 헤아려 보아도 마땅함을 얻지 못하겠습니다.
상께 여쭌 정인길등 3인에 이르러서는 각각 경중에 따라서 형을 받았습니다. 일은 밝히기 어려우나 옥체(獄體)가 지극히 중하니 끝까지 형신(刑訊)을 가하여 실정을 얻도록 해야하겠습니다만, 위에서 지극하신 인애(仁愛)가 하늘과 같아 흠휼(欽恤)이 지극하였습니다.
이에 엄한 형장(刑杖) 아래에 혹 원통함을 가지는 사람이 있을까염려하시어 의계(議啓)하라는 분부를 내리기까지 하셨으니,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 곧 이에 이르셨으므로 신들은 매우 감격스러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정인길이 당초 고변하려고 서울에 올라왔다가 도로 중지하고 내려간 것은 전후의 공초 또한 다르니 실정을 과연 헤아릴 수 없으므로 끝까지 신문하여 승복을 받아야할 듯합니다.
다만 정인길이 이성남과 반역을 같이 모의한 정상은 실로 근거할 만한 단서가 없으니, 한결같이 형을 가하는 것은 아마도 온당하지 못할 듯합니다.
신여옥이 역적과 비슷하다는 말로 정인길에게 말하였으니 정인길이 추궁하여 물으니, 신여옥은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만종은 곧 강효남의 종입니다만 곽응수를 면질할 때에 그가 ‘한강에 진영을 설치하는 등의 일은 만종이 듣지못하였다.’하였고. 귀필(貴必)을 면질할 때에도 ‘만종이 삼종(三從)에게 말했다는 말은 잘못되었다.
나는 희정이 지시하고 꾀기 때문에 진고(進告)하였다.’하였습니다. 이 두 사람이 역모에 참여한 정상도 또한 드러나지 않았으니, 기필코 실정을 다 말하도록 형을 가하는 것은 또한 온당하지 못할 듯합니다.
이성남이 반역을 모의한 일은 알 수 없으나 술수를 가탁하여 화복을 점치고 요언으로 대중을 유혹하는 종적이 궤이(詭異)하고 비밀스런 죄는 면하기 어려운 바가 있습니다. 형추하여 끝까지 국문하도록 하소서.”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인길의 일은 형신을 정지하라. 이성남은 형추하라.”하였다.
○推鞫廳啓曰: “此獄, 雖干係叛逆, 而窮極推詰, 終無顯然端緖, 實涉可疑。 臣等反覆參詳, 未得其當, 至於上稟, 鄭仁吉三人, 各以輕重受刑矣。 事雖難明, 獄體至重, 所當窮加刑訊, 期於得情, 而自上至仁如天, 欽恤備至, (乃)〔仍〕念嚴(形)〔刑〕之下, 或有抱冤之人, 至下議啓之敎, 好生之德, 一至於此, 臣等不勝感激之至。 鄭仁吉, 當初欲告變上京, 還止下去, 前後供招亦異, 其情果爲叵測, 似當窮訊取服, 而但仁吉與成男, 同謀叛逆之狀, 實無端緖(不)〔可〕據, 一向加刑, 恐或未安。 (申汝沃)〔申汝玉〕, 雖以似逆賊之言, 言於仁吉, 而仁吉窮問, 則(汝沃)〔汝玉〕曰: ‘不知。’ 萬從, 卽姜孝男之奴, 而郭應水面質時曰: ‘漢江設營等事, 萬從不爲預聞’ 云。 貴必面質時, 亦曰: ‘萬從言於三從之說, 非矣。 吾以希貞敎誘, 故進告’ 云云。 此兩人與於逆謀情狀, 亦未顯出, 期以輸情加刑, 亦恐未安。 李成男, 則謀爲不軌之事, 雖未可知, 而其假託術數, 推占禍福, 妖言惑衆, 蹤迹詭秘之罪, 則在所難免。 請刑推窮問。” 上曰: “鄭仁吉等停刑, 李成男刑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