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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리유적전시관 입구
위의 건물이 왕궁리 유적 전시관이다.
건물 디자인이 특이하게 되어 있었다.
왕궁리유적전시관의 상설전시실은 백제의 왕궁 왕궁리유적 , 왕궁리유적의 백제건물, 왕궁의 생활,
왕궁에서 사찰로의 변화, 백제왕궁 등 5개의 zone으로 구성되어 있다.
익산 왕궁리 유적
익산 왕궁리유적은 백제 30대 무왕(A.D. 600~641년)의 익산지역 경영계획에 의해 조성된 고대의 궁성(宮城)유적으로 남북길이 490m, 동서너비 240여m에 이르는 장방형 성벽으로 구획되어 있다. 지난 1989년부터 현재까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연차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그 동안의 조사에서는 왕궁리오층석탑(국보 제289호)과 관련한 금당지, 강당지 등 통일신라시대 사찰유구와 백제시대의 성벽(城壁), 석축(石築), 건물지, 공방지(工房址) 등 다양한 궁성관련 유구가 확인되었고, 대관관사(大官官寺), 수부(首府)명 인장와, 연화문와당, 각종 토기 및 중국자기류 등 3,0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왕궁리유적 모형
왕궁리는 예로부터 왕궁평, 왕검이, 왕금성으로 불려, 고대 백제의 왕궁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 지역의 유적은 고대 백제의 왕궁이 있던 자리에 사찰이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왕궁유적과 사찰 유적이 함께 남아있다.
왕궁리유적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를 할 수 있는 공간이다.
무왕과 익산, 왕궁리유적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왕궁리유적의 발굴성과를 축소모형 및 현황도,
영상을 통해 설명함으로써 왕궁리유적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를 돕고 있다.
왕궁리유적(사적 408호)은 백제문화권 유적정비사업의 일환으로 1989년부터 현재까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실시한 발굴조사 결과 백제 무왕대의 왕궁유적과 후대의 사찰유적이
같은 지역에 위치한 복합유적으로 확인되었다.
백제 왕궁은 용화산 능선의 끝자락에 위치한 해발 40m내외의 구릉에 평탄대지를 조성하고
주변에 사구적, 장대석, 할석, 점토 등을 사용하여 폭 3m, 남북 490m, 동서 240m의 장방형 담장을 조성하였다.
백제 왕궁관련 유적은 서울 풍납토성, 공주 공산성, 부여관북리유적, 익산 왕궁리유적 등지로
알려져 있으나 익산 왕궁리유적을 제외하면 구체적인 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이다.
서울지역의 백제초기 도읍지로 알려진 풍납통성은 1964년 시굴조사후 1996년부터
10여젼 이상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전체 유적의 1/10도 되지 않은 극히 제한된 부분만 조사되었다.
조사결과 평면 6각형의 대형건물지와 도로, 연못지 등이 확인되었으나 도성 내에서
정확한와궁의 위치를 확정하기는 어려운 상태이다.
공주 도읍기에는 공산성 내 雙樹停)앞 광장이 왕궁지로 추정되는 곳으로 1985년 1986년 발굴조사에서
백제시대 수혈건물지, 굴립주건물지, 적심건물지와 집수시설 등이 조사되었으나 이러한 유적으로는
왕궁으로 단정하기는 어려운 상태이다.
부여 도읍기에는 부소산성 아래 관북리유적 일대를 왕궁지로 추정하고 오랫동안 조사하고 있는데,
왕궁리유적에서 조사된 정전건물지와 같은 토심적심의 대형건물지와 공방지, 도로, 목곽, 수조, 창고,
저장구덩이 등이 확인되었으나 대형건물지가 유적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어서 왕궁의 중심 건물로 보기는 어려운 상태이다.
익산 백제 왕궁터에서는 왕궁의 외곽경계를 이루는 폭3m의 담장 시설과 남측 담장과
연결된 3개의 문지, 담장 내부에서 정전건물로 볼 수 있는 대형건물지를 비롯한 14개의
건물지와 정원유적 등이 확인되어 백제 무왕대의 왕궁으로 추정되고 있다.
왕궁리유적에서는 다른 어느 유적보다 대형항아리가 많이 출토되었다.
대형항아리는 왕실의 식량이나 물과 같은 음료를 보관하기 위한
저장용기로 워낙 크기 때문에 풍요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다.
대형항아리는 2003부터 2004년까지 왕궁리유적의 서북편 공방지 주변과 왕궁 이후에 들어선
사찰유적의 승방 건물로 추정되는 곳에서 땅에 묻힌 상태로 출토되었다.
대형항아리의 높이는 80~105cm이며 이 대형항아리 안에서는 용도를 알 수 있는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이 대형항아리와 비슷한 토기가 1982년 미륵사지 발굴조사 과정에서
동원 승방지의 중간부근에서 5개가 땅에 묻힌 상태로 조사되었다.
이 토기 안에는 물과 함께 흙이 가득 들어 있었는데, 보리와 콩이 함께
수습되어 대형항아리가 양식 저장용기임이 확인되었다.
연화문수막새
우리 눈에 익숙한 8엽 단판연화문수막새는 왕궁리유적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고 있는 막새이다.
연화문수막새는 불교의 상징인 연꽃의 모양을 새겨 넣은 수막새입니다. 연화문수막새로
기와를 마무리함으로써 시각적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함과 동시에 나쁜 기운과 귀신을
물리치기 위한 벽사(辟邪) 즉 주술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또한 이 막새를 통해 조사된 건물이 지붕에 기와를 올린 기와집으로 격조 있는 건물뿐 만 아니라 건물의 건립 시기를 알 수 있다.
그 모양은 평면적이면서도 하트형 꽃잎 표현으로 과하지 않은 양감을 두어 연꽃을 표현하는데 모자람이 없다.
또 연화문수막새의 모양과 무늬가 조금씩 다른 것도 발견되는데 이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익산 지역에 기와를 직접 생산함으로써 문양과 모양이 변모된 것으로 보고 있다.
백제 기와문양
특별전시실에서는 왕궁리5층석탑 해체보수 관련 사진, 도면, 문서 등의 사진자료 전시되어 있었다.
왕궁리5층석탑은 미륵사지 석탑을 본떠서 만든 백제계 석탑이다.
높이가 9미터인 이 석탑은 단층 기단, 얇고 넓은 옥개석, 3단 옥개 받침 등이 특징적이다.
왕궁리5층석탑도면
이 건물 기초를 보면 이 석탑은 본디 목탑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석탑 주변에서는 '왕궁사', '관궁사', '대관사관', '대관궁사'라는 글자가 적힌 통일신라 시대 명문 기와가 여럿 출토 되었다.
1965~1966년에 해체.복원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여러 유물이 발견되었다.
제 1층 옥개석 중앙과 기단에서는 금강경판 19장, 금동제 사리함, 사리병 같은 사리장 엄구(국보 제123호)가,
석탑 밑에서는 가로 16.8미터, 세로12.7미터인 건물 기초가 발견되었다.
백제의 궁성건축
왕궁내부는 1:1또는 2:1의 비율로 공간을 분할하여 처음부터 치밀한 계획에 의해 조성되었으며,
전체 공간을 1/2로 나누어 남축은 의례와 생활공간, 북측은 후원과 공방으로 사용되었다. 남측의 의례 ㆍ
생활공간에는 4단의 동서석축을 쌓아 전반부는 의례공간으로, 후반부는 생활공간으로 활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요유적으로는 의례ㆍ의식을 행하던 정전건물지와 백제 정원유적, 왕궁 내의 중요 필수품인 금, 유리, 동 등을
생산 하던 공방지(폐기장), 백제 최고의 화장실유적 등이 조사되었다.
백제 왕궁은 무왕대에 건립외어 백제 말기를 전후하여 왕궁의 중요 건물을 철거하고 그 위에
다시 사찰을 조성하여 통일신라기까지 경영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사역 동측 일부에서만 부분적으로 건물지가 확인되고 있다.
왕궁리유적은 고대 왕궁으로는 처음 내부 구조가 확인된 곳으로 왕궁의 조성 계획과 건물의 배치를
알 수 있어서 고대 왕궁의 연구를 위한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왕궁리유적에서 건물지는 지금까지 백제시대 건물지 14기, 통일신라 건물지 6기, 고려시대 건물지 1기등 총 21기가 조사되었다.
백제시대 건물지는 기단의 축조 재료에 의해 석축기단건물과 와적기단건물로 구분되며, 초석의 유무에 따라 초석건물과 굴립주건물,
적심의 조성방법에 따라 적심건물과 토심적심건물로 구분할 수 있다.
중요 건물지는 대부분 초석을 사용한 기단건물지가 주를 이루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정전건물지와 같이 토심적심건물지와
와적기단건물지, 굴립주건물지도 확인되고 있다.
건물지의 위치를 보면 정전건물지는 중문의 중심축과 같은 선상에 위치하고 있으나 나머지 건물은 사찰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제거되어 금당지와 강당지를 제외하면 대부분 중심에서 벗어나 동편에 치우쳐 있다.
정전건물지는 왕궁리유적의 중문에서 들어가면 접할 수 있는 첫 번째 건물이며, 유적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건물로서
주변에서 수부(首府)명 기와가 출토되고 토심적심의 특이한 기초공법이 확인됨에 따라 정사를 돌보던 곳이나
의례, 의식을 행하던 정전(正殿)건물로 추정되고 있다.
왕궁리유적 출토기와
왕궁리유적 발굴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토기는 완, 합, 전달린토기, 접시, 뚜껑, 자배기, 호,
대호, 등잔, 병, 개배, 고배, 기대, 벼루, 시루, 파수부토기, 부뚜막형토기 등이다.
완, 합, 전달린토기 등은 백제 왕궁터로 전하는 부여 관북리유적 출토 회색토기와 같은 종류로
고운 태토를 사용하여 정교하게 만들었는데, 이러한 형태의 토기가 미륵사지에서는
몇 점 출토되었으나 백제고분에서는 출토되지 않고 있다.
개배, 고배, 기대, 벼루, 부뚜막형토기 등은 수점 또는 일부 편으로 출토되었는데, 기록이나 특별한 의식과
관련된 토기로 추정되며 토제 수각(짐승 모양의 다리)은 대형토기의 다리로서 의식과 관련된 토기로 보인다.
왕궁리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는 주변 사찰유적이나 고분유적 출토 유물과는 구분되고 다른 유적에서는
볼 수 없는 기종이 출토되어 유적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2002년 익산 왕궁리유적 발굴 과정에서 금과 유리를 가공했던 백제 공방(工房)터를 발견하였다.
이곳에서 금, 유리, 동 등을 녹여 원료와 제품을 생산하는 용기인 ‘도가니’가 많이 출토되었다.
왕궁리 유적터에서는 도가니와 함께 녹유리 구슬과 금 구슬, 금사 등 금장식품들도 상당량 출토되어
유리․금제품의 제작이 궁성 내에서 이루어졌음이 확인되었다. 출토된 금제품의 성분분석 결과
순금뿐만 아니라 은을 일정 비율 섞어 넣은 합금제품이 만들어 진 것이 확인되었고
제품의 사용 용도에 따라 은의 비율을 달리해가며 강도를 조절해 제작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왕궁리유적의 서북편에는 금, 유리, 동 등 왕궁에서 필요한 귀중품의 생산과 관련된 제품과 원료,
도가니, 용재(slag), 숫돌, 노의 벽체 편, 토관 등이 수습된 공방폐기장이 확인되어 그 주변에서
이들 제품을 생산하던 공방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궁리유적에서 수습된 금은 제품 생산 전단계인 재료 상태의 금막대, 금종이, 금덩어리와 이러한 재료를
이용한 금연꽃구슬, 영락, 연결고리, 금구슬, 금판, 금못, 제품 생산과정에서 남은 금판 편 등이 수습되어
금의 제련, 정련과 함께 세공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제품을 확대 관찰하면 표면에 연마흔적, 단조흔적, 주조흔적, 접합흔적 등이 남아 있어서 금제품의 제작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왕궁리유적에서 출토된 백제기와 만져보기, 관세음응험기 목판찍기, 유물 이미지 스템프찍기 등을
관람객이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다.
아이들이 즐거워할 목판찍기 체험도 있다.
옛날 인쇄술이었던 목판찍기를 직접 체험하며 요즘의 인쇄술과 차이점을 배워나가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될것 같다.
목판찍기 - 백제무왕의 익산천도와 관련된 유일한 기록인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를 목판으로 제작하여
목판찍기 체험과 함께 관세음응험기의 내용도 볼 수 있음.
도장 찍기 체험 - 태극문수막새, 수부명기와, 관궁사명기와, 금제사리함을 이미지를 도장으로 만들어
도장찍기 체험과 함께 전시유물을 오래 기억될 수 있도록 구성.
가장 즐겁게 즐겼던 게임인 궁실 축조 체험 게임이다.
매직비젼 및 게임을 통해 궁성건축 과정을 재미있고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시청각실
왕궁리유적전시관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궁성로 666(왕궁리 562번지)
063-859-4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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