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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 김태빈의 공부 http://blog.ohmynews.com/doublebean/rmfdurrl/533425
북경한국국제학교 방과후수업으로 주요 대학 추천도서 중 항일독립투쟁과 관련된 책을 읽는 시간을 마련했다. 『백범일지』와 같은 '대중적'인 책도 있지만, 박은식 선생의『한국통사』 같은 다소 전문적인 책도 커리큘럼에 넣었다.
그 중에서 아이들이 가장 경악한 책은 에드거 스노의『중국의 붉은 별』이다. 기존의 상, 하 두 권이었던 것이 합본된 판형으로 새로 나왔는데, 두께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주목하지 않았지만 내가 이 책과 짝을 지어 선정한 책이 있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 두 책의 저자 에드거 스노와 님 웨일즈가 부부였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에드거 스노의 저작은 세계 3대 르포르타주로 불리며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고, 중국 공산당의 장정과 마오쩌둥 또한 불멸의 혁명과 지도자로 여전히 회자된다. 그런데 님 웨일즈가 기록한 김산, 장지락은 조국에서조차 오랜 기간 금기였고, 지금도 너절한 이념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세계적 혁명가로 평가받는 건 언감생심.
나는 이 상황이 안타깝다. 님 웨일즈가 중국 혁명의 과정에서 우연히 만난 무명의 조선 혁명가, 만약 그가 중국 공산당 지도자의 '역사적 성실성'에 미치지 못했다면 님 웨일즈는 과연 그를 기록하려 했겠는가? 『아리랑』은 그 자체로 장지락이라는 한 인간에 대한 위대한 평가의 증거다. 님 웨일즈도 이렇게 확신하지 않았던가. '김산은 우리 시대에서 가장 많은 피를 흘리고, 가장 추악하고, 가장 혼란스러운 대변동 속으로 내던져진 한 명의 민감한 지식인,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이상주의적인 시인이요, 작가인 한 명의 지식인이었다.'
10여 년 전 개정판으로 『아리랑』을 처음 만났던 나는 작년 동료교사로부터 선물받은 초판본을 다시 읽었다. 처음에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희귀한 기록과 날카로운 문장을 읽을 때마다, 다시 읽기를 잘 했다고 몇 번이고 되뇌었다. 예를 들어 1933년 북경에서 두 번째로 체포되고 화북공산당이 해체된 후의 상황을 회상하면서 김산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불행했다. 하지만 절망하지는 않았다." 그 문장에 밑줄을 긋고 나는 이렇게 메모했다. '나는 이기적인 삶에서도 불행하는 족족 절망한다. 그는 이타적인 삶에서 불행하되 결코 절망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장지락의 인식도 흥미롭다. 임정을 지원하기도 했던 그는 그러나 '1924년에는 일단의 노인네들만을 상심과 실의 속에 남겨둔 채 와해되고 말았다.'고 평가했다. 이런 장지락의 견해를 존중해서인지 님 웨일즈 또한 다음과 같은 각주를 달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 중국의 중경에서 재건되었다.' 1924년에서 1940년 사이인 1932년에는 임정에서 주도한 이봉창, 윤봉길 의사 의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박한 평가를 한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하다.
1922년 황포탄 의거에 관한 기록은 오류가 적지 않지만, 약산 김원봉이 남긴 기록을 보충할 중요한 내용이 있다. 김익상 - 장지락은 김약산으로 구술하고 있다 - 과 오성륜이 도주하는 과정에서 오성륜이 자동차를 탈취해 운전을 하다 '에드워드 칠세로'에서 다른 차와 추돌해 체포되었다는 내용이다. '에드워드 칠세로'는 당시 중국어로 애다아로
愛多亞路로 지금의 연안동로延安東路다. 이 도로는 공동조계와 프랑스조계의 경계에 해당한다.
내가 장지락의 기록을 통해 배운 또 한 가지는 1927년 상하이 쿠데타의 세계사적 의미다.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은 내가 무척 좋아하는 소설이다. 1927년 상하이 쿠데타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 콩쿠르 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역사에 상당한 관심이 있다는 사람들도 ‘상하이 쿠데타’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사실 이 작품을 읽기 전에는 나도 그랬다. 그러니 이 사건이 중국 현대사에, 그리고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조선의 혁명가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렇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중국 국민당이 탄생하고 정확히 10년 후 중국 공산당이 창당한다. 1924년 소련의 요구와 지시로 두 정당은 협력을 한다. ‘제1차 국․공 합작’이다. 그리고 ‘북벌’을 단행한다. 중국을 분할 지배하던 군벌을 제거하지 않고는 혁명을 성공시키지도 중국을 통일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북벌에 참여한 장지락은 그때를 이렇게 회고한다.
불과 육 개월 이내에 양자강 유역까지 도달한 북벌군의 승승장구하는 급 진격이 한창이었을 때 모든 혁명가들이 느꼈던 환희와 열광은 지금은 기억해내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화북으로! 그리고 조선으로! 우리의 가슴은 미칠 듯이 기뻐 날뛰었던 것이다.
북벌의 중요한 전기가 된 지역은 상하이였다. 먼저 공산당원들이 지하공작을 통해 파업을 성공시키고, 이후 국민당 군대가 밖에서 압박하기로 약속을 한다. 그러나 북벌 과정에서 세력이 성장한 공산당을 적대시한 국민당 총통 장제스는 배반을 한다. 상하이의 공산당원을 학살한 것이다. 그는 오히려 군벌과 결탁했던 외국 자본가들과 손을 잡는다. 이때의 절망을 또한 장지락은 기록한다.
우익의 장개석이 지도하는 반혁명이 일어나 성공이 빤히 바라보이는 바로 승리의 문턱에서 국공분열이 일어났던 것이다. 중국이 공식적으로 분열하고 혁명이 좌절되었으며, 조선, 러시아, 일본, 기타 각국과의 혁명적 유대감이 깨어졌을 뿐만 아니라, 또한 혁명가 개인들도 모두 이 충격으로 각각 흩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자각하였다. 우리 조선인들은 우리나라 혁명의 지평선 위에 검은 구름이 뒤덮이는 것을 보았으며 이 검은 구름이 흩어지는 순간을 내다볼 수가 없었다.
남창南昌봉기는 실패한다. 1927년 8월 1일, 그러니까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 군대에 맞서 싸운 이 날은 이후 중국인민해방군 건군기념일로 지금도 기념되고 있다. 이후 중국 공산당은 광동에서 봉기하고 소비에트를 선포하지만 ‘삼일천하’로 끝난다. 정강산으로 쫓긴 공산당원 이후 다섯 차례 국민당의 토벌을 견디며 그 유명한 장정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1927년 상하이 쿠데타와 연달이 일어나 남창, 광동 봉기는 중국 공산당이 자생적 정치세력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겪은 곤란과 희생은 참혹했다. 1936년 서안사변으로 ‘제2차 국․공 합작’이 작동되기 전까지 조선의 혁명가들 또한 서로 다른 길을 강요받게 된다.
일본군과 최초로 교전한 조선인 부대 조선의용‘대’는 훗날 그 일부가 우익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었고 이는 해방 후 국군의 모태가 된다. 그 전에 화북으로 진출한 일부는 조선의용‘군’으로 개편, 해방 후에는 인민군의 주력이 된다. 두 세력이 해방된 조국에서 분단을 고착화한 전쟁에서 총부리를 겨누게 될, 그 시초가 상하이 쿠데타라고 하면 과장일까.
내가 상하이 쿠데타에 주목하는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딱 10년 후 스페인에서 발발한 내전과 이 사건이 무척 유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페인 내전 참전을 기록한 르포르타주 『카탈로니아 찬가』와 저자 조지 오웰은 내가 가장 아끼는 작품이자 가장 존경하는 작가다. 아주 거칠게 도식하면, 군벌에 대항한 국민당-공산당의 연합에서 국민당이 배반한 것과, 파시스트 프랑코에 대항해 스페인 민주전선과 협력한 소련이 배신한 것은, 적어도 내게는 그게 그 짓이다.
참고로 상하이에 한 번도 오지 않고 『인간의 조건』을 집필해 혁명가들의 ‘외롭고 높고 쓸쓸한’ 생애를 증언했던 앙드레 말로는, 스페인 내전에는 비행기 조종을 할 줄 모르는 공군 편대장으로 참전해 파시스트 또라이와 싸운다. 스페인 내전은 민주전선의 분열로 인한 프랑코의 어부지리 승리로 끝난다. 그러나 ‘싸워서 지는 것이 아예 싸우지 않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때도 있는 것’임을 이 패배는 우리에게 알려 주었다. 이는 우리 항일독립운동사에도 적확히 적용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인간의 조건』의 주인공 중 한 명인 기요의 모델이 주은래라는 설이 있다. 본인은 부정했지만 그렇게 추정할 정황은 충분하다. 중국 공산당이 상하이 총파업을 준비할 당시 ‘주은래는 사전에 반란을 준비시켜 국민군의 상하이 점령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주은래는 훗날 에드거 스노에게 “이틀 만에 우리는 외국 조계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지요.”라고 증언한 바 있다.
억압받고 있는 제 민족과 제 계급을 지도하기 때문에, 소련을 나는 어머니처럼 사랑한다. 중국혁명은 그 삶과 운명이 나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피를 나눈 형제와 같이 사랑하였다. 조선혁명은 어리고 불확실한 어린아이로서 애정이 갔다. 나는 조선혁명의 발걸음이 그전에 러시아와 중국이 걸어간 길을 따라 가도록 도와주어야 하리라 생각하였다.
- p.201
고통은 성격을 창조하고 인간적인 감정을 만들어낸다. 즐겁고 행복한 사람들이 내게는 멍텅구리처럼 보인다. 그들은 삶의 표면 위를 날아다니고는 있지만 절대로 그 의미는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오늘날 그들은 인간의 참마음에 가까이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고 고립되어 있다. 아마도 그 때문에 그들이 즐거운 상태로 남아있을 수 있으리라.
- p.243
자발적인 추종이 두려움에 가득찬 복종으로 화할 때 해체가 시작되는 것이다.
- p.288
에드거 스노가 중국에 온 것은 1929년이고 처음 정착한 곳은 상하이다. 그가 북경으로 옮겨온 것은 1932년이며 당시 연경대학 인근에 거처를 정했다. 연경대학은 기독교 계열 대학이었는데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인 1952년, 북경대학이 연경대학 터로 옮겨오면서 지금에 이른다. 에드거 스노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사망하는데 유언에 따라 시신의 반이 현재 북경대학에 묻혀있다.
주은래는 14세 때 천진에 있는 남개南開중학에 입학해 공부했고, 1919년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후에는 다시 남개대학에서 공부한다. 1920년 5.4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된 후에는 근공검학勤工儉學 유학생으로 프랑스로 떠난다. 그런데 이곳 남개대학이 우리나라 독립운동가와도 인연이 깊다. 도산 안창호의 주선으로 장지락을 비롯한 조선학생 5명이 장학생으로 이 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들은 등교를 거부했고 장학생 자격을 잃어 공부를 하지 못했다. 장지락의 증언이다.
1921년 10월 우리들이 천진에 도착하였을 때, 우리들이 등교를 거부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김엄金嚴이라는 남개대학의 조선학생 한 명이 가을 체육대회에서 달리기 시합에 출전하였다. 그는 뛰어난 주자였으므로 다른 선수들을 훨씬 앞지르고 선두를 달렸다. 그런데 “저 사람이 저렇게 잘 달리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게 없지. 그는 왜놈의 주구走狗인걸.” 하고 어떤 중국인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엄은 경주를 하다 말고 달려가서 이렇게 소리친 중국인을 후려 때렸다. 교수가 이 일을 가지고 김엄을 나무랐으나 김엄도 역시 그 사고의 와중에서 얻어 맞았던 것이다. 김엄과 우리 여섯 명은 즉각 학교에서 철수하였다. 그후 김엄은 중국 영화계에 들어갔으며, 오늘날에는 호접胡蝶 여사가 ‘여왕’으로 지목되는 데 반하여 김엄이 영화 스타의 ‘왕’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는 대단한 미남이고 노래도 잘 부르며 중국에서는 ‘김찬金燦’으로 불린다.
장지락이 소개한 김찬이 혹시 ‘중국영화의 황제’로 불리는 김염金焰이 아닌가 싶어 확인을 해보았으나 두 사람이 동일인은 아닌 것 같다. 김염은 1910년생인데, 1921년이면 12세이고 그렇다면 대학생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중국 인민이 일본군의 힘을 고갈시켜 쳐부수려면 어떤 조건을 잦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라는 에드거 스노의 질문에 마오쩌둥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세 가지 조건을 갖춘다면 우리의 성공은 보장될 것입니다. 첫째, 중국 내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민족통일전선이 성취되고, 둘째 국제적인 항일연합전선이 결성되며, 셋째 현재 일본 제국주의 아래서 신음하고 있는 피압박 인민들이 혁명적 활동을 벌여야 합니다.” 식상한 수준의 ‘상식’이 명쾌할 때가 있다. 그런데 이 분명한 것을 왜 조선의 항일투쟁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을까? 나는 잠정적인 답을 이어진 마오쩌둥의 한마디에서 찾았다. “이 중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중국 인민 자신의 통합이지요.”
한 줌의 비적에 불과하다던 중국 공산당 홍군이 어떻게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승리해 중화인민공화국을 성립시켰는지, 궁금하던 차, 나는 아주 명료한 답을 얻었다. 1928년 제2차 마오핑 회의에 더해진 8가지 규칙이 그것이다.
인가에서 떠날 때는 모든 문짝을 제자리에 걸어 놓는다.
잠잘 때 사용한 짚단은 묶어서 제자리에 갖다 놓는다.
인민에게는 예의바르고 정중하게 대하며, 가능한 경우에는 무슨 이이든 도와준다.
빌려 쓴 물건은 모두 되돌려준다.
파손된 물건은 모두 바꾸어준다.
농민들과 하는 거래는 정직하게 한다.
구매한 모든 물건은 값을 지불한다.
위생에 신경을 쓰고, 특히 변소는 인간에 피해를 주지 않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세운다.
매우 거친 요약임을 전제하고 어떻게 마오쩌둥이 중국 공산당을 장악했는지 정리해보자. 초기 중국 공산당을 창당한 이들, 예를 들어 ‘중국의 레닌’이라 불렸고 최초의 공산당 서기를 역임했던 진독수는 왜 공산당을 장악하지 못했는가? 진독수와 같은 해외유학파나 이립삼 등의 소련의 지시를 직접 받는 사람들은 사회주의 혁명에서 농촌의 중요성이나 농민의 역할을 간과했던 듯하다. 그들은 러시아혁명 과정을 기계적으로 중국에 적용해 도시에서의 무장봉기나 파업만이 사회주의 혁명의 주요하고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반면 ‘자생적 공산주의자’라고 할 만한 마오쩌둥은 사회주의 운동 자체를 농촌에서 농민을 조직하면서 시작한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지만 이 전략은 장정 과정에서 그 실효성을 검증받고 중국 공산당의 공식 전략으로 채택되기에 이른다. 이는 사실 마오쩌둥의 혜안 덕분이라기보다는, 도시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국민당과 달리 도시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 왜냐하면 아무런 재원도 지원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 중국 공산당이 근거지로 선택할 곳이라곤 농촌밖에 없었던 정황에 따른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다.
중국은 큰 나라다. 도시는 점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 점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농촌이다. 이는 중국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다. 또한 근대 자본주의적 도시는 필연적으로 주변 농촌의 생산물을 강제로 집중시키고 농민을 수탈하는 메커니즘을 통해서만 존립가능하다. 국민당은 농민을 수탈하는 지방군벌과 결탁하거나 적어도 그들을 방기했다. 반면 공산당은 바로 그 농민을 지원하고 해방시켰다. 권력이 곧 민중의 ‘쪽수’라면 승리는 자명했던 것이다. 당시 중국 농민의 실상을 에드거 스노는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기근 때문에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그렇게 죽어갔고,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싸라치의 거리에서 막 목숨이 끊어진 시체를 보았으며, 촌락의 얕은 웅덩이에 기근과 질병의 희생자들이 죽어 겹겹이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이 가장 충격적인 것은 아니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이런 마을들 대부분에서 아직도 부자와 쌀 매점상인과 밀 매점상인, 그리고 고리대금업자와 지주들이 무장병력의 보호를 받으며 엄청난 폭리를 취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도시에서 관리들이 기생들과 어우러져 노래하고 희롱하는 가운데 식량이 산처럼 쌓이기 시작한 지도 벌써 여러 날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의 혁명가 장지락을 노래한 『아리랑』과 중국의 혁명가 마오쩌둥을 그린 『중국의 붉은 별』을 함께 읽으며, 나는 여전히 이념적 경직성을 털어내지 못한 한국 사회에 답답함을 느꼈다. 마오쩌둥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국가적 자유를 박탈당한 민족에게는 혁명적 임무가, 조속한 사회주의의 실현이 아니라 독립을 위한 투쟁이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조선의 혁명가 장지락에게도 그렇지 않았겠는가. 그가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것도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기 위한 것이었지 않았겠는가 말이다.
사회주의나 아나키즘 계열 독립운동가를 ‘빨갱이’ 운운하며 폄훼하는 이들은 그들이 소련의 지시를 받았고, 조국해방을 위해 헌신한 게 아니라 계급해방을 위해 투쟁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둘째 가라면 서러울 ‘공산주의 수괴’ 마오쩌둥의 말을 다시 인용한다. ‘모스크바의 ‘명령’에 결코 좌우되지 않고 그들 인민의 의사에 따라 그 연합에 가입하고 탈퇴할 권리를 가질 때에만 비로소 (혁명을)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공산주의자도 그와 다른 방향을 생각한 적이 없었으며 ‘모스크바의 세계 지배’라는 신화는 파시스트들과 반혁명분자들이 날조한 것입니다.'
10년 전에 써두었던 다소 거친 독후감을 덧붙여 둔다.
혁명적 낭만주의자와 낭만적 혁명가 사이
낭만화라는 것은 바로 질적 강화이다. 이러한 질적 강화 작용 속에서 저속한 자아는 고차적인 자아와 동일시된다. 우리 자신은 그러한 질적 강화의 연속이다. - 노발리스
한 범상치 않은 인간의 역사적 족적을 기록한 글을 전기라고 한다. 그래서 그 인물에 대한 엄정한 역사적 사실은 전기문의 최소한의 조건이다. 그런 점에서 『아리랑』은 전기가 아니라 소설이라 할 수도 있겠다. 저자는 김산에 대해 상당부분을 거짓으로 기록했다. 그런데 바로 이 점, 모르고 잘못된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일부로 잘못되게 기록했다는 점이 김산의 삶을 예리하고도 적확하게 드러내 준다. 개인의 신상을 최소한으로 노출하는데도 목숨까지 걸어야 했던 삶, 김산은 바로 그런 삶을 살았다.
단순한 문학적 수사를 넘어서 김산이 낭만적 혁명가가 아닌 혁명적 낭만주의자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라이홀드 니버가 병든 낭만주의자라고 폄하했던 과격한 테러리스트만은 아니었다. 또한 그는 단 한 번의 혁명으로 모든 민중의 총체적 현실 조건이 완벽히 개선되리라고 믿는 순진한 낭만주의자도 아니었다. 현실적 불의를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쓸어버려야 한다고 믿는 치기어린 혁명가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는 혁명에서의 ‘오류’를 인정했으며, 자신의 삶으로 다른 사람의 삶을 함부로 재단하려 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적용했던 엄정함이 타인에게는 관용으로 드러났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비전의 완전성이 아니라 일관성이었다.
너무나 진리에 가까운 질문을 한다는 것은 위험하다. 그런 질문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버릴 것이다. 자신에게 진리라고 생각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은 위험하다. 자기가 틀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 나름의 신념과 오류를 지닌 채 행복하게 죽어가도록 내버려두어라. 근본적인 질문으로 타인의 영혼을 괴롭히지 말아라. 자기가 원하는 문제에 대해 자기 나름의 해답을 찾도록 내버려두어라.
물론 당시의 김산 이외의 혁명가들의 뜨거운 열정과 건전한 환상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이런 환상이 사람들의 영혼을 부추겨 숭고한 광기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한, 정의란 결코 달성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광기를 갖지 않고서는 그 어느 누구도 사악한 권력 또는 ‘높은 지위에 있는 정신적 사악’에 대항해서 싸울 수 없’기 때문에, 그 정도의 한에서 의미를 갖는다. 환상이 그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에 앞서 이성이 그것을 파괴해버리는 상례도 경계해야 하겠지만 또한 그 환상이 맹렬하고 맹목적인 환상주의로 경직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김산은 그런 점에서 혁명가이기 이전에 낭만주의자였다. 낭만주의에 대한 세간의 부정적인 평가2)는 개념의 혼동 내지는 부분의 부정적 확대일 뿐, 김산을 낭만주의라고 평가하는 것은 온당하다. 그는 현실의 부정성[正]을 오류를 포함한 혁명[反]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고, 최종적으로는‘낭만성[合]’이란 개념으로 변증법적 지양을 이루고자 했다.
정신사적으로 ‘이성을 통한 감각 세계의 인식’을 기치로 내건 계몽주의와 대립되는 낭만주의는 이성적 사고로는 결코 이를 수 없는 인간과 자연의 통일성 또는 의식의 통일성을 성취하는 능력인 ‘환상’의 개념을 통해 정초되었으면서도 계몽주의로부터 이어받은 ‘성찰’이라는 고도의 지성에 대한 신뢰를 함유한다. 달리 말해 계몽주의자는 보편적 이성을 통해서만 세계가 변화될 수 있다고 믿지만 낭만주의자는 그러한 이성을 포함한 사랑의 감정에 의해서도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이 때의 사랑이란 ‘세계를 변혁시키는 힘’이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낭만주의자에게 ‘낭만적’이란 용어는 ‘혁명적’이란 것과 동일한 의미로 간주된다.
그의 낭만적 기질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철저하게 현실에 기초하고 있다. 결코 퇴폐적 감정에의 탐닉이나 정치적 반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래서 님 웨일즈의 다음과 같은 평가는 적절하다. ‘육체는 빵으로 살찌지만 정신은 기아와 고통으로 살찐다.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에 의해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어야만 비로소 지식인은 행동하고 결정할 수 수 있게 된다. 김산은 이 약점을 극복하였으며, 그래서 지식인적 패배주의라는 질병에 희생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김산은 어떤 의미인지 잠깐 살펴보자. 김산의 삶은 그 자체로 혁명적 삶의 진정성, 그 가능성과 한계이다. 그러나 그의 한계는 결코 실패나 패배와 동의어가 아니다. ‘죽음은 패배가 아니다. 수많은 죽음 가운데서 승리가 태어날 수도 있다.’ 도덕과 윤리가 늘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도덕과 윤리의 폐퇴 가운데서도 정의는 자리할 수 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확인한다. 독재가 민중의 무관심을 먹고 살았다면 혁명은 선봉의 피를 먹고 자란다. 그러므로 김산의 한계는 ‘미래의 열린 가능성’이지 결코 절망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김산의 삶을 통해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그가 그 짧은 삶을 통해 이룩한 성숙의 지점에서 상대에 대해 관용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 관용의 실천은 보편적 이성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이성이 감당하지 못하는 부분을 ‘사랑’과 ‘관용’으로 채워야 한다. 마르크스에게 보낸 프루동의 편지의 일절은 바로 그러한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지적, 실천적 자만은 더 이상 자리할 곳이 없다.
학식과 선견지명에 기초한 관용의 예를 세상에 보여줍시다. 우리가 운동의 앞장을 섰다는 이유만으로, 새로운 편협성을 드러내는 지도자가 되지는 맙시다. 절대 어떤 문제를 끝난 것으로 취급하지 맙시다. 우리의 마지막 주장까지 다 펼쳤다 해도, 필요하다면 웅변과 풍자로 새로 시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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