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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국제정세의 변화와 조선선교를 위한 성경번역선교
조선은 26대왕 고종(1852~1919년)이 국왕이었지만 모든 실권은 자신의 부친인 흥선대원군(이하응,1820~1898년)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스스로 “국태공”(國太公)의 자리에 올라 “쇄국양이정책”(鎖國壤夷政策)을 고집하며 외교를 단절한채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전무후무한 천주교 탄압을 실시하여 8,000명이 넘는 천주교 신자들에게 순교자의 길을 요구하였습니다. 서양학문의 탐구에서 시작된 천주교신앙은 이승훈과 강완숙과 최초의 신부 김대건의 순교속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고 오직 조선인의 힘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1816년, “한문성경”을 전달한 영국 해군 대령 “바실 홀”(Basil Hall) 이후 1832년, 충청도 서해안 고대도를 방문한 기독교의 네덜란드 선교회 소속의 “칼 귀츨라프”(Karl F.A.Gutzllaff)선교사는 1개월 동안의 조선 체류 기간 중, 고대도 관리와 지역 주민들과 접촉하면서 한문성경을 대량으로 전파하였습니다. 귀츨라프는 한문을 잘 모르는 주민들을 위해 조선어를 배웠고, “주기도문”을 기록한 한글성경번역을 하여 주민들에게 보급하였습니다. 그와 함께 쪽복음서와 전도문서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모든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습니다” 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후 조선선교를 열망하였던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는 1865년 9월과 1866년 8월 등 2차례에 걸쳐 조선 황해도 창린도와 연평도, 그리고 평양부 양각도에서 “야소교”(예수교)라는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다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알렉산더 윌리엄슨”(Alexander Williamson)은 1867년, 중국 최대의 기독출판사 “동문서회”(同文書會)를 산둥성에 설립하고 조선인 중국관문인 “고려문”을 통하여 성경과 기독교 교리와 만국공보 등을 보급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실각후 고종은 서구열강들의 틈바구니속에서 “쇄국양이정책”(鎖國壤夷政策)을 포기하고 문호를 개방하였습니다. 1878년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고, 1882년에는 조미조약, 조영조약, 조독조약, 1886년에는 26명의 선교사 중 12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조불조약이 체결됨으로서 세계열강들의 각축장이 된 조선에서의 무역통상은 자유화 되었고, 종교활동은 정부의 억압과 탄압에서 개인적 선택으로 이양되는 등 민주주의 국가로의 전환기에 서 있었습니다.
(1) 성경번역선교의 필요성 : 최창현과 귀츨라프
천주교 신자인 세례명 “요한”의 “최창현”(崔昌顯,1759(영조35)∼1801(순조1))은 이승훈, 이벽 등 남인학자들과 교류하던중 천주교 서적을 읽으며 1784년(정조8년) 12월, 천주교에 입교하였습니다. 최창현은 그후 조선천주교회의 “총회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초기 조선 천주교회는 교리책이 거의 없어서 전교에 불편이 많았습니다. 1790년, 4복음서의 성경구절 가운데 주요구절을 발췌하고 그 해석을 기록한 한문본 “성경광익”(聖經廣益)과 “성경직해”(聖經直解)를 재편집하여 한글성경인 “성경직광익”(聖經直廣益)을 편찬하였는데 이것이 최초의 우리말 성경번역서 였습니다. 최창현은 배교자의 밀고로 1801년(순조1년) 4월8일, 정약종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습니다.
그 후에 1832년, 네덜란드 선교회 소속의 “칼 귀츨라프”(Karl F.A.Gutzllaff)가 충청도 고대도 사람들에게 한글문서 “주기도문”을 가르치고 이것을 보급하였습니다. 귀츨라프는 고대도 체류 1개월 기간 중 처음에는 한문성경과 전도문서를 보급하였으나 조선인들이 서학의 일종으로 여겨 글을 읽지 못하거나 재판매용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귀츨라프 스스로가 조선어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내용 전달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양”(陽)이라고 알려진 어떤 사람으로부터 조선어를 배우고 그의 도움을 받아 주기도문을 한글로 기록할수 있었습니다. 귀츨라프는 조선어를 통하여 예수님의 기도를 가르쳤고 예수를 믿어야 하는 당위성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2) 조선어 성경의 역사 : “존 로스”(John Ross)와 “존 맥킨타이어”(John Macintyre)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 출신인 “존 로스”(John Ross,1841~1915년)와 “존 맥킨타이어”(John Macintyre,1837~1905년)는 처남 매부로서 1872년, 존 로스는 선교사로서 아내 “스튜어트”와 함께 중국 지푸를 경유하여 영구(營口)에 도착하여 만주 우장(牛莊)을 거점으로 하는 선교활동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1873년, 아내 스튜어트가 아기를 출산하는 과정에서 사망함으로서 매우 큰 충격에 빠졌지만 로스는 이로서 선교를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내의 유산인 아기를 돌볼 보모로서 여동생인 “캐더린 로스”(Catherine Ross)가 필요했고 캐더린은 어린 조카를 위해 영국을 출발하여 중국 우장에 도착하였습니다. 캐더린의 헌신적인 배려에 감동을 받은 로스의 동료 선교사인 맥킨타이어는 그녀를 사랑하여 결혼에 이르렀습니다. 아내를 잃은 그해 10월, 로스는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 산동지역과 서간지역으로 1차 전도여행을 하였습니다. 봉천 홍경을 경유하여 압록강 상류 임강에서 “임강 한인촌”을 발견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은 쇄국정책으로 인하여 외국인과의 접촉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선으로의 입국 자체가 불허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조선인에게 한문성경을 전달한 후, 로스는 조청 국경지대인 봉황성 아래 “고려문”을 방문하였습니다. 고려문은 조선과 청나라의 유일한 국제관문으로 연간 4차례에 걸쳐 큰 시장이 개설되었습니다. 로스는 그곳에서 조선어 선생을 찾았습니다. 조선선교를 본격화 하기 위해서는 한글성경이 반드시 필요하였기 때문에 성경을 한글로 번역할 조선인을 찾았던 것입니다. 로스가 군중들 앞에서 복음을 전할 때 조선인들이 설교를 듣기도 하였지만 그들 대부분은 교리보다 다른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874년 4월말, 로스가 자선 사업가인 “아딩톤”(R.Arthington)의 재정후원으로 고려문을 다시 찾았을 때 그곳에서 의주 출신의 한약재 상인 “이응찬”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응찬은 의주에서 한약재를 가지고 고려문으로 가기위해 압록강을 건너다 풍랑을 만나 배가 전복되면서 전재산이라 할 수 있는 모든 한약재를 잃고 겨우 목숨만을 건진 상태였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오갈 때 없는 처지가 된 이응찬의 위기와 조선어 선생을 찾는 로스 선교사의 기회가 정확히 일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한학에 탁월한 이응찬의 어학지도와 학구열에 탁월한 로스의 지적능력으로 1877년 로스는 조선어 교본 “한영문전입문”(A Corean English Primer)을 발행하게 되었습니다.
1875년, 이응찬이 로스의 조선어 학습과 여러 가지를 지원하는 가운데 기독교에 대하여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며 고려문에서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등 의주 사람 3명을 추가로 인도하여 로스의 선교사업을 지원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들은 성경번역사업을 위해 한문성경을 수차례 정독하는 과정속에서 믿음을 갖게 되었고 1879년, 이들 네명이 맥킨타이어로부터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때를 같이 하여 만주 우장에서 “서상륜”이라는 사람이 로스에게 세례를 받았고 1883년 “김청송”이 세례를 받음으로서 이들에 의한 세례자는 모두 6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이응찬을 비롯하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는 선교사, 세관관리, 병원장들의 어학교사로 근무하면서 로스의 성경번역사업을 지원하였습니다. 맥킨타이어가 합류한 조선인들을 위한 신앙공동체는 1880년 30여명이 성경교육을 이수였을 정도로 놀라운 성과가 있었습니다. 조선인 스스로가 정기적인 회집을 가졌던 신앙공동체(봉천교회)는 1879년 이전부터 있었고 이곳의 지도자 또한 조선인이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이것은 조선인에 의한 조선기독교회가 이미 복음이 전래된 순간부터 실질적으로 존재하였음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선교의 보다 구체적인 비전은 성경번역에 있었습니다.
초창기 성경번역과정은 조선인 번역자들이 선교사들과 함께 한문성경을 읽고 그것을 한글로 번역한후 로스와 맥킨타이어가 헬라 원문과 대조하여 원문에 충실하도록 편집하는 절차였습니다. 1878년 로스와 이응찬, 김진기, 백홍준이 누가복음 초역을 완성하고 맥킨타이어 목사가 서상륜 등 조선인 번역자들과 함께 원문에 충실하도록 재수정을 하였습니다. 1879년 로스가 안식년을 맞이하여 스코틀랜드로 귀국하였을 때 복음서, 사도행전, 로마서 원고를 가지고 갔습니다. 로스는 스코틀랜드에서 “한국의 역사, 고대와 근대”를 출판하고,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로부터 조선어 성경의 출판비용을 승인받았습니다.
1881년, 로스는 만주 우장으로 돌아와 심양에 “문광서원”을 설립하고 맥킨타이어가 수정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최종수정하였으며, 그해 10월에 최초의 한글 기독교문서인 “예수셩교문답”과 “예수셩교요령”이 인쇄되었습니다. 한글을 모르는 중국인 식자공으로 인하여 서간도 조선촌에서 ”김청송“이라는 사람을 식자공으로 채용하였으나 너무 둔하고 느려서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인쇄가 가능하였습니다. 김청송은 인쇄공이 3천장을 인쇄할 때 4장밖에 조판을 못할정도로 천성적으로 느렸지만 매우 성실하고 치밀한 성격이어서 맡은 일의 결과는 정확하였습니다. 1882년 3월24일, “예수셩교 누가복음뎨자행젹”과 5월에는 "예수셩교요안나복음“을 발행함으로서 한국성경 번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1883년 재교정된 ”예수셩교누가복음뎨자행젹“과 ”뎨자행젹“(사도행전) 합본이 출판되었고, 이와 별도로 ”예수셩교누가복음뎨자행젹“ 3천권과 재교정된 ”예수셩교요안나복음“ 5천권이 출판되었습니다. 1884년, ”예수셩교말코복음“(마가복음)과 ”예수셩교맛디복음“(마태복음)이 출판되고, 1885년에는 ”로마인서“(로마서), ”코린돗젼후셔“(고린도전후서), ”가라탸서“(갈라디아서), ”이비소서“(에베소서)가 출판되었으며, 1887년 마침내 ”예수셩교젼셔“(신약성경 전권)가 완간되었습니다.
로스와 맥킨타이어는 중국어 성경 문리, 헬라어성경, KJV, ERV를 저본으로 사용하였고, 특히 최종 작업시 헬라어 성경사전과 헬라어 성경과 영어성경을 대조하며 원문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특히 조선선교를 위해 조선에 있는 사람들의 언어로 성경을 출판함으로서 조선에서의 기독교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였습니다.
(3) 조선인의 성경번역 : 이수정(李樹廷,1842(헌종8년)~1886년(고종23년))
전남 곡성 출신의 “이수정”(李樹廷)은 대학자이며 전주이씨(全州李氏) 왕족의 친척인 “이병규”(李秉逵)의 아들로서 1842년(헌종8년)에 출생하였습니다. 1881년, 이수정은 신사유람단(일본조사시찰단,4월10일~윤7월2일)의 수행원이었던 농경학자 안종수(安宗洙)의 일본참가기를 듣고 일본행을 희망하였습니다. 1882년 임오군란때 이수정은 농부로 변장하여 “명성황후”를 지게에 거름똥이 나가는 것으로 위장하여 궁궐을 탈출하여 충주까지 피신시킨 공로가 있었습니다. 이 일로 1882년 10월 고종의 신임을 받아 신사유람단의 수신사 박영효의 비수행원으로 일본행의 꿈을 이루었습니다. 귀국후 동경제국대학 한국어 강사모집에 응시하여 한국어 강사로 선발되어 다시 일본을 가게 되었을 때 안종수는 일본 농학박사 “쯔다센”(津田仙)을 소개하였습니다. 일본에서 당대 일본 최고의 농학자이며 기독교인이었던 쯔다센과 친분을 쌓으며 그로부터 근대농법과 법률과 우편제도를 수학하였습니다.
어느날 쯔다센의 방에서 한문족자를 발견하고 거기에 기록 되어진 “산상수훈”(山上垂訓)을 읽고 그 내용에 깊은 감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1882년 12월25일, 쓰다센의 안내로 “츠키지교회”의 성탄절 예배에 처음으로 참석한 이수정은 이듬해인 1883년 4월29일, “로개쥬쵸교회”(동경노월정교회,露月町敎會)에서 미국 장로교회 소속 일본 선교사 “조지 낙스”(Knox, G.W.)의 입회하에 “야스가와 토오루”(安川亭) 목사의 주례로 세례를 받았으며, 이것은 일본에서 세례받은 최초의 사례였습니다.
세례를 받은 이수정은 1883년 5월8일, 동경에서 우찌무라 간조, 우에무라, 니이지마 죠 등 일본 기독교 지도자들이 참석하는 제3회 전국기독교도 대친목회(대부흥집회)가 5월11일까지 개최되었을때 그날 저녁집회 시간에 조선어로 대표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날 미국 성서공회 일본선교 총무 “헨리 루미스” 선교사가 이수정의 세례소식을 미국 본부에 송신하면서 조선의 복음사역자로 소임을 다해 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5월12일 전국기독교 신도 대친목회 임원야유회에서 이수정은 요한복음 14장에 근거하여 자신의 구원의 기쁨을 고백하는 신앙고백문을 한문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이수정의 “신앙고백서”는 “윤치호”의 신앙고백서와 함께 조선기독교 초기 신자의 신앙을 대표하는 것이었습니다.
1883년 8월, 이수정은 동경외국어학교 조선어 교수로 재직하며 “조선일본선린호화”라는 한국어 교재를 발간하여 조선의 지리, 민속, 제도, 법률, 정사, 도학, 문예, 물산, 기구 등 일본에 조선을 소개하였습니다.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던 미국 성서공회가 조선을 위한 성서반포사업을 추진하며 이것을 일본선교 총무인 헨리 루미스에게 일임하자 이수정은 이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 하였습니다. 이수정은 조선어 성경번역 사업이 선교사업의 기본이라는 생각으로 신약성경을 조선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883년 5월29일, 편익을 배려한 로개쥬쵸교회 야스카와 목사님의 서재에서 이수정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번역본을 완성하였습니다. 그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을 완역하였고, 로마서 번역작업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이수정은 조선인 일본유학생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일본의 자녀를 대상으로 하는 교회 주일학교 개설 계획을 준비하였습니다. 이와는 별도로 1883년 5월, 조지 낙스와 헨리 루미스 선교사는 선교 가능성을 진단하기 위해 조선 여행계획을 수립하고 미국 본부에 승인을 요청하였습니다.
1883년 7월30일, 이수정이 번역한 요한복음 일부를 미국 성서공회 본부에 발송하였습니다. 1884년 11월, 이수정은 한문성경에 한글 토를 단 “현토성경신약성서마가전”을 출간하고, 이어 1887년에 “현토한한신약전서”(懸吐韓漢新約全書)를 출간하였습니다. 1883년 12월, 이수정은 미국 선교부에서 기독교 불모지인 조선에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발송하였고 이 편지는 선교 잡지인 “미셔너리 리뷰”(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에 게재되었습니다. 이수정의 편지는 미국 선교부를 감동시켰고 조선 선교열망을 고취시키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와 북미지역의 선교사들이 이수정의 간절함에 힘입어 조선선교를 결정한 것이었습니다.
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의 요청으로 “감리교 요리문답”을 한글로 번역하여 감리교는 이 문서를 조선에 유포하였습니다. 이수정은 1885년 7월부터 동경의 조선인 유학생을 대상으로 예배집례를 주관하고 일본의 선진문물을 전수하였으며, 1874년 결성된 개화파 서재필,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등에게 기독교 교리를 전파하였습니다. 1884년 12월4일,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개화당이 청나라에 의존하려는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했던 “갑신정변”이 실패한 후, 이수정은 조선조정과 김옥균으로부터 불신을 받고 있었으며 김옥균이 보낸 자객 “김정식”에 의해 죽음의 위기에 직면하며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습니다. 1886년 복음사역으로 인하여 귀국을 미루던 이수정은 1886년 조선으로 귀국하였으나 개화파를 적대시 하던 수구파에 의해 처형 됨으로서 그의 짧은 사역은 끝이 났습니다. 조선 선교는 성경번역에서 시작되었고 조선인에 의해서 자생적으로 복음이 전파되었으며, 하나님께서 순교자의 피가 헛되지 않도록 굳건한 믿음의 기초를 세워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