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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하게 세상 바라보기와 수필 쓰기
강 돈 묵
일상의 시각에 잡힌 대상은 있는 모습 그대로다. 그것은 작가의 의도된 해석이 가미되기 전이어서 현상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는 단순한 일상의 현상에 발칙한 시각으로 해석해내어, 문학적 소재로 다시 태어나게 만든다. 그냥 보이는 것은 단순한 사물이지만, 작가가 의도된 심안으로 사물을 바라보면 특이하게 작가만이 바라본 것이 되기에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되는 것이다.
같은 대상을 바라보아도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그것은 달리 보인다. 보는 이의 직업, 성별, 나이에 따라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또 바라보는 순간의 심리 상태에 따라 대상은 더욱 다른 의미를 함유한다. 작가의 수용 자세가 사물 인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수용 자세에는 작가의 의도된 목적이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작가는 남의 시선을 따라가기보다는 그것의 방향과 의도를 거스를 필요가 있다. 자기만의 시선을 갖기 위해서 새로운 시도가 항상 필요하다.
내 생각의 주인은 나다. 주인은 언제나 자신의 생각이 돌발적이고 센세이션하기를 소망한다. 감히 다른 이가 흉내 낼 수 없는 독창적인 것이길 바라지만 그게 그리 만만하지 않다. 어느 사람이든 다 같이 신체적 조건에 차이가 없고, 살아가는 환경이 대동소이하기에 얻는 결과물 역시 비슷하다. 삶의 디테일마저 그게 그거라서 어느 집을 들어서든 대문이 있고, 마당이 있으며, 안방이 있고, 건넌방이 있다. 여기서 무슨 획기적인 다름을 찾을 수 있겠는가. 오직 획기적이진 못하더라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서 새로움을 건질 수 있을 뿐이다. 그 시각을 만드는 일이 작가가 해야 할 일이다. 무엇이든 생각의 주인이 되어 새로운 것의 발견에 매진한다면 작가는 충분한 매력을 가지게 된다. 주관성을 갖고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인다면 나름 정체성을 획득할 수 있다.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나무만 보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숲만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나무만 보듯 깊이 파고들어 날카롭게 파헤치고 분해하는 능력에 의존하는 글은 자폐성만 키울 위험성이 있다. 또 숲만 보듯 세상을 넓게 보면 전체적인 흐름은 읽을 수 있으나 사물의 본질을 파고드는 데는 더러 한계가 느껴지기도 한다. 자아를 말하고 표현하는 것이 진정 수필이라지만 자아에 함몰되어서는 안 되고, 밀폐된 공간에서 벗어나 자아와 세계와의 보편적 관계도 읽어내야 한다.
수필을 하는 마음은 이 둘의 적절한 조율이 필요하다. 수필이 작가의 고백문학임에 의탁하여 심도 있게 깊이 들어가기만 하면 정체성을 찾는 데는 크게 기여하나, 자아와 세계와의 보편적 관계 설정에는 실패한다. 사람과 사람이 함께 하는 인간세상은 이 보편적 관계를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숲을 바라보는 시각의 기여도 찾게 된다.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사랑이 오히려 세상을 더 따뜻하게 만든다.
강미영의 시에서처럼 ‘흐릿한 내 눈 속에 어여쁜 사람 그대로 두고 싶’을 때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향기 탐나 가까이 가서 요모조모 눈 씻고 뜯어보면’ 오히려 ‘숨겨진 가시 험하고 벌레 먹은 꽃 이파리와 시든 줄기’도 보일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단내 나는 살에 비비고 싶은 맘을 꼭 잡아두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작가는 소재를 가까이 두고 깊이 뜯어보기도 하고, 이만큼 거리 두고 바라보며 사랑하기도 한다. 작가는 부드럽게 풍기는 시공을 통한 의미가 신기루처럼 피어올라 작가의 가슴을 적실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작가는 화려한 몸짓으로 달려드는 소재도 잡지만, 흐릿한 그림자 속에 숨겨진 진실의 모습을 찾아내어 독자에게 보여주기도 해야 한다.
긴 세월 눈비 맞아 마모된 비석 속의 문자처럼 소재는 작가의 끝없는 노력을 쳐다보며 한 올 두 올 벗어던지고 자신의 속내를 보여준다. 문자가 놓인 자리에 따라 갖는 의미가 다르듯 세상의 이치 또한 보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의 위치에 따라 다르게 의식하게 된다. 짙은 안개 속에 묻혀 있는 소재를 찾아내는 사람이 진정한 심안의 소유자다. 일찍이 다른 이가 찾아내지 못한 소재의 의미를 찾아내면 그 작가는 존재의 의미를 획득한다.
이번 《수필세계》에는 수필가들의 발칙한 눈빛이 너무 찬란하여 주체하기에 힘이 들 정도다. 그만큼 좋은 작품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대부분의 수필가들이 일상의 눈에서 벗어나 발칙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작가의 삶을 밀어 넣어 해석하고, 그것이 함유하고 있는 진실을 독자들에게 선물하고 있다.
최원현의 <기다림 없는 기다림>은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의 요양원이 작품 배경이다. 젊어서는 한 미모였던 큰어머니도 늙어 죽음 앞에 서니 어쩔 수 없음을 그려주고 있다. 이 정도에 머물면 독자들은 식상할 터이지만, 작가는 사람이 어느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 그 인식이 다름을 들고 나온다.
젊음과 늙음의 차이는 일상의 삶터와 요양원의 차이로 구체화된다. 즐거움이 있고, 기다림이 있는 삶터가 있는가 하면, 아무런 소망도 없고 기다림도 없는 죽음의 대기소인 요양원이 있다. 죽음과 삶의 경계에는 오직 문 하나가 있을 뿐이다. 그 문의 안과 밖은 다른 세계다. 이 확연한 다름 앞에서도 가식으로 꾸미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요양원에서 작가는 죽음의 냄새를 맡는다. 그 냄새 속에서 가식으로 치장한 인간의 모습을 깨닫는다. 본연의 냄새를 감추기 위해 화장품을 바르고, 향수를 뿌리는 인간. 어쩌면 이 죽음의 냄새는 적나라하게 드러난 인간 본연의 냄새가 아닐까.
차가워진 손, 뼈와 가죽만 남은 다리며 발, 눈만 까만 얼굴, 모든 것을 놓아버린 모습에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노랫말을 생각한다. 오는 것도 가는 것도 마음대로 되는 것 아니잖는가. 그저 다가올 삶의 종착역을 막연하게 기다리는 저 많은 모습들 중에 하나일 뿐인 큰어머니를 보며 기다림 없는 기다림이란 생각이 들었다. 기다림이란 무엇이건 목적한 바가 있기 마련인데 그 목적 자체를 잃어버린 저분들에겐 그저 시간만 흘러 보낼 뿐 아닌가. -최원현의 <기다림 없는 기다림>에서
작가는 기다림도 목적한 바가 있어야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즉, 삶은 무엇인가 의미를 가지고 진행되어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 놓인 그 자리가 어디이든 목적을 가진 삶은 가치가 있다. 작가는 삶이 놓인 자리에 따라 그 의미가 현저하게 차이가 있음을 인식시킨다.
박주희의 <부엌 화분>. 세상의 모든 사물은 놓이는 자리에 따라 그 가치가 다르다. 가치뿐 아니라 놓인 자리에 따라 신분에 변화를 가져오고 마침내는 확연히 다른 사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사물도 이럴진대 사람이야 말해 뭣하랴. 작가 박주희는 ‘부엌 화분’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한 생을 되돌아본다. 제자리를 얻지 못해 힘들어 하는 화분에 자신의 삶을 얹음으로써 문학적 입지를 확보한다.
놓일 자리를 얻지 못해 햇볕과 바람이 부족한 책장 위 한 귀퉁이에 놓인 유리병의 아이비, 이는 일곱 살에 아버지를 잃고 시골 외가로 밀려온 작가 자신이다. 식탁 모서리에 들어온 장미 화분 곁으로 내려온 유리병 아이비는 창문과 가까워진 것에 만족한다. 신혼생활을 비록 엇박자나는 시누이와 함께 했어도 남편의 사랑이 있어 다행이고 좋았다.
남편이 사 온 영양제와 화분대를 밀착시켜 배치하고, 늦게 들어온 화분 두어 개도 함께 붙여놓고 여행을 다녀오니 제대로 된 공간을 갖지 못한 화분들이 죽을상이다. 마른 떡잎을 떼어내며 이들에게 자리를 마련해 줄 궁리를 한 끝에 겨우 찾아낸 곳이 부엌 창가다. 햇볕이 들고, 바람도 들어오도록 창문을 열 수 있다.
집안일에 얽매어 부부간에 제대로 대화하지 못하던 때에 이사를 하게 된다. 낯설고 말 설은 부산으로 오니 바뀐 환경에 적응하기가 그리 만만하지 않다. 후회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환경에 적응하게 된다.
화분처럼 그녀는 어떤 힘에 의해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다. 힘들고 버거웠지만 돌아보니 모든 자리는 그녀를 성장시키고 성숙케 했다. 지금, 그녀 얼굴에는 날마다 생기가 돈다. 이사 오기 전에 그녀를 알았던 사람들은 얼굴색이 환해졌다고 한마디씩 보탠다. 바다를 싫어했던 그녀가 바다 회에 푹 빠져 산다. 친구도 사귀고 저녁마다 나서는 산책길에서 억양 센 동네 분들과 인사도 나눈다. 그래서인지 남편과의 대화도 늘어간다. 부산이라는 곳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던 그녀가 다이내믹한 부산에 동화되어 가고 있다.
마음과 몸을 바쁘게 움직인다. 교양으로 듣고 있는 교실에 가도 이제는 한 자리를 고수하지 않는다. 형편대로 앉고 매번 바꾸어 다른 자리에 앉는다. 어떤 자리에서든 삶은 이어지고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해 갈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박주희의 <부엌 화분>에서
교양강좌에 나가서도 한 자리를 고수하지 않고, 이 자리 저 자리로 바꾸어 앉는 그녀의 모습이 건강하여 좋다. 1인칭으로 하질 않고, 3인칭으로 놓음으로써 객관성을 획득하고 있다.
이연숙의 <완장>은 ‘자리’가 화두이다. 자신이 어떠한 자리에 앉아 있느냐에 따라 사람의 존재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 자리는 다른 이가 바라보는 자기 자신의 위치를 일컫기도 하지만, 남의 자리를 내가 바라보는 관점도 나타낸다.
우선 작가는 그 자리를 ‘완장’에 비유하였고, 그것은 ‘권력’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대개의 경우 완장을 차게 되면 자신의 힘을 내보이는 수단으로 사용하게 됨을 보여준다. 권력은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고 유혹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이란 존재는 힘이 남보다 조금 세면 그것을 내보여 상대를 제압하고 싶은 욕망을 떨치기 어려운 존재이다. 권력에 의존하는 사람일수록 그것을 놓치면 죽음과 같은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와 같은 심리가 인간을 맹목적으로 권력의 시녀가 되도록 만든다.
그러나 아버지의 ‘완장’은 그렇지 않았다. 아들이 공무원에 합격하자 아버지는 완장을 차게 되었다. 그 완장은 동네사람들을 휘어잡는 완장이 아니라 돌보는 완장이었던 것이다. 홍수피해를 복구해 주고, 동네 사람들의 민원창구 역할을 하는 완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작가 이연숙에 있어서 값진 완장의 의미는 베풂인 것이다. 동네이장 한 번 해 보지 못하면서도 베풀기만 했던 아버지 삶의 완장을 지금 작가는 자신의 팔뚝에 차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어떠한 능력이 있든 없든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하는 삶이 가치 있는 삶임을 말해 주고 있다.
때가 되면 권력은 내려놔야 하고 낮은 자리로 내려와야 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완장은 부모 자식이기 때문에 내려놓을 일이 없다. 우스갯소리로 칠십이 훌쩍 넘도록 남들 다 해본 마을 이장을 한 번도 못한 사람은 아버지밖에 없을 것이라 농을 하지만 아쉬운 표정은 어디에도 없다.
‘반장님. 이번 모임은 어디에서 할까요. 장소 좀 정해 주세요.’ 어린 회원한테 문자가 왔다. 내 완장도 아버지의 완장과 같아 문자 하나에 웃음이 인다. 장소를 선정하고 그날의 주제를 정하는 일이 즐겁다. 회원 중 누구도 잘 나가는 사람과의 비교에 마음 다치지 않기를 바란다. 잘 나간다는 것도 때론 무거운 완장이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연숙의 <완장>에서
권춘애의 <댓돌 위의 신발>. 역시 사물이 놓인 자리에 따라 함유하게 되는 의미의 다양함을 내보이고 있다. 댓돌 위의 신발은 신발장 속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신발장 속에 놓인 신발은 단순한 사물에 그치지만, 댓돌 위에서는 그 주인을 대신한다. 장순하의 시조에서처럼 댓돌의 사각은 안방의 방벽이고 그 위에 놓인 신발은 부대끼면 함께 살아가는 가족의 모습이다. 아무리 눈보라가 몰아쳐도 방벽은 가족을 따뜻하게 보호한다. 댓돌의 사각이 신발을 감싸 안는 것도 마찬가지다. 가장이 집을 비운 날이면 어머니는 댓돌 위에 아버지의 신발을 내놓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남편의 부재를 위장하려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오시지 못하는 날은 철저하게 문단속을 했었다. 대문 앞을 지키고 있는 멍멍이 에스가 있었지만 문이 잘 잠겨졌는지 몇 번이나 확인을 했다. 그 시절엔 밤손님이 많았다. 엄마는 물건을 도둑맞는 것은 겁나지 않지만 사람을 다치게 할까 봐 걱정이라고 늘 말씀하셨다. 어린 우리를 지키기 위해 대문 단속이 끝나면 댓돌 위에 경찰 군화랑 큼직한 슬리퍼에 고무신까지 쭉 늘어놓았다. 남자가 집에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것도 부족해 엄마 머리맡에는 늘 나무 방망이가 놓여 있었다. 우리는 너무 어렸기에 엄마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다. 사람이 제일 무섭다고 말씀하시는 엄마에게 아버지 신발은 늘 든든한 무기였다. -권춘애의 <댓돌 위의 신발>에서
무심코 벗어 놓은 신발도 보이는 그대로의 모습에 멈추지 않고, 작가의 삶을 밀어 넣어 음미해 볼 때 숨겨진 깊은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작가란 이와 같이 현상의 소재를 재음미하고 해석하여 문학적 소재로 형상화하는 사람이다.
김응숙의 <전보 한 알>. 세상의 모든 숨탄것은 행복할 권리가 있다. 오로지 좁은 공간에 갇히어서 주는 모이나 먹고 알을 낳은 것이 죄라서 모두 학살당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닭에 대한 이야기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 인간의 편리를 위해 사용한 살충제로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 놓인 암탉들. 그들의 운명은 달걀번호에 의해 무섭게 갈라진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처절히 수모 당해야 하는 암탉들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 글에서 작가는 아주 뛰어난 상상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소재와 소재의 연결에서 매끄럽게 이어가는 작가의 재주는 가히 일품이다. 작가는 어린 날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보를 친 적이 있다. 초여름 더위를 헤치고 다급하게 우체국으로 달려가 쪽지를 내밀면 여직원은 다급하게 모르스 부호를 두드렸다. ‘모친 위독’. 다음날 삼촌과 고모들이 들이닥쳤지만 할머니는 한해가 지난 후에 돌아가셨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날 눈길을 헤치고 달려가 ‘모친 사망’ 전보를 쳤다.
그런데 사십 년이 지난 지금 지인이 카톡에 날려준 한 통의 문자. “비펜트린 나온 달걀번호”는 그 옛날의 다급하고 위급했던 상황을 추억하게 만든다. 그 문자가 가지고 있는 위력은 전문(電文)에서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던 시절로 끌고 간다.
죽어야 할 닭과 살 닭을 가름하는 “비펜트린 나온 달걀번호”는 놓인 두 자리의 현격한 차이를 말해 준다. 마치 카톡에 올라온 이 문자는 닭의 죽음을 알리는 절박한 전문인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생명의 존귀함을 새삼 느끼게 되고, 가차 없이 도살될 닭들로부터 타전되어 온 전문으로 상상을 이어간다.
모든 생명은 행복할 권리가 있다. 생명의 행복이란 제 생육조건이 맞는 곳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행복은 생명 존속의 절대적 조건이 되는 셈이다. 한때 삶의 행복을 누리다가 서로의 먹이가 되는 것은 자연의 순리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생명으로 태어난 환희를 느낄 새도 없이 무참하게 짓밟히는 암탉들을 보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암탉들은 차마 마주보기조차 힘든 몰골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양계장은 집단 학살을 목적으로 세운 수용소 같았다. 몸 하나 돌릴 공간도 없는 곳에서 죽을 때까지 알을 낳는다고 했다. 세상의 끝을 본 것처럼 송연한 느낌조차 들었다. 그러나 내가 본 것은 세상의 끝이 아니라 인간의 이기심의 끝일 터였다. -김응숙의 <전보 한 알>에서
화면을 가득 채운 추레한 암탉들의 모습. 움직일 수도 없는 공간에서 먹고 낳기만을 반복하다가 종내에는 도살되어야 하는 그들. 그들이 갇혀 있는 양계장은 학살을 목적으로 세운 수용소가 틀림없다. 이들의 위급한 상황은 어디로 급전해야 하는 것인가. 이제 우리는 인간성의 몰락과 이기심의 극치를 경계하기 위해 어디로 타전하여야 하는 것인가.
안병태의 <입원 단상>. 이 수필은 병원 화단 경계석에 앉아 들어오는 차량의 번호를 바라보며 적은 글이지만, 오히려 차량번호 순례기라는 편이 나을 것이다. 공간을 정지시켜 놓고 동일한 공간에서 다양한 시간대에 발생한 이야기나 사건을 모아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시간 몽타주(time-montage)의 기법을 사용하고는 있으나 전반적으로 다양한 경우를 모아 재미있게 제시한 글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마침 링거 바닥이 보여 갈아 끼울 겸, j 꼴 보기 싫어 병실을 바꿔 달라고 떼도 써볼 겸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는데 빨간 soul이 들어온다. 저번 교황 방한 때 그 분이 승차하여 화제를 모은 작고 예쁜 차 7979. 친구친구! 저 차엔 아마 앳되고 상냥한 새댁이 타고 있을 것이다. 빨간 딸기를 한 바구니 들고 차 이름 soul처럼 마음과 영혼이 통하는 친구를 문병 오는 벗…. 아닐 수도 있지만 그냥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무료함도 병이다. -안병태의 <입원 단상>에서
‘생로병사 알고 보면 모두가 숫자로 연결된 긴 여정이다.’ 숫자 놀이를 보이는 글이다. 하지만 그냥 아무렇게나 주절거리는 글은 아니다. 하나의 질서 속에서 재치를 모아 놓은 글이다. 이 글에서 매체가 된 것이 ‘차량번호’임이 심상치 않다. 우리는 늘 떠나고 도착하는 일상을 반복하며 사는 것이 아닐까. 그 여행의 도구가 자동차인 것이다.
윤승원의 <떨켜>는 준비하는 삶을 말하고 있다. ‘떨켜’란 날씨가 추워지면 잎자루와 가지 사이에 얇은 코팅을 입혀 잎으로 빠져나가는 수분을 차단하게 되는데 이때 생기는 특수한 세포층을 일컫는다. 겨울이 오면 절대적으로 모자라는 수분을 관리하기 위해 미리 이파리를 제거할 준비를 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이런 준비를 하지 못하면 가지 끝에서 잎이 떨어져 나가지 못하고 긴 겨울 찬바람에 시달리며 울게 되는 것이다.
자연의 이러한 이치처럼 사람도 영원한 사별이나 독립을 위한 헤어짐에는 준비를 하여야 한다. 이 준비기간을 갖지 못하고 느닷없이 헤어지게 되면 그 아픔은 실로 커서 견뎌내기가 어렵다. 준비된 헤어짐은 그래도 아름다울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처절하게 아픔을 요구한다.
만남보다 헤어짐을 잘 해야 한다. 겨울이 깊었는데 느티나무 잎은 아직도 가지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강풍에 찢기듯 아프게 떨어진다. 진즉에 단풍들고 낙엽으로 떨어져야 했지만 급히 닥친 지난 가을 한파에 미처 떨켜를 만들지 못한 듯하다. 대로에 줄지어 선 은행나무와 벚나무는 미리 준비를 잘 했는지 곱게 물들고 알맞은 때에 이파리들과 깔끔하게 작별을 했다.
<비포 선셋> 영화에서 두 주인공은 육 개월 후 꼭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진다. 약속과 달리 헤어질 때의 마음처럼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구 년이란 세월이 지난 뒤 우연하게 만났다. 옛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둘은 서로가 애틋했다. 하지만 긴 시간 각자의 삶을 살아온 두 주인공은 결국 헤어지게 된다. 그들의 관계엔 이미 떨켜가 만들어져 있었던가. 마지막 헤어짐은 낙엽이 지는 것처럼 쓸쓸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윤승원의 <떨켜>에서
작가 윤승원은 헤어짐의 준비를 위한 마음가짐도 지적한다. 헤어진다는 것은 아프고 서운한 일이기는 하지만, 미리 준비하게 되면 이해가 되어 잘한 일이라 생각하게 된다고 정리한다. 그리고 떨켜의 준비는 떠나야 할 때를 먼저 감지한 쪽이 시작하게 된다고 깨닫는다.
조현태의 <바이올린과 수필 쓰기>. 이 수필에서는 인식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의 선입견이 얼마나 고정화되고 발칙한 상상에 장애가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자가 연주 중 악기를 떨어뜨리는 실수를 한다. 모두 긴장하여 숨을 죽이고 있다. 앞 좌석의 젊은이가 악기를 주어다 주자 바이올리니스트가 감았던 눈을 뜨고 보니, E현이 터졌다. 관객들은 연주자가 현을 바꾸거나, 끊어진 채로 연주할 것이라 생각하며 조용히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의외의 행동으로 관객을 경악에 빠뜨린다.
그러나 연주는 고사하고 E현이 끊어진 바이올린을 보란 듯이 콘크리트 바닥에 집어던져 박살을 내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 광경을 목격한 관객들은 너무나 놀라워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실수라면 얼마든지 묵과해 줄 요량이었는데 그 비싼 악기를 저렇게 내동댕이치다니 음악을 사랑하는 관객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다는 비난이 일기 시작했다. 더러는 너무하지 않느냐? 혹자는 그러고도 예술가냐? 집어치워라. 온갖 비난과 조롱이 홀을 가득 메웠다. 하지만 연주자는 두 손을 들어 관중을 진정시키고 대기실로 신호를 보냈다. 곧이어 대기실 쪽에서 또 하나의 바이올린을 가지고 나왔다.
“음악을 사랑하는 관객 여러분, 제가 깨뜨린 저 바이올린은 연습용 싸구려 악기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 바이올린은 제가 애용하는 최고급 바이올린입니다. 이제부터 이 악기로 다시 연주할 것입니다. 좀 더 고운 선율의 음악을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그러고 처음부터 다시 연주하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관객들은 숨을 죽이고 훌륭한 연주회를 끝까지 경청하였다. 그러나 수천만 원을 호가한다는 악기나 수십만 원짜리밖에 안 된다는 악기나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그 악기가 수천만 원짜리 명품 악기가 맞느냐고 따질 수도 없다.
-조현태의 <바이올린과 수필 쓰기>에서
수필이기에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라고 보지만은 작가가 지나치게 과장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예화다. 자신이 하는 예술의 영역이 신성하다고 느끼는 예술가라면 아무리 메시지를 던지고자 했어도 이와 같은 행위는 감히 하지 않을 것 같다. 바이올리니스트라면 아무리 허접한 악기라도 이렇게 관객 앞에서 퍼프먼스를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앞선다.
연주자가 연습용 악기를 박살낸 이유는 ‘싸구려 악기’이기 때문이지만, 작가가 기술하기에는 별다른 소리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글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가. 연주자의 행위와는 전혀 맞지 않는다. 너무 큰 감동을 위한 장치가 더러는 위험할 수 있다는 염려가 드는 것은 평자의 착각일까.
그리고 제목에서 ‘수필 쓰기’를 붙인 것 역시 무리가 따른다는 생각이다. 지금까지 끌고 온 이야기와 ‘수필 쓰기’가 어떻게 연결이 되는 것인지 무능한 평자의 눈에는 잘 잡히지 않는다.
최병섭의 <치사한 갑을 관계>. 본래 ‘갑’과 ‘을’은 공 ․ 사적인 일로 서로 상대적 입장에 있는 양자에게 편의상 붙이는 지칭어일 뿐이다. 하지만 요즈음에 와서 이런 의미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갑’에다 나쁜 행위를 뜻하는 접미사 ‘-질’을 붙이면서 ‘갑질’이란 말이 생겼기 때문이다. 힘 있는 ‘갑’쪽에서 힘이 없는 ‘을’에게 부당한 요구를 하거나 치사스러운 짓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현실을 나무랄 때 많이 사용하는 말이 되었다.
당하는 쪽에서야 당연한 조치를 ‘갑질’로 받아들일 수 있다. 가령 관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법적 규제와 정당한 절차를 요구해도 ‘갑질’로 인식할 수 있고, 통제나 방해로 여겨 불평을 늘어놓을 수도 있다. 또 진실로 ‘갑질’을 당하면서 가족의 안위와 자신의 출세를 위해 비굴하게 참아내는 샐러리맨의 삶도 있다.
그러나 작가가 이 글에서 하고자 하는 말은 사랑하는 가족끼리 ‘갑을’관계를 설정해 놓고, 유세를 부리는 세상을 폭로하고자 하는 것이다. 정년을 하고 강습소에서 요리를 배운 남자가 할머니들에게 건넨 농담은 그냥 웃어넘기기에는 눈물겹다. ‘꼴랑 이거까 평생 그 유세를 떨었단 말이제!’ 아내의 ‘갑질’을 탓하는 소리다. 이제 현역에서 물러나고 보니, 높아만 가는 아내의 목소리에 어깨는 자꾸만 쳐진다.
어떤 일에 종사했든 간에 지금은 현역에서 물러난 많은 남자들이 집안에서 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남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하기 짝이 없다. 젊은 시절부터 가족의 생계를 위해 매일 일터에서 온갖 ‘갑질’과 ‘유세’ 다 참으며 살아 왔었는데, 이제 와서는 퇴물 취급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면 괘씸하기 짝이 없다. 젊은 한때는 깨소금으로 범벅을 쑤며 솜씨 자랑까지도 하더니만, 이제 끼 때 되어 밥 한 그릇 차려내는 것이 뭐가 그리 힘들고 귀찮아서 ‘삼식이’니 ‘일식이’ 하며 남자들 조롱하는 말까지 만들어 내며 유세를 떨어대니 말이다.
반면에 여자 노인들의 항변 또한 만만치 않다. 가장이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은 당연한 의무인데, 그동안 돈 벌어 온다고 기세등등한 남편을 위해 숨죽이며 살아온 지난 세월이 너무나 억울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편과 자식, 거기다 시부모님을 위해 매일 삼시 세끼 밥 차려내고, 설거지하고, 거기다 빨래까지 매일 반복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최병섭의 <치사한 갑을관계>에서
사람이 어떤 위치에 놓이느냐에 따라 그 위세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사람은 같은 사람인데 눈앞의 현실 변화가 ‘갑’과 ‘을’을 바꾸어 놓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무에 그리 대수냐는 작가의 시선은 글을 마무리하기에 족하다. 서로 장군멍군, 아웅다웅하며 ’갑질‘하고 유세 떨며 살아왔으니 서로 위치를 바꾼들 무에 문제냐는 것이다. 처지에 따라 인식이 변한다 한들 한 가족이 화목하고 사랑하면 그만이란 말이다. 재치와 위트가 있는 글이다.
송귀연의 <홑눈과 겹눈>. 복잡다단한 삶을 추구하는 현대에 자신의 삶을 단순화하고자 하는 작가의 태도가 심도 있게 그려져 있다. 잠자리나 나비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겹눈을 가졌기에 360도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시야를 확보한다 하여 그 삶이 윤택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많은 피사체들은 자신에게 시선 주기를 갈망하기에 늘 긴장되어 있어야 하고, 더러는 그로 인해 복잡한 삶을 꾸려야 할 때가 있다. 사물의 깊이보다는 겉만 보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사물의 깊이를 천착할 때는 허블망원경의 원리처럼 초점을 단순화시켜 시선을 모아야 한다. 조선시대의 화가 최복이 한 눈을 송곳으로 찌르고 시류에 얽매이지 않고 그림에 전념하려 한 것도 그렇고, 샤갈이 노후로 갈수록 유아적이고 사물의 단순화가 보인 것도 그렇다. 또 크게 교묘한 것은 서툰 것이라던 추사 역시 홑눈의 삶에 가치를 둔 것이라는 글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생각을 단순화하고 조금씩 버리는 것을 익혀야 한다는 작가의 생각이다.
원시시대엔 남자와 여자의 구분이 확연했다. 남자는 사냥을, 여자는 집안에서 요리를 했다.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면서 가족의 식량을 구해야 하는 남자는 당연히 시야가 넓어야 했고 고도의 종합적 판단을 필요로 했다. 반면 여자는 집안에서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다보니 시계가 좁아졌다. 한 가지 생각은 자연스럽게 사고를 단편적으로 굳어지게 했다. 남자와 여자의 시계 차이는 성적 태생이라기보다 이처럼 오래 된 생활환경의 영향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젊은 날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지려 했다. 남편도 자식도 그저 남보다 앞서길 바랐으며 부와 명예마저 거머쥐고 싶어 안달했다. 수천수만 개의 낱눈을 만족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세상을 향한 욕망은 가지려하면 할수록 저만치 달아났고 나는 또 그걸 허겁지겁 좇아갔다. 한 가지를 성취하면 다른 한 가지를 욕망했고 그 한 가지를 성취하면 또 다른 한 가지가 모자랐다. 욕망의 겹눈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 송귀연의 <홑눈과 겹눈>에서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의 갈등도 역시 이 시각의 차이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욕망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제시한 글이다. 행복이란 그것을 수용하는 마음의 자세에 따라 그 빛깔을 달리 하는 것이라는 일깨움을 독자에게 준다.
앞에서 말했듯이 수필은 현상에 멈추지 않고, 문학적 세계로 옮겨와 본질을 기록하는 문학이다. 이때 수필가는 일상의 소재를 문학적 소재로 환치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고, 그것에 자신의 삶을 밀어 넣어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형상화시키는 과정을 거쳐서 독자 앞에 내놓아야 한다. 그래서 수필가는 사물을 봄에 있어서 나무만 보는 근시안이나 숲만 바라보는 원시안만으로는 안 된다. 이 둘을 적절히 조율하는 작가의 능력이 필요하다.
이번 《수필세계》에는 아주 다양한 눈빛들이 참신한 이야기를 들고 나와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글이 많았다. 작가의 눈이란 이와 같이 날카로워야 하고, 개성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글의 모음집이었다.
에필로그
특히 특집으로 마련한 ‘부 ․ 울 ․ 경 ․ 포 ․ 대 수필’은 백미였다. 한국의 좋은 수필가들은 모두 이 지역에 모여 있는 듯이 느껴졌다. 한참을 뷔페식당에 들러 식사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마치고 나오면서 한 가지 회의적인 생각에 빠지고 말았다. 공모전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한 개인의 뛰어남에 여러 차례 빛을 모으기보다는 신선한 작가의 등장으로 한국 수필문단에 활력소가 되었으면 하는 주최 측의 소망은 없었을까. 많은 신선한 사람이 나와 우리 수필문단을 살찌웠으면 하는 바람이 스멀스멀 일어나는 것을 억누를 수가 없다. 공모전은 한번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는 정도에서 멈추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는 생각이 바람결에 너풀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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