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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폐셜 30회 '가야인은 성형수술을 했다' (1999.06.05.)
30회 : 가야인은 성형수술을 했다
가야인은 성형수술을 했다
방송일: 19990605 조회수 : 6375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역사스페셜]
-가야인은 성형수술을 했다-
*방송일시: 1999.6.5(토) 저녁 8:00-9:00(1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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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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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팬 (그냥 보고)
문에서 12 사람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그 시대의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은 우리가 역사를 만나는 통로이기도
하다.
인골실 보이고 (그냥 보고)
인골함 팬 22 이 곳에서 우리가 찾아낸 과거의 흔적은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
(인골 보이고)
1600년 전의 인골들.
오래 전 바로 이 땅에서 역사를 일구었던 주인공들이다.
다리뼈와 각종 뼈들 14 그들이 지금 기나긴 세월의 침묵을 깨고 자신들의 삶을 말해 주고 있다.
얼굴뼈에서 서브 타이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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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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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1-오프닝]
컴컴한 스튜디오 ,
서서히 밝아지면
MC 여러 무덤들 사이에 서 있다. MC-지난 1976년 경상남도 예안리에서는 획기적인 발견이 있었습니다.
무려1600년 전 가야인들의 집단 무덤 터가 발견된 것입니다.
주변 둘러보며 지금 제가 서 있는 이곳이 당시 모습을 드러낸 무덤 터입니다. 보시는 것처럼 무덤 속에서는
수많은 가야인들의 인골이 출토됐습니다.
MC-인골은 역사를 파악하는데 있어 더없이 중요한 유물입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이 인골들을 통해 그들의
생김새는 물론 생활모습까지, 아주 생생한 역사를 되살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편두 인골 일어선다.
편두 옆에 서서 편두 가리키며
MC-자 지금 제 옆에 있는 이 인골이 1600년 전 가야인입니다. 이 인골에는 아주 독특한 점이 있는데요.
머리부분을 한번 유심히 보시죠.
두개골 줌인 팬 옆으로 돌아서고 (한 호흡 쉬고)이번엔 정상인과 한번 비교해 보겠습니다.
편두와 정상인골 머리 비교 MC-이 가야인의 머리는 정상인에 비해서 이마부분이 훨씬 뒤로 누워있고 정수리
부분이 불쑥 솟아 있습니다.
한 마디로 참 이상한 두개골인데요. 어떻게 해서 이런 두개골이 나올 수 있었는지 그
비밀을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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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1]
길 트래킹 10 (경남 김해시 예안리 자막 4에서 빠지고)
김해시에 위치한 작은 마을 예안리
건물 팬 예안리 무덤터 16 (3초쯤 보고)
그저 평범한 농촌의 한 귀퉁이 논에서 1600년전의 역사가 깨어난 것은 우연에 의해서였다
피디와 이재생 걸어가고 10 당시 땅주인이었던 이재생씨가 논을 개간하려고 흙을 파내자 예사롭지 않은 유물
들이 나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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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생 인터뷰 (저 부근쯤 돼요. 저 부근쯤 되는데 상당히 많이 나왔어요. 여러 수십점이 발굴이 됐는데,
그 전에도 일부 부분적으로 한점 두점 발굴되는 것은 예사롭게 생각을 했고. 그런데 너무 많은 양이 한 무덤에서
나오다보니까 보통이 아니다 싶은 예감이 들어서 일단은 신고를 하게되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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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훑고 7 이재생씨의 신고로 발굴작업이 시작된 것은 지난 1976년.
사진 (무덤터) 8 땅속에서는 오래 된 무덤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사진 (무덤터) 4 고고학자들은 이 놀라운 발견에 주목했다.
무덤 원샷 2장 7 무덤의 주인공은 1600년전 김해지역에 살고 있던 가야인들,
많은 무덤 풀샷 사진 5 이곳은 그들의 집단 무덤터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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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터 CG 10 모두 네 차례에 걸친 발굴작업 끝에 아주 빽빽하게 조성된 180여기의 무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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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들 팬 13 (3-4초 보고)
무덤에서 나온 부장품만 해도 천 여 점의 토기를 비롯해 유물의 숫자는 총 2천 여 점에 이르렀다.
토기 틸업 7 예안리 무덤은 그야말로 고대 가야인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고고학의 보고였다.
토기 타이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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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옥련 인터뷰 (분묘의 규모로 봐서 대체로 최상위 클래스는 아니고 일반 서민계층의 공동묘지같은 성격이
아닌가 싶습니다.그 뿐만 아니라 예안리에서는 아주 양호한 상태로 남아있는 고인골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걸 통해가지고 가야인들의 얼굴이랄까
골격이랄까 그걸 복원할 수 있는 자료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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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인골사진줌인 11 (4-5초 보고)
예안리 무덤 터에서 무엇보다 놀라운 발견은 상체만 남아있는 인골 3 가야인의 인골이었다.
중복 인골 2 거의 대부분의 무덤 속에는 한 구 합장된 인골 9 또는 많게는 10여 구에 이르기까지 인골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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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박물관 외경 7 (3-4초 보고)
현재 부산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인골함 팬 15 예안리 인골은 모두 190여구.
숫적으로도 우리나라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지만 고대인골이라고 하기에는 그 보존 상태가
뼈들 (다리뼈, 관절 ) 5 무척이나 양호한 편이었다.
편두 줌인 19 (3초후)그런데 예안리 무덤에서 발견된 가야인의 인골 중에는 눈길을 끄는 모습이 있었다.
바로 이 두개골이다.
편두와 정상인골 6 정상적인 인골에 비해 이 인골은 얼굴 폭이 넓고
8 미간에서 정수리까지의 길이도 훨씬 짧다,
편두 이마 7 이마부분도 평범한 인골과는 달리 뒤로 누워있었다.
편두와 정상인골 옆모습 8 분명 이 인골은 같은 시대의 가야인들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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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학교실 정면풀샷 4 (보고)
교실 뒤에서 풀샷 5 예안리에서 발견된 인골은 고대가야인의 신체적
김진정 교수 강의 7 특성을 파악하는데 소중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슬라이드 5 하지만 이 인골은 고대가야인중에서도 특별한 경우였다.
학생 보고 3 (보고)
슬라이드 머리 그림 5 아직까지 우리나라 의학사에서도 이런 인골이 연
풀샷 8 구된 기록은 없다.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나타난 수수께끼의 인골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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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정 교수 연구실 5 (3 초후) 40여 년 해부학을 연구한 김진정
김진정 교수 5 교수,
책보고 4 그에게 혹시 이 인골이 특수하게 나타날 수 있는
책 타이트 2 기형의 모습은 아닌지 자문을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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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정 교수 인터뷰 (기형은 기형인데 선천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그런게 아니고 태어나고 나서 외적인 어떤
힘을 가해 가지고 변형된 것이라고 그렇게 추정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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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두 줌인 12 (5초후)
이 가야인의 특이한 모습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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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2]
MC 편두 인골과 마주 앉아 있다가 앞을 바라본다.
MC-이런 모습이 나온 것은 기형때문이 아니고 일부러 이렇게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여인들이 작은 발을 갖기 위해 전족을 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가야인들이 머리를 이렇게 하는것도 일종의 풍습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는데요.
하지만 머리의 뼈를 이렇게 변형시킨다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모습을 만들다가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을 것입니다.
편두 가리키면서 가야인들이 일부러 머리를 이렇게 만들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옆으로 앉은 인골, 머리부분으로 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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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2}
서가 훑고 8 (3초 보고)
중국의 역사서는 가야인에 대한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전하고 있다.
책 나오고 13 (자막 발생하면)
아기가 태어나면 돌로 눌러 머리를 납작하게 했다. 지금도 진한 사람들은 모두 머리가 납작하다.
CG 지도 9 기록 속의 진한은 3세기 중엽의 진한과 변한, 즉 김해지역의 가야인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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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두 들고 있는 손 16 (현장음 듣고)
김진정 교수 편두들고 8 머리를 납작하게 한다고 해서 그 당시엔 이를 편두라고 했다.
역사 기록속에서만 존재했던 치아 3 편두의 실체를 예안리의 인골에서 확인하게
교수들 보고 4 된 것이다.
탁자위의 편두로 줌인 13 (3초후)
가야인들은 어떻게 편두를 만들었을까?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한가지 방법이 있다.
김진정 교수 인터뷰 (뒤쪽하고 앞쪽에 판자를 대가지고 이쪽하고 이쪽에 묶어 버리면 다 압박이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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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두 방법CG 21 (8초에서 판자 대고 묶어)
편두를 하는 한가지 방법은 아기가 태어나면 머리 앞뒤로 판자를 대서 끈으로 묶는 것이다.
이렇게 십여차례를 반복하면 유연한 아기의 두 개골은 앞 뒤로 납작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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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음 살리고)
김진정 교수 설명 (여기에 튀어나온게 들어갑니다 .우리는 여기에 튀어나온게 있기 때문에 여기는 안했을
것이다.)
사람이 이렇게 누른다고 봐야겠습니까?
돌로 돌을 얹어서 그 압력이다 이말이죠. 돌의 압력 때문에 그 무게 때문에 눌려져 있다,태어나서 일개월
이내니까 어린애가 잘 움직이지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추정을 하죠.
판자가 아닌 것은 이 뒤의 모습 때문에?
예 뒤의 모습 때문에 우리는 뒤에는 안 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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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두 방법 CG 16 아마도 가야인은 아기가 태어난 지 한달 이내에 앞이마를 돌로 지긋이 눌러주는 방법으로
편두를 만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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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석압) 14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도 가야인이 편두를 만들기 위해 돌로 아기의 머리를
눌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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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두 해골 5 편두의 인골이 다른 인골들에 비해 심하게 부서
이마의 부서진 곳 4 진것도 인공적인 변형 때문에 일어난 것인지 의
편두 해골 3 문이 들었다.
해골 틸업 11 (3-4초후)
사람의 뇌는 머리에 강한 압력이 가해질 경우 그 압력을 줄이기 위해 뼈를 녹이는 세포를 내보낸 부서진
곳들 8 다고 한다. 따라서 압력이 가해진 부분의 뼈는 얇아지게 마련이다.
의사들 두께재고 있고 7 편두인골이 쉽게 부서진 이유도 그렇게 뼈가 얇 측정기 타이트 2 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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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두 보는 조,피, 전 9 (2-3초후 )
편두를 하면 실제 얼굴모습 또한 보통사람과는 달랐을 것이다.
조용진 교수 3 조용진 교수. 그는 한국인의 얼굴 전문가다.
그와 함께 편두의 얼굴을 복원해 본다.
편두사진 복사물 3 얼굴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훼손이 덜된 온전한 사진보는 세사람 5 인골이 필요하다.
우리는 출토된 편두 인골중 가 선정된 편두 5 장 양호한 상태의 인골을 선정했다.
학생들 편두상자에 넣고 13 (3-4초 보고)
소중한 유물의 훼손을 막기 위해 인골과 똑같은 모형을 만들어서 편두 얼굴을 복원하기로 했다.
길 트래킹 (보고)
팻말 틸다운 (보고)
방사선과 회의하는 풀샷 9 인골의 모형을 만들기 위해 우선 부산대병원 방사선과를 찾았다.
측정 준비하는 사람 5 이곳에서 인골의 컴퓨터단층촬영에 들어갔다.
모니터 9 컴퓨터단층촬영으로는 얼굴 전체적으로 뼈의 두께가
해골 보이고 3 얼마인지 그 정확한 수치를 파악할 수 있다.
모니터에 두께 6 (그냥 보고)
측정하는 얼굴과손 4 뼈의 두께를 재는 이유는 뼈의 두께에 따라서
모니터 해골 모습 4 각 부위에 살과 근육이 어느정도 붙는지가 결정
모니터로 줌인 8 되고 또 눈썹의 방향이라든지 입술의 방향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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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테크노 연구소 (보고)
팻말 (보고)
해골 (세점) 8 (줌 아웃 하면)얼굴복원작업을 위해 이번엔 인골의 입체측정을 실시했다.
측정하는 사람 3 (보고)
볼에 레이저 광선 5 모두 세 개의 좌표를 설치한 후 2밀리미터 간격
컴퓨터보는 둘 3 으로 레이져 광선을 쏘아서 인골의 표면을 측정
모니터의 해골 4 한다.
연구원 얼굴 5 (보고)이렇게 세개의 좌표에서 측정한 표면이
모니터 좌표 합치고 6 하나로 모아지면 인골의 입체가 완성되는 것이다.
기계안의 해골 10 (3초후)이제 지금까지 측정한 인골의 표면과 두께의 수치로 모형을 만든다.
문열리고 해골 가지고 12 (4초후 )이렇게 해서 예안리 편두 인골과 똑같은 모형인골이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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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안으로 들어가
작업하는 조용진 교수 6 모형인골은 다시 조용진 교수의 작업실로 옮겨졌다.
진흙 눈,입, 귀 8 (2초 보고)
일주일에 걸친 세밀한 작업 끝에 편두 인골은
조교수 타이트 5 서서히 살아나고 있었다.
편두 들어오고 13 (4초에 정지하면)
자그마한 얼굴의 이 미인, 이 것이 바로 편두를 한 20대 가야여인의 얼굴이다.
옆모습 8 편두를 한 그녀의 옆모습에서 눈에 띄는 것은 뒤로 젖혀진 이마와 오똑 솟은 코
머리에서 코로 13 (3초 후 )
마치 현대여인이 성형 수술을 받은 것처럼 그녀는 높은 코를 가지고 있었다.
두 얼굴의 옆모습 비교 20 (2-3초후)
그리고 그녀는 같은 시대 평범한 가야여인의 얼굴에 비해 턱이 유난히 작고 ,이마는 뒤로 누워 있으며,
코부분이 돌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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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교수 설명 (현장음)
(양옆이 돌출하게 됩니다. 내강이 작진 않아요.두 정부가 돌출합니다. 미간부가 눌리기 때문에 눈 안부분이
아래로 내려오고 이쪽에서 피부가 당겨서 눈꼬리는 위쪽을 향하게 됩니다.
얼굴을 상대적으로 코있는 부분이 돌출하게 되고 턱은 매우 발육이 좋지 않게 되요. 그래서 턱은 매우 좁고
작게 이렇게 이런 특징적인 얼굴 모습을 갖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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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두 얼굴 돌고 23 (5-6초 보고)
당시 가야인들에게 편두는 새로운 얼굴을 만드는 일종의 성형술이었다. 그러나 이런 성형술이 비단 가야에서만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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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여자 보는 두사람 10 (2초후)
그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고대 이집트의 종교의식과 관련되어 있다는 한 조각품이다.
앞모습 5 6000년전 조각품으로 남은 이 이집트 여인도 편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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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음)
옆모습 (이 조각을 옆에서 보면 예안리에서 나온 편두하고 여러 가지 특징이 일치합니다.
이마부분이 들어가 있죠. 요기서 요기까지가 돌출해 있죠.
턱뼈의 각도가 둔각으로 돼 있어서 얼굴 앞쪽으로 나온 , 뒤통수가 올라붙어 있어서 편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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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두들 21 (2-3초후)
이렇게 시기는 다르지만 편두의 풍습은 이집트와 가야 그리고 마야에서도 보여진다.(한 호흡)
예안리 무덤에서 출토된 편두인골은 모두 열구. 그런데 그들에게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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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옥련 인터뷰 (지금 예안리에서는 여성인골에만 국한되어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다 행해진게 아니고 일부
에만 행해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 생각으로는 아마 일종의 무당과 같은 특수신분의 여성들에게만 행해진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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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두 13 (2-3초 보고)
편두를 한 이 여인은 독특한 그 얼굴처럼 평범한 사람과는 다른 인생을 살다 갔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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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3]
복원한 편두 CU에서 Z.O
편두 복원상과 MC 2S MC-이렇게 코를 높이는 것이 미인의 기준이었는지,또는 어떤 특수한 지위를 상징하는
것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가야인들이 성형수술을 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물론 현대적인 의미의 성형수술은
아니지만 1600년전에 이런 성형술이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데요.
기존 세트가 무덤터로 변한다
MC-만약 예안리에서 편두인골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과거에 이런 풍습이 있었는지 확인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무덤터.
어느 부분 단면으로 잘라지면. 그 안에 인골이 있다.
MC-가야인들이 조성한 예안리의 무덤은 아주 밀집된 무덤의 이중 구조가 보인다.형태로 남아있었습니다.
이렇게 땅속에 이중삼중으로 무덤이 쓰였고, 그 무덤 속에서는 어김없이 인골이 출토됐습니다.
예안리에서 발견된 인골만해도 190여체, 그 동안 우리 나라에서 발견된 인골을 모두 합해도 예안리 숫자에는
미치지 못합니다.왜 이 예안리 땅에서만 이렇게 많은 인골이 나왔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겠습니다.
단면의 해골로 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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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
예안리 무덤터 5 겉으로 보기에 무덤터는 그저 평범한 땅이었다
땅 훑으면 조개들 10 (5초후 )
하지만 그곳에 뜻밖의 실마리가 있었다.
조개 만지는 손 5 (보고)
피디 조개 보고 11 바닷가에서 한참 떨어진 곳인데도 무덤터 여기저기엔 조개껍질이 흩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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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정리실 7 (2-3초후) 발굴당시에도 무덤을 덮고 있는 조개와 굴껍질들 19 흙 속에선 수많은 패각들이
나왔다.
(좀 보고)누군가 버리고 가지 않았다면, 이렇듯 많은 패각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원래부터 그곳에 패각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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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질학과 복도,전시물 6 (전시장에서)
검사하는 학생들 3 무덤터에서 채취한 흙을 현미경으로 정밀 검
현미경 돌아가고 3 사해 본 결과 아주 미세한 생물의 화석이 발
보는 학생 3 견됐다.
유공층 사진 7 유공층이라 불리는 이것은 바다에서만 사는 단세포 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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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 교수 보이고 10 (2-3초후)부산 경남 지역의 고대 지형과지질을 연구하는 윤선교수.그는
컴퓨터로 줌인 10 예안리 무덤터에서 패각과 유공층이 나온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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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 교수 인터뷰 3세기 경에는 바닷물이 김해 평야 일대를 덮고 있었으며 해안선은 바로 고분군 바로 옆에까지
와 있었습니다. 고분군은 육계사주라고 하는 것인데요. 옆에는 자그마한 마산과 안쪽의 까치산을 연결하는
모래등성이였었습니다.
구성물질은 현재 해운대 백사장과 같이 백사장의 깨긋한 모래로 되어있던 그런 지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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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 예안리 고대지형 24 (3초에 바닷물, 9초에 예안리 표시)
지금으로부터 1600년전, 예안리는 바닷가 마을이었다.그리고 현재의 예안리 무덤터는 그 당시 바닷가 백사장
이었던 것이다. 백년후 바닷물이 물러가자 가야인은 그곳에 무덤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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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터 팬 사람들 보이고 8 (3-4초후) 실제로 예안리의 땅이 바닷가 백사장
흙만지는 손 3 었는지를 알아보는 실험을 해보았다.
액체 붓고 3 바닷물의 영향을 받은 땅에선 황화철이 만들어진
사람들 풀샷 3 다.
거품 일어나고 16 이 황화철이 과산화수소수와 만나면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보고)실험결과 예안리의 땅은
바닷물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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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디 틸다운 흙파고 10 김해시청의 양해를 얻고 무덤터의 토양을 채취하기 시작했다.
흙색깔 대조 8 발굴 후 무덤을 덮는 과정에서 흙이 뒤섞인 탓에 원래의 토양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흙파내고 (아 그게 진짜베기네)
(저게 그러니까 인골이 들어있는 그런)
(인골이 들어있는 토층)
구덩이 팬 흙 봉지들 13 땅속 1미터 20센티미터를 파고들어가서야 비로소 인골이 묻혀 있던 그 흙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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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팬 농업시험장 9 (보고)
토양분석실 풀샷 6 영남 농업시험장 토양분석실에서는 채취한 흙을
연구원 보이고 4 가지고 두가지 실험에 들어갔다.
세가지 흙 팬 9 먼저 일반논과 예안리 그리고 해수욕장에서 채취한 각각의 흙속에 칼슘이 어느정도 들어 있는
흙들어서 쏟고 6 가 하는 실험이다.
유리병이 든 흙 10 토양속에 칼슘이 많을수록 인골이 남아있을가능성도 커진다고 한다.
검사하는 연구원들 3 두 번째 실험은 미생물의 활동 가능성을 알아보
측정기계 2 PH도 측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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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 표 실험 결과
일반 논의 경우는 산성 토양으로 미생물이 활동할 수는 없지만 칼슘함량은 무척 적은 편이었다.
해수욕장의 토양은 미생물의 활동도 없고 칼슘함량도 무척 많은 편이다.
그리고 예안리는 미생물이 활동하기 어려운 알카리성인데다, 칼슘 함량도 일반 논의 5배가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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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디와 정박사 7 ( 3-4초후)
토양학자인 정연태 박사. 실험결과를 분석한 그
분석결과로 줌인 9 는 예안리 무덤터에서 인골이 남을 수 있었던 두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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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태 박사 인터뷰 (이렇게 조개껍질 함량이 많이 함유된 토양에는 비가오면은 조개껍질이 녹아서 밑으로
모래땅이기 때문에 투수가 잘되고 하는 조건이니까 밑에 인골에까지 탄산캄슘함량이 공급이 되는 그런 가능성
이 있습니다. 또하나는 토양 피에이치가 높으면은 토양속의 특정 성분 이를테면 규산같은게 녹아서 밑으로
용탈이 됩니다.
밑으로 내여온게 인골에 침착이 될 수 있는 그런 가능성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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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 칼슘 내리고 10 결국 비가 올때마다 무덤을 덮고 있는 패각의 칼슘이 녹아내리면서 인골에 칼슘을 보충해
준다.
규산 내리고 14 그리고 조개성분으로 알칼리성이 높아진 땅에서는 규산이 녹아내리는데 이 규산은 인골에
니스칠을 하는 효과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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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안리무덤터로 줌인 8 이 두가지 외에도 예안리무덤에서 다수의 인골이 발견된 이유는 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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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 교수 인터뷰 (여기는 지하수의 유동이 아주 약했습니다. 거의 없다고 생각이 들정도로 미약해가지고 그
지하수에 모래에 들어있는 패각의 껍질이 녹아들어 가지고 칼슘이 포화상태가 됐습니다.
그 포화상태로 되면 더 이상 칼슘이 안녹습니다. 그래서 알칼리성이면서 칼슘이 포화됐기 때문에 인산칼슘인
우리 인골이 녹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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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 칼슘과 지하수 19 거의 움직임이 없었던 예안리의 지하수는 패각에서 녹아내린 칼슘으로 포화된 상태였다.
그래서 인골의 칼슘이 더 이상 녹지 않았던 것이다.
이 세가지 인골은 1600년의 세월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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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4]
MC스튜디오에 서서 MC-오늘 우리가 만나는 가야인들은 1600년전 김해지역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요즘으로 치면 중산층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600년전 중산층 가야인들은 어떤 생활을 했는지, 궁금한 점이 너무도 많습니다. 무엇을 먹었는지 어떤 질병을
앓았는지 또 무엇 때문에 죽음에 이르렀는지 그 동안 이런 궁금증들은 밝혀지지 않은 채 역사 속에 묻혀 있었
습니다.
자, 지금부터 가야인의 인골을 분석해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그들의 삶을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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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해골 들어 수건위에 놓고 8 인골에는 그 사람에 대한 정보가 담겨있다.
맞추는 의사들 3 (보고)
상자 팬 조립되고 있는 8 예안리에서 출토된 이 인골은 몸전체의 뼈가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었다.
교수들 얼굴 6 인골의 전체모습을 조립하면 이사람이 누구인
조립하는 손 3 가를 알게 될 것이다.
교수와 혜진씨 3 (보고)
두개골에서 줌아웃 완성 17 완성된 인골은 키 149.7센티미터, 나이는 20대에서 30대 가량으로 추정되는 여성
이었다.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셈이다.
골반 뼈 5 보통 인골은 골반의 모양으로 남자인지 여자인지 를 가려낸다.
골반 여남 비교 7 대체로 여자는 골반 안쪽이 90도를 이루고 남자는 70도 를 이룬다.
여자골반 팬 남자 13 (5초후 팬)
아기를 낳을 수 있도록 여자의골반이 넓은 반면 남자의 골반은 좁은 것이다.
대퇴골 틸다운 13 인골의 키는 대퇴골, 즉 엉덩이에서 무릎까지의 뼈 길이로 추정하는데 이 여인은 당시 평균
가야인보다 약간 작은 편이었다.
치아 9 나이는 치아의 마모도로 아는데 이 여인은 젊은 나이에 비해 치아를 무척 많이 사용한 편이다.
관절 8 그리고 관절이 굵은 것으로 보아 그녀는 살아생전 무척 고된 노동에 시달렸던 것을 알 수 있다.
신장 비교 표 20 예안리 인골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무엇보다 장대한 기골이었다.
1600년전 김해지역에 살고 있던 가야인의 평균키는 남녀 모두 1930년대 중부 이남 사람보다 큰 것으로 나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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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풀샷 7 부산대 박물관 전시실에는 수많은 예안리 인골중에서 아주 특별한 인골 하나가 전시되어 있다.
유물 팬 구멍난 두개골 18 (보고)
머리에 동그란 구멍이 나있는 이 인골은 한가지 수수께끼를 던져주고있다.
두개골 구멍 줌인 13 (3-4초 보고)
마치 도려낸 듯 동그랗게 나있는 이 구멍은 도대체 무엇일까?
두 개의 구멍 비교 6 그 구멍 옆에는 또 다른 부서진 자국이 있었다.
부서진 자국 타이트 14 죽은 후에 부식되거나 자연적으로 부서질 경우엔 이렇게 일정한 형태가 없다.
또 부서지면서 뼈에 균열이 생기게 된다
자연 구멍 팬 인공구멍 10 그런데 균열하나 보이지 않는 이 구멍에선 전혀 부서진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구멍 타이트 10 잘려진 단면도 반질반질 윤이 날만큼 깔끔하다.
그렇다면 창과 같은 무기에 의한 흔적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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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인골 8 하지만 누군가에게 맞아서 생긴 두개골의 파손은 전혀 다른 모양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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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있는 세사람 (현장음)
(근데 이게 뚫기가 일반적으로, 여기서부터 여기까지가 평면이거든요. 뚫기가 편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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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있는 세사람 풀 10 일부러 도려낸 자국이 분명하다면 고대 가야인들이 뇌수술을 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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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진 교수 인터뷰 (목적이 주술적이든 병을 치료하기 위한 목적이든간에 그것은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뚫어진 것이고 그리고 상당히 숙련된 솜씨로 뚫은 거죠.
예를 들어서 주변에 균열이라든가 이런 것이 없이 상당히 전문 수술도구로 한 흔적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제생각에는 두개골 상태에서 사후에 한 것이 아니라 생전에 수술한 것으로 보입니다.
단지 수술후에 이분이 생존하지 않았다는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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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난 두개골 6 뼈를 수술한 후, 만약 살아있었다면 상처가
구멍 타이트 6 아무는 과정에서 뼈의 단면이 변화하는 이른 바 치유흔이 생겨야 한다.
구멍 줌아웃 13 하지만 여기에 그런 흔적은 없었다.(2-3초 보고)
안타깝게도 이 사람은 수술을 받은 후 곧바로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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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뼈 보고 있는 두사람 6 (2-3초 보고)
이 인골은 출토당시 골반뼈 부근에
골반 틸다운 아기뼈 14 아기의 두개골이 놓여있었다. 그녀는 아마도 임신 말기나 출산중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뼈 만지는 두사람 3 의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 당시에 산모와 아기
작은 뼈조각 7 의 죽음은 흔한 일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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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관 사진 10 그 사실을 증명이라고 하듯 예안리 무덤터에선 꽤 많은 숫자의 아기 무덤이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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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불관의 옹관들 9 옹관이라고 불리는 이것이 바로 예안리에서 출토 된 아기의 무덤이다.
옹관 만지는 둘 4 (보고)
두 개의 독 맞대고 11 아기가 죽으면 독안에 시신을 넣고 두 개의 독을 이렇게 맞대어 붙인다.
그리고 아기의무덤은 사진 6 부모나 가족무덤 옆에 놓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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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옥련 인터뷰 (예안리 경우에는 어린아이들은 전부 옹관묘에 매장이 돼 있습니다. 옹관묘의 어린아이 비율이
전체적으로 28%정도 되기 때문에 대체로 전체의 비율로 봐서 굉장히 높은 편이기 때문에 당시의 유아사망률은
아주 놓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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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레이 사진 찍는 부감 5 (2-3초후) 인골은 그들이 어떤 질병을 앓았는지
기사 1 도 말해준다.
뼈 2
사진 보는 사람들 풀 9 예안리 인골에서 무기에 의한 손상이나 전쟁으로 인한 부상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당시 가야인사람들얼굴 10 들이살고 있던 시대는 무척 평화로웠던 것을 알 수 있다 .
엑스레이 (뼈들) 10 하지만 그들을 괴롭힌 것은 다양한 질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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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교수와 피디 11 허리를 움직이는 동안에 통증을 호소한다든지 이렇게 누르게 되면 이안에 들어있는 수액
부분이 앞쪽으로 눌리게 되니까 신경을 누르게 되니까 통증을 유발 할 수 있다는 거죠.
16 허리질환이네요.
요부분이 눌려서 그렇게 됐다는 거죠.요부분이 , 눌려서 좁아진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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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추 17 힘든 노동으로 척추가 눌린 이사람은 척추 디스크를 앓고 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삐져나온 뼈가
신경을 건드렸을 테고 ,살아생전 그는 지독한 통증에 시달렸을 것이다.
골절에 의한변형 12 이 사람은 뼈가 부러진 후에 치료를 제대로 못해 뼈의 모양이 비정상 적으로 변해 버렸다.
고관절 탈구 21 정상적인 뼈에 비해 이사람의 대퇴골은 훨씬 크다. 골반에 대퇴골이 완전히 맞물리지 못하면
이렇게 고관절 부분이 부어오르는데, 아마도 이사람은 평생 한쪽 다리를 쓰지 못했을 것이다.
골막염에 의한 변형 15 외상에 의한 염증이 골막염을 일으키는 경우도있었다.
이 사람은 그 증세가 더 심해 염증이 뼈까지 침투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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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용 인터뷰 이런 소견들은 실제적으로 현대인에서도 그 정도에는 차이가 있지만은 존재하는 질환들이
그당시에도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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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틸다운 치아 11 (3-4초후)
인골중에서도 치아는 가장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필름 보는 의사 4 (보고)가야인골의 치아를 엑스레이 촬영해본
필름 2 결과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충치를 앓고 있었다
박교수 관찰하고 9 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가야인의 치아에는 한가지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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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아 보이고 (현장음)
(상아질이 완전히 닳아있어서 심한 상태의 교모도를 볼 수 있습니다.치간이 거의 3분의 2정도가 다 없어져
버렸습니다.)
반 이상 닳아있는 치아들 12 가얀인들의 치아는 대부분 30-40대만 되도 뿌리가 드러날 정도로 닳아 있다.
치아를 그만큼 많이 사용했다는 뜻이다.
치아 하나도 없는 턱 9 이사람은 생전에 이가 모두 빠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잇몸으로 살았던 사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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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있는 두사람 (현장음)
(여기에 고름주머니가 있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이뿌리에?/예 더 진행되면 이부분이 골수염까지 갈 수
있었지 않았을까 그 당시에 살아계셨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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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열난 치아 11 가야인들의 치아에는 대부분 이렇게 균열이 나있다. 딱딱하고 거친 음식을 먹었다는 증거다.
축농증에 의한 구멍 11 이 사람은 축농증에 의한 고름이 윗턱뼈에 구멍을 낼 정도로 심한 축농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얼굴 틸다운 치아 10 예안리 가야인 그 인골들은 이렇게 그들이 살았던 삶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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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5]
뒤에 가야인의 치아 보이고
MC-현대인들의 치아는 윗니가 아랫니를 덮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예안리 인골의 치아는 대부분 옥니였습니다. 이것은 당시 가야인들이 아래턱을 많이 사용했다는 뜻인데
요. 가야인들이 먹었던 음식은 딱딱하고 모래가 많이 섞인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이빨을 사용해서 뻬를 짰다고도 합니다.
한마디로 가야인들은 아래턱을 끊임없이 움직였고 따라서 아래턱이 커지면서 옥니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인골을 통해서 1600년전의 생활상을 알 수 있다는 것이 무척 신기하지 않으십니까?
이 이외에도 인골은 우리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해줍니다. 가야인의 인골속에는 그들의 역동적인 삶을 알 수 있는
단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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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5]
바다 보이고 4 (보고)
지도 보이고 7 삼천포 앞 바다에 위치한 늑도는 100여가구가 살 섬 보이고 3 고있는 작은 섬이다.
줌인 무덤터 6 섬전체가 유적지라고 할 정도로 이곳에서는 지금
흙팬 유물 7 도 기원전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토기조각들 6 (보고)
산 팬 무덤터 15 (무덤 터 보이고)
지난 85년 이곳 늑도에서는 기원전 1세기대의 주거지 터와 무덤들이 발굴됐다.
집 기둥 자리 9 현재 남아있는 네 개의 기둥자리로 당시 주거지의 크기와 형태를 짐작해볼 수 있다.
CG 집 22 땅을 파서 네 개의 기둥을 세우고 ,통나무를 서로 엇갈려서 지붕을 만든다.이엉과 가죽으로 벽체와
지붕을 덮는다. 아마도 이런 모양의 집이 아니었을까?
인골 사진 6 그런데 늑도에서 주목할 점은 바로 인골이다.
인골함들 8 (4-5초 보고)늑도에서 출토된 인골은 예안리의 인골과
서랍안의 뼈들 8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그들은 바로 예안리 가야인들과 같은 계통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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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 줌인 치아 22 (4-5초 보고)
늑도에서 발굴된 이인골은 한가지 특이한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살아 있을 때 송곳니를 뺀 것으로 보이는
발치의 흔적이다.
CG발치 10 발치, 즉 멀쩡한 치아를 뺀 후에는 이렇게 홈이 메워지고 간격도 줄어든다.
호주 발치 사진 5 이런 발치의 풍습은 1930년대까지도 호주와 뉴기니 사진 3 파퓨아 뉴기니 ,
대만 발치 사진 10 그리고 대만에서 널리 행해진 풍습이었다.
(보고)
고대중국의 발치 6 고대 중국의 그림속에서도 발치의 풍습을 확인 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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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호 교수 인터뷰 (대체로 통과의례와 관계되는 행위가 아닌가 얘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성인식이라든지 결혼식이라든지 가족이라든지 집단의 우두머리가 죽었을 때 이빨을 뽑는 그런 행위
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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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발치 사진 9 그런데 일본 큐슈 지방에서도 발치를 한 인골이 출토됐다.
동아대 외경 5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렇게 똑같은 풍습이 나타
유물보는 사람들 6 난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유물둘 10 (보고)그 실마리를 찾은 것은 늑도에서 출토된 유물에서였다.
탄화미 보이고 14 변농사를 짓지 않던 늑도에서 탄화미가 나왔다. 이것은 어디에선가 쌀을 수입했다는 뜻이다.
반량전 8 그리고 고대중국의 화폐 반량전에서도 외국과의 교류를 엿볼 수 있다.
일본 남부해안 산호 10 늑도의 주거지에서는 또 일본 남부해안의 산호가 출토되기도 했다.
토기 CG 16 그리고 기존의 토기와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토기가 나타나고 있었다. 크고 정교한 이토 기는
일본의 야요이 토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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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봉근 인터뷰 (늑도는 우리나라 남해안에 위치하는 섬들 가운데서 당시 중국이나 일본과 서로 교류하는 과정
에서 교통의 요지로서 우리나라 남해안의 국제적인 항구역할을 한곳이 아닌가 이런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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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요이토기 출토지역 20 우리나라에서 일본의 야요이 토기가 출토된 지역은 한반도 남부의 부산,김해 고성
삼천포 등 일곱 개 지역, 당시 일본과 교류하고 있었던 이 지역에는 예안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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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시마시 전경 10 일본 가고시마시.이곳에는 한반도에서 출토된 야요이 토기가 단순히 문물교류에 의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단서가 있다.
가고시마 대학 외경 4
인골실의 인골들 15 바로 이 인골들이다. 야요이 인골이라 불리는 이 인골은 예안리가야인과 똑같은 형질을
가지고 있었다.
지도 인골출토 9 기원전 3세기 일본 큐슈지방에서부터 갑자기 나타난 이 야요이인은 점차 일본본섬지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왕피디와 교수 12 (2-3초후)야요이 토기를 만든 야요인 인은 기존의 일본인과는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바로
해골 7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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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다 교수 인터뷰 (한반도 남부의 형질도 유전으로 이어지는 것이고 거기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사람의
인골도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예안리의 인골과 큐슈에서 출토되는 인물은 시간차이가 있지만 당연하게
닮아있다,특히 미간이 좁아지고 코가 길어지며 전체적으로 얼굴이 길어지는 특징들이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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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배모양 토기 10 (4-5포 보고)고대 가야인들은 활처럼 휜 뗏목위에 배를 얹었다.
배 팬 10 일본을 오가기 위해서는 거센 파도를 헤칠 수 있는 이런 배가 필요했을 것이다.
큐슈출토 배토기 13 일본 큐슈지역의 사람들도 가야의 배와 똑같은 모양의 배를 사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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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19 오래전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간 한반도 남부인들, 그들과의 교류는 예안리 가야인들이 살았던
시대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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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6]
MC-결국 가야인들은 예안리부덤이 형성되기 훨씬 이전부터 일본지역으로 건너가서 터전을 잡고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지금은 우리나라와 일본이 국경선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1600년전만 해도 가야인들과 일본북부
큐슈인들은 같은 문화를 가진 같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서울과 부산을 오가듯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도와 편두 복원한 얼굴 나타나고
MC-그런데 아직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한가지 있습니다. 가야인골에서 편두가 나타나는 시기는 4세기까지입니다.
그 이후로 편두를 한 인골은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편두의 풍습은 왜 사라진 것일까요?
가야지역으로 줌인 어쩌면당시 가야사회에 커다란 변화의 바람불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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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6]
무덤 보고 있고 16 (현장음)
(여기 발목같은데 봐도 무릎꿇고 엎드려서 일한 흔적이 없습니다. 기골이 장대하고 인물이 현대인으로 봐서도
인물이 매우 잘생겼는데 턱뼈라든가 눈도 크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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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인골 팬 부장품 13 아버지와 아들의 인골이 나란히 묻혀있는 이 무덤은 당시 가야인들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인 목곽묘다.
부장품들 9 이 무덤은 부장품을 이렇게 시신의 발밑에 놓는다.
무덤 사진 10 당시 예안리에서 발굴된 목곽묘는 모두 59기.
모두 4세기 이후에 조성된 무덤들이다.
무덤 사진(옆에 부장품) 12 하지만 그이전의 무덤은 부장품을 놓는 위치에서 차이가 보인다.
무덤의 양식이 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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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 무덤 변화 11 4세기 이전 초기 목곽묘는 무덤 가장자리에 나무판자를 대고 시신 옆에 부장품을 놓았다.
12 그러나 4세기 이후부터는 무덤가장자리에 나무판자를 대는 형식은 같지만 부장품을 발치에 놓거나 따로
곽을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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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트래킹 5 (보고)
대성동 고분 6 무덤 양식의 변화와 함께 가야사회엔 새로운 문화가 등장한다.
올라가서 표지석 7 (올라가고)
김해지역 지배층의 무덤인 대성동 고분.
고분 사진 6 3세기 말 이 고분에선 느닷없이 이전에는 없었
순장 인골 사진 6 던 매장 문화가 등장한다. 바로 순장이다.
유물 팬 동복 13 그리고 순장과 함께 대성동 고분에서는 가야지역에서 볼 수 없었던 청동 항아리가 나타났다.
오르도스형 동복이라고 불리는 이 항아리는
동복 타이트 5 북방민족의 전유물이다.
갑주들 풀 3 뿐만 아니라 가야에선 그때부터 북방 기마민족
갑옷 10 이 입었던 철갑옷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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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실 들어가고 8 당시 가야사회에 느닷없이 등장한 이 북방 문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신교수 연구하는 모습 11 (2-3초 보고)
유독 한반도 남부인 가야지역에서만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로 신경철 교수는 한가지
무덤 책 4 한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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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철 교수 인터뷰 (순장은 쉽게 말해서 북방의 정신문화거든요. 북방의 정신문화와 물질 문화가 함께 나타
나는 것은 그런 정신문화를 소유한 종족의 이동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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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CG 16 당시 이런 사건이 있었다. 모용선비족의 공격을 받은 부여의 왕족이 동해안의 옥저로 피난 을 가는
민족 대이동이 있었다.그 부여인들은 그곳에서 계속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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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철 교수 인터뷰 (근데 돌아가지 않았던 왕자라든지 주력은 어디갔는지.그거는 그때부터 행방불명입니다.
그런데 부여는 이른바 대평원의 민족이었기 때문에 아마 옥저와 같은 협소한 지역에 정주하지 않았을겁니다.
맞지 않았을 겁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당시 동아시아에서 철의 중심지이자 교역의 중심지인 김해로 옮겼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소산이 아까 순장이라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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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달리고 18 (3-4초 보고)
어쩌면 새로운 지배자의 등장이 새로운 문화를 가져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가야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일으킨 원인이 무엇인지 그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편두 해골 팬 일반 20 (보고)하지만 4세기 이후 가야사회에서 편두는 사라진다.
이것은 가야를 지배하고 있는 정신문화가 사라지고 새로운 문화가 등장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보고)
줌아웃 투샷 15 1600년전 ,한 시대에 불어닥친 변화의 소용돌이를 이 인골들은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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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7-클로징]
무덤터에 MC 서있다.
MC-예안리의 인골을 통해 우리는 1600년 전 가야인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장대한 기골을 하고 있었고 편두나 발치와 같은 독특한 풍습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가야인들의 거주 범위는 비단 한반도 남부에 머문 것이 아니라 일본지역에까지 넓게 확산돼 있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습니다.
먼 과거일수록 서민들의 생활상을 조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욱이 가야는 그동안 그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신비의 왕국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난 이 주인공들의 삶과 죽음은 신비로 가득한 가야사의 한 장을 채울 것입니다..
누워있는 인골로 줌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