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려진 신과 진정한 신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에서는 인류의 역사가 거대한 세 가지의 담론을 거쳐왔다고 요약한다. 유신론, 인본주의 그리고 데이터 교정이다.
이 책의 내용에서 <유신론>에 관한 견해를 한 유튜브가 다음과 같이 요약 기술한다.
-아래 내용은 본 유튜브의 내레이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유신론은 수천년간 인류의 지배적인 세계관이었다. 여기서는 모든 의미와 권위가 신에게서 나온다는 것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신이 결정한다. 누가 왕이 되어야 하는지도 신이 결정하였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신의 명령이 답이었다. 인간의 역할은 그저 신의 뜻을 따르는 것이었다. 유신론적 세계에서 개인의 욕망과 감정은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의심해야 할 것이었다. 인간의 욕망은 죄의 근원이고, 인간의 감정은 흔들리는 갈대이며, 인간의 판단은 신의 빛 아래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누르고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며, 신의 말씀에 자신을 맞춰 살았다. 그러다 17-18세기를 지나면서 유신론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과학이 신을 우주의 중심부체서 밀어내고 계몽주의가 인간이성을 권위로 세웠다.”
위의 요약본을 하나씩 뜯어보자. 사실인 것과 아닌 것, 과장된 것과 실재인 것,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등을 분별하면서 만일 오류가 있다면 오류의 이름도 알아보자.
① “유신론은 수천년간 인류의 지배적인 세계관이었다.” 이 부분은 약간은 과장된 면이 있지만 이렇게 진술해도 무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대 동양에서는 유신론이 없었다. 노자나 장자 부처나 공자는 신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당시 왕들은 천자 즉 하늘의 아들이라고 믿었으니 유신론이었다고 치자.
② “여기서는 모든 의미와 권위가 신에게서 나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술은 문학적으로 말해 너무 일반적인 진술이라 맞는 것도 틀린 것도 아니다. 그런데 논리적으로보면 명백히 거짓진술이다. ‘모든’이라는 전칭명제는 모든 영역을 아우를 것인데,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중세기에도 신을 뜻을 진정으로 추구한 사람들은 거의 극소수이며, 신의 뜻이 의미나 권위가 된 사람들은 성직자나 수도자 정도였으며, 일반인들은 신의 뜻을 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심지어 불경한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라틴어를 알고 성경을 읽을 수 있었던 사람이 0.1%도 되지 않는 시대에 모든 이들이 신의 뜻을 안다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배의 키를 어디로 향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 있어서 그 권위는 중세때에도 선장에게 있었지 신에게 있었던 것은 분명 아니다. 중세때에 지주들과 소작농에게 ‘의미’는 지주에겐 ‘돈’이었고 농로에겐 ‘땅의 소출’이었지, 신의 뜻이 아니었다. 유신론자들의 문제는 모든 것을 신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면서도 진정 그것을 추구하지 않았거나 아예 믿지도 않았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지주들이 진정 신의 뜻을 찾고, 거기서 의미를 구했다면, ‘노예’를 부리는 것 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0.1% 정도에 해당하는 일, 그것도 그 0.1%에서 다시 1%정도만이 진실이었던 것을 ‘모든’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였으니, 이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할 수 있다.
③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신이 결정한다. 누가 왕이 되어야 하는지도 신이 결정하였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신의 명령이 답이었다. 인간의 역할은 그저 신의 뜻을 따르는 것이었다.”
위 진술 역시 ②번과 같은 논리로 전형적인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옳고 그름을 결정한 것은 권력자들 종교계에서는 성직자가, 행정계에서는 행정수반이, 공장에서는 사장이, 가정에서는 가장이 결정하든 시대였지, 그들은 결코 신의 뜻을 청하면서 옳고 그름을 결정한 적이 없었다. 지극히 드물게 수도원 등에서 결정하기 이전에 항상 신의 뜻을 알고자 한 이들이 있었다. 삶의 90% 이상의 영역에서는 결코 신의 뜻을 물어 결정한 적이 없었다. 이는 오늘날 역시 유사하다. 왕은 당연히 왕자가 왕위를 계승하였고, 다만 정교일치 시대 였기에 ‘종교계의 허가’라는 형식을 유지하였을 뿐이었다. 90% 이상의 무지한 백성들은 신의 명령 자체를 몰랐기 때문에 신의 명령을 따라 살수도 없었다. 인간의 역할은 그저 신의 뜻을 따르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한 인간은 0.1%도 되지 않았다. 다만 대다수의 무지한 백성들은 그냥 자신들의 삶이 신의 은총으로 주어졌다고 믿었을 정도였고, 막연히 죄를 지으면 신의 벌을 받을 것이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을 뿐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진술은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라고 할 수 있다.
④ “유신론적 세계에서 개인의 욕망과 감정은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의심해야 할 것이었다.”
위 진술은 <주제 일탈의 오류>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의 욕망과 감정을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유신론 무신론의 문제와 전혀 무관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욕망과 감정을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모든 분야 모든 영역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며, 주로 합리론에서 감정보다는 이성에 무게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욕망과 감정’을 신뢰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욕망과 감정을 믿을 수가 없다는 말인가? 아니면, 욕망과 감정을 따라 행동하면 안된다는 말인가? 그도 아니면, 개인의 욕망과 감정은 진실하지 않은 것이라는 말인가? 진술 그 자체가 매우 애메 모호하여서 참 거짓을 말할 수도 없다. 따라서 이는 <에매어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중세의 수도승들은 오히려 이성적 판단보다는 영감이나 직관에 의해 판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의미에서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도 함께 범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⑤ “인간의 욕망은 죄의 근원이고, 인간의 감정은 흔들리는 갈대이며, 인간의 판단은 신의 빛 아래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누르고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며, 신의 말씀에 자신을 맞춰 살았다.”
“인간의 욕망은 죄의 근원이고”라는 표현은 어느 정도 맞는 표현이다. 하지만 이 역시 문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욕망에도 다양한 종류와 등급이 있을 수 있으며, 예를 들어 ‘거룩한 욕망’이라는 것도 있다. 인류를 위해 자기 인생을 포기하고, 오직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해 헌신했던 프란치스코 성인 같은 사람들이 그러한 거룩한 욕망을 가진 자들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표현 역시 엄밀히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감정은 흔들리는 갈대이며”라는 표현은 전혀 무의미한 진술이다. 이러한 생각은 모든 문화 모든 사상에서 말할 수 있는 너무나 일반적인 진술이어서, 유신론과는 무관한 진술이다. “인간의 판단은 신의 빛 아래에서만 의미를 가진다”라는 진술도 무의미한 진술이긴 마찬가지다. ‘인간의 어떤 판단’을 말하는 것인가? 유신론자도 월세를 얻을까 전세를 얻을까? 망설인다. 그리고 경제적 사정등 여러 가지를 고려하여 어느 하나를 결정을 한다. 여기서 신의 빛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대다수 일반인들은 삶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이성과 양심의 판단에 따라 살고자 한 것이 유신론자에게서도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전칭명제로 사용된 ‘인간의 판단’이라는 표현 자체가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신의 빛 아래서만 의미를 가졌던 사람들은 아마도 0,01%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 다음의 진술도 논리적인 결론이므로 당연히 오류이다.
⑥ “그러다 17-18세기를 지나면서 유신론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과학이 신을 우주의 중심부에서 밀어내고 계몽주의가 인간이성을 권위로 세웠다.”
세계사나 철학사를 조금만 더 섬세하게 공부했다면 이러한 일반론은 믿지 못할 것이다. 르네상스인들이 중세의 그리스도교에서 이탈한 것은 과학발전이 한 몫을 했겠지만, 보다 큰 이유는 정치적인 이유, 즉 성직자들의 부패와 교회의 도덕적 타락에 때문이었다. 가톨릭에서 개신교가 갈라져 나간 것은 <면죄부>사건 때문이었고, 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난 것은 정교 분리가 일어나고, 왕립학교 왕립연구소 등 국가의 행정력이 막강하였기 때문이었다. 즉 권력의 이동에 따라 백성들의 이동도 예고된 것이었다. 계몽주의가 이성을 앞세운 것은 맞지만, 데카르트도 이성의 절대적 확실성을 신으로부터 확보하였다. 계몽주의 이후 많은 무신론자들의 등장한 것은 아주 냉정히 보면, 지상의 권력을 차지하려는 일종의 정치게임이었다. 신을 등에 업고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에 맞서 무신론(과학)을 앞세워 권력(대중의지지)을 차지하고자 한 것이었다. 엄밀히는 권력 보다는 ‘부(경제)’를 차지하려는 싸움이었다. 권력 만이 부를 가져다 주기 때문이었다. 이는 오늘날 정보, 데이터 등의 이슈도 사실 그 윈리는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진술은 <본질 이탈의 오류>라고 할 수 있다.
결론 :
이렇게 보면 유발 하라리라는 저자가 무엇을 오해하고 있는지 분명해 진다. 그는 진짜 신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려진 신’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와 시간은 ‘지속’임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마치 ‘병렬’처럼 놓고, 한 시기는 무슨 시기, 다름 한 시기는 무슨 시기 이렇게 구분하려다 보니, 이러한 이론을 내놓은 것이다. 만들려진 신을 진짜 신처럼 혹은 만들려진 유신론을 진짜 유신론처럼 고려하는 것은 따라서 전체적으로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브리엘 마르셀이란 철학자는 “증명된 신은 진정한 신이 아니다. 진정한 신은 오직 체험될 뿐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 진정한 신에 대한 진정한 앎이란 오직 '인격적인 앎' 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중세에도, 근대에도 그리고 현대에도 무수한 사람들이 신을 믿고 있지만, 과연 이 중에서 ‘진정한 신’을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마도 0.01%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한 번도 신을 체험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신에 대해서 주절이 주절이 늘어놓는 다는 것이 우습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