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독립운동가, <이희경·나용균·황기환 선생> 선정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조국 독립 위해 세계 누벼
국가보훈처와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일제 침략의 부당함과 대한민국 독립의 당위성을 적극적으로 세계에 알린, 이희경(1968년 독립장)·나용균(1990년 애국장)·황기환(1995년 애국장) 선생을 <2023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889년 평안남도 순천 출생의 이희경 선생은 1911년 일리노이대학 의학전문과에 진학, 1911년부터 대한인국민회 시카고지방회에 참여하여 임원과 총무를 맡아 지방회의 자치제도와 규칙을 마련하는 등 적극 활동했다. 또한, 1916년 하와이에서 병원을 운영하며 한인사회의 의료체계를 마련하기도 했다.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했고, 1919년 5월 제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평안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군무위원장, 임시회계검사원, 법률기초위원, 외무총장대리 등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선생은 1905년 10월 대한제국 칙령 제47호에 의해 조직되었으나, 1909년 일제 강압으로 일본적십자사에 통합된 대한적십자회 재건에도 앞장섰다. 1919년 임시정부 내무부의 인가를 얻어 회규를 제정하고 선언서를 발표하는 등 초창기 대한적십자회의 토대 구축과 체계 확립에 힘썼으며, 간호원 양성소와 병원 설립도 추진하여 독립전쟁에 필요한 인력양성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선생은 미국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등 한인사회를 직접 찾아가 선전활동을 통해 미주 한인사회의 적극적인 지원을 이끌어내 대한적십자회 회원을 모집했으며, 모집한 의연금 4,000여 원을 상하이 임시정부 본부로 송금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20년 8월, 미국 상·하원 의원들로 구성된 ‘미국의원단 동양시찰단’이 상하이를 방문하자, 선생은 교제위원에 선정되어 임시정부에서 제작한 「진정서」를 미국 의원들에게 전달, 한국의 실상을 알리는 외교활동을 펼쳤고, 1921년 안공근과 함께 임시정부 특별전권대표로 러시아의 독립자금 지원을 받기 위해 모스크바로 파견되기도 했다.
선생은 1937년 국내로 귀국하여 호흡기 전문의로 활동했으며 언론에 위생과 관련된 글을 게재하는 등 국민건강 증진을 위해 노력하다 1941년 서거하였다.
1895년 전라북도 정읍 출생의 나용균 선생은 1914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학부에 입학,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민족자결주의 원칙의 대두로 독립운동에 유리한 국제정세가 조성되자 한국인 유학생들과 모임을 갖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1919년 최팔용과 함께 3·1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된 2·8독립선언 발표에도 기여했다.
이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 1919년 7월 제5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전라도 의원으로 선출됐고, 이후 임시의정원 법제위원회 이사와 위원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관제 및 헌법 개정에도 힘썼다.
1921년 11월, 김규식, 여운형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자, 1922년 러시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주최한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했다. 1922년 2월 다시 상하이로 돌아온 선생은 국민대표대회 소집에 관한 사항을 준비하기 위해 국민대표대회주비위원회(國民代表大會籌備委員會)가 구성되자 위원에 임명되어, 1922년 5월 김철 등과 함께 ‘국민대표대회주비위원회 선언서’를 발표했다.
선생은 광복 이후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고 1984년 서거하였다.
1886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출생한 황기환 선생은 인기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유진 초이’의 실제 인물로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가 공립협회(共立協會, 190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가 주도하여 조직한 민족운동단체)에서 활동했으며, 1906년 6월까지 레드랜드 지회의 부회장을 맡기도 했다.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소대장으로 중상자 구호를 담당하며 독일 베를린에 입성한 부대를 이끌었고, 1918년 11월 종전 후 김규식의 제안으로 1919년 6월 파리위원부에서 서기장을 맡아 ‘통신전(通信箋, 유럽내 각 언론기관과 강화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 및 저명인사 등에게 송부하기 위해 만든 안내문)’을 발행하여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선생은 1919년 8월 김규식이 구미위원부 위원장을 맡게 되어 미국으로 돌아가자 파리위원부의 실질적인 책임자 역할을 수행했다. 프랑스,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일제침략과 통치 실상을 널리 알렸고 1919년 10월 프랑스 인권옹호회에 참석하여 한국 독립문제를 보고했다.
선생은 1920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런던위원부 위원에 임명되어 프랑스와 영국을 오가며 외교활동을 펼쳤다. 그해 10월 영국의 언론인 맥켄지(Frederick A.Mackenzie)와 협의하여 ‘대영제국 한국친우회’ 결성을 주도했으며, 영국의 국회의원·학자·신문기자 등 60여 명이 참석한 창립대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연설을 통해 영국인들의 지지와 성원을 이끌어냈다.
1920년 12월, 파리위원부 설립 이후부터 추진한 대유럽 외교활동을 소개·정리한 ‘구주의 우리사업’ 간행에도 참여했고, 1921년 6월에는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대영제국 식민지 수상회의에 참석한 수상들에게 ‘일본의 통치를 벗어나고자 하는 조선 사람의 청원’이라는 인쇄물을 배포하고, 일본대사에게도 보내,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침략과 수탈에 대한 실상을 알리고 한국의 독립승인을 요구했으며, ‘일영동맹(日英同盟)반대안’을 공식적으로 제출했다.
1921년 8월경 이승만의 요청으로 워싱턴회의에 제출할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했으며, 1921년 11월부터 1922년 2월까지 열린 워싱턴회의에 참석하였고, 이어서 하와이에 파견되어 민찬호와 함께 독립운동자금을 적극 모집했다.
이후 뉴욕과 런던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1923년 4월 미국 뉴욕에서 서거하였다.
이희경·나용균·황기환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적극적인 외교활동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신 독립유공자로,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이희경 선생은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나용균 선생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또한 황기환 선생에게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한편, 국가보훈처는 제1차 세계대전 시 미군으로 참전하고 프랑스, 미국 등에서 독립운동에 전력하다 후손 없이 서거한 황기환 선생 유해를 순국 100년이 되는 올해 4월, 최고의 예우로 미국 뉴욕에서 국내 국립묘지로 봉환하여 조국 대한민국에서 영면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