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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그는 누구인가
범상(석불사주지)
시작하는 말 --
만해에 대한 박사논문이 100여 편에 달하고, 관련 논문이나 서적들은 1,000여 편을 넘어서고 있다. 그런데 새삼 ‘만해 그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은 선행연구에 대한 다소 도전적 발상일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물음은 그동안 만해에 대한 연구가 ‘독립운동’과 ‘문학’에 편중되었고, 한국사회의 일반적 인식은 외세에 저항했던 독립투사라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서 무연자비(無緣慈悲)를 실천했던 출가사문의 본래모습이 왜곡되고 있는 것에 대한 자연스런 반동으로 혜량해 주셨으면 한다. 만해는 승려이다. 다시 말해, 시인도 아니요! 문학가도 아니요! 독립운동가도 아니요! 사상가도 아니다! 다만 붓다의 가르침에 귀의한 승려였고, 깨달음을 현실에서 실천했던 보살이었다. 여기에 대해 박노자는 1920~30년대의 그가 진보적 경향의 민족운동 지도자이었지만 그에게는 ‘민족’이란 정확하게 자유, 인권이라는 사회적인 궁극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중간적 수단이었다. 사상가로서 한용운의 담론의 최고(最高), 최후의 목표가 ‘집단’이 아닌 자유, 인권을 누리고 해탈에 도달하려고 노력할 ‘개인’에게 있었다는 점에서, 한용운에게는 불교의 논리가 주(主)가 되고 ‘민족’이란 근대적인 방편이 종(從)이 돼 일정 정도의 근대 논리 극복이 된 것이었다. 이것은 스리랑카, 태국의 권력화 된 공식적인 ‘불교민족주의’의 담론이라든가, ‘호국’과 ‘애리(愛理)’에 같은 가치를 두었던 ‘이노우에 엔료’ 류의 일본의 근대적인 ‘불교민족주의’와 질적으로 다른 논리이었다고 정의한다. 거의 전부라 할 만큼 인류의 역사는 외부로부터 행복을 구하려는 집단들에 의해 주도되어 왔다. 이 같은 현상은 지금도 진행 중이며, 긍정적으로는 물질문명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지만, 부정적으로는 전쟁과 침략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반면 붓다는 개인의 내부(마음)에서 행복을 찾았고 그것을 깨달음이라 하며, 문명의 발전과 물질의 소유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집착을 재거함으로서 공동의 이익과 인권과 평화에 기여할 것을 강조한다. 깨달음이란 어떤 신비한 체험이나 특별한 능력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인간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붓다는 “마음과 부처와 중생은 차별이 없다”고 선언한다. 만약 이 세 가지가 각기 다르다면 ‘깨달은 사람인 부처’는 인간의 범위 밖에 존재하게 되거나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모순이 발생한다. 현재도 고행주의를 선택한 인도의 요기나 신선(神仙)이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은 정신과 육체를 분리함으로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음을 확신하고 온갖 수행을 감행한다. 이와 달리 불교에서의 수행은 ①자신이 본래부터 부처였음을 알아가는 과정이며, ②깨달음을 성취한 사람은 과거로부터 이어오는 나쁜 습관을 재거하고 깨달음의 사회적 실천인 불행수행(佛行修行)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서커스에서 말[馬]이 등에 호랑이를 태우고 달리는 모습을 종종 본다. 만약 호랑이가 자신이 호랑인 줄 알고, 말이 자신이 말 인줄 안다면 절대로 이런 일은 벌어질 수 없다. 다만 인간이 교육과 환경을 조작하여 말과 호랑이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지 못하도록 통제했기 때문에 가능해 진다. 이처럼 모든 중생은 본래부터 부처이지만 서커스의 호랑이나 말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호랑이가 문득 자신이 호랑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시간 걸리는 일이 아니며, 그렇다고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본래부터 호랑이였기 때문이다. 만해가 살았던 시대는 그야 말로 중생의 탐욕이 극에 달했고 전 세계는 약육강식, 우승열패가 진리로 숭앙되었다. 그래서 무력을 앞세운 서세동점은 진화론적 입장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제국주의 침략자들은 자신들의 정복전쟁이 미개사회를 개화하는 일 즉, 성스러운 소명으로까지 받아들여졌다. 이에 상대적으로 물질문명과 무력이 취약하여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국가와 민족들은 하루빨리 침략군들의 문명, 사상, 종교 등을 배워서 부국강병으로 맞서야 한다는 모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일본이 조선에 대해 “조선은 스스로 (근대)국가를 경영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므로, 일본의 지도아래 나라를 경영할 수 있는 힘을 키우고 난 연후에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므로 일본에 저항하는 급진적 독립투쟁 보다 부국강병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매우 비논리적 주장으로 보이지만 일본의 감시와 통제에 시달리며, 시시각각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던 식민지 지식인들에게는 달콤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고, 이 같은 부국강병의 논리는 친일, 친미(서구중심주의)의 근거로서 충분하였다. 여기에 대해 만해는 억압과 무력으로 고통을 받는 조선과 조선인이 부국강병을 이루어 식민지대열에 나서겠다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의 연속 일뿐 진정한 인류평화와 인권은 구현 될 수 없음을 간파했다. 그렇다고 물질문명의 발전을 거부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제국주의를 향해 폭력으로 평화를 구현하려는 것은 애시 당초부터 잘못되었음 인식시키려 노력했고, 민족은 타(他)에 의한 개조가 아니라 스스로의 자각에 의해서 평화와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음을 강조했다. 만해는 붓다의 가르침에 투신한 출가사문으로서 깨달음을 통해 진정한 행복을 체득했다고 보여 진다. 그래서 만해는 ‘행복을 찾는 사람’ 또는 ‘행복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행복을 실천하는 사람’이었다고 평가되어야 한다. ‘행복의 실천’이란 행복을 경험한 사람 즉, 깨달은 자 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서 보살행을 말한다. 본고는 붓다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조선독립의서>의 이면을 들여다봄으로서 만해의 독립운동이 조국과 민족에 국한되는 별애(別愛)가 아니라 인류의 행복을 구현하려는 무연자비(無緣慈悲)의 보살행임을 밝히고, 현대사회에서 요구되는 화합과 상생의 길을 모색하는 제안서의 성격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본말---
1. 종교에 대한 이해와 오해 현대사회에서 만해는 종교인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지금 현재 종교에 대한 한국사회의 일반적 인식은 서세동점이후 ‘인간은 죄를 범하였으므로 신으로부터 추방되었다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신과 하나가된다는 신인합일(神人合一)’을 뜻하는 Religion(기독교)이 종교(宗敎)로 번역되면서 왜곡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불교를 포함한 전통종교와 사상에 대한 오해는 회복 불가능할 만큼 깊어졌다. 종교라는 용어는 《랑카바타라 수트라》가 중국에서 《능가경》으로 번역 될 때 우주에 편만한 궁극적 진리를 깨달았다는 싯단타(siddhãnta)를 종(宗)으로, 그 가르침은 교(敎)라고 하였다. 그리고 중국에서의 종(宗)은 《설문(說文)》에서 ‘종존조묘야(宗尊祖廟也)’라 했고, 《주례(周禮)》에서는 ‘종백(宗伯)’으로, 그 주(註)에서는 ‘종백주례지관(宗伯周禮之官)’이라하였다. 그러므로 종교는 종실(宗室), 종조(宗祖), 종묘(宗廟) 등에서 보는 것처럼 조상에 대한 제례를 의미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현대사회의 관점에서 본다면 모든 종교를 두루 통섭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이지만 전통사회에서 어떤 사람을 소개할 때 유, 불, 선에 밝았다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각 종교 간의 차이를 분명히 알고 있었고, 진리를 찾아가는 하나의 방법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따라서 ①인간의 길흉화복과 우주의 주관자로서 자연현상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초자연적 힘을 가진 유일신을 신봉하는 종교와 ②우주에 편만한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음을 근본으로 하는 종교는 처음부터 같은 범주에서 이해 될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종교란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주장하며, 따르는 신도가 있고, 의례를 동반하는 사회적 문화현상”으로 정의된다. 여기에 비추어 본다면 상기①.②의 종교는 외형적 측면에서는 유사점을 발견 할 수 있으나 근간이 되는 교리와 사상에서는 마치 고양이와 호랑이만큼 차이가 난다. 호랑이와 고양이가 같은 고양잇과 동물이라 하여 1:1의 비교를 할 수 없듯이…,…. 모든 종교를 같은 범주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지만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종교의 권위가 학문은 물론 사회전반을 지배함으로서 각 종교를 비교하는 논의 자체가 어렵다. 특히 지방자치이후 신도조직을 확보하고 있는 종교가 선거에 개입하여 민주주의에 대한 폭력을 자행하고, 정치에 개입함으로 더욱 강한 힘을 가짐으로서 이 같은 문제는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이처럼 우리사회의 종교인식에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만해는 승려이고, 종교인으로 분류되는 만큼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한국사회의 일반적 종교인식으로는 그의 일생을 온전히 조망 할 수 없다.
1) 스키너상자 속의 쥐
모든 종교는 자신들의 교리를 진리로 확정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의든 타의든 종교에 대한 실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교육을 통하여 전지전능(全知全能), 지고지선(至高至善)의 진리로 각인한다. 종교의 주장대로 자신들의 가르침이 진리라면 선과 악이라는 양면성은 처음부터 있을 수 없고, 선(善)이라고 주장하려면 전쟁과 살육에는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인류역사는 종교를 원인하는 수많은 전쟁과 살육에 관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으며, 2014년 현재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의 근거가 되고 있다. 스키너는 보상과 강화를 주제로 하는 행동주의 학습이론을 대표하는 학자이다. 스키너의 다양한 실험 중에 쥐를 대상으로 하는 다음과 같은 실험은 인간이 교육을 통해서 어떻게 왜곡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스키너상자 속의 쥐에게 있어서 실험자인 인간은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자이다. 그래서 실험자는 임의대로 다음의 2가지의 실험을 수행 할 수 있다. ①쥐가 특정행동을 할 때 마다 먹이를 공급한다. ②행동에 상관없이 무작위로 먹이를 공급한다. ①의 실험에서는 실험자가 의도하는 특정행동을 강화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②의 실험은 특정행동을 강화시킬 수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②의 실험에서는 쥐 스스로의 착각에 의해서 특정행동이 강화된다. ②의 실험에서 쥐는 스스로 먹이가 공급된 행동과 위치(실제로는 무작위지만, 쥐의 착각으로)를 생각해내고 그 행동을 반복하게 된다. 그래서 특정행동의 빈도가 높아지게 되고, 높아진 빈도만큼 먹이공급과 일치되는 비율이 높아지게 된다. 이 같은 착각에 의해서 ②의 쥐 역시 배가 고플 때마다 같은 행동을 반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종교는 인간이 가지는 가장 나약한 심리상태와 경험 할 수 없고 인식 불가능한 죽음 등에 관여함으로서 무소불위의 권위를 가진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스키너상자 속에 들어있는 쥐의 행동을 조작하는 시험자의 역할을 통하여 일반대중을 조정 할 수 있다.(예, ①의 쥐)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터부(taboo), 마스코트, 징크스, 부적, 종교장식물 등에 집착하고 요행을 기대하는 심리와 방어기재가 서로 부합하여 스스로 종교적이 된다. 예를 들면 교통사고와 같은 극히 상식적인 사건에 있어서도 ‘신(神) 또는 삼재(三災)’와 같은 이유를 들어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를 시킨다.(예, ②의 쥐) 스키너의 이 같은 실험은 종교뿐만 아니라 사회전반에 걸쳐서 권력자가 일반대중을 어떻게 왜곡하는지를 잘 보여 준다. 여기에 대해 만해는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속임수의 말로 일관하여 천당이 과연 있는지 없는지, 받드는 신이 정말인지 거짓인지, 영생(永生)의 약속이 사실인지 어떤지에 대해 조금도 냉정히 검토함이 없이 아무것도 모르는 채 미신을 지녀 내려오니, (중략) 구차스러운 말을 꾸며 미신을 변호하는 이도 없지 않다. 그리하여 이렇게 말한다. “미신인 점은 인정하나, 여러 사람의 정신을 하나로 통일하는 효능은 인정해야 한다. 11세기 이래 구미(歐美) 각국에서 전개된 놀라운 업적들을 보지 못했는가” (중략) 그것은 그렇다. 그러나 정치가로서 역사상 아주 저명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담(美談)의 주인공이 되고 있는 사람치고 누구나 무수한 사람의 피를 흘린 끝에 그 공을 자기 한 몸에 거두어들이지 않은 자가 있다는 것인가. 저 정치가들이 만약에 미신을 민중의 정신을 세뇌(洗腦)하지 않았던들 생명에 대한 애착을 박탈하여 사지(死地)에 몰아넣어 버릴 수는 없었을 터이었기에--
이것은 만해가 <불교의 성질>을 밝히며 다른 종교와의 차별을 설명하는 것으로서 올바른 진리가 어떤 것이며, 당시 시대상황에서 무엇이 연유가 되어 선(善)을 주장하는 종교가 제국주의의 군함을 타고 조선에 들어오게 되는 지를 밝히고 있다. 지배와 피지배로 이루어진 인간사회에서는 강자는 약자를 끝임 없이 ‘스키너상자 속의 쥐’로 만들고 있으며, 지금 열고 있는 이 세미나에서도 학문의 권위가 민중을 왜곡시키고 있을지도 모른다.
2) 종교의 두 갈래
인류는 종교뿐만 아니라 학문과 사상 등에 있어서 유론(有論)과 무론(無論)으로 발전해왔다. 유론은 유(有)의 근원으로서 유일신(唯一神)을 주장하였고, 주관과 객관을 엄격히 구분한다. 반면 무론은 전지전능의 유일신을 부정하고 일체만물은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으므로 주관과 객관은 서로 교호적 입장에 있음을 주장한다. 불교는 무론에 속하는 종교로서 “세상은 항상 변하고 있으므로 실체라고 할 그 어떤 것도 존재 하지 않으며, ‘나’라는 주관은 ‘대상’이라는 객관과 서로 분리 될 수 없는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세상 만물은 조건과 원인에 의해서 이합집산이 반복되는 것으로, 현상(물질)은 조건에 의해서 성립되었다가 그 조건이 사라지면 현상 역시 사라진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우주)에 있어서 어떤 것들은 전혀 연관이 없는 듯 보이나 실재로는 일체만물은 상의상관 관계에 있는 유기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자동차를 이용하는 것이 산성비를 내리게 하는 원인이 된다.’든지 ‘나의 목숨과 숨 쉬는 공기를 따로 분리 할 수 없듯’ 불교는 ‘모든 존재의 가치는 평등하다’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일체는 ‘나’라는 주관이 대상이라는 객관을 만나서 이루어진 (임시)가합(假合)에 불과하다. 마치 똑같은 동그란 모양이 주어졌을 때 사람마다 자신의 생각대로 받아들임으로서 어떤 사람은 보름달 아래에서 속삭였던 사랑을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전거바퀴를 생각하듯이,--- 이처럼 불교는 중생은 마음이 오염되어 있으므로 자신의 생각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한 사랑과, 바퀴 등에 집착하고 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말한다. 그래서 마음이 오염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행복의 길이 열린다고 가르친다. 이에 반해 유일신교는 자신들이 신앙하는 신(유일한 신으로서 다른 종교에서 신앙하는 신을 인정하지 않음)이 (특정한)인간(또는 민족)을 선택하거나 계시를 통해서 지상명령을 내린다. 이것은 신의 명령을 수행하는 자와 그 대상이 되는 자로 엄격히 구분되며, 주관과 객관을 분리하므로 개인의 행복역시 객관의 절대자인 신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그래서 유일신교를 대표하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지상명령은 불교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되어 진다. “본래부터 원수는 없다, 다만 (너의)마음이(오염되어) 원수를 만들어 내었으므로, (오염된)마음이 사라지면 원수 또한 사라진다. 그러므로 원수도 없고 사랑도 없다” 왜냐하면 원수도 사랑도 마음의 분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3) 별애와 겸애를 넘어서는 출가
별애 - 나의 아버지는 혈연관계에 있으므로 친구의 아버지와는 반드시 차별되어야 한다. 겸애 – 나의 아버지와 친구의 아버지는 차별 할 수 없는 똑같은 존경의 대상이다. 자비 - 나와 내 아버지, 친구와 친구아버지뿐만 아니라 일체 모든 중생들은 본질적으로 차별이 없다. 다만 사회윤리(형식)의 입장에서 구분 될 뿐이다. 위의 세 가지는 앞서 말한 유론(有論) 무론(無論)과 함께 종교와 학문, 사상을 이해 할 때는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근원적인 문제이지만 현실에서는 금기시하거나 회피하는 경향이 짙다. 이것은 우리가 원자력의 엄청난 파괴력 때문에 원전(原電)의 확산을 반대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하겠다. 원전(原電)을 반대하는 것은 전기의문제가 아니라 후쿠시마원전사태에서 경험했듯이 그 내면에 숨어져 있는 위험성 때문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필연적으로 혈연, 지연, 학연, 종교연 등등의 연고(緣故)를 가지게 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살아간다. 연고는 차별적 사랑인 별애의 근본으로서 어떤 식으로든지 상대를 배타하므로 크고 작은 분쟁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 연고는 “생존을 가능케 하는 제 1의 원인”으로 작용하므로 중생은 쉽게 떠날 수 없다는 특성이 있다. 원폴라 라훌라는 별애적 입장에 있는 종교의 발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인간은 포육기간이 길고, 포육기간동안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해야만 생존이 가능하다. 그래서 성인이 된 이후에도 부모의 역할을 대신해줄 의존적 존재를 그리워하여 신이라는 개념을 만들었고,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후영생을 산정했다” 이때의 부모는 연고이며 신은 별애가 된다. 별애는 가족중심주의, 지역주의, 국가주의(인종주의) 등을 만들어 내고, 만해 당시 제국주의 열강들이 신봉했던 백인우월주의 등으로 나타난다. “인간은 사회적동물”이라고 천명했고, “정치(민주주의)는 폴리스의 시민만이 가능하다” 며, 자유와 평등을 신봉하는 민주주의 시원으로 존경받는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역시 차별주의(별애)에 근거한다. 이처럼 별애는 생존에 있어서 가장 원초적이며, 자(自)가 타(他)에 대한 일방적 사랑이라 할 수 있겠다. 19세에 이르러 별애는 다윈의 진화론의 영향으로 “신이 참된 인간(백인)은 에덴동산에서 창조했지만, 다른 인종 적어도 흑인은 다른 곳에서 다른 때에 창조했다”는 <창세기 해석>까지 침투했다. 동양에서 사회윤리의 기본으로 제시되었던 삼강오륜은 군신, 부자, 부부, 장유를 수직적으로 차별하며 “내 아버지와 남의아버지는 같을 수 없다.”는 맹자의 윤리가 여기에 속한다 하겠다. 이에 반해 공자의 인(仁)과 의(義)를 비판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한 묵자는 겸애(兼愛)를 내세웠으며, 다음과 같이 견해를 밝히고 있다. --《묵자》에 겸애를 주장으로 한 편목이 3편이 있다. 여기에 묵자는 우선 ‘따로別’와 ‘함께兼’를 구분하였다. ‘따로’를 주장하는 사람別士이 말한다. “내 어찌 자신을 위하는 만큼 적을 위하고 벗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만큼 위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은 자기 친구가 굶주려도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며, 추위에 떨어도 옷을 입히지 않으며, 병들어도 간호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함께’를 주장하는 사람은 그와 반대의 말을 한다. “나는 자신을 위하는 만큼 친구를 보살펴 주어야 하겠으며, 친구의 어버이도 나의 아버지 같이 위하여야겠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친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 친구가 굶주리면 먹을 것을 주고, 추위에 떨면 옷을 입히고, 병이 들면 간호해 준다. 묵자는 이와 같이 ‘따로’와 ‘함께’를 대비해 놓고 다음과 같이 물었다. “이 두 원리 중 어느 것이 옳은가”
묵자의 겸애는 사(士)계급에 있어서 직업윤리의 확장이며, 사(士) 집단속에서의 동고동락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묵자는 위의 진술의 시비를 가리기위해 “근원은 옛 성왕의 사적에 두어야 하고, 연원은 백성들이 직접 듣고 본 사실에 두어야하며, 효용은 국가와 백성의 이익에 맞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근본, 연원, 효용이라는 삼표를 주장하였다. 살펴보았듯이 묵자는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주는 자와 받는 자’가 분명히 구분되며 인간사회의 도덕적 측면이 강조되므로 시혜적이고 윤리적 사랑이라고 본다. 앞서 말했듯이 불교는 인간을 포함한 일체만물을 하나의 유기체로 이해한다. 이것은 『화엄경』에서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로 표현되는 것으로 별애와 겸애를 넘어서는 자비사상의 근원이 되며, 이사무애(理事無碍)와 사사무애(事事無碍)로 이어진다. 따라서 불교의 사랑은 조건 없는 ‘무연자비’로서 일체만물의 ‘본연적(本然的)사랑’이라 하겠다. 만해는 자비를 가르치는 불교에 투신했고, 깨달음을 얻었다. 불교에서의 출가는 연고를 떠나 ‘본연의 사랑’인 자비를 체득하는 것이다. 연고를 떠남으로서 차별이 사라지고 차별이 없으므로 일체를 평등하게 된다. 이때 연고를 떠나는 출가는 일체중생이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열쇠인 무연자비를 성취한 다음 다시 중생의 세계로 돌아와서 행복의 길을 열어주기 위함이지 결코 세상을 버리거나 등지는 것이 아니다.
4) 불교는 특정종교인가?
앞서 본연적 사랑을 말했듯이 결론부터 말하면 불교는 특정종교가 아니다. 이 같은 주장에 대해 “불교는 특정종교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특정종교가 아니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앞서 말했던 깨달음과 자비는, “진리는 불교(어느 누구의)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를 전제로 한다. 그래서 “장미를 장미라고 부르지 않아도 가시와 향기는 여전 하듯이, 진리는 어떻게 불리는지에 상관없이 언제나 그대로이다” 그래서 불교를 불교라고 부르지 않아도 그 가르침은 여전하다. 그리고 불[火]이라고 말한다하여 입이 뜨겁지 않듯이 붓다의 가르침은 진리를 설명하는 것일 뿐, 자신들이 경전은 일자(日字) 일획(一劃)도 틀림없는 진리라고 주장하는 종교와는 전혀 다른 입장에 있다. 붓다의 가르침은 직접지각인 현량(現量)을 근본으로 하며, 비량(比量;추론)역시 현량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것은 당시 주류를 이루고 있던 미망사와 베단타는 전승되어오는 증언(證言;언어로 된 교리) 즉, 성언량(聖言量)을 존중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려 했던 것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붓다는 다음과 같이 성언량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깔라마들이여, 그대들은 의심 할 수 있고, 혼동 할 수 있다. 의심할 만 곳에서 혼돈이 일어난다. 깔라마들이여, 그대들은 소문에 의해서, 전설에 의해서, 성전의 권위에 의해서, 논리에 의해서, 추론에 의해서, 이유의 타당함에 의해서, [그릇된]견해와 이해에 근거한 믿음에 의해서, 그럴듯한 모습에 의해서, ‘[저]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다’라는 [식으로 무조건 진실이라고 받아들이지] 말라. 까라마들이여, 그대들이 스스로 ‘이 가르침은 선하지 못하고, 이 가르침은 비난받을 만하고, 이 가르침들은 지혜로운 자들에 의해서 비난받을 것이니, 무조건 받아들인 이런 가르침들은 불이익과 고통으로 이끌게 될 것이다’고 알게 되면, 깔라마들이여, 그대들은 [그것들을] 버려야만 한다.--
이것은 모든 종교나 철학 사상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정설(正設)이라고 하는데 비추어 보면 참으로 파격적이며, 한걸음 나가서 붓다는 스스로 자신과 자신의 가르침마저 성언량의 입장에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말 것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사람들은 단지 나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나의 법을 말하여서는 안 된다. 마치 쇠[金]가 불에 의하여 시험되듯이, 나의 법 또한 시험되어야 한다.
불교에서 존중의 대상인 부처는 “우주에 편만한 진리를 깨달음 자”를 뜻하는 일반명사이다. 석가모니는 “석가족의 성자”라는 뜻이며, 자신의 깨달음에 대해 스스로 “법(연기)은 내가 지은 것이 아니며 또 다른 사람이 지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여래가 세상에 나오든지 나오지 않든지 상관없이 법계(法界)는 언제나 머물러 있다. 저 여래께서는 이 법을 깨달음으로서 위없이 높고 올바른 깨달음을 이루어서 모든 중생을 위하여 분별 연설하시고 개발(開發) 현시(顯示)하니, 이른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남으로 저것이 일어난다.”며, 교리는 해탈에 이르게 하는 뗏목과 같다고 밝히고 있다. 이런 연유로 신앙의 대상역시 신이나 교주가 아니라 (우주에 편만한)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포교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국 사람이 한국전통 집인 한옥에 부처를 모시듯이 각 나라는 자신들의 집을 불교성전으로 사용하고, 승려들은 고유의 전통복색을 갖춘다. 그리고 예배의식에 있어서도 그 나라의 전통에 따라 각각 다른 모습을 가진다. 이 같은 불교의 전파방식은 ‘파도는 바닷물이 일어난 것에 불과하므로, 파도와 바닷물은 모양은 다르지만 그 근본은 같다.’는 입장에서 각 나라와 민족의 문화와 관습은 파도에 해당하며, 붓다의 가르침은 바닷물에 해당하므로 포교는 지배와 확산이 아니라 수용과 융합으로 상생을 모색한다. 따라서 불교는 진리의 다른 이름일 뿐 특정종교로 구분 될 수 없다.
2. 불교윤리에서의 선과 악
사회는 복잡한 구조 속에서 유지되고 있지만 그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도덕, 관습, 규범 등의 윤리이다. 그래서 윤리는 인간생존에 있어서 자연환경과 같다고 본다. 인문학에서는 윤리를 이성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진화론에서는 모든 생명체는 생존과 번식이라는 개체의 영속을 제 1의 목적으로 해서 진화해왔으며 정신적 측면도 외에 일수 없다고 말한다. 진화심리학은 과거에는 나치즘과 같은 인종주의 근거가 된다하여 금기시 된 적도 있었지만 최근 들어 인간행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윤리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키거나 행해야 할 도리나 규범”이다. 따라서 사전적 의미가 윤리를 정확히 설명하고 있다면 인지와 문명발달에 비례하여 인간사회에서의 다툼과 분쟁은 줄어들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진화심리학에서는 인간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나이든 사람을 존경(윤리적)하도록 진화해 왔음을 설명한다. 처음에는 인간사회도 동물과 같은 방법으로 질서가 유지되었으나 점차 인지가 발달하면서 물리적 힘이 약화되는 늙음을 걱정하게 되었고, 그 대책으로 젊은 세대들에게 도덕과 윤리를 강요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집단을 이루게 되면 포식자로부터 생존의 확률이 높아지므로 군집생활을 선택하게 되었고, 이때 다양한 경험을 통하여 생존에 유리한 정보를 많이 축적하고 있는 노인은 당연히 존경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인류가 이 같은 집단생존의 방식을 선택함으로서 집단내부의 결속은 강화하고 상대가 되는 외부집단에 대해서는 배타를 하는 방향으로 진화되어 왔다. 위와 같은 진화심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자(自)와 타(他)가 구분되는 별애와 겸애는 더욱 분명해 진다. 최봉수는 『불교란 무엇인가』에서 소승적 몰이해에 빠지지 않는 한 불교의 모든 윤리는 사회복리와 정의를 추구한다고 전제하고, 다음과 같이 목적론적 윤리설과 법칙론적 윤리설을 주장한다.
1) 목적론적 윤리설 : 선의 윤리
(1) 선(善)의 윤리
여기서 선이란 ‘아집을 지닌 채 공리를 추구하는 행위’를 두고 내리는 불교 윤리적 평가이다. 늑대가 양을 잡아먹었다면 이것은 선한 것일까? 아니면 악한 것일까? 근본적으로 선과 악은 상대적 개념이다. 그래서 위의 상황에서는 본질적으로 선과 악이 있을 수 없다. 다만 늑대의 입장에서는 선이고, 양의 입장에서는 악이 된다. 위와 같은 전제 없이 늑대가 가축을 잡아 갔다하여 악으로 인식했고, 그렇게 교육시킨 결과 늑대는 나쁘고 악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러나 늑대를 용맹과 지혜의 상징으로 여기는 문화권에서는 신성한 동물로 여긴다. 이처럼 선과 악은 상대적 개념으로 별애의 입장에 있다. 불교에서는 10선업이 여기에 해당하며, ‘나’라고 집착하는 자기 자신을 존속시키려는 노력으로서 공동체의 이익에 부합되는 행위를 말한다. 만약 공동체의 이익에 반한다면 다른 구성원들의 동의를 얻을 수 없어 결국 개인의 이익이 성취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공자는 가족 간의 사랑인 인(仁)이 국가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가족, 가문, 사회, 국가로 이어지는 충효는 별애의 확장이며, 기독교의 ‘사랑’ 역시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라는 계명을 근거로 하는 별애적 입장에 있다. ‘아집을 지닌 채 공리를 추구하는 행위’인 목적론적 윤리, 별애는 현재 남북이 대치하고, 미국과 중국이 서로 적대적 관계의 경쟁에 있지만 외계인이 쳐들어오면 힘을 합쳐 대응해야 한다는 논리와 같은 맥락에 있는 것으로 자신의 존속을 위해 최대다수 최대행복을 추구하는 서구의 공리주의에 해당 한다고 하겠다.
2) 법칙론적 윤리설 : 正 • 眞 • 覺의 윤리
(2) 정(正)의 윤리 앞서 선과 악은 상대적 개념임을 밝혔다. 여기에서의 정(正)은 ‘아집의 소멸’을 통하여 종교적 생명인 열반을 추구하는 행위를 말한다. 열반은 끝임 없이 일어나는 갈애(渴愛)의 소멸이 이루어진 상태이다. 갈애는 번뇌를 근원으로 하며 번뇌는 집착에 의해서 생긴다. 집착은 ‘아(我)’를 유지하려는 무명이다. 예를 들면 무한(無限)이라는 우주[일체중생]에 있어서 인간은 특정 범위 안에 있는 유한(有限)인 동시에 개개인의 삶과 경험[업]이 각기 다르므로 무한의 입장을 가진다. 유한의 범위에 있는 인간은 무한의 우주는커녕, 마주 대하고 있는 동료의 마음(유한 속의 무한)조차도 정확히 파악 할 수 없다. 그러나 무명이 만들어내는 아집은 무한의 우주를 자신의 입장(유한의 견해)에서 이해하여 ‘선과 악’ ‘좋고 싫음’ ‘높고 낮음’ ‘크고 적음’ 등을 분별한다. 이러한 분별의 발생과 소멸을 사성제로 설명하며 구체적인 실천방법으로서 팔정도의 수행을 강조한다. 사성제, 팔정도는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 그리고 소멸에 이르는 길을 제시함으로서 아집을 소멸하고 선과 악이라는 상대적 개념을 벗어나는 길을 제시한다. 이것은 세속적인 선과 악, 고(苦)와 낙(樂) 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집으로 성취된 선과 낙은 반드시 괴로움으로 귀결됨으로, 아집의 소멸을 통해서 나타나는 상락아정(常樂我淨) 즉, 종교적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열반의 즐거움을 말한다. 따라서 정의 윤리는 상대적 개념에서 벗어난 (우주)법칙론적인 근본적 윤리라 할 수 있다.
(3) 진(眞)의 윤리
출가는 세속을 떠남이 아니라, 다시 돌아옴을 말한다. 마치, 아버지가 장사를 위해 먼 길을 떠났다가 돈을 벌어 가족의 행복을 위해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듯이--- 여기서 참됨이란 ‘종교적 생명의 수준에서 세속적 생명의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행위’를 두고 내리는 윤리적 평가이다. 붓다는 연기를 깨달았다. 연기하는 일체만물은 자성(自性)이 없으므로 공(空)하고, 공하므로 극단이 있을 수 없는 중도(中道)이며, 중도이므로 일체(세속과 열반)는 상호의존적일 수밖에 없다. 앞서 선의 윤리는 세속적 아집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므로 세속적 아집을 떠난 종교적 생명인 정의 윤리를 살펴보았다. 따라서 사성제와 팔정도를 통해 얻어지는 반야지혜(열반)에 머무르는 것은 종교적 생명에 대한 또 다른 아집이 된다.(*현재 한국사회에서 일반대중이 출가를 이해하는 수준-필자 주) 여기에 대해 <화엄경>에서는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라고 선언 한다. 그러므로 세속적 아집과 열반에 대한 아집을 떠난 반야공관에서 보면 세속과 열반(출가)역시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으므로 분별 될 수 없다. 이것은 곧 “중생이 아프면 보살도 아프다”는 <유마경>의 불이(不二)사상으로서 일체중생을 향한 보시인 육바라밀로 귀결 된다. 바라밀은 궁극적인 완성을 뜻하는 것으로, 세속적인 생명까지도 보시하는 것을 말한다. 세속적 생명을 보시하더라도 깨달음으로 성취한 종교적 생명은 그대로 유지된다. 따라서 세속적 생명을 종교적 생명과 동등하게 만드는 윤리가 진의 윤리이다.
(4) 각(覺)의 윤리
나의 목숨과 숨 쉬는 공기의 가치가 차별 될 수 있을까? 앞서 붓다의 깨달음을 말하면서 --“저 여래께서는 이 법을 깨달음으로서 위없이 높고 올바른 깨달음을 이루어서 모든 중생을 위하여 분별 연설하시고 개발(開發) 현시(顯示)하니”---라고 밝힌바 있다. 여기에서 분별, 개발, 현시는 일체중생가운데 인간이라는 중생을 중심으로 붓다의 교설이 설해졌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앞에서 살펴본 선, 정, 진의 윤리가 인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각의 윤리는 궁극적인 깨달음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궁극적인 깨달음이란 일체중생의 진실한 모습을 통찰하는 것으로 ‘나의 목숨과 공기가 차별 될 수 없다’듯이 일체 만물은 서로 상호의존적 관계의 연결고리(인드라망)로서 끝임 없이 전개됨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인간의 생명뿐만 아니라, 다른 중생 및 자연존재들까지도 상호대립하지 않고 조화롭게 연결됨을 느낄 수 있다. 여기서 ‘인간생명의 수준에서 다른 중생 및 자연의 참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각의 윤리임을 도출할 수 있다. 이처럼 각의 윤리는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과 함께하는 일체를 평등하게 보는 것으로 동양에서 말하는 일체의 원리로서 천(天)이나 서양의 주제자로서의 천(天)이 가지는 수직적 패러다임과는 다른 입장에서의 윤리라 할 수 있겠다. 살펴보았듯이 불교윤리는 아집의 윤리로서 선, 아집소멸의 윤리로서 정, 아집과 법집(法執)을 소멸한 인간평등의 윤리로서 진, 인간뿐만 아니라 일체중생(일체만물)의 평등윤리인 각으로 정리 된다.
3. 선, 정, 진, 각 윤리에서 본 <조선독립의 서>
만해가 경험한 제국주의는 집단이익이라는 선(善)의 윤리를 근간으로 타(他)를 억압했고, 진화론을 왜곡한 자연법칙을 내세워 일방적 윤리로서의 정(正)을 내세워 자신들의 침략과 억압을 합리화 하려했다. 이것은 만해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도 세속의 원리로 작용하며, 힘을 근본으로 하는 정의의 진면목이기도 하다. 그래서 붓다는 이 세계를 사바세계라고 규정한다. 사바세계는 “먼지가 낀 것처럼 더럽고, 참고 인내해야 살 수 있다”는 뜻에서 예토(穢土), 인토(忍土), 감인토(堪忍土)로 표현된다. 선과 정의 윤리는 사바세계에서 원칙처럼 받들어지는 생존의 방식으로서 언제 어느 곳에든지 분별과 분쟁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형제간에 싸움을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방치하는 부모가 없는 것처럼, 적어도 불교는 사바세계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출세간인 종교가 존재해야 한다는 입장에 있다. 그래서 ‘출가는 사바세계라는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으로)다시 돌아옴으로서 완성되는 것이다.’ 출가사문으로서 만해에게는 사바세계도, 그렇다고 열반의 세계도, 실재하지 않는다. 다만 사바세계에 집착하는 중생들만 있을 뿐이다. 이 중생 역시 본래부처이므로 방편을 열어 자각케 하면 그만이다. 붓다가 중생들의 근기에 맞추어 대기설법을 펼치셨듯이 만해 역시 선, 정, 진, 각의 순차적 윤리로 세상을 깨우려 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로 시작되는 <조선독립의 서>는 적어도 ‘진(眞)의 윤리’의 입장에서 파악하고 ‘각(覺)의 윤리’를 실천하려 했던 보살행으로서 만해를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정의하고, 일본은 적으로 확정하고 있는 신채호는 선과 정의윤리인 세속적 입장을 강조했다면, 만해는 진과 각의 윤리를 통해, 제국주의에 고통 받는 민중과 이끌고 있는 개인(지배집단)의 양심에 호소하고 있다. 국가를 구조와 외형적으로 보면 개인들의 집합체이지만, 경영의 입장에서는 통수권자(지배집단)의 신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만해는 조선독립뿐만 아니라 인류평화는 지배집단의 의해서 세뇌되어진 힘없는 피지배층들 간의 투쟁이 아니라 지배집단 즉, 국가를 이끌고 있는 통수권자들의 올바른 신념에 의해서 이루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러시아 독일혁명에서 보듯이 결국에는 지배집단은 피지배자들의 행복과 자유의지를 꺾을 수 없으므로 침략야욕은 허황된 꿈임을 깨닫게 하려 했다. 마치 현재 한국사회 혼란은 법과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운영하는 권력의 문제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처럼. 국가 간의 전쟁은 결국 지배집단의 이익을 위해 다수의 피지배계급들이 사지(死地)로 내몰리는 것이다. 그래서 만해는 국가, 종교, 정치 등등 어떤 경우에서도 타(他)의 의지에 의해서 행복의 제1의 조건인 생명이 사지로 내몰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 된다.
(1) 세상에는 대 원칙이 있다 (眞 • 覺의 윤리) <조선독립의 서>는 3.1만세운동으로 투옥되었던 1919년 일본검사의 심문에 대한 답변형식의 글이지만 개론은 각의 윤리로 시작한다. 만해는 자신이 조선독립에 투신한 이유를 “자유는 만물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라고 전제한 다음 독백형식으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생명을 터럭처럼 여기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희생을 달게 받는 것이다. 이것은 인생의 권리인 동시에 또한 의무이기도 하다.”라고 밝히고 있다. 외형적으로는 일본이 조선을 구분하고 지배와 피지배를 분별하고 있지만, 깨달음의 분상에서 보면 사바세계에서 일어난 하나의 사건이며, 출가사문으로서 사바세계의 고통을 제거하려는 것은 당연한 일임을 천명한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사바세계는 고통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사바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 열반을 얻도록 하는 것은 보살과 부처가 해야 할 당연한 의무이며, 대승불교는 ‘중생을 제도하는 일과 부처를 구하는 수행은(깨달음을 얻는 것) 차별이 없다’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모토(motto)로 하여 붓다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처럼 붓다의 가르침을 통찰한 만해의 입장에서는 침략군의 일본인도, 핍박받는 조선인도 무명이 만들어내는 사바의 고통에 빠져있기는 매 마찬가지이다. 붓다가 일본인과 조선인의 고통을 차별하지 않는 것처럼, 만해는 1931년 11월에 <삼천리>지와의 대담에서 “석가모니가 다시 조선에서 태어난다면 분명히 조선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구제에 전력을 다할 것이다. 조선인만의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며, 자신의 입장을 피력한바 있다. 다시 말하면 만해는 일본침략의 문제가 아니라 출가사문으로서의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는 인류평화와 중생의 안락이라는 이상향의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 했을 것이다. 그것은 만유의 이치를 따르는 것이고, 조선의 독립역시 만유의 이치 속에서 당연한 것임을 <개론>과 <조선독립 선언의 이유>에서 밝히고 있다.
(2) 세속의 윤리를 인류평화로 확대하자.(善 • 正의 윤리)
세속적인 선(善)은 국가주의를 만들었고, 국가주의가 군국주의를 낳으면서 18세기 이후 세계는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세계는 이러한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 민족자결주의를 근거로 하여 폴란드와 체코의 독립을 지원하고 있다. 만해는 위의 두 가지 이유를 ‘모든 생명체는 자기 집단만이 누리는 자유를 갈망하는 본성이 있으므로 설령 같은 종(種)에게 지배를 당하는 것이 이익이 될지라도 자유의 박탈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처럼 생존을 위한 배타와 자유에 대한 갈망은 만유의 본성에 해당하는 것으로 누구도 막을 수 없다. 독일의 패망은 연합군이 무력으로 거둔 승리라기보다는 자유를 갈망하는 독일내부의 혁명이 원인이 되었으며, 독일역시 전쟁의 한계를 실감하고 스스로 살길을 택했음을 다음과 같이 일본에 주지시키고 있다.
--그러면 연합군 측의 대포가 강한 것이 아니었고 독일의 칼이 약한 것이 아니었다면 어찌하여 전쟁이 끝나게 되었는가. 정의와 인도의 승리요, 군국주의의 실패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정의와 인도, 즉 평화의 신이 연합군과 손을 잡고 독일의 군국주의를 타파했다는 말인가. 아니다. 정의와 인도, 즉 평화의 신이 독일국민과 손을 잡고 세계 군국주의를 타파한 것이다. 그것이 곧 전쟁 중에 일어난 독일의 혁명이다. 독일혁명은 사회당의 손으로 이룩된 것인 만큼 그 유래가 오래고 또한 러시아 혁명의 자극을 받은 바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총괄적으로 말하면 전쟁의 쓰라림을 느끼고 군국주의의 잘못을 통감한 사람들이 전쟁을 스스로 파기하고 군국주의의 칼을 분질러 그 자살을 도모함으로써 공화혁명의 성공을 얻고 평화적인 운명을 개척 한 것이다. 연합군은 이틈을 타서 어부지리를 얻은 데 불과하다.--
또한 만해는 일본의 무력과 선진문물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일본이 인류평화라는 거시적 안목으로 능력을 발휘 할 때 그야 말로 동양의 평화와 세계의 평화가 이루어 질 수 있음을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일본이 넓은 도량으로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고 일본인 구두선(口頭禪)처럼 외는 중•일 친선을 진정 발휘하면 동양평화의 맹주를 일본 아닌 누구에게서 찾겠는가. 그리하면 20세기초두 세계적으로 천만년 미래의 평화스런 행복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천사국이 서반구의 미국과 동반구의 일본에 있게 되니 이 아니 영예겠는가. -(중략)- 조선의 문명이 일본에 미치지 못함은 사실인즉 독립한 후에 문명을 수입하려면 일본을 외면하고서는 달리 길이 없을 것이다. -(중략)- 두 나라의 친선은 아교나 칠같이 긴밀할 것이니 동양평화를 위해 얼마나 좋은 복이 되겠는가. 일본인은 결코 세계 대세에 반하여 스스로 손해를 초래 할 침략주의를 계속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고 동양평화의 맹주가 되기 위해 우선 조선의 독립을 앞장서서 승인하리라 믿는다.--
이처럼 만해는 “생명체가 가지는 생존을 위한 자유갈망의 욕구”인 세속윤리를 국가의 이익에서 벗어나 세계평화와 인류행복으로 확대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만해는 아집에 근거하고 있는 세속윤리를 세계인류평화로 확대시킴으로서 침탈과 전쟁을 최소화 시키고, 그 폐해와 후유증, 즉 인과라는 우주의 법칙에 의해서 전쟁이후에 필연적으로 받게 될 고통을 줄이려 했다고 보여 진다.
끝맺는 말--
만해는 <조선독립의 서>를 쓰기 이전 <불교유신론>과 『불교대전』을 집필한다. 『불교대전』은 종래 경, 율, 론 삼장으로 구분하고, 경전의 목록에 따라 분류했던 방식에서 벗어나 내용과 뜻을 중심으로 정리하여 자신이 <불교유신론>에서 주장 했던 불교혁신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것은 만해가 유학(儒學)을 공부했고, 일본과 러시아등지를 돌아보았으며, 서구의 학문을 접했지만 결국 자신이 종(宗)으로 삼고 있는 불교 안에서 녹여내고 있음을 말하며, 불교적 이상향의 세계를 세상의 본(本)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불교는 우주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고 있다. 다만 시시각각 다가오는 현실은 인과에 의한 순서의 차이 일뿐 근원적 차별은 아니며, 일체역시 차별적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만해가 <조선독립의 서>에서 제국주의와 일본의 문제를 지적하기에 앞서 당시 세계정세를 “다행인지 불행인지 18세기 이후 국가주의는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라고 적고 있다. 이 같은 입장에 있는 만해에게는 일체의 만물과 사건에 있어서 어떤 차별적 입장이 있을 수 없다. 다만 아(我)에 집착하여 그것을 진실이라 믿으며 타(他)를 억압하고 지배하는 무명(無明)의 문제를 지적하고 개선하는 노력이 있을 뿐이다. 이를 근거로 만해의 독립운동은 “불교를 종(宗)으로 하고, 조국의 독립을 방편(方便)으로 하여, 전 인류의 행복을 구현하려 했다”로 정의되어야 한다. 이것은 신채호로 대표되는 민족주의의 별애적 윤리와, 서구와 일본을 배워서 부국강병을 이루자는 윤치호, 서재필, 이승만 등이 함몰되었던 서구우월주의의 한계를 뛰어 넘는 것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일본인의 나라사랑과, 조선인의 나라사랑이 충돌하면 전쟁이 되고, 경상도 사람과 전라도 사람이 부딪히면 갈등이 된다. 이것은 결국 개개(箇箇)의 선(善)과 선(善)의 충돌이 악(惡)이라는 엉뚱한 결과를 낳는다. 이 같은 문제로 인해 현재 지구촌은 다음과 같은 위기에 직면해있다. 첫째,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는 속도가 자연이 회복하는 속도를 앞지른 지 오래이다. 그래서 인간 대 인간의 평화를 넘어서 인간과 자연이 평화를 이루어야한다. 둘째, 인간의 탐욕으로 지구를 파괴하도 남을 만큼의 무기와 핵발전소 등을 만들어 놓았고, 그 속도를 멈추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사회와 국가의 윤리가 지구촌이라는 세계로 확산되어야 한다. 셋째, 기계문명은 무한생산에 돌입하고 있고, 소비는 유한에 머무르고 있다. 이것은 18세기 이후 기계문명을 앞세워 전 세계를 휩쓸었던 약육강식의 사회구조가 한계에 왔음을 말한다. 그래서 세계는 새로운 질서를 찾아야 한다. 위와 같은 문제는 이미 만해가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세계질서를 주도하는 서구의 사상과 종교, 물질문명의 한계를 지적했고, 또 다시 <조선독립의 서>에서는 세속적 윤리가 지구촌으로 확대 될 때 인류의 평화가 도래함을 역설하고 있다. 홍성은 만해의 고향이다. 인간은 태어난 고향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각인한다고 한다. 그만큼 인간에게는 생존의 첫발을 내디딘 고향이 중요한다. 그렇다고 고향이라는 연고에 함몰되면 그것은 모든 분쟁의 시발점이 되는 별애가 된다. 만해의 출가는 고향을 떠남이 아니라, 별애인 연고를 떠남이요, 무연자비로 인류의 행복을 가득 짊어지고 우리에게 다시 돌아 왔음을 알아야 한다. 이 같은 만해의 정신으로 현재 우리사회가 겪고 있는 동서로 나뉘어 차별하고, 진보와 보수로 대별되며, 좌우로 갈등하고, 남북이 대결하는 혼란과 분열을 치유해서 홍성이 대한민국의 화합과 인류평화의 시발점이 되었으면 한다.
◈참고문헌
임종국 - 『신록친일파』 돌베개, 1991. 촤봉수 - 『불교란 무엇인가』 부디스트웹닷컴, 2000. 김호성 - 『불교해석학연구』 민족사, 2009. 진철승 역 - 『붓다의 가르침』 대원정사, 2001. 전중환 - 『오래된 연장통』 사이언스북스, 2010. 박노자 - 『우승열패의 신화』 한겨레신문사,2006. 정인재 역 - 『중국철학사』 형설출판사, 1999. 송건호 - 『한국현대인물론』 한길사, 1985 김광식 - 『한용운평전』 장승, 2007. 불교문화연구원 - 『한용운전집』 2006. |
첫댓글 깊은 말씀 고맙습니다~~!
긴 글 읽을주셔서 고맙습니다.
27일 세미나가 있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