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백일몽유
2021-02-22 오후 5:01:32김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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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수 / 성균관 부관장, (사)일두기념사업회 이사장, 한국수필작가회장, 지리산문학관장
설날 아침 함양의 상징 상림 숲길을 지나 최치원역사공원의 고운기념관으로 올라갔다. 2층 문루인 고운루를 지나 마당에 올라섰다. 불굴의 노력 정신을 상징하는 고운 선생의 말씀, 남이 백 번 하면 자기는 천 번 한다는 「인백기천(人百己千)」 어록비를 음미하고 고운 선생 동상 앞에 서서 허리 숙여 참배하며 세배를 대신하였다. 또 제수 대신 시조 한 수 읊어 드리며 경내를 서성였다.
최치원역사문화관 / 김윤수
외로운 조각구름 고운이 아니더라
온 겨레 우러르는 겨레의 스승이라
이 땅에 우러러 찾는 문화관이 장엄하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기념관, 역사관, 상림관이 폐관 중이라서 안에 들어가 볼 순 없지만 이미 많이 본 것이라서 아쉬울 건 없었다. 오히려 주변을 에돌아 걸어 다니며 둘러볼 기회가 생겨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개관 전부터 명칭문제를 건의도 하고 글도 썼으나 한 번 정해진 방침은 바꾸기 어렵다. 권력자의 말 한마디면 금방 바뀌는데 말이다. 그래서 권력을 선호하는가보다.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이듯이 권력은 강철로 된 펀치인가보다.
고려시대 처음으로 문묘종사된 선현 문창후 고운 최치원. 문묘종사 제1호이다. 작년 2020년이 문묘종사 1,000주년이었다. 1020년(고려 현종11)에 한국인 최초로 문묘에 종사하고 1023년(고려 현종14)에 중국 문묘 종사자와 동격의 작위 칭호로 문창후에 추봉하였다. 유교의 총본산 성균관에선 기념행사도 했으나 여기 최치원역사공원에선 적막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나 가야산에 은거하며 워낙 청일하게 사시다 가셨기에 유교의 신선, 유선으로 추앙되었다. 유교에선 유선이라 추앙하고 도교에선 청학동신선으로 흠모하였다. 살아 있는 신선에게 문묘에서 제사상을 받으라고는 아니 했을 것이다. 문묘종사는 인간 최치원, 선비 최치원을 선언한 것이다.
탁영 선생은 일두 선생과 지리산을 유람하고 천왕봉에 올라 한국 선비의 기상을 떨쳤다. 「속두류록」을 쓰며 고운 생존 시에 태어났다면 집편지사 곧 마부라도 달게 했을 것이라고 하였다. 필자도 고운 당시 태어나 고운의 가르침을 받았다면 티끌 세상의 티끌 인간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도학이 충만한 조선 중기에 오면 고운 추모 분위기가 성토 분위기로 확 바뀌었다. 불교에 아첨한 인간이니 문묘종사는 부당하다는 것이다. 삼교회통의 대유학자를 편견으로 보는 병폐이다. 다문화시대의 겨레의 스승이 될지 어찌 알았으랴.
인산 선생은 고운 선생이 단군의 환생 후신이라고 하였다. 필자는 인산 선생이 고운 선생의 환생 후신이라고 여긴다. 단군의 홍익인간, 고운의 풍류도, 인산의 활인구세 정신은 상통한다. 고운을 참배하면 일거삼득이 된다. 단군도 뵙고 고운도 뵙고 인산도 뵙는 것이다.
고운기념관 현판을 바라보며 저 밑에 백연서원 현판을 달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백연서원은 천령군(함양 신라 때 명칭) 태수 고운 최치원과 함양군수 점필재 김종직을 향사하는 함양읍의 유일한 서원이었다. 대원군의 서원훼철령 무진사화(1868, 고종5)에 파괴되고 복원하지 못하여 유감이다.
현재 함양에는 함양읍 없고, 병곡면에 송호서원(고은 이지활), 백전면에 백운정사(송정 강문필), 휴천면 없고, 유림면에 여암영당(여암 정도현), 마천면 없고, 서상면에 의재사(의재 문태서), 서하면에 서산서원(채미헌 전오륜), 안의면에 황암사(존재 곽준, 대소헌 조종도), 신암사(신암 노응규), 종담서당(지족당 박명부), 지곡면에 도곡서원(덕곡 조승숙, 죽당 정복주, 송재 노숙동), 정산서원(삼원당 허원식), 덕곡사(덕곡 조승숙), 수동면에 남계서원(일두 정여창), 청계서원(탁영 김일손), 구천서원(일로당 양관), 화산서원(회헌 임대동), 정곡사(당곡 정희보), 연화사(사근산성 9원수) 등이 있다.
고운기념관 안에 사당을 조성하여 천령군 태수 고운 최치원과 함양군수 점필재 김종직을 모신 백연서원 사당을 복원하는 것이다. 본향 2위에 안음현감 일두 정여창, 안의현감 연암 박지원의 위패를 추가하여 2인을 추향한다. 4현은 함양사대목민관이니 함양사대목민관 기념서원으로 백연서원을 복원하는 것이다. 사당 명칭은 목민사라 한다.
천령군 태수 고운 최치원은 함양읍 한들을 흐르는 물길을 돌리고 둑을 쌓고 나무를 심어 홍수로부터 방지하는 숲을 조성하였으니 한국 최초의 인공림 함양 상림이다. 지리산에서 산삼을 캐어 신라 조정에 진상하여 대당외교예물로 제공하고 산삼시문도 남겼다. 함양군수 점필재 김종직은 한훤당 김굉필과 일두 정여창, 뇌계 유호인, 남계 표연말 등의 뛰어난 제자를 기르고, 호차원(虎茶園)을 조성하여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덜어주었다.
안음현감 일두 정여창은 광풍루와 제월당을 건립하여 스승 점필재를 추모하고 편의수십조를 제정하여 법치를 확립하고 양로례를 베풀고 형편상 혼례를 못 치른 처녀총각에게 혼수를 장만해주었다. 신고당 노우명 같은 제자를 길러 옥계 노진의 가학을 배양하였다. 안의현감 연암 박지원은 하풍죽로당과 백척오동각 같은 적벽돌 건축을 지어 실학정신을 구현하고 산삼원(山蔘園)을 조성하여 양생하고 함양군 학사루기와 흥학재기 등 문화유산 기문을 지어주었다.
4현의 위패를 병렬하여 병향한다. 고운과 일두는 문묘종사 유현이고 점필재는 문묘 2현의 스승이고 문묘종사운동이 실패했으나 제2의 문묘에 종사될 유현이다. 연암은 문묘종사운동이 없었지만 실학의 대가로 실학자 티오가 있다면 당연히 문묘에 종사될 유현이었다. 제2의 문묘를 기약할 수밖에 없겠다.
고운기념관 옆 빈터에 강당을 신설하여 좌학우묘 형식으로 배치하는 것도 무방하겠다. 강당 명칭은 계원필경학당으로 하여 최치원고전을 강의하는 장소로 이용하면 좋겠다. 강의하다가 강의듣다가 머리 아프면 고운루에 올라가 바람 쐬며 천왕봉을 바라보는 것도 한 공부이리라.
동재 서재도 있어야 완벽한 서원 규모가 완성된다. 서재는 최치원역사관과 서재 두 현판을 달고, 동재는 상림관을 폐지하고 최치원문화관과 동재 현판을 달면 된다. 이 동재는 함양사대목민관기념관으로 겸용하는 것이다.
통칭은 백연서원, 최치원역사문화관으로 한다. 백연서원은 성균관의 유림서원으로 인준받아 유교 활동 하고, 최치원역사문화관은 박물관으로 등록하여 박물관 문화 활동을 하는 것이다. 고운기념관 뒷산 필봉산에 함양군이 조성한 최치원산책로를 걸으며 백주대낮에 백일몽을 꿈꾸며 비몽사몽 거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