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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군수(咸陽郡守) 윤광석(尹光碩)에게 보냄
燕巖集卷之二 潘南朴趾源美齋著 / 煙湘閣選本○書
與尹咸陽光碩書
僕於足下。本無葭莩之親。又無纖芥之嫌。及在安義。則與咸陽元定兼官也。四載相鄰。不設畛域。月三同推之會。鄰倅暇日之集。談笑欵洽。情志無阻。雖同閈舊要。何以過之。荷堂竹館。未甞不聯枕也。風軒月榭。未甞不飛觴也。臨水登山。筇屐相隨。民憂邑瘼。造次共商。而公牒私牘。靡日不往復也。所謂白頭如新。傾葢如舊者。豈虛語也哉。苟無大故。則庶幾其共期歲寒矣。今見頃來後村集。誣辱吾先祖錦溪君。罔有紀極。今僕與足下。一朝爲百世之讐也。是吾與百世之讐。飛觴聯枕。譚笑追隨。而不覺於四載之中也。凡爲吾先祖後孫者。孰不同此寃憤沫飮之情。而僕於足下。尤有所痛恨者。曩歲會推之罷還也。足下出一草冊曰。吾家本無文獻。而先祖後村公。有數篇遺文。將付剞劂而裒集。墓文及年譜遺事。僅成一冊。願爲略閱凡例。仍手自裹紙。囑付鄙隷。歸後乍展。則標籤叢雜。塗乙胡亂。性不耐煩。姑且摺置。繼有翻庫之行。竟未一目。而足下謂急於送京凈寫。不日推去。則實未知其中有何許說話也。其後陪臣傳之釆錄。僕所指也。刻手僧之來借。僕所遣也。僕之又以會推往也。與足下共登郡樓。是時樓中刻役方張矣。僕取看本縣僧所刻之數板。且詡手品之精好。因要印後之見賜。僕之所以樂與成美者。誠以江都一節。起人曠感。而故家遺乘。葢欲藏弆其一本也。詎料其中誣悖之至此哉。頃者。足下突如其來。爲謝不審之失。且曰。吾以俸廩餘資。雖任剞劂之役。而若其刪述之事。自有其人。且吾時病甚。亦未及詳閱。若果知有此一段。而故爲送示。則世豈有如許心術哉。本事爽實旣如此。則惟當亟圖毁改而已。紛紜告絶。猶屬餘事。尹說止此。 其說丁寧似出眞情。及見足下答尹莘叟書。有曰。朴某在安義時。屢閱而稱善。僕於是又不覺心顫而膽掉也。人非梟獍。以何膓肚。人辱其先而反謂之稱善乎。人非鬼蜮。抑何心肝。辱人之先而以其書遺之乎。是可忍也。孰不可忍也。足下旣懷此陰譎。則何以來見其方此血視之人乎。何以摧謝其從前不審之失。而又言其亟圖毁板乎。何爲言自此轉往綾州族兄之家乎。噫嘻痛矣。在昔七臣之被告也。吾先祖尤爲凶徒之所仇嫉。隱鍔伺影。厥有年所。及其捏合。高成金應璧之獄。以爲藉口之資者。李爾瞻之凶國也。攙引前後。不相涉之事。添之播告之文者。奇自獻之逞憾也。逮癸亥改玉之後。年少喜事者。不詳本事。依俙抉摘。謗議喧騰。喙喙郵傳。從以修隙者起焉。樂禍者起焉。吾先祖遂以獲罪。竄謫流離者十餘年矣。其後聖母遺命。渙發雷雨。先朝昭晣。高揭日月。當時群公之議讞王府。俱在同朝衆賢之伸卞。神明可質。故淸陰金文正公之銘碑則曰。近世士林之所倚重者。有若李梧里,李白沙,申玄軒,吳楸灘,鄭守夢數公。而不阿私以廢公議也。惟時訾公之口。哆若南箕。公不自白。數公者白之衆人所毁。君子所完。其言足徵。百世永觀。銘辭止此。 尤菴宋文正公之表墓則曰。當時國舅之獄。延及諸公。而公只明其不樂於平日者。入於爰辭。亦謂其事已泯於無徵。則可保無傷於國舅也。凶徒之追人前爰。衊公於播告之文。尤非始慮所到。故沙溪老先生。甞言錦溪斷無他意。不幸蠱獄繼起。而遂爲今日之誣案。表辭止此。 噫。此皆先賢之定論也。墓道顯刻。昭布森羅於諸集之中。一國之疑謗快釋。百世之公議已定。則後生小子之追加惡言。妄肆誣筆於數百年之後。抑獨何心哉。語意憯毒。誣我先祖之不足。而直驅延興於巫蠱。抑又何心哉。吾未知尊家後村公。所欲比。而自同者誰歟。捃摭爰辭。則凶徒之藉口如彼。愍䀌寃枉。則群賢之篤論若此。設令當時不詳事實。酒席噂𠴲。有或隨衆。其後事根。彰明較著。則必將悔失前言。樂與衆賢同歸矣。設又當時篤信浮謗。株守前惑。自世之掌故家觀之。尙駭其道塗掇拾。鹵莽言議。况非當日之手筆。而專出於後人之追演乎。是欲揚其先烈。而先自陷於誣先之科。名爲實記。而不念反置於爽實之地也。設又當時被枳臺路。未克臆唱。其後十數年之間。臺端出入。非止一再。則何所顧忌而竟不一攄其素蓄乎。設又當時蓄怨旣深。手自錄置。適見其志切榮塗。留憾傳家也。豈以後邨之賢。而果有是哉。且吾宗之玄石先生。錦溪君之孫也。尊家魯西。卽後邨公之猶子也。尊家包藏若此。則必有聞乎其家庭。如之何匿怨而友其人乎。以今推之。其所匿怨。自有傳來之家法耶。是未可知也。嗚呼。當城陷草芟之日。敵鋒一慬。亦足以彪揚一世。榮耀後昆。而區區臺地之一差池。固不足輕重於已辦之大節矣。何必厚誣他人之祖先。然後始益光顯於厥世耶。後人之摸撈追述。亦可見欲巧而反拙也。近日入聞益有可駭者。足下不憚說謊。到處張皇曰。與某不廢往還。盃酒團樂。無異平昔。其說之謬悖一至此哉。追思嶺邑往還之時。尙切痛恨于胸中。忍復團欒於刺心次骨之日乎。今日足下之云爲。輒出於天理人情之外。古所稱知人未易。正謂此也。頃日相對足下。容怍而語絮。要不出改鐫一欵。則僕之所以含忍須臾。不爲門中衆議之憤薄崢嶸者。誠以望誠於毁板之一言。而且爲歷擧吾先祖被誣本末以暢曉之也。雖不免言語酬酢。以此謂之杯酒團欒。不異平昔可乎。吾宗中亦有咎僕以不可與讐人相對。亦不必與讐人交口辨論。並此洞陳。從今以往。但願勿復飾辭於常情之外。俾絶口語之紛紜焉。今僕於足下。怨旣深矣。交已絶矣。猶復披露衷曲者。竊自附於不出惡聲之義也。
연암집 제2권 /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함양 군수(咸陽郡守) 윤광석(尹光碩)에게 보냄
나는 그대와 본래 가부(葭莩)의 친분도 없고, 또 티끌만 한 혐의도 없는 처지였사외다. 급기야 안의(安義)에 있게 되니, 함양(咸陽)과 안의는 본래 정해진 겸관(兼官)이어서, 4년 동안 서로 이웃이 되어 피차의 한계를 두지 아니하고, 한 달에 세 번 옥사(獄事)를 동추(同推)하는 모임이나 이웃 고을 원님들과 틈을 내어 만난 자리에서 흡족히 담소를 나누어 흉금의 간격이 없었으니, 아무리 한마을의 옛 친구라 할지라도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었겠소?
하당(荷堂 연꽃이 피어 있는 집 )과 죽관(竹館 대숲이 있는 집 )에서 베개를 나란히 베기도 했고, 풍헌(風軒 창이 있는 작은 집 )과 월사(月榭 달구경하는 정자 )에서 술잔을 나누기도 했으며, 물놀이와 산놀이에도 서로 빠진 적이 없었지요. 백성의 근심이나 고을의 폐막(弊瘼)을 잠깐 사이에도 같이 상의했고, 공문이나 사신(私信)도 주고받지 않은 날이 없었소. 이른바 ‘머리가 희도록 서로 만나도 낯선 사람 같고, 초면 인사만 나누어도 옛 친구 같다’는 것이 어찌 헛말이겠소? 진실로 큰 허물이 없는 한, 어려움을 만나도 변치 않도록 함께 기약하기를 바랐던 것이외다.
그런데 지난번에 보내온 후촌집(後村集)을 지금 보니, 우리 선조 금계군(錦溪君)을 모함하여 욕보인 것이 한이 없었소. 이제 나와 그대는 하루아침에 백세(百世)의 원수가 되었구려. 이렇다면 나는 백세의 원수와 더불어 술잔을 나누고 베개를 나란히 베며, 담소를 나누고 서로 추종하면서도 4년 동안이나 까맣게 몰랐던 셈이오.
무릇 우리 선조의 후손된 자라면 누구나 원통하고 분해서 피로써 얼굴을 적시고 눈물을 삼키는 이와 같은 감정을 똑같이 품지 않으리오마는, 나는 그대에게 더욱더 원통하고 한스러운 것이 있소. 지난해 동추의 모임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그대가 초책(草冊 초벌로 쓴 책 ) 하나를 꺼내며,
“우리 집안에는 본시 문헌이 없는데 선조 후촌공이 두어 편 남긴 글이 있어, 장차 인쇄에 부칠 생각으로 묘도문자(墓道文字)와 연보(年譜) 및 유사(遺事)를 주워 모아 겨우 한 책을 이루었소. 범례만이라도 대강 열람해 주기 바라오.”
하면서, 손수 종이에 싸 나의 하인(下人)에게 넘겨주었소. 돌아와서 잠깐 펴 보니, 표시하려고 붙여 놓은 쪽지가 하도 번잡하고 새까맣게 지우고 고쳐 쓴 자국이 몹시 어지러웠소. 나는 번거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성미라 우선 책을 접어 둘 수밖에 없었고, 뒤미쳐 번고(飜庫)의 행차가 있어 마침내 한 번도 훑어보지 못했는데, 그대가 서울로 보내 정서(淨書)하는 일이 급하다 하며 불시에 찾아가고 말았으니, 그 속에 무슨 말이 들었는지 실로 알지 못했소.
그 후에 배신전(陪臣傳)에서 뽑아 싣게 한 것도 내가 지시한 바요, 각수승(刻手僧)을 빌려 가게 된 것도 내가 보낸 것이지 않았소? 그리고 또 내가 동추하러 갔을 때 그대와 함께 함양군의 학사루(學士樓)에 올랐는데, 이때 누 가운데에서 각자(刻字)하는 일이 한창이었지요. 나는 우리 고을 중이 새긴 목판 두어 개를 가져다 보고 솜씨가 정교함을 자랑하고 나서, 인쇄한 뒤에 한 벌을 선사해 달라고까지 하였지요.
내가 이렇게 즐거이 남의 아름다운 일을 도와서 완성하는 데에 참여하게 된 까닭은, 진실로 강화도에서 순절한 일이 지금까지도 사람들을 감동시킬 뿐더러 고가(故家)의 남겨진 가승(家乘)이니만큼 그 한 벌을 보관하고 싶어서였지요. 어찌 그 속의 모함과 패설(悖說)이 이 지경까지 이를 줄이야 생각인들 했겠소?
전번에 그대가 갑자기 와서는 자세히 살펴보지 못한 실수였다고 사과하고, 또 이렇게 말하였소.
“나는 봉급의 여유가 좀 있어서 비록 인쇄하는 역사(役事)를 맡기는 했지만, 글을 삭제하거나 그대로 살리는 일은 할 사람이 따로 있으며, 더욱이 나는 그때 병이 심하여 미처 자상히 열람하지 못했소이다. 만약 이 한 단락이 들어 있는 것을 과연 알고서 일부러 보내어 보게 했다면, 세상에 어찌 이러한 심술이 있겠소? 이 일이 사실과 어긋남이 이미 이와 같으니, 마땅히 훼판(毁板)하고 고쳐 넣도록 빨리 서둘 따름이오. 떠들썩하게 절교를 통고하는 일은 오히려 나중 일이오.” - 윤(尹)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
그 이야기가 분명 진정에서 나온 것 같았는데, 급기야 그대가 윤신수(尹莘叟)에게 답한 편지를 얻어 본즉 ‘박 아무개가 안의에 있을 적에 여러 번 열람해 보고 아주 잘 되었다고 칭찬했다.’고 하였소. 나는 이에 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떨리고 쓸개가 뒤틀리는 듯싶었사외다. 사람이 효경(梟獍)이 아닌 이상, 무슨 심보로 남이 제 선조를 욕했는데 도리어 잘 되었다 칭찬했겠으며, 사람이 귀역(鬼蜮)이 아닌 이상 무슨 억하심정으로 남의 선조를 욕하고서 그 책을 그 자손에게 보내 준단 말이오? 이 일을 참을 수 있다면, 참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소?
그대가 이미 이러한 간계를 품은 이상, 무슨 까닭으로 와서 바야흐로 눈에 핏발이 설 이 사람을 만나 보았으며, 무엇 때문에 종전에 살피지 못한 잘못을 사과했으며 또 훼판을 빨리 서둘겠다고 말했소? 무엇 때문에 이제부터 방향을 바꾸어 능주(綾州) 족형(族兄)의 집으로 가야겠다고 말했소?
아아, 원통하도다! 예전에 칠신(七臣)이 고발을 당할 때에 우리 선조는 특히나 흉악한 무리들의 원수가 되어, 그들이 칼을 숨기고 그림자를 엿본 적이 여러 해였소. 나중에 고성(高成)ㆍ김응벽(金應璧)의 옥사를 날조함에 미쳐, 우리 선조의 공초를 구실 거리로 삼은 것은 나라를 해치려는 이이첨(李爾瞻)의 짓이었고, 앞뒤로 상관없는 일을 끌어들여 왕명을 포고하는 글에 덧붙인 것은 유감을 풀려는 기자헌(奇自獻)의 짓이었소. 급기야 계해년(1623, 인조 1)에 반정(反正)이 있은 뒤로는 참견하기 좋아하는 젊은이들이 본래 사실을 잘 모르고 어름어름 들추어내니 비방하는 물의가 드높아지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자, 따라서 옛 원한을 갚으려는 자, 남의 화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들고 일어나서, 우리 선조가 마침내 죄를 얻어 10여 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로 떠돌아다녔던 것이오.
그 후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유명(遺命)으로 사면 조치가 내렸고 선왕(先王 인조 )의 밝으신 통찰이 일월같이 높이 비쳤으며, 당시 조신(朝臣)들이 죄의 경중을 심의한 기록이 의금부에 모두 남아 있고, 조정에서 같이 벼슬한 뭇 어진 이의 변론은 천지신명과 대질할 만했던 것이오. 그러기에 청음(淸陰) 김 문정공(金文貞公 김상헌(金尙憲) )은 비(碑)에 명(銘)하기를,
“근세 사림(士林)에서 믿고 의지하며 중히 여기는 이로는 이오리(李梧里 이원익(李元翼) )ㆍ이백사(李白沙 이항복(李恒福) )ㆍ신현헌(申玄軒 신흠(申欽) )ㆍ오추탄(吳楸灘 오윤겸(吳允謙) )ㆍ정수몽(鄭守夢 정엽(鄭曄) ) 같은 분들이 있는데, 이 몇 분들은 절대로 자기 사정(私情)에 치우쳐 공론(公論)을 폐기할 분들이 아니었다. 이때 공을 비난하는 입들이 마치 남기성(南箕星)처럼 크게 벌려 있었으나, 공은 스스로 변명하지 않았으며, 이 몇 분들이 나서서 밝혀 주었다. ‘중인(衆人)들은 헐뜯었으나 군자는 완인(完人)으로 여겼다.〔衆人所毁 君子所完〕’ 하였으니, 그 말을 증명하기에 족하며 백세에 길이 거울이 될 것이다.” - 명(銘)의 글은 여기까지이다. -
하였다오. 우암(尤菴) 송 문정공(宋文貞公 송시열(宋時烈) )이 쓴 묘표(墓表)에는,
“당시 국구(國舅)의 옥사가 여러 분에게 미쳐 갔다. 공은 다만 평소에 국구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실을 원사(爰辭)에서 밝혔고, 또한 그 일은 증거도 없이 유야무야되었으니 국구에게는 아무런 손상이 없음을 보증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는데, 흉악한 무리들이 앞의 원사를 나중에 집어넣어 왕명을 포고하는 글에서 공을 욕보일 줄은 더욱 당초에 우려했던 바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 노선생(老先生)이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금계(錦溪)는 절대로 다른 의도가 없었는데, 불행히도 무고(巫蠱)의 옥사가 잇달아 일어나서 드디어 오늘날의 억울한 죄안(罪案)이 되었다.’ 하셨다.” - 묘표의 글은 여기까지이다. -
하였소.
아! 이것은 모두가 선현들의 정론(定論)이오. 신도비에 분명히 새겨져 있고 여러 문집 속에 환히 알려지고 널리 나열되어 있어, 온 나라의 비방이 깨끗이 풀리고 백세의 공론이 이미 결정되었는데도, 새까만 후배들이 나중에 악담을 가하고 수백 년 뒤에 함부로 모함하는 붓을 휘두르는 것은 도대체 무슨 심술이오? 말뜻이 참혹하고 표독하여, 우리 선조를 모함하고도 부족해서 곧장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 )을 무고에 몰아넣은 것은 도대체 또 무슨 심술이오?
존가(尊家)의 후촌공(後村公)이 한패거리가 되어 스스로 부화뇌동하고자 한 자가 누군지 나는 모르겠소. 원사를 주워 모아서는 흉악한 무리들이 구실로 삼은 것이 저와 같고, 억울한 죄를 애통히 여기어 뭇 어진 이들이 확실한 결론을 내린 것이 이와 같소이다. 설령 당시에는 사실을 자상히 모르고 술자리에서 떠들며 이야기하다가 혹시 함께한 사람들의 말을 따랐다 하더라도, 그 뒤에 사건의 근원이 분명하게 밝혀졌으니 필시 전에 한 말의 실수를 후회하여 기꺼이 다른 어진 분들과 생각을 같이하였을 것이오. 또 설령 당시에는 떠도는 비방을 단단히 믿고서 이전의 의혹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하더라도, 세상의 장고가(掌故家 고사(故事)에 해박한 사람 ) 입장에서 보면 길거리에서 주워듣고 함부로 거론하는 것도 오히려 놀라운 일이거늘, 하물며 당시에 직접 기록한 글도 아니고 오로지 뒷사람이 나중에 부연한 것에서 나온 경우이리오? 이는 자기 선조의 공적을 드러내고자 하다가 먼저 스스로 선조를 속인 죄목에 빠진 것이며, 이름은 실기(實記)라 해 놓고 도리어 실제 사실과 어긋나는 처지에 놓인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오.
설사 또 당시에 대간(臺諫)으로 나갈 길이 막히어 억측으로 외쳐 댈 수는 없었다 하더라도, 그 후 십수 년 동안 간관(諫官)으로 출입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무엇을 돌아보고 꺼려서 마침내 한 번도 평소 가슴에 쌓인 말을 털어놓지 않았소? 설사 또 당시에 품은 원한이 이미 깊어서 손수 기록해 두었다면 그 뜻이 출세길에 간절하여 원한을 보류했다가 집안에 전한 것을 마침 드러내 보인 셈이니, 어찌 후촌(後村) 같은 어진 이로서 과연 이런 일이 있었겠소?
더구나 우리 집안의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 ) 선생은 금계군의 손자요, 존가의 노서(魯西 윤선거(尹宣擧) )는 바로 후촌공의 조카요. 존가에서 남에게 화를 끼칠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이와 같다면 이는 반드시 그 가정에서 들은 바가 있을 터이니, 어찌하여 그 원한을 숨기고 그 집안사람을 벗하려는 것이오? 지금 일로 미루어 보면, 그 원한을 숨기는 것이 본래부터 물려받은 가법(家法)이었는지? 이도 알 수 없겠구려.
아! 성이 함락되어 풀 베듯이 목숨이 잘리던 날에 적의 칼날에 순절한 것만으로도 족히 한 세상에 드날리고 뒷자손에게 영광이 될 수 있으며, 구구한 대간의 자리에서 한 번 처진 것이 이미 세워 놓은 큰 절개에는 진실로 영향을 끼칠 것이 없는데, 하필 남의 조상을 지독하게 모함한 연후에야 비로소 그 시대에 환히 드러난단 말이오? 뒷사람들이 어름어름 포착하여 추후에 서술한 것은 역시 교묘하게 하려다가 도리어 치졸함만 드러내 보인 것이라 하겠소.
근자에 들려온 소문에 더욱더 놀랄 것이 있었소. 그대가 황당한 말을 꺼리지 않고 가는 곳마다 장황히 떠들어 대며, ‘아무개와 왕래를 끊지 않고 술자리에서 단란히 정을 나누기를 예전이나 다를 바 없이 한다.’ 한다니, 그 말이 도리에 어긋남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소!
영남의 고을을 왕래하던 때를 돌이켜 생각하면 상기도 몹시 가슴속이 아프고 한스러운데, 심장이 쑤시고 뼈에 사무치는 이날을 당하여 차마 다시 단란하게 만나리오? 오늘날 그대의 언행은 번번이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의 밖으로 벗어난 것이니, 옛사람이 일컬은 ‘사람 알기란 쉽지 않다.’란 말이 바로 이를 두고 이른 것이오. 지난날 마주 대했을 때, 그대가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을 띠고 말을 머뭇거리며 요컨대는 ‘고쳐 새기겠다’는 한 가지 사항에서 벗어나지 않았었소. 그러기에 내가 참고 견디며 차분히 기다리면서 문중의 여론이 하늘을 찌를 듯이 분노로 치닫지 않도록 한 까닭은, 진실로 훼판(毁板)하겠다는 한마디 말에 성실할 것을 바랐을 뿐만 아니라 또 우리 선조가 모함당한 본말을 낱낱이 들어서 개운하게 깨우쳐 주기 위함이었던 것이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말을 주고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할지라도, 이를 일러 ‘술자리에서 단란히 정을 나누기를 예전이나 다를 바 없이 한다’고 한다면 되겠소? 우리 종중(宗中)에서도 역시 나를 허물하며, 원수와 상대할 것도 없고 또한 굳이 원수와 대화를 나누며 변론할 것도 없다고 하였소. 이와 아울러 분명히 말하건대, 이제부터는 다만 상정(常情)에서 벗어나는 말을 꾸미려고 말고 분분한 입씨름을 끊기로 합시다. 지금 나는 그대에게 원한이 이미 깊어졌고 사귐도 이미 끊어졌소. 그래도 속마음을 다시 털어놓는 것은 ‘절교는 해도 악평은 하지 말라’는 그 뜻을 삼가 스스로 따르고자 하는 때문이오.
[주-D001] 가부(葭莩)의 친분 : 가부란 갈대 줄기 속에 있는 엷은 막으로, 두텁지 않은 친인척 관계를 이른다.[주-D002] 겸관(兼官) : 수령의 자리가 비었을 때 바로 이웃 고을 수령이 임시로 그 사무를 겸임하는 것을 말한다.[주-D003] 동추(同推) : 사죄(死罪)를 저지른 경우에는 30일 안에 옥사를 판결해야 하는데, 그 경우 수령들이 추관(推官)으로 회동하여 죄인을 신문(訊問)하는 것을 말한다. 옥사를 시급히 판결해야 하므로 열흘에 한 번 동추하는 것이다.[주-D004] 머리가 …… 같다 : 원문은 ‘白頭如新 傾蓋如舊’이다. 고대 중국의 속담으로 추양(鄒陽)의 옥중상서자명(獄中上書自明) 등에 인용되어 있다. 《文選 卷39》[주-D005] 《후촌집(後村集)》 : 후촌은 윤전(尹烇 : 1575~1636)의 호이다. 윤전은 노서(魯西) 윤선거(尹宣擧)의 숙부이며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1613년 유생 이위경(李偉卿) 등이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아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를 상소하자 이들의 처벌을 주장하다 파직당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복직하였으며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필선(弼善)으로 강화도에 들어가서 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후촌집은 함양 군수 윤광석이 1795년에 간행한 《후촌실기(後村實記)》 즉 《윤충헌공실기(尹忠憲公實記)》를 가리킨다. 이 책은 세계도(世系圖)와 연보(年譜)를 실은 상권, 윤전의 유문(遺文)과 유묵(遺墨)을 실은 중권, 행장(行狀 : 윤증〈尹拯〉 찬〈撰〉)ㆍ묘지명(墓誌銘 : 조익〈趙翼〉 찬)ㆍ시장(諡狀 : 박세당〈朴世堂〉 찬)ㆍ제문(祭文)과 부록을 실은 하권으로 되어 있으며,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의 서문과 윤전의 5대손인 윤광안(尹光顔)의 발문이 있다. 여기에 실린 행장에, 인목대비 폐위 반대에 공이 컸던 윤전이 인조반정 이후 대간(臺諫)으로 기용되지 못하고 경기 도사(京畿都事)로 나가게 된 것은, 그가 전에 어느 술자리에서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이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변명한 말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여 미움을 산 때문이라고 했다. 묘지명과 시장에도 구체적 인명은 거론하지 않은 채 그 사실이 진술되어 있다. 부록에서도, 윤증이 지은 행장은 박세채(朴世采)의 처지를 생각해서 그 사실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하면서, 워낙 사실이 현저하므로 박동량의 종손(從孫)인 박세당조차 시장에서 이를 은폐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주-D006] 금계군(錦溪君) : 박동량(朴東亮 : 1569~1635)의 봉호이다. 박동량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의주(義州)로 호종(扈從)한 공으로 금계군에 봉해졌다. 1613년 계축옥사 때에 투옥되어, 자신이 칠신(七臣)의 한 사람으로서 인목대비의 아비인 김제남(金悌男)과 반역을 모의했다는 죄목을 부인하면서, 유릉(裕陵)의 저주 사건에 대해 발설함으로써 대북파(大北派)에게 폐모론(廢母論)의 구실을 제공하였다. 이로 인해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 부안(扶安)에 유배되었다. 1635년 아들 박미(朴瀰)의 상소로 복관되어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주-D007] 피로써 …… 삼키는 : 원문은 ‘沬飮’인데 ‘沬血飮泣’의 준말이다.[주-D008] 번고(飜庫) : 창고의 물건을 일일이 뒤적이며 장부와 대조하여 검사하는 일을 말한다.[주-D009] 배신전(陪臣傳) : 황경원(黃景源)이 지은 명배신전(明陪臣傳)을 가리킨다. 《강한집(江漢集)》 권28 명배신전 2에 윤전의 사적을 기록한 항목이 있는데, 《후촌실기》 하권 부록에 채록되어 있다.[주-D010] 남의 …… 데에 : 원문은 ‘成美’인데, 《논어》 안연(顔淵)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남의 아름다운 일을 도와서 완성한다.〔君子成人之美〕”고 하였다.[주-D011] 윤신수(尹莘叟) : 신수(莘叟)가 누구의 호인지 알 수 없다.[주-D012] 효경(梟獍) : 효파경(梟破獍)이라고도 하며, 악인(惡人)을 비유할 때 쓰인다. 효(梟)는 제 어미를 잡아먹는 올빼미이고, 파경(破獍)은 제 아비를 잡아먹는다는 짐승이다.[주-D013] 귀역(鬼蜮) : 보이지 않게 사람을 해치는 귀신과 물여우를 이른다.[주-D014] 이 일을 …… 있겠소 : 원문은 ‘是可忍也 孰不可忍也’이다. 《논어》 팔일(八佾)에서 공자가 노(魯) 나라 대부 계손씨(季孫氏)가 감히 천자의 예악인 팔일무(八佾舞)를 추게 한 것에 분노하여 한 말이다.[주-D015] 능주(綾州) : 전라도에 속한 현(縣)으로, 현재는 전라남도 화순군(和順郡)에 속한 면이다.[주-D016] 칠신(七臣) : 선조(宣祖)가 임종에 앞서 어린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부탁한 유영경(柳永慶), 한응인(韓應寅), 박동량(朴東亮), 서성(徐渻), 신흠(申欽), 허성(許筬), 한준겸(韓浚謙) 등 일곱 신하를 일컫는다. 이들은 1613년 계축옥사 때에 국구(國舅)인 김제남(金悌男)과 반역을 도모했다는 죄목으로 투옥되었다.[주-D017] 고성(高成)ㆍ김응벽(金應璧)의 옥사 : 선조 말년에 영창대군의 궁방(宮房)에서 선조가 병에 시달리게 된 원인을 원비(元妃)인 의인왕후(懿仁王后)에게 돌리고 고성, 김응벽 등을 시켜 그 능(陵)인 유릉(裕陵)에 가서 저주를 하게 했다고 하여 일으킨 옥사를 말한다.[주-D018] 기자헌(奇自獻) : 1562~1624. 선조가 영창대군을 후계자로 삼으려는 데 극력 반대하여 광해군의 즉위에 공로가 컸으므로 영의정까지 지냈다. 그러나 폐모론(廢母論)에는 소극적이어서 문외출송(門外黜送)되고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인조 즉위 후 이괄의 난 때 사사(賜死)되었다. ‘왕명을 포고하는 글〔播告之文〕’이란 광해군 5년(1613) 7월 15일 계축옥사의 주모자로 김제남 등을 처형하고 나머지 관련자들을 사면하는 일로 내린 교서(敎書)를 가리킨다. 그 교서에서 김제남의 죄상을 논하는 대목에 유릉 저주 사건에 대한 박동량 형제의 증언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는 기자헌이 광해군에게 교서 중에 첨가하기를 거듭 요청한 결과였다. 《光海君日記 5年 7月 10日ㆍ13日ㆍ15日》[주-D019] 사면 조치가 내렸고 : 원문은 ‘渙發雷雨’인데, 《주역》 해괘(解卦) 상전(象傳)에 “천둥치고 비 내리는 것이 해(解)이니, 군자가 이로써 허물을 용서하고 죄를 관대히 보아준다.〔雷雨作解 君子以赦過宥罪〕”고 하였다. 인조 10년 6월 박동량의 죄를 용서하여 유배지를 가까운 곳으로 옮겨 주었는데, 이는 인목대비가 승하하기 직전에 내린 하교를 따른 조치였다. 《仁祖實錄 10年 6月 25日》[주-D020] 마치 …… 있었으나 : 남기성(南箕星)은 곧 기성(箕星)으로, 남방 하늘에 나타나므로 남기성이라고도 한다. 기성은 구설(口舌)을 주관하는 별로 간주되었으며, 참언(讒言)의 비유로 즐겨 쓰였다. 《시경》 소아(小雅) 항백(巷伯)에 “입을 크게 벌려 이 남기성을 이루었도다, 남을 헐뜯는 저자들은 누구와 더불어 음모를 꾸미나.〔哆兮侈兮 成是南箕 彼讒人者 誰適與謀〕”라고 하였다.[주-D021] 근세 …… 것이다 : 《청음선생문집(淸陰先生文集)》 권24 ‘금계군 겸판의금부사 박공 신도비명 병서(錦溪君兼判義禁府事朴公神道碑銘幷序)’의 명(銘)을 인용한 것이다. 단 글자에 약간 차이가 있다.[주-D022] 국구(國舅) :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을 가리킨다.[주-D023] 원사(爰辭) : 죄인이 자신의 죄상을 말한 진술서를 이른다.[주-D024] 그 일 : 유릉(裕陵) 저주 사건을 말한다. 선조 말년에 영창대군의 궁방(宮房)에서 선조가 병에 시달리게 된 원인을 원비(元妃)인 의인왕후(懿仁王后)에게 돌리고 고성, 김응벽 등을 시켜 그 능(陵)인 유릉(裕陵)에 가서 저주를 하게 했다고 하여 옥사가 일어났다.[주-D025] 앞의 …… 집어넣어 : 원문은 ‘追人前爰’인데, 추인(追人)은 고대 중국의 백희(百戱)의 일종이므로, 여기서는 전혀 뜻이 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追入前爰’의 오류임이 분명하다. 송시열이 지은 묘표 중 그에 상응하는 구절은 ‘追引爰辭’라 하여 ‘나중에 끌어넣었다’는 뜻의 ‘追引’으로 되어 있다.[주-D026] 무고(巫蠱) : 무술(巫術)로 사람을 호리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유릉에 저주를 행한 사건을 가리킨다. 박동량은 공초에서 이는 영창대군 궁방의 사람들이 저지른 일이라는 말을 들었으나 김제남에게 감히 따지지는 못하였다고만 말했던 것인데, 나중에 김제남이 유릉에 저주를 하도록 사주한 사실을 증언한 것으로 이용되었다.[주-D027] 당시 …… 하셨다 : 《송자대전(宋子大全)》 권191 ‘금계군 박공 묘표(錦溪君朴公墓表)’에서 인용하였다. 단 그대로 인용한 것은 아니고, 취사선택하면서 고쳐 인용하였다.[주-D028] 한패거리가 …… 한 : 원문은 ‘所欲比而自同’인데, 《논어》 위정(爲政)에 “군자는 두루 사귀되 패거리를 짓지 않고, 소인은 패거리를 짓되 두루 사귀지 않는다.〔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고 하였고, 자로(子路)에 “군자는 남과 화합하되 부화뇌동하지 않고, 소인은 부화뇌동하되 남과 화합하지 않는다.〔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고 하였다.[주-D029] 사람 …… 않다 : 원문은 ‘知人未易’인데, 반악(潘岳)의 ‘마견독뢰(馬汧督誄)’에 나오는 말로, 《사기》 범수열전(范睢列傳)에서 후영(侯瀛)이 “사람은 원래 자기를 알기 쉽지 않으나 남을 아는 것 역시 쉽지 않다.〔人固未易知 知人亦未易〕”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주-D030] 절교는 …… 말라 : 《사기》 권80 악의열전(樂毅列傳)에, “옛날의 군자는 절교는 해도 악평은 하지 않았다.〔古之君子 交絶不出惡聲〕”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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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族弟) 이원(彜源)에게 보냄 與族弟彛源書
燕巖集卷之二 潘南朴趾源美齋著 / 煙湘閣選本○書
與族弟彛源書
數昨極擾中。貴伻適到。兼索尹牘。而尹牘借他未推。所以未送。尙切耿耿。此書之來。本欲輪示諸宗。而間作楸行。閱月方還。比又非鎖直。則奔汨公冗。訖此未遂也。瑞雪連日。起居益勝。溯仰區區。頃者金居昌孟剛。以差員入京也。聞尹袖此牘。往示孟剛。而賓客滿座。酬應頗煩。則略視其起頭數行。因爲卷而還之曰。似此長牘。非竆日難竟也。且今吾於君。其所處義。雖有蹔殊於朴友。實不欲干涉於此事往復也。尹卽還納袖中。草草作別而去云。今觀此書。其末端。有會安義時。與孟剛同觀之語。其所用意。一至此哉。印本之送投。吾果不識裏面之有何語。而要得一本也。及其乍閱原文數篇。則無甚可觀。而因爲雜置於他帙中矣。所謂孟剛來會之時。乃尹滿瓜辭去之日也。于時妓樂滿前。杯盤狼藉。夕會朝散。極歡而畢。亦奚暇竆搜覓得於曉夜亂帙之中。以作汗漫之披閱乎。假令吾歇後看過於前日。及此聚首同觀之際。寧有不覺之理乎。且况孟剛家先故誣逼。同此一欵。雙行並列。則孟剛亦安肯恬然鼎坐。不爲之驚痛乎。前日眞誠圖所以改鐫者。今旣其勢末由。則乃反姑爲此立證以自明。獨不內愧於心乎。且其書中高擡引重者。乃松郊一人耳。未知松郊爲號者。誰耶。必欲背馳於諸先正衆賢。而强引一松郊何也。尤可駭惋者。譏切我文純公不有餘地。未知賢輩處義。將若之何耳。又未知新出之書何樣文字云耶。並吾原牘以送。紙頭所付。幸勿脫落。覽後卽還如何。
연암집 제2권 /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족제(族弟) 이원(彜源)에게 보냄
엊그제 극히 어수선한 때 귀하의 심부름꾼이 마침 왔다가 아울러 윤(尹 윤광석 )의 편지를 달라고 했으나, 윤의 편지는 딴 곳에 빌려 주고 찾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보내 드리지 못했으니 상기도 몹시 마음에 걸리외다. 이 편지가 왔을 적에 본래는 여러 일가 분들에게 두루 돌려 보이려 했으나, 그 사이에 성묘길을 떠나 달이 지나서 막 돌아왔고, 요즘도 역시 직소(直所)에 몸이 매어 있지 않으면 자잘한 공무에 분주하여 이제껏 뜻을 이루지 못했던 거요.
연일 서설(瑞雪)이 내리는데 지내시기가 더욱 좋으신지, 그리운 마음 그지없소이다.
지난번에 거창 현령(居昌縣令) 김맹강(金孟剛)이 차원(差員 업무차 차출된 관원 )으로서 상경할 적에 듣자니 윤(尹)이 이 편지를 소매에 넣어 가지고 와서 맹강에게 보였는데, 손님들이 좌석에 가득하여 그와 응수하기가 자못 번거로웠으므로 그 첫머리 몇 줄만을 대략 보고는 그대로 말아서 돌려주면서
“이러한 긴 편지는 하루내 보아도 볼 둥 말 둥 하겠고, 또 지금 내가 자네에 대해 지키는 의리가 비록 박군과는 잠시 다르기는 하지만 실인즉 이 일로 편지가 오고 가는 일에는 간섭하고 싶지 않네.”
하자, 윤은 바로 소매에 도로 집어넣고 허둥지둥 작별하고 떠났다는 거요. 그런데 지금 이 편지를 살펴보면 그 말미에 ‘안의(安義)에 모였을 때 맹강과 함께 책을 보았다.’는 말이 있으니 그의 속셈이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구려!
인본(印本)을 보내왔을 때 나는 과연 그 이면에 무슨 말이 들었는지 알지 못하고 한 부 보내 달라고 요청했던 것인데, 급기야 원문 두어 편을 잠깐 열람해 보니 볼 만한 것이 별로 없어서 그대로 다른 책들 속에 뒤섞어 두고 말았던 거요. 편지에서 말한 ‘맹강이 와서 모였다’고 한 때는 바로 윤이 임기가 만료되어 하직하고 떠나던 날이었소. 이때에 기생과 풍악이 앞에 가득하고 술과 음식이 상에 널리어 저녁 모임이 아침에야 흩어졌고 실컷 즐기다 파했으니, 어느 겨를에 어지러운 책더미 속에서 밤낮으로 애써 찾아내어 부질없이 펼쳐 보는 짓을 했겠소?
가령 내가 전일에는 뒷부분을 생략하고 지나쳐 보았을망정, 이와 같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함께 책을 보는 마당에야 어찌 깨닫지 못할 이치가 있겠소? 더더구나 맹강 집안의 선조를 모함하고 핍박한 일도 이와 조목을 같이하여 두 줄로 나란히 열거되어 있으니, 맹강도 어찌 기꺼이 편안히 셋이 함께 앉았겠으며 그 때문에 놀라 원통해하지 않았겠소?
전일에는 진실로 성의 있게 고쳐 인쇄하려고 꾀했던 것이 지금 와서 이미 그렇게 하지 못할 형세가 되자, 도리어 우선 이런 말을 만들어 증거를 세워 자신을 해명하자는 것이니, 어찌 자기 속마음에 부끄럽지 않겠소? 또 그 편지 중에서 높이 추켜들어 존중하고 있는 사람이라야 송교(松郊) 한 사람뿐인데, 송교란 호를 가진 이가 누구인지 모르겠소만, 반드시 여러 선현(先賢)들과 반대로 어긋나고자 하면서 억지로 송교 한 사람을 끌어들이려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요?
더욱 놀랍고 한탄스러운 것은 우리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 )을 여지없이 조롱한 점이니 현배(賢輩)들이 지키는 의리는 장차 어떻게 될는지 모르겠소. 또 새로 인출(印出)한 책이 어떤 글들인지도 모르겠소이다. 나의 원래 편지까지 아울러 보내니 종이 상단에 붙여 놓은 것을 행여 빠뜨리지 말고, 본 뒤에 즉시 돌려주기 바라오.
[주-D001] 이원(彜源) : 박이원(朴彜源 : 1743~1801)은 박사고(朴師古)의 아들로 박사눌(朴師訥)의 양자가 되었으며, 1777년 생원시에 급제하고 형조 정랑을 지냈다. 연암이 안의 현감으로 재직할 당시 문경 현감(聞慶縣監)으로서 합천 화양동에 있던 야천(冶川) 박소(朴紹)의 묘소 정비 사업에 성금을 보태기도 했다.[주-D002] 김맹강(金孟剛) : 맹강(孟剛)은 김유(金鍒)의 자(字)이다.[주-D003] 내가 …… 하지만 : 김유가 윤광석과 같은 소론(少論)이어서 노론인 연암과는 당파적 의리가 다르다는 뜻이다.[주-D004] 인본(印本) : 윤광석의 선조 윤전(尹烇)의 문집인 《후촌실기(後村實記)》 즉 《윤충헌공실기(尹忠憲公實記)》의 인쇄본을 말한다.[주-D005] 송교(松郊) : 이목(李楘 : 1572~1646)의 호이다. 이목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손으로 성혼(成渾)과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었다. 1612년 문과 급제 후 병조 좌랑 등을 지냈으며 대북파(大北派)의 무고로 파직되었으나, 인조반정 후 복직하였다.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 왕을 호종했고, 1636년 형조 참판이 되어 병자호란을 당하자 척화를 주장했다. 사후(死後)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正)이다.[주-D006] 현배(賢輩)들이 …… 모르겠소 : 현배는 후배(後輩)를 높여 부른 말이다. 박세채는 박동량의 손자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자 소론의 초기 지도자가 된 인물인데, 소론의 후배 세대인 윤광석 등이 그를 조롱한다면 당파의 의리가 제대로 지켜져 나가겠느냐고 힐난한 것이다.[주-D007] 나의 원래 편지 : 바로 앞에 수록된 ‘함양 군수 윤광석에게 보냄〔與尹咸陽光碩書〕’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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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忠憲公實記 윤충헌공실기 책 이름. 3권 1책. 조선 정조(正祖) 19년(1795) 윤광안(尹光顏) 엮음.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강화도에서 순절(殉節)한 윤전(尹烇)의 실기(實記)·연보·유문(遺文)·묵적(墨蹟) 등을 부록하였다.
[출처] 옥편비교004579R01尹 성씨 윤/다스릴 윤|작성자 oycleenet
尹忠憲公實記
서명 尹忠憲公實記 현대어서명 윤충헌공실기 저자 尹烇(朝鮮) 著‚ 尹光顔(朝鮮) 編. 청구기호 奎3899 책수 3卷 1冊(111張) 판본 木板本 사이즈 32×20.5cm. 본문 四周單邊 半郭 : 21×15.9cm.有界 10行 20字 注雙行.版心 : 上花紋魚尾.
序 : 洪良浩.
跋 : 尹光顔.
後村 尹烇(1575-1637)의 遺文과 遺事들을 모아놓은 것
장령 노종 | 23 | 윤전 尹烇 | 1575-1637 | 父 윤창세尹昌世 | 윤충헌공실기尹忠憲公實紀 | 3卷 1冊, 圖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