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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9년 신춘문예 당선작품 모음
[뉴스페이퍼 = 김상훈 기자] 신인 작가를 발굴하는 '신춘문예'가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신춘문예'는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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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당신의 당신/문혜연
새들의 울음은 그들의 이름이 됩니다
우리는, 어떤 이름을 갖게 될까요
원래 인간은 제 이름보다 남의 이름을
더 많이 부르는 종이잖아요
나는 당신의, 당신은 나의 이름을
새들에게 우리는 우리일까요
우리를 대신할 말을 찾아요
수많은 단어들이 사라져요
뻐끔거리던 입술들이 짝을 짓습니다
입술을 부딪치며, 서로에게 옮아가는 인간들
새들은 인간과 상관없이 날아다닙니다
새들은 새들이고, 우리는 우리입니다
부리를 부딪치는 새들은
정다운 만큼 가벼운가 봐요
자신을 닮은 사람을 세 번 만나면 죽는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어요
지렁이와, 지렁이 모양 젤리
그걸 공포라 할 수 있나요
머리와 꼬리를 알 수 없는 젤리는
달콤하고 모호한, 주인모를 관계들
우리는 점점 닮아 가는데
누가 누굴 닮은 건지 모를 때는
어떻게 할까요, 당신은 지금
2%의 당신 자신과, 98%의 당신의 당신
순도 높지 않은 당신, 그리고 나
끝 모를 바닥으로 가라앉아요
새들은 언제나 아득한 높이에서 웁니다
그림자도 생기지 않을 물에는
새의 밑면만 지나갑니다
깊이 가라앉은 바닥, 그곳에서 우리는
떠오를 수 없는 낮은 음, 낮은 울음
새들의 이름은 그들의 인사가 됩니다
우리의 울음도 우리의 내일이 될까요
안녕, 당신, 안녕
유언 같은 안부를 주고 받아요
우리는 새들의 세계에서도, 서로의 이름만 부르고
인간은 역시, 새들에게는 이해받을 수 없나봅니다
▲1992년 8월 6일 서울 출생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4학년 재학 중
[심사평]시가 운문의 세계인데도 산문적 진술의 세계를 현란하게 드러낸 시가 많았다. 행갈이와 연 구분이 무시된 산문 형태 시를 많이 투고하는 현상은 한국 시의 미래를 위해 분명 경계해야 할 일이다. 내적 운율과 침묵으로 함축되는 시의 본질적 부분이 신인들의 시에서 도외시되는 까닭은 산문성에 기울어진 한국 시단의 유행을 비판 없이 쉽게 따른 탓이다. 산문 시대일수록 시인이라면 시의 고유한 본질을 지켜나가야 하나 그렇지 못하다. 시를 왜 써야 하는지 그 필연성마저 결여돼 사유의 얄팍함이 엿보인다. 시의 본문은 물론이고 제목에까지 외래어나 외국어를 남발하는 점은 그 필연성의 결핍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으리라.
당선작으로 결정한 '당신의 당신'은 시적 감각이 신선하고 섬세하며 사유의 개성이 깊어 신뢰가 갔다. 새와 인간의 관계를 통해 인간 존재의 의미를 탐구함으로써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내면적 삶을 성찰하게 하는 높이가 돋보였다. 당선자는 더욱 노력함으로써 한국 시의 미래가 되길 바란다.(문정희·정호승)
[201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사과를 따는 일/ 권기선
나는 아버지 땅이 내 것이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런 마음을 먹은 뒤부터 아버지 땅에 개가 한 마리 산다 깨진 타일조각 같은 송곳니는 바람을 들쑤신다 비옥한 땅은 질기고 촘촘한 가죽의 눈치를 살피다 장악되고, 과잉되다, 갈라진다 아버지는 땅을 방치하고, 나는 그것을 납치한다 깊은 목젖을 끌어올려 목줄을 뜯은 늙은 개가 간신히 사과 하나를 놓고 엎드렸다 세상 혼자 짊어지려던 남자는 무게를 견디다 어깨가 굽었다 힘은, 무기의 정차역 같았다 엎드린 개가 일어서지 못하고, 사과는 지하의 고요한 관棺을 기억해낸다
아버지 땅에 몰래 사과나무 한 그루 심은 날 그해 사과는 한 개도 달리지 않았다 아버지 땅이 내 땅 되던 날 나는 사과나무 아래 아버지를 묻었다 병 걸린,
아버지를 먹고 자란 사과나무
붉은,
사과 따는 일을
심사평
심사위원=조용미(시인)·엄원태(시인)
본심에 올라온 13명의 응모작 가운데 권기선, 장진주, 유진희, 조진희씨의 작품이 최종적으로 논의되었다. 본심에 오른 작품들은 대부분 일상적 고뇌와 가족이라는 관계에 몰두해 있었다. 고통의 세목은 분명하되 치열한 해석이 부족해 보였다. 그러나 내 발밑이 이 세계를 관통하는 입구이자 출구라고 믿는 절실함은 감지할 수 있었다.
장진주씨의 '의자'는 소박한 사유인 듯하지만 튼튼한 뼈대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그 외의 시에서는 명확하지 않고 모호한 자기논리가 감지되었다. 유진희씨의 진지한 경쾌함은 무척 매력적이다. '루팡의 장미'는 수작이지만 다른 작품에서 약간의 편차가 느껴져 제외되었다. 조진희씨의 시에는 세련되지 않았지만 빛나는 문장이 드문드문 박혀 있다. 하지만 항상 전적으로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시의 세계가 있다. 마지막으로 시적 진술을 마무리하는 힘과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하는 감각이 조금 부족한 것도 아쉬웠다.
권기선씨의 시에는 전복적 사유와 태도가 내재되어 있다. 이 세계를 관성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치열한 자기 인식이 배면에 깔려 있다. 무엇보다 시의 행간이 촘촘하고 다른 작품들도 헐렁한 부분이 없다. '사과를 따는 일'의 어조는 나지막하지만 단호하고 명료하다. 서툰 듯 자리잡은 쉼표도 그 역할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아버지를 먹고 자란" "사과를 따는 일"은 훼손된 세계를, 이 세계의 견고한 불안을 이어받는 것이기도 하지만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다.
당선자로 선정하기 전 잠시 고민했던 귄기선씨에 대한 약간의 우려는 '나와 사람들 사이가 돌과 물처럼 놓일 때'와 '올해는 나아질 거예요'에서 보여준 긍정적 사유에서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시를 쓰는 나는 얼마든지 불행해질 수 있다"는, 패기 있고 가능성 있는 시인에 대한 기대로 기꺼이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정진을 기대한다.
[2019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너무 작은 숫자 / 성다영
도로에 커다란 돌 하나가 있다 이 풍경은 낯설다 도로에 돌무더기가 있다 이 풍경은 이해된다
그린벨트로 묶인 산속을 걷는다
끝으로 도달하며 계속해서 갈라지는 나뭇가지
모든 것에는 규칙이 있다 예외가 있다면 더 많은 표본이 필요할 뿐이다 그렇게 말하고 공학자가 계산기를 두드린다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만 그렇기에 더 중요합니다 너무 작은 숫자에 더 작은 숫자를 더한다
사라져가는 모든 것은 비유다
망할 것이다
한여름 껴안고 걸어가는 연인을 본다 정말 사랑하나봐 네가 말했고 나는 그들이 불행해 보인다는 말 대신 정말 덥겠다 이제 그만 더웠으면 좋겠어 여기까지 말하면 너는 웃지
그런 예측은 쉽다
다영 씨가 웃는다
역사는 뇌사상태에 빠진 몸과 닮았다
나무 컵 받침이 컵에 달라붙고 중력이 컵 받침을 떼어낸다
물이 끈적인다 컵의 겉면을 따라 물방울이 아래로 모이는 동안 사람과 사물은 조금씩 낡아간다
조용한 공간에 금이 생긴다
되돌릴 수 없다
▲성다영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중퇴
[심사평]적어도 시에서 고유한 세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세계를 향해 가는 ‘언어적 의지’일 것이다. 언어적 의지는 시인의 의지가 아니라 시인이 구사하는 언어에 숨어 있는 힘에 가깝다. 그 힘으로 인해 우리는 시가 만드는 특별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어떤 언어는 동시대 시인들에게 마치 공통감각처럼 통용되기도 하는데,그 유행에 시인의 감각이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방법론에 휩쓸린 나머지 자신의 세계를 잃어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우리는 모두가 잘 쓰고자 한다. 하지만 ‘쓰려는 것을 잘 쓰는 것’과 ‘잘 쓰기 위해 쓰는 것’은 다르다. 시가 고유한 세계를 갖는 이유는 그것이 언어의 장르이면서 또한 진실의 장르이기 때문이다. 성다영은 자신이 쓰고자 하는 것을 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당선작 ‘너무 작은 숫자’는 침묵과 수다를 격정 속에 교차시키고 딴청과 응시를 침묵 속에 빠뜨리면서, 이러한 언어의 불균질성이야말로 상실 앞에 선 마음의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말한다. 비록 이 시를 통해 우리는 사라짐의 의미를 깨달을 수는 없지만, 그 순간에 동참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것들이 겪는 상실의 필연적 과정을 목도하게 된다.
컵에 달라붙어 있던 컵 받침이 무심하게 다시 떨어지는 일에서조차도 말이다. 그것이 성다영 시가 가진 언어적 의지이다. 막 등장한 신인에게 그만의 세계를 말하는 것은 거짓이다. 하지만 시의 세계란 언제나 유예되는 것이어서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그 세계를 향해 끝없이 나아가야 한다는 믿음을 성다영은 가졌다. 신인에게 그보다 중요한 태도는 없다.(장석남·김민정·신용목)
[동아일보 2019 신춘문예 시 당선작]
캉캉/ 최인호
발목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
불란서 댄서들은 하이힐에 올라야 비로소
태어나지
발끝을 모으지
분란은 구두 속에도 있고
탁아소에도 있고 어쩌면
내리는 눈의 결정 속에서도 자라고
오후 세 시에는 캉캉이 없다
모르는 시람이랑 대화하려면 쓸데없는 말들이 필요해요
식탁 아래서 발을 흔들고
유쾌해졌지 아무 것도 흔들리지 않는 것 같아서
몰래 휘파람 부는 것 같아서
뉴스를 튼다
신은 인간을 만들었고
인간은 가십을 만들죠
상반신만 보이는 아나운서의 말을 믿으며
캉캉은 감춰지는 중
양말 속에 주머니 속에
불란서 댄서들의 스포티한
팬티 속에
빨간 주름치마가 되어
덤블링이 되어
지구가 돌아간다
구세군 냄비에 눈이 쌓이고 내년에는
내년의 근심이 기다리겠지 고향이 어디입니까 묻는다면
제왕절개 했습니다 답하겠지 아무것도 흔들리지 않는 것 같아서
마음은 캉캉
발끝을 들어올릴 때마다
불거지는 중
▲1988년 서울 출생
▲강남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심사평] 당선작인 ‘캉캉’은 문장의 대담함과 사유의 힘이 과장 없이 잘 녹아있다. 흥미로운 이미지들이 신선하면서도 힘 있는 문장을 통해 전개되고 있으며 진술 대신 묘사를 통해 심적 상태를 제시하는 요령을 확보한 작품이다. 단 한 편의 높은 완성도가 심사과정을 마무리 지었다. 기대를 안고 축하를 건넨다.(김혜순·조강석)
[국제신문 2019 신춘문예 시 당선작]
스테이플러 씨/ 이규정
그는 서류들을 한 코에 제압하고 있다
바람의 두께에 따라 뒤집어질 수도 있지만
이미 꿰인 코는 염기서열을 갖는다
하얀 낱장에 뼈대를 두고 있는 얼굴들
묶인 것으로 질서가 된 몸이지만
위아래 각을 맞추는 것은 복종의 의미
자세를 낮추고 하나의 각도와 눈높이로
사열되어
제왕에 예의를 갖추듯 손발을 맞추고 있다
어떤 묶음도 첫 장 머리에서 움직이고
펄럭이는 팔과 다리를 갖게 된다
간혹 흩어질까 묶인 것들끼리 권이 된다
날개를 갖고 있어도
그 손에 한 번 잡히면 그만이다
입이란 하나의 입구
무엇이 채워졌을 때
뜬구름이라도 소화하게 만든다
솜사탕과 뜬구름은 종이 한장의 차이
단정하게 정리된 그의 입에
꽉 물려서 봉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적 있다
흐트러진 낱장들을 함구시키며 제압하는
따악, 그 소리
일침으로 조용히 봉할 줄 아는 그는
서류의 제왕이다.
이규정-1953년 경기도 안성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과정 수료.
2019 신춘문예] 시 심사평(성신경, 이정록, 문태준)
오랜 詩作 경험 엿보이는 상상력 돋보여
심사위원들은 시의 원형을 새롭게 제시하는, 혈기 넘치는 시를 기대하면서 작품을 읽었다. 탄력이 있고 개성이 넘치면서 새로운 안목을 펼쳐주는 시를 기대했다. 그래서 기시감이 있거나, 지나치게 안정적인 시편은 후한 점수를 주지 못했다. 당선작을 놓고 마지막까지 고심한 작품들의 수준은 높았다.
‘바다 경매’ 외 2편, ‘가내수공업’ 외 4편, ‘계단의 전개’ 외 4편, ‘스테이플러 씨’ 외 3편을 놓고 토론을 이어갔다. ‘바다 경매’ 외 2편의 시편 가운데서는 ‘뿌리경전을 읽는 저녁’을 주목해서 읽었다. 꽃과 잎의 세월을 다 보낸 연의 뿌리에서 어머니의 존재를 발견한 대목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다만, 함께 보내온 두 작품의 수준이 이에 미치지 못했다. ‘가내수공업’ 외 4편은 생활의 감각이 돋보였다. 노동 등 육체를 움직여 일하는 사람의 애환이 담겨 있었다. “한 줌 삭힌 콩나물에는 한 사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와 같은 표현에서 보듯 감정이 흘러넘치는 점이 눈에 띄었다. ‘계단의 전개’ 외 4편 가운데서는 ‘매미의 시간’이 단연 두드러져 보였다. 매미의 허물을 대낮의 시간이 벗어던진 투명한 흔적이라고 쓴 점은 매우 신선했지만, 이 작품 이외엔 평범한 수준이었다.
결국 심사위원들은 ‘스테이플러 씨’ 외 3편 가운데 ‘스테이플러 씨’를 당선작으로 선정하기로 흔쾌히 합의했다. 함께 보내온 작품들은 고른 수준이었다. 시행이 앞뒤로 결속되고 보완되거나, 시행이 상상력을 통해 훌쩍 넘어서면서 한 편의 시가 완성되는 광경을 매력적으로 보여주는 시편들이었다. 그만큼 오랜 시작(詩作)의 경험이 엿보였다. 당선작 ‘스테이플러 씨’는 서류를 철하는 도구를 시적 대상으로 다루지만, 의미는 중층적으로 읽힌다. 철심이 박힌 서류 낱장에서 나약한 개인의 창백한 얼굴을 떠올릴 수 있다. 그것은 자본사회의 냉담한 구조 안에 강압적으로 편입되고 규율되는 개인이 느낄 공포심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로써 스테이플러는 사물 차원을 넘어서는 상징체로 거듭난다. 좋은 작품을 열정적으로 창작해 시단에 새롭고 산뜻한 바람을 불어넣어 줄 것으로 기대한다
[농민신문 2019 신춘문예 시 당선작]
부드러운 시간을 어느 곳에 쓰면 좋을까 / 이성배
미선나무 가지마다 밥알 같은 꽃들이 총상꽃차례*로 수북하다
이 부드러운 시간을 어느 곳에 쓰면 좋을까
십여년 전 겨울,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무차별 폭격이 있을 때
나는 군고구마를 사 들고 눈 오는 거리를 걸었지 싶다
재빨리 움직이지 못하는 아이들과 그 어머니들은 사락사락 죽어갔다
하굣길에 장벽 쪽으로 돌을 던진 팔레스타인 소년 사미르 아와드가 이스라엘
군인들의 공격으로 현장에서 즉사한 2013년 1월,
나는 따뜻한 거실에서 유치원에서 돌아올 네살배기 딸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총상꽃차례 같은 폭탄 다발을 투하하는 인간적인, 그 인간적인 인류애
엉뚱하게 우리 집 마당에 던져진 밥다발을 두고
고슬고슬한 밥알에 어머니 젖가슴 냄새 비릿하게 스며있는
이 질기지 않은 의미를 어찌하면 좋을까
햇볕 좋은 마당에 과분한 꽃
장벽 아래 양지바를 팔레스타인의 언덕에
시리아와 아프가니스탄의 폐허 사이에 수북수북 피어
덤불 사이를 뛰노는 아이들 얼굴에 밥알이 하얗게 붙는다면
꽃 하나가 그럴 수 있다면
*꽃이 촘촘히 피는 형태의 하나
[신춘문예-시 심사평] 곽재구, 문태준
시상이 협소하지 않고 두루 넓어…작가의 굳센 기상 보여
내가 누리는 평화로운 시간, 어떤 의미인지 아프게 질문해
예심을 통과해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을 면밀하게 읽었다. 농촌을 시공간으로 한 작품들이 많았고, 농촌에서의 사실적인 형편을 시적으로 표현한 작품들이 많았다. 그런 만큼 시편들은 삶의 현장의 생생한 실감을 느끼게 했다. 마지막까지 경쟁한 작품들의 수준도 높았다.
심사위원들이 손에 쥐고 끝까지 고민했던 작품들은 ‘내 떠나온 골목’ ‘사과도 선크림을 바른다’ ‘화각장’ ‘부드러운 시간을 어느 곳에 쓰면 좋을까’였다. ‘내 떠나온 골목’은 골목에서의 추억을 통해 과거의 시간에 교우했던 옛사람을 불러내는 작품이었다. “미숙 은정 혜원 은희도 놀러 오고”라고 써서 직접 인명을 기술한 것이 정감 있고 특별하게 느껴진 반면, 골목의 아침 가로등 이름을 “‘이별’이거나 ‘후회’이거나 ‘눈물’”이라고 명명한 것은 상투적으로 느껴졌다. 염천에 사과농사를 짓는 농부의 애타는 심정을 고스란히 담은 ‘사과도 선크림을 바른다’는 방언의 활용이 효과적이었으나 감정의 과잉이 있어 아쉬웠다. ‘화각장’은 대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능력이 돋보였다. 그러나 쇠뿔을 얇게 오려서 오동나무장에 붙이는 그 과정 그대로 시행이 전개되어서 극적인 효과는 오히려 줄어들게 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고심 끝에 당선작으로 ‘부드러운 시간을 어느 곳에 쓰면 좋을까’를 선정했다. 우선 이 작품 외에 다른 작품들에서도 시 쓰는 이의 강기(剛氣)를 느낄 수 있었다. 또 당선작인 이 시는 시상이 협소하지 않았고 두루 넓었다. 이 시는 세계가 전쟁과 폭력과 가난의 고통 속에 있는데,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이 평화로운 시간이 어떤 의미인지를 아프게 질문한다. 세계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사회적 주제와 연결되는 이러한 시의 창작은 타인의 고통에 점점 더 무감해지는 우리 시대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앞으로도 자신만의 뚜렷한 육성으로 소신껏 시인의 길을 가길 당부드린다. 다시 한번 당선자에게 축하의 말을 전한다.
[전북일보 2019 신춘문예 시 당선작]
훈민정음 재개발 지구 / 한경선
강남로 집현전 부동산 내벽에는
매물로 나온 낯선 문자들이 새겨져 있다
푸른 종이 속 세종대왕을 사랑한 삼촌은
강남로에 집현전을 차려놓고
그 안에 가득 바람을 풀어놓았다
이 곳의 바람은 타워팰리스 하늘과 내통한 지 오래다
집현전 내벽에 새롭게 나붙은 훈민정음을 보며
성층권에서 내려온 별똥들의 수다가 한창이다
별똥들의 방언도 이곳에서는
종종 훈민정음으로 인정된다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던 소문의 지도를 따라
북두칠성이 제 궤도를 돌 때
궤도를 벗어난 뭇별들은 지하로 숨어들어
각진 상자 한 귀퉁이에 지친 제 하루를 누인다
모양과 크기가 다른 상자 속의 상자
앰뷸런스 소리가 빈번한 이곳
곽에서 관으로 이동하는 길목에도 훈민정음이 있다
흐린 불빛을 달고 수직으로 오르내리는 관은
언젠가는 땅속 깊이 스며들어 더 이상
길어 올릴 수 없는 검은 우물을 만질 것이다
노숙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이미 그 우물의 색깔을 알고 있다
종종 허름한 지하방으로 스며들던 그 우물의 예언을 사람들은 한때
언문이라고 불렀다는 것도,
순식간에 곽이 관으로 변하는 것은 집현전의 소관이 아니다
ㄱ자로 꺾인 길을 돌아 ㄴ자로 통하는 길은
강남로 후미진 골목 도처에 널려 있다
나랏말싸미 세상인심과 달라
언젠부턴가 사람들은 주위에 이상한 소문의 울타리를 친다
바람이 곽을 슬쩍 밀면 순식간에 관이 되는 이 새로운 골목에서
세종대왕을 사랑한 삼촌은 집현전 벽면에 새로운 훈민정음을 붙이고
네모난 상자곽 안의 잠을 사랑한 아버지는 오늘도
당신의 잠 속에 칠성판을 그려 넣고 일찍 잠자리에 드셨다
▲1959년 서울 출생.
▲동국대일산캠퍼스 평생교육원 시창작과정 수료.
[심사평] 신춘문예는 그 반향의 민감성으로, 문학계에 끼친 영향의 상징성으로 연유하여 이의 품격에 합당한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다음 몇 가지 필요조건을 내 걸었다. 우리 모국어를 충분히 잘 승화시켜 빛내고 있는가. 아름다운 정서를 잘 빚어냈는가. 내포된 메시지는 미래지향적으로 건강한가. 시의 본질인 기본 체제 갖춤이나 형상화를 비롯한 여러 갖춤으로 시적 감동을 함유하며 언어 예술의 경지를 달성하고 있는가. 등등이다.
‘훈민정음 재개발지구’는 훈민정음이라는 어휘가 담고 있는 우리 민족 고유의 문화 정신을 이끌어 와 시 전편에 한 사조로 굽이치게 하며, 여기에 얹어 현대의 세태적 실감을 풍자로 연출하고 있다. 대칭적 소재들이 유기적으로 화융하며 조화를 이루게 하여 서사적 스토리를 엮는다. 시적 발상이 우선 절묘했다. 세종대왕은 화폐로서 강남의 부를 창출하는 재화를 의미하며 또한 훈민정음의 정신을 함께 상징하여 중의적 표상으로 등장한다.상층의 부류와 가난한 서민이 교차적으로 이야기 속에 끼어든다. 곽과 관에 서로 넘나드는 이미지의 진화도 관심을 끈다. ㄱ과 ㄴ이 기호로 등장하는 교집합성과 대립성은 훈민정음의 정신 본연에 다가간다.
‘언문’은 집단 무의식, 거대한 민족 문화의 누적적 잠재의식을 담지하며 이 시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인 셈이다.말하자면 백성들을 이롭게 하려는 훈민정음의 고유 정신인 나라 말씀인 것이다. 북두칠성과 칠성판은 마치 생과 사, 빛과 어둠, 운명의 지배자(하늘)와 고단의 삶을 펼쳐 가는 피지배자(땅)로 상호 대치를 보이며 함께 조화로움에 다가간다. 이 시에서는 고결하고 신성한 훈민정음 정신과 세속적 부동산 실태와 노숙에서 돌아 온 아버지로 표상되는 가난한 서민의 삶 등 세 타래의 얼 킨 스토리의 영상이 교차적으로 오버랩 되며 종결에 이른다.결국 마지막엔 원융(圓融)을 표방하며 옹근 시 정신을 성취한다. “아버지에겐 종종 잠도 또 다른 언문이다.”(유안진·소재호)
[서울신문 2019 신춘문예 시 당선작]
랜섬박스 / 류휘석
내겐 매일 허들을 넘다 실패하는 광대들이 살아요
불필요한 기념일이 빼곡한 달력, 숨 쉬는 날이 없어요
나 대신 종이에 누워 숨 쉬는 사람들
밤이 되면 광대는 잠을 자고 나는 일어납니다
나는 허들을 치우고 부서진 광대들을 주워 종이 상자에 집어 넣습니다
그늘을 뿌리는 거대한 인공 나무, 물을 줘요 잘 자라서 더 크고 뾰족한 허들을 만들어내렴
그렇지만 모든 게 나보다 커져서는 안 돼
광대들은 일도 하지 않고 아침마다 이불을 걷어냅니다 나는 토스트처럼 튀어 올라 침실을 접어 내던져요 나를 어지럽히는 벽시계와 발목에 생긴 구멍들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커집니다
방이 비좁아서 나는 밖에 있습니다 밖이 끝나면 집에 돌아가 상자를 만들어야 해요
재사용 종이는 거칠고 단단해서 반성에 알맞습니다
천장에 붙어 기웃거리는 가녀리고 얇은 나의 광대들
반성이 시작된 집은 무덤 냄새가 나는 요람 같아요
나는 탄생부터 기워온 주머니를 뒤집습니다 바닥은 먼지로 가득찹니다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상자는 좀처럼 변하지 않는 실패와 실종
내가 죽으면 광대들은 허들을 넘을까요
궁금해서 죽지도 못합니다
▲1994년 충남 서산 출생.
▲단국대 문예창작과 졸업 예정
[심사평] ‘요르단에서 온 편지’ 외 6편은 이국적인 소재나 배경, 동화적 상상력을 통해 이채로운 이미지들을 빚어낸다. 일상의 공간이 자연스럽게 먼 극지나 태고의 시간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풍경이 매력적이다. 그러나 감각과 리듬에만 주로 의지하다보니 소품에 그치는 느낌이 들었다. ‘앞의 감정’ 외 2편은 시어를 다루는 숙련된 솜씨와 구어체의 다정한 문장들 덕분에 흡인력 있게 읽힌다. 그런데 그 유려한 문장들이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잘 잡히지 않았고, 기시감이 느껴지는 표현들이 눈에 띄었다. 매끄러운 언어 뒤에 인식의 충격이나 여운이 좀 더 있으면 좋겠다.(안도현·나희덕)
[한국일보 2019 신춘문예 시 당선작]
엄마는 저렇게 걸어오지 않는다
노혜진
예순두 살에 뽀얀 속살입니다 시야각으로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다 벗고 만날 수 있고 온몸을
훑고도 괜찮아요 엄마는 때수건과 우유를 손에 들고 옵니다 우리는 깨끗해집니다
두꺼운 발톱과 무좀을 병이라 부릅니다 탕의 수증기는 소리와 이야기를 불러 모읍니다 "그 발톱으로 네일숍에 왔대" 동료들이 웃었습니다
회사에서는 엄마 얘기만 합니다 아빠 얘기만 하는 동료에게 묻지 않았습니다 "엄마가 없니?" 질문은 되돌려집니다 알고도 모르는 것들을 생각합니다
동료를 엄마라고 불렀습니다 아차 하면서 재채기처럼 웃었습니다 자꾸 새어나오는 웃음만큼 웃음거리들이 쉽게 배어나오는 회사입니다 제가 오늘 재채기를 했던가요
바디 클렌저에서 수영장 냄새가 납니다 미즈노 루리코의 '헨젤과 그레텔의 섬'이 떠오릅니다 카페 화장실 앞에서 스콘을 먹어야 했어요 열고 닫히는 문은 섬이었다가 여름이다가 코끼리였습니다 삼십 분 동안 읽었는데요 시 한 편을 오래 보았습니다
매일 달라지는 책을 동료에게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쓰는 몰입을 알 리 없어요 동료가 농담을 던졌습니다 "등단을 못 하겠구나" 엉뚱한 발언을 잘 하는 저의 별명은 소설가입니다 "시를 씁니다" 말하지 않아요 동료들은 알고도 모르는 것일까요
"친구들은 어때요"하면 엄마가 떠오릅니다 저의 벗입니다 같은 원 안의 피자를 먹고 다른 날 같은 구두를 신습니다 즐거운 시간은 떼어 두었다가 서로에게 선물합니다 기억이 풍성해지면 쪼그라드는 현재들 진짜 벗들은 기억의 원 안에 있어요
항공사 부도 직전이라는 소문이 돕니다 엄마는 키위를 반으로 자릅니다 포도를 씻고 귤을 깝니다 키위의 씨만큼 늘어나는 의혹들 과일 열한 통을 들고 출근합니다 회사일까 집단일까 궁금합니다 급여가 들어오지 않았으니 과일은 엄마에게 달아두는 외상입니다
조금만 당돌해집시다 구호가 필요합니다 동료는 잘난 척을 하다 동료들에게 혼쭐이 났습니다 저도 잘난 척의 기질이 있습니다 그러니 많이는 말고 조금만요
늙어도 우리는 무섭습니다 엄마는 겁보입니다 매일 밤이 오다니 엄마는 차를 몰고 저를 데리러 옵니다 보조석의 방석은 꽃무늬입니다 여성이 되기 위해 꽃을 사들이고 무늬를 사들입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우아합니다 스무살에 꾸었던 꿈의 일부를 이룬 것 같아요
심사평 / 황인숙ㆍ김민정ㆍ서효인 시인
"모두가 충분히 시라고 부를 만한 진짜 시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심사위원인 김민정(왼쪽부터) 서효인 황인숙 시인이 지난해 12월 서울 중구 세종대로 한국일보에서 응모작을 두고 의견을 나누고 있다. 류효진 기자
심사위원의 손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않은 작품은 다음 3편과 같다. 노혜진씨의 ‘엄마는 저렇게 걸어오지 않는다’, 김겨울씨의 ‘형벌’, 정유소씨의 ‘외나무다리’. 정유소씨의 작품은 일상의 균열을 끝내 잡아내는 관찰의 힘이 돋보였다. 그러나 시 전반에서 보이는 단단한 진술이 어떤 부분에 있어서 조금은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느 지점에서는 예상된 시의 흐름을 살짝 비틀어보는 엉뚱함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김겨울씨의 작품은 상상의 영역에서 독특한 영토를 이미 확보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에 비해 지나치게 평면적인 제목은 시를 보는 이의 자세조차 느슨하게 만들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제목도 시에 포함된다. 아주 유력한 방식으로.
당선의 영예는 노혜진씨에게 돌아갔다. 신춘문예 발표 시즌마다 들리는 비슷한 이야기를 노혜진의 작품은 정면으로 돌파하고 있다. 요즘 시가 시답지 않게 길다, 최근 시는 언어를 정제하지 못한다, 산문시의 경향이 한국시를 망친다 등등.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일인가? 노혜진의 시는 분명하게 아니라고 답하는 듯하다. 가령 “여성이 되기 위해 꽃을 사들이고 무늬를 사들입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우아합니다”라는 다소 소설적인 문장은 시에 대한 평균적인 인식에 비해 길게 나열된 ‘엄마’의 특정되지 않은 성격으로 인해 그 의미가 넓어진다. 그렇게 우아해진 부분 외 나머지 것들을 더 궁금하게 한다. 나는 이런 전개를 시적이라 부르지 않을 자신이 없다. 경쾌한 발성, 산문 형식을 지탱하는 관점의 전환과 독특한 리듬감, 페이지 전반을 아우르는 페이소스… 이 모두가 충분히 이미 시라고 부를 만했다. 요즈음 시가 아니고, 진짜 시.
이번 심사는 예심과 본심이 함께 진행되었다. 시인에게는 전부라 할 수 있는 자신의 취향을 근거로, 다른 이의 취향을 설득하는 작업을 더욱 치밀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시와 시, 시인과 시인이 서로에게 육박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 시간을 통하여 새로이 등장한 노혜진 시인의 손을 잡고, ‘시라는 것’을 두고 벌이는 유구한 전쟁의 복판을 함께 걸어가도 되겠다 싶다. 앞으로 그가 이룰 겸허한 돌파를 응원한다.
[부산일보 2019 신춘문예 시 당선작]
거미 / 권영하
하늘 끝 마천루 정수리에
밧줄을 꽁꽁 묶었다
동아줄 토해내며 낙하하는 몸으로
건물의 창을 닦으며 절벽으로 내려간다
빌딩들 눈부시게 플래시를 터뜨려도
허공길 유리블록 사뿐히 밟으면서
수족관 물고기처럼
살랑살랑 물호수를 흔들며 헤엄친다
뙤약볕 빨아먹은 유리성이 열을 뿜고
빌딩허리를 돌아온 왜바람이
목숨줄을 무섭게 흔들지만
구슬땀을 흘리며 내려간다
아이스링크에 정빙기같이
생채기를 지운다
유리벽에 갇힌 사람들에게
푸른 하늘도 열어주고
유리창에 비치는 현수막의 사연도
살포시 보듬어 닦는다
의지할 곳 없는 허공에서
작업복 물에 젖어 파스내음 진동하고
피로가 줄끝에서 경적처럼 돋아나지만
또다시 하늘에 밧줄을 묶는다
땀 흘린 줄길이만큼 도시는 맑아지고
유리벽에 그려진 풍경화도
깨끗해지니까
▲1965년생
▲경북 문경시 점촌중학교 교사.
[심사평] 투고한 작품들을 읽어보면서 느낀 몇 가지 아쉬운 점을 적어본다. 첫째, 시를 오랫동안 익혔으면 좋겠다. 잠깐 보았던 사물이나 여행지의 인상을 그대로 쓴다고 '리얼'의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래 묵혀 충분한 발효를 거친 다음에야 좋은 작품이 되는 것이다. 둘째, 문장이나 문체의 완성도를 높였으면 한다. 셋째, 기괴한 이미지를 썼다고 해서 난해한 좋은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넷째, 의식 또는 사유(사회적, 정치적, 미학적)가 시의 토대를 받쳐주지 못하고 있다. 다섯째, 노래가 없다. 운율 또는 리듬이 그것이다.
'샤갈의 숲속 마을로, 나는'은 이미지가 출중하여 감각은 높이 사 줄만 했으나 주제의 가벼움이 일상성에 매몰되어 우리 삶에 대한 사유가 받쳐주지 못하였다. 반면 당선작인 '거미'는 현실감을 바탕으로 해 사회를 보듬어 안는 시선이 따뜻하고 정겹다. 유리벽을 청소하는 노동자의 삶이 잘 형상화 되어 있었다.(강은교·강영환)
[한라일보 2019 신춘문예 시 당선작]
소 / 김윤진
고양이소에서 정말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당신은 물웅덩이를 지켰다. 짙은 녹색의 고양이소처럼 당신의 집은 고양이의 눈처럼 깊고 고요하다.
가만히 있다가도 다이빙하거나 발을 헛디뎌서 누가 그 깊이를 만지면, 털을 바짝 세우고 물보라를 일으키며 가릉, 하고 울어댔다. 몸을 으스스 떨며 건져 올린 신발의 개수를 일지에 적어넣는 것이 여름 당번의 일. 개학 후 신발의 개수만큼 책상이 비고, 당신이 지키지 못한 동생들은 집을 떠나고
당신은 항상 깊이를 알 수 없어. 두근대는 소에서 산다. 꿈 속에 당신의 아비는 칼을 들고 쫓아오고, 또 하나 당신의 아비는 발목이 부러진 당신을 부축하고, 한 손에는 칼을 들고 한 손은 당신 어깨를 감싸고, 파도가 되었다가 호수가 되었다가 그저 무지개 장화를 신은 아이들의 퐁당거리는 빗물이 되었다가, 당신마저 발을 담그면 세숫대야 물은 심층을 알 수 없었다.
▲1971년 제주 서귀포 출생
▲서강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심사평]김윤진 씨의 '소(沼)'는 제주도 여러 곳에 산재해 있는 '고양이소(沼)'에 얽힌 슬픈 일화(逸話)를 과장이나 들뜸이 없이 차분한 어조로 빚은 작품이다. 김윤진 씨의 시는 오직 구체적 경험의 범주에서 상상력의 단초를 구하느라 다소 밋밋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유년의 아픈 경험을 장악하는 솜씨가 뛰어나고, 그 슬픔의 질량을 절제된 표현으로 담아낸 것은 숨길 수 없는 재능이다. 웅덩이를 고양이로 바꾸는 활유법에서 시는 돌연 탄력을 얻는데, 이를테면 '누가 그 깊이를 만지면, 털을 바짝 세우고 물보라를 일으키며 갸릉, 하고 울어댔다'라는 구절을 거쳐 '당신은 항상 깊이를 알 수 없어 두근대는 소(沼)에서 산다'에 이르는 시의 펼침에서 드러난 반전과 도약의 상상력은 분명 남다른 시적 재능이다. 함께 투고한 '태풍', '그 집' 같은 시에서도 좋은 시인이 될 만한 재능을 두루 확인하며 우리는 김윤진 씨의 시를 당선작으로 뽑았다.(장석주·허영선)
[세계일보 2019 신춘문예 시 당선작] *당선 취소
역대 가장 작은 별이 발견되다
박신우
별이 깃든 방, 연구진들이 놀라운 발견을 했어요 그들은 지금까지 발견된 별 가운데 가장 크기가 작은 별을 발견했습니다 그 크기는 목성보다 작고 토성보다 약간 큰 정도로, 지구 열 개밖에 안 들어가는 크기라더군요 세상에 정말 작군요, 옥탑방에서 생각했어요 이런 작고 조밀한 별이 있을 수 있다니 하고 말이죠 핵융합 반응 속도가 매우 낮아서 표면은 극히 어둡다고 합니다 이제야 그늘이 조금 이해되는군요
이 별의 천장은 매우 낮습니다 산소가 희박하죠 멀리서 보는 야경은 아름다울지 몰라요 어차피 낮에는 하늘도 추락하겠지만 그래도 먼지가 이만큼 모이니 질량에 대해 얘기할 수 있군요 그건 괜찮은 발견이에요
먼 곳에서 별에 대해 말하면 안 돼요 다 안다는 것처럼 중력을 연구하지는 말아야죠 피아노 두드리듯 논문을 쏟아내지 말아요 차라리 눈물에 대해 써보는 게 어때요 별의 부피를 결정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둘레를 더듬는 일이죠 옥상난간을 서성거리는 멀미처럼 말이에요
여기 옥탑에서는 중력이 약해서 몸의 상당부분이 기체로 존재해요 그래요 모든 별들은 항상 지상으로 언제 떨어질지 숨을 뻗고 있는 거죠
[무등일보 2019 신춘문예 시 당선작]
경운기를 부검하다 / 임은주
그는 차디찬 쇳덩이로 돌아갔다
움직이지 못할 때의 무게는 더 큰 허공이다
돌발적인 사건을 끌고 온 아침의 얼굴이 쾡하다
피를 묻힌 장갑이 단서를 찾고 일순 열손가락이 긴장한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망치와 드릴이 달려들어
서둘러 몸을 빠져나간 속도를 심문한다
평생 기름밥을 먹은 늙은 부검의 앞에 놓인 식은 몸을
날이 선 늦가을 바람과 졸음이 각을 뜨는 순간,
그의 흔적이 남아있는 진흙탕과 좁은 논둑길이 나타난다
미궁을 건너온 사인에 집중한다
붉게 녹슨 등짝엔 논밭을 뒤집고 들판을 실어 나른
흔적이 보인다 심장충격기에도 반응이 없는 엔진
오랫동안 노동에 시달린 혹사의 흔적이 발견되고
탈, 탈, 탈, 더 털릴 들판도 없이 홀로 2만Km를 달려 온 바퀴엔
갈라진 뒤꿈치의 무늬가 찍혀있다
가만히 지나간 시간을 만지면
그 속에 갇힌 울음이 시커멓게 묻어나온다
소의 목에서 흘러나온 선지 같은 기름이 왈칵 쏟아진다
임종의 안쪽에는 어느새 검은 멍이 튼튼히 자리잡았다
길이 간절할 때마다 울음이 작동되지 못하고 툴툴거린 흔적이다
죽어도 사흘 동안 귀는 열려 있다는 말을 꼭 움켜쥔
얼굴의 피멍이 희미한 눈빛부터 쓸어내렸다
이제 습골의 시간이다
정든 과수원 나무들이 마지막 악수를 청했는지 뼈마디마다 주저흔이 보인다고 기름 묻은 손이 넌지시 일러주었다
심사평/고재종시인
시적 진정성 돋보여
2019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출품한 시는 총 369명 1426편이었다. 꽤 높은 응모 율이었다. 한데 양적인 투고에 걸맞게 작품들의 수준도 그 감각과 사유, 표현력에 있어서 고투를 보여주는 작품이 많아 기뻤다.
세계와 존재의 비밀을 캐고 인식에 충격을 주는 시, 사회의 현안문제들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시, 무엇보다도 삶과 사랑에 대한 여러 감정과 담론을 펼쳐 대며 공명의 감동을 이끌어내는 시들에 가슴이 먹먹했다.
이 중 시적 표현력의 진수를 보여준 '몰골'의 김길전, 화려한 상상력을 가진 '지느러미 떼라피'의 김휼, 인생 이해의 감각적 진술이 돋보이는 '붉은'의 최재영, 그리고 서정과 인식, 공감 그 어느 것에서든 자유로운 '그 그림은 아무 것도 낳지 않았다', '경운기를 부검하다', '오래된 그릇'의 임은주가 최종적으로 겨뤘다.
여기 네 사람 누구를 당선으로 밀어도 큰 문제가 없었는데, 다만 김길전은 시 전체의 유기적 통일성 확보에 실패했고, 김휼은 이미지들이 삶에 천착하지 못했으며, 최재영은 잠언 투의 문장이 거슬렸다.
결국 위 문제점들을 잘 극복한 임은주로 결정되었는데, 당선작 '경운기를 부검하다'는 어느 날 사고로 박살난 경운기를 수리하며 그 경운기를 운영했을 농부의 죽음을 유추해내는 솜씨가 사유나 감각, 적확한 표현력에 있어 그 재능과 숙련도를 충분히 보여줬다.
한데 이 시인의 다른 두 작품이 신춘문예용으로는 더 적합할 것도 같았는데, 나는 시적 진정성이 돋보이는 이 작품을 최종 당선작으로 밀었다.
축하드리며 아쉽게 된 김길전, 김휼, 최재영도 금명간에 시인이 될 수 있는 재능을 가졌다는 것을 알려드린다
[경상일보 2019 신춘문예 시 당선작]
광고 / 김길전
파라킨사스 너는 뼛속까지 시린 밤에도 쇄골을 드러낸 가난한 여인의 입술에 걸린 광고
가진 것이 그저 빨강 밖에 없네요
추운 것들은 늘 번지려는 색 뿐이에요
낡은 예식장이 생각과 모자를 바꿔 장례식장이 되자 눈이 많이 내리고 대기하던 사람들이 죽었어요
간밤
그 신장개업의 담벼락에 어지럽게 나붙은 광고
생고무 신발 재고 정리 새 신발 신고 가세요
추운 것들은 늘 눈이 커져요
광고는 붉은 과장
광고는 춥고 따스함의 의도적 대비
광고는 움츠리는 불빛의 촉수
추운 것들은 언제나 끝에 있어요
오늘 파라킨사스는 눈 속에서도 드러낸 가슴이 너무 붉고
몇 낱알 쌀을 물고 누운 자는 신발이 없어요
단지 겨울이라는 그 이유만으로 모두 돌아섰네요
타인의 추위를 수긍하지 않는 이들의 등 뒤로 드러냄이 참 스산한데요
심사평]
현대시 갖출 언어의 긴장·유머등 고루 담아 / 이시영
예심을 거친 31명 145편의 시를 읽었다. ‘울거미’는 노동을 잃고 시골로 내려가는 동료에 대한 시큰한 애정을 담은 시이지만 감정이 앞선 나머지 서사가 결을 잃었다. 감정은 감출수록 행간 속에서 울림을 갖는다. ‘길의 방정식’은 언어의 긴장을 유지하다가 결국은 단추 구멍이라는 상식의 확인에 머물고 만 점이 아쉬웠다. 그러나 맨마지막 ‘새 발가락이 따뜻하게 만져졌다’라는 비상이 눈부셨다. 시란 평범한 사실의 재현이 아니라 발상의 대담한 전환이 이루어졌을 때 새로운 단계를 향해 비약한다.
‘볼펜 똥’은 발상과 언어의 서술이 재미있으며 간간이 유머도 구사하여 읽는 맛을 주는 것이 장점이나 너무 지루하다. 하고자 하는 얘기를 과감하게 생략할 줄 알아야 시적 발언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기 바란다.
당선작 ‘광고’는 현대시가 갖추어야 할 언어의 긴장과 냉담, 유머와 생략과 그로테스크까지 갖추었으며 무엇보다 강렬한 붉은색 꽃인 파라킨사스를 통해 광고로 대변되는 현대의 으스스한 풍경을 매력적인 언어 서술로 이끈 솜씨가 돋보인 작품이다. 이 시인의 언어 감각과 정동(affect)은 ‘추운 것들은 늘 번지려는 색뿐이에요’라는 구절이나 ‘광고는 붉은 과장/…/광고는 움츠리는 불빛의 촉수’라는 날카로운 대비 속에 한껏 빛을 발하고 있다. 뛰어난 신인을 새해 새 아침에 선보이는 선자의 기쁨이 크다.
[전북도민일보 2019 신춘문예 시 당선작] *당선취소
명옥헌 별자리
최재영
원림에 드니 그늘까지 붉다
명옥헌*을 따라 운행하는 배롱나무는
별자리보다도 뜨거워
눈이 타들어가는 붉은 계절을 완성한다
은하수 쏟아져 내리는 연못 속 꽃그늘
그 그늘 안에서는 무엇이든 옥구슬 소리로 흘러가고
어디선가 시작된 바람은 낮은 파문으로 돌아와
우주의 눈물로 화들짝 여울져 가는데,
기어이 후두둑 흐드러지는 자미성**
연못 속으로 어느 인연이 자맥질 해 들어왔나
문이란 문 죄다 열어젖히고
한여름 염천에 백리까지 향기를 몰아간다
그 지극함으로 꽃은 피고지는 것
제 그림자를 그윽히 들여다보며
아무도 본 적 없는 첫 개화의 우주에서
명옥헌 별자리들의 황홀한 궤도가 한창이다
한 생을 달려와 뜨겁게 피어나는 배롱나무
드디어 아무 망설임 없이 안과 밖을 당기니
활짝 열고 맞아들이는 견고한 합일의 연못
눈물겹게, 붉다
*명옥헌 : 전남 담양군 소재. 조선중기 오이정이 세움.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옥구슬소리 같다하여 명옥헌이라 함.
**자미성 : 자미는 백일홍나무, 배롱나무라고도 하며 하늘의 은하수를 본따 명옥헌 연못 주위에 28그루의 배롱나무를 심었다고 함.
<시 심사평-양병호>
“어두운 세상을 성냥 치는 불빛의 시”
세상은 미세먼지 자욱하고, 인생은 흐리멍덩 쓸쓸하다. 자본은 탐욕을 무한증식하고, 노동은 춥고 억울하다. 과학은 인간을 삭제하고, 인간은 자연을 추억한다. 속도는 속도를 추월하고, 문명은 외려 불편하다. 모든 국가는 애국을 빌미삼아 이기주의로 치닫는다. 태양은 식어가고, 별빛은 침침하다. 지구의 겨울엔 경쟁경쟁 낙엽이 지고, 효율효율 바람이 분다. 본의 아니게 막차를 놓친 사람은 환멸조차 심드렁하다.
이러한 때 골방에서 밀교자처럼 외로움의 연필로 시를 쓰는 사람들이 있다. 저들의 불면과 언어와 고뇌와 환상은 어두운 세상을 성냥 치는 불빛이 될 것이다.
그 성냥불빛 같은 시편들 속에서 최종 다섯 편이 빛났다. 김향숙의 「곰보꽃게거미」 전진욱의 「부정과 긍정 사이」, 송아리의 「초대」, 박준성의 「표준형 인간」, 최재영의 「명옥헌별자리」이다. 이들 작품은 모두 치열한 내공의 시간을 통과한 수준 높은 미학을 성취하고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새로운 언어미학과 완결성 측면에서 「표준형 인간」과 「명옥헌별자리」가 남았다. 선택의 고민이 오래 이어졌다.
「표준형 인간」은 세계와 자아가 겪는 불화에 대한 연민의 정서, 경쟁사회를 살아내는 인간의 슬픈 운명을 형상화하고 있다. 특히 참신한 언어의 활달한 운용,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웅숭깊은 사색이 돋보였다. 환한 시의 미래가 기대된다.
「명옥헌별자리」는 배롱나무를 통해서 작동하는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이 밀도와 집중력을 확보하고 있다. 나아가 꾀죄죄하고 지리멸렬한 인간의 삶을 우주의 영역으로까지 확장하여 창발하는 상상력의 품새가 호연하다. 자아와 세계의 화평한 동일화를 인연의 합일로 이루어내는 서정 또한 “눈물겹게, 붉다.” 작품의 구조와 시상의 전개 역시 군더더기 없이 매끈하게 흘러서 황홀한 미학을 성취한다. 더불어 투고한 「꽃뱀」, 「모루」 역시 가편이다. 당선이다. 훌륭한 시인이 될 것이다.
▲양병호 시인·전북대 국문과 교수
[영주일보 2019 신춘문예 시 당선작]
기도 / 원기자
일면식도 없는 햇살이
평화의 소녀상 앞에 십자가로 세워집니다
아무도 보듬어주지 않는 상처를 온몸으로 끌어안은 할머니가
외줄 위의 어름사니처럼 아슬아슬하게 넘어갑니다
헐렁한 약속을 꿰어보자고
옷고름 풀고 앉아 빈 하늘에 보내는 침묵을
귀 세워 듣는 이 없네요
열세 살 어린 꽃송이
군용트럭에 실려 어둠의 터널로 들어섰지요
속살 드러낸 허공이 이제 막 달거리 시작한 꽃잎으로
휘파람을 불며 달려들던 밤에는
비린내가 사라질 때까지 노래를 불렀지요
그 노랫소리 배경삼아 스스로 껍질이 된
한 여자의 붉은 생, 반듯한 체면을 따라가면
목숨처럼 그러안은 기도가 쏟아집니다
인생이란 단막극을
주연으로 살아본 적 없는 몸, 숨이 멈추면
"미안합니다"
듣고 싶은 그 말 한 마디 염원으로 남기고
십자가 높은 푸른 하늘에 한 줌 햇살이 되리
[2019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마지막 할머니와 아무르 강가에서
조온윤
할머니가 있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가판대 위 물고기의 눈알처럼
죽어가면서도 시선을 잃지 않아서
그 아득한 세월의 흔들의자에 앉아 여전히
이승의 장경을 관망하고 있는
아무르 강가에서 늙고 지친 호랑이가
밀렵꾼들에게 가족을 잃은 마지막 호랑이가
수면 위로 얼굴을 비추는 순간
마르고 거친 혓바닥을 내밀어 적시는 순간
늙은 호랑이는 마주하게 되지
마지막 할머니를
초원 위를 뛰어가는 사슴들을 멀리서
그저 멀리서 바라보고만 있는 위구르족 여자의 시선을
그 시선의 수심을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어서
심해어의 눈처럼
어딘가에 있겠지만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무언가 보고 있겠지만 무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초점이 없이도 자전하는 지구본처럼
물고기의 눈알이 빨간 국물에 적셔졌다면, 지금쯤 식탁 위에서
눈알을 도려냈다면 어두컴컴한 하수구 어디쯤에서
삼켰다면 고래의 뱃속에서
여전히 관망하지
세계를
그곳의 공감각을
머지않아 모든 할머니들이 사라진 시대가 온다고 해도
목을 축이러 찾아간 아무르 강가에서
저 멀리 초원 위를 뛰어다니는 사슴들밖엔 바라볼 수 없다고 해도
호랑이는 그 눈을 죽는 순간까지 기억하지
죽은 뒤에도 시선을 잃지 않아서
흔들의자는 혼자서도 오랫동안 흔들거리지
■ 시 심사평
신춘문예 시 심사는 3∼5편의 완성도가 높고 고른 투고작 중에서 투고자의 역량이 집중된 ‘한 편’을 선정한다. 우리 시단에 즐거운 자극을 줄 새로움도 기대하게 된다. 이런 점이 이른바 신춘문예 유형을 형성하게 되는 것 같다. 예심에서 올라온 13명의 작품 중에서 마지막까지 논의된 그 ‘한 편’은 ‘사돈’ ‘헤드셋 소녀’ ‘바닥 꽃 핀다’ ‘마지막 할머니와 아무르 강가에서’ 등 4편이었다.
‘사돈’은 사물의 모습이나 움직임을 소리로 듣고 냄새로 감지하는 빼어난 공감각적 이미지로 표현하면서 만물이 ‘사돈’이라는 인식을 드러낸 작품이다. 귀로 듣는 말에서 벗어나 세계와 온몸으로 교감하려는 태도가 주목할 만했으나 비약이 심한 몇몇 문장들은 부자연스러웠다. ‘헤드셋 소녀’는 헤드셋 음악에 스스로 갇혀 지내는 소녀의 내면적 움직임을 체험시키는 감각적인 이미지와 그 음악을 연상시키는 스타카토 리듬이 인상적이었다. 표현 기법만으로 본다면 으뜸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소녀의 목소리에서 어른의 관념이 감지되어 아쉬웠다. ‘바닥 꽃 핀다’는 냄비에 끓는 물에서 단단한 바닥을 뚫고 올라와 꽃피우는 봄의 에너지를 즐겁게 상상한 점, 일상의 경험을 자연스럽게 육화시킨 점이 볼만하였으나 미적 인식보다 아이디어에 의존한 점은 한계로 지적되었다.
숙고와 논의를 거쳐 죽기 직전에 할머니가 바라본 풍경과 할머니의 죽음을 기억하는 호랑이의 시선을 스케일이 큰 상상력으로 진술한 ‘마지막 할머니와 아무르 강가에서’를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이 시는 지상의 수많은 삶과 죽음을 자신의 몸으로 겪어낸 것 같은 할머니가 자신의 마지막을 풍경화처럼 바라보는 시선과 개개의 삶을 넘어 생태계에 각인된 기억에 따라 움직이는 호랑이의 시선을 교차시키고 있다. 서로 얽히면서 소멸되어가는 두 시선은 자연의 냉혹한 질서와 죽음의 공포, 삶의 애착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어떤 거대한 눈을 떠올리게 한다.
이 시는 우리 현실과 다소 거리가 있는 소재와 한 편의 시가 감당하기 쉽지 않은 큰 주제로 인해 관념에 떨어질 위험이 있으나 세밀하고 끈질긴 상상과 삶과 죽음의 순환을 꿰뚫는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통찰이 그런 우려를 잘 떨쳐내고 있다.
심사위원 정호승·김기택
2019년,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고독의 방 / 차진주
사방으로 흐르는 하이얀 잉크에
투명한 창을 내고 시를 쓴다
바람을 묶어 단단히 메어두고
그 시로 난 길에 청보리밭
청명한 내음이 입속에 오도독 씹힐 때
영원으로 가는 내밀한 계단이
나직이 나를 부를 때
그 손 잡아 여여히 흐르는 강으로 회양목을 돌아
고이 들어앉은 앉은뱅이 숲
오래된 서커스처럼 안개 같은 향이 피어 오른다
영혼을 견인하는 차 야곱의 사다리
스톡홀름 증후군
콰지모도 콤플렉스의 아가씨들
영원을 향한 길목에서 자유를 찾은 소녀들의 밤
인생의 복락 삶의 뒤안길
수를 셀 수 없는 생의 명과 암
시간을 잊은 고독의 방
파두의 라틴어 원류가
깨어 있는 영혼으로 침묵을 두드리며 춤을 춘다
아서라,
영겁의 향기 부처님 자비가
고독을 빛으로 가득 채운다
응모작들의 높은 수준과 시적 풍요로움
■ 시 심사평 / 최동호 시인
본심에 오른 대부분의 작품은 일정 수준을 넘어섰으나 그 중 일부는 불교적 소재나 불교적 사유가 밖으로 드러나 어색한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숙고의 대상이 된 ‘안나푸르나’, ‘집에 들다’, ‘선잠’, ‘생각의 그늘’, ‘불일암 오두막’, ‘고독의 방’, ‘끝’ 등의 시편들은 상당 수준의 시적 공력을 엿볼 수 있었다. 시적 언어의 구사나 이미지의 형상화 능력 등에 있어서 오랜 수련을 알 수 있게 하여 응모작들의 높은 수준과 그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위에서 거론한 작품들 중에서 마지막까지 심사자의 손을 떠나지 않은 것은 ‘집에 들다’, ‘선잠’, ‘생각의 그늘’, ‘고독의 방’ 등 4편이었다. ‘집에 들다’는 비교적 간결한 시인데 ‘국수 꼬리 같은 나를 보았다’와 같은 독특한 표현이 주목되었으며 마지막에서 불교적 사유를 유연하게 보여주었다. ‘선잠’은 남편을 잃고 제삿날 시골에서 자식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우회적 어법으로 잘 표현해 내었으나 불교적 소재가 유연하게 작용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생각의 그늘’은 사물을 바라보고 이를 사유하는 과정을 시적으로 변용시키는 유연함을 보여주었으며 긴 시행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나가는 저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마지막 부분을 선명하게 드러내 보이지는 않았다. ‘고독의 방’ 역시 사변적이기는 하다. 그러나 일단 산뜻한 첫 부분의 시작과 “청보리밭 청명한 마음이 입 안에서 오도독 씹힐 때”와 같은 감각적인 표현이 인상적이었으며 중간 부분에서 시어의 열거로 약간의 흔들림이 있었으나 마지막 결말의 처리에서 탄력적인 긴장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상의 시편들은 각각이 지닌 장단점으로 인해 우열을 정하기가 어려워 당선작을 쉽게 결정할
수는 없었다. 다시 작품을 정독하고 비교한 다음 다른 분들의 작품보다는 완결성을 지닌 ‘고독의 방’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결말 부분에서 ‘고독을 빛’으로 채워 부처님의 자비를 자연스럽게 표현한 것을 강점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많은 편수의 시조가 최종심에 넘겨졌으며 이들 작품 또한 세심히 읽어 보았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편들이 너무 형식에 억매이거나 과장된 어법을 구사하고 있어서 당선작의 대상이 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었다. 최종적으로 당선된 분에게는 축하의 박수를 보내드리고 아깝게 탈락한 분들에게는 격려의 박수를 보내드린다.
2019 광남일보
혀를 삼키는 나 / 조경환
그를 떠나보낸 건 혀였다
혀가 어른이 된 나무를 스튜디오에 불렀다
머나먼 이국으로 흙 한 줌, 물 한 모금 보자기에 싸여 보내졌다
어른의 모습으로 그가 돌아왔다
-어머니 찾으러 왔어요
1번 카메라 앞에서 젖은 가지를 후드득 턴다
붉은 혀가 더듬더듬 어떻게 살았느냐며 묻는다
허공에 파노라마처럼 나무의 성장과정이 실금처럼 얽히고 설킨다
-누굴 원망한 적은 없는 걸요
심호흡 한번으로 다 풀 수 없다는 듯이 고개떨군다
-우는 법도 잃어버렸어? 혀가 묻는다
-오는 내내 비가 내렸어요
더 가벼워지지 않으려고 무너지지 않으려고 날아왔죠
뿌리를 내리기까지 나무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더군요
새 뿌리에 새 말이 고인다 새 흙이 덮이고
새 잎이 수북이 쌓인다
혀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꺾꽂이 된 거군요
혀의 목소리가 갈라진다 혀가 3번 카메라를 보는 사이
내가 어미라는 말이 들린다
혀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저음이다
아랫입술 밑에서 나오는 작은 소리다
갑자기 그가 꺼이꺼이 운다
혀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그의 등을 두드린다
어른이 된 나무가 몸속 깊이 혀를 꿀꺽 삼킨다.
심사평
시의 역할과 기능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다른 공연예술과 영상예술이 사람들 주변에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와 있기 때문이리라.
특히 핸드폰의 발달로 인해 모든 예술을 실시간으로 즐길 수 있게 되자 더 이상 시를 찾지 않게 된 듯도 싶다. 이제는 책을 펴고 앉아 읽으며 즐기던 기존의 고급 예술인 시가 설자리를 잃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투고된 원고는 상당했다.
어쨌거나 선자는 정성을 다해 읽으며 원고더미를 줄여갔다. 우선 15편의 우수작을 골라낸 뒤 읽고 또 읽으며 엄선을 거듭해 나갔다. 마침내 좋은 작품 7편이 남게 되었다. 이렇게 엄선을 하는 과정에 투고한 사람의 이름도 확인이 되었다. 아는 이름이 있으면 과감하게 떨어뜨렸다. 역차별을 당한 셈이다.
최종 예심에 오른 시 7편은 김향숙의 ‘달의 계곡’, 김정순의 ‘필사의 밤’, 조수일의 ‘낯선 조문’, 김휼의 ‘악어가 사는 집’, 김현곤의 ‘남간재 구름다리’, 이호영의 ‘모퉁이 찻집에서’, 조경환의 ‘혀를 삼키는 나무’였다. 이들의 시 7편을 중심으로 투고자의 나머지 시들도 거듭 검토한 결과 김현곤의 ‘남간재 구름다리’, 이호영의 ‘모퉁이 찻집에서’, 조경환의 ‘혀를 삼키는 나무’를 남기고 나머지는 옆으로 밀어냈다 그런 뒤 다시 또 남은 3편의 시를 여러 차례 숙독했다. 거듭 숙독한 끝에 우선 먼저 김현곤의 ‘남간재 구름다리’를 제외시켰다. 이호영의 ‘모퉁이 찻집에서’와 조경환의 ‘혀를 삼키는 나무’만 남게 된 것이다.
이호영의 ‘모퉁이 찻집에서’는 서정이 풍부한 시, 공감이 풍성한 시이다. 하지만 그런 장점과 달리 예의 시와 함께 투고된 시들에는 추상적 관념이 많았다. 이호영의 시적 역량을 가늠하기가 힘들었다는 뜻이다. 읽고 또 읽은 끝에 조경환의 ‘혀를 삼키는 나무’를 2019년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의 당선작으로 뽑기로 했다.
나머지 시들도 우수하지만 이 시는 ‘머나먼 이국’으로 입양을 떠났던 아이가 ‘어른의 모습으로’ 돌아와 어미를 찾는 방송국 스튜디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우선은 아이를 나무로, 그 나무를 이국으로 떠나보낸 원인을 혀로 알레고리하고 있는 것이 재미있다. 그런 재미와 함께 전개되고 있는 민족사의 비애를 인내의 언어로 전개하고 있는 면도 긴장감을 준다. 민족사의 비애와 함께 섬세한 운산이 담겨 있는 조경환의 ‘혀를 삼키는 나무’를 당선작으로 민다.
당선된 사람에게는 축하를, 낙선된 사람에게는 격려를 보낸다.
이은봉 광주대 명예교수
첫댓글 https://youtu.be/n7Y-rDTUdgI
광고/김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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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를 따는 일/권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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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김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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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태이플러씨/ 이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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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할머니와 아무르 강가에서/조온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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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만 저렇게 걸어오지 않는다/노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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