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창 선생 45살(1896) 자서전(「明美堂 詩文集 敍傳」)의 한문(漢文) 표현력(expressive ability)
2024년 9월 15일
이건창 선생이 훌륭한 문장가라고 일찍부터 불려왔는데 몇 가지 점에서 재평가하고 외국어 교육 관점에서 조선시기 한문(漢文) 교육의 문제점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래 문단을 놓고 살펴보겠습니다.
『明美堂集』,卷十六,「明美堂詩文集敍傳」︰
在銀臺(承政院),嘗夜對。因讀『漢史』,微言︰“(東漢)桓、靈之世,君子道消,以言爲諱,漢室遂傾。”上曰︰“不言者,臣下之過也,而亦其君不能包容之故耳。”建昌賀曰︰“聖諭及此,臣民幸甚。”
이건승 선생이 지은 「이건창 선생 행장」에 따르면 할아버지 이시원 선생이 어린 이건창에게 일찍부터 한자를 가르쳤기에 말하기보다 먼저 글자를 깨우쳤고 조금 커서는 작문하였다고 말합니다. 또 23살(1874) 겨울에 북경에 갔을 때 한림원 몇몇 사람들은 젊은 이건창 선생이 중국에서 태어났다면 한림원에 뽑혀들어왔을 것이라고 높이 칭찬하였다고 말합니다. 마치 청나라 한림원 사람들과 한문(漢文)으로 필담(筆談)하면서 아무런 언어 장벽이 없는 것처럼 묘사하였습니다. 이건창 선생 자신도 15살(1866)에 강화도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뒤에 홍문관에 들어갔을 때 나이가 가장 어렸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동갑내기 고종 임금도 이건창 선생을 부러워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이건창 선생의 외국어 한문(漢文) 읽기와 글쓰기 학습 사례에서 중요한 문제는 외국어를 말하기(speaking) 과정 없이 읽기(reading)에서 곧바로 글쓰기(writing)로 넘어가는 방법이 좋은지 따져보아야 합니다. 이건창 선생은 어려서부터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을 만큼 읽기를 이어갔고 또 어려서부터 글쓰기(작문)를 시작하였습니다. 23살에는 청나라 한림원 사람들과 한문(漢文)으로 필담(筆談)하였고 이후에 관원 생활하는 동안에도 지속하여 고종 임금의 교서와 외교문서를 작문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언어 학습은 말하기, 읽기, 생각하기, 글쓰기 네 단계를 차례로 거쳐 자신의 주장과 감정을 표현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외국어 학습에서 말하기와 생각하기 없이 읽기에서 글쓰기로 넘어가려면 글을 쓰는 동안에 먼저 무엇을 표현할 것인지 주제와 내용 구성을 생각하고 다시 단어 선택과 문법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아무리 익숙하더라도 생각하기(thinking)가 2번 일어납니다. 다시 말해 글 쓰는 과정에서 항상 마음속에 모니터 2개를 켜놓고 표현할 주제와 내용 구성을 생각하고 또다시 외웠던 글자와 문구를 떠올리면서 단어와 문구의 선택과 수정을 생각하는 동작을 반복하여야 합니다. 생각하기에서 모국어로 생각할 것이냐 외국어로 생각할 것이냐 아니면 섞어서 생각할 것이냐는 사람마다 또는 익숙한 정도에 따라 다릅니다. 그런데 가장 좋은 외국어 글쓰기는 표현할 주제와 내용을 외국어로 생각하고 단어 선택과 문법을 생각하는 과정을 생략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중국에서 언어 학습의 최대 장애는 말하는 백화(白話)와 글쓰기(文言)가 서로 일치하지 않았기에 둘을 따로따로 배워야 합니다. 백화도 지방마다 따라 방언(方言, vernacular)이 많아 서로 소통하기 어려웠습니다. 심지어 청나라 시기에는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지방관으로 나가면 지방 사람들과 말이 달라 소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큰돈을 주고 언어능력과 행정능력이 있는 막료를 고용하여 데리고 갔습니다.
중국에서 말하기와 글쓰기를 가르치고 배우는 교학 과정을 보면 옛날부터(宋代 이후) 과거시험 경쟁이 치열하였기 때문에 조기 교육이 널리 유행하였습니다. 한대(漢代)와 위진(魏晉)시기에는 상류층에서 조기 교육 열풍이 불었고 송대 이후에는 평민교육에서도 조기 교육이 유행하였습니다. 송대 이후를 보면 어린이 교육에서 가장 먼저 정확한 발음과 성조를 가르치고(2-3살, 顧炎武 사례) 조금 더 자라면 어른 말에 짧게 대답하도록(對句) 하여 아이의 생각하기를 도와주고 유도하는(5-7살, 왕양명 사례) 두 가지 단계가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어린이 언어 교육에서 1-3살 말하기 시작할 때는 가족 가운데 발음이 정확한 어른(주로 엄마)이 어떤 쉽고 짧은 구절을 어린이에게 자꾸 읊어주면 어린이가 흉내 내면서 발음과 성조(聲調)를 따라 외우도록 하였습니다. 어린이가 많은 문구를 외우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집안에서 학교 교육을 받았던 어른이 먼저 한 구절을 말하고 어린이에게 다음 구절을 짓도록 가르쳤는데 이것이 대구(對句)입니다. 한국에서는 서울 사람들이 경어(敬語)가 밝다는 말로 서울 사람과 시골 사람을 구분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발음 연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어른들이 말할 때 아이들이 말참견하는 것을 보고 “댓구하지 말라”고 야단치는 것이나 이율곡 선생이 어려서 외할아버지와 함께 지은 시(詩)도 외할아버지가 어린 손자에게 대구(對句)를 가르친 것입니다.
청소년 시기에 12-15살 넘으면 학교에 보내거나 가정교사를 모셔서 경전과 모범답안을 외우도록 가르치며 대략 20살이 넘도록 지속하는 사례도 많았습니다.(宋濂 사례) 청소년 시기에는 경전 문구를 이해하건 말건 아침부터 무조건 외우도록 강요하며 초저녁에는 얼마나 잘 외우는지를 점검합니다. 평범한 학생이 하루에 대략 600자 분량을 외웁니다. 청나라 초기에 모기령(毛奇齡, 1623-1716), 왕완(汪琬, 1624-1691), 염약거(閻若璩, 1636-1704) 같은 사람들은 20대 후반에 외운 분량이 아주 많아 앉은 자리에서 3-4시간 동안 외운 내용을 기억하여 끊임없이 읊었다고 합니다. 물론 녹음기처럼 경전을 외우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외우는 데 기억력이 가장 좋았던 사람은 왕안석이었다고 전해옵니다.
경전과 모범 문장을 익숙하게 많이 외운 뒤에야 학교 교사 또는 가정교사가 작문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학생은 옛날부터 전해오거나 당시에 유행하는 모범적인 작가들의 시(詩)와 산문을 모방하여 글짓기를 하고 선생님의 수정과 지도를 받습니다. 돈이 많거나 인맥이 넓은 집안은 아들이나 남동생이 다양한 학술 주장을 배우도록 여러 선생님을 찾아 먼 지방으로 유학을 보내는 경우도 많았습니다.(呂祖謙 사례)
물론 과거시험은 20대 초반에 합격하여야만 늙어 퇴직할 때까지 관직 경력 연수(年數)가 조금 넉넉하여 높이 승진할 수 있었고 30대에 합격하면 경력 연수가 부족하여 높은 관원이 되기 어려웠습니다. 청나라 시기에는 60대에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기뻐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외우기와 대구(對句) 가르치기를 보면, 청소년 시기에는 처음부터 오경(五經) 가운데 글자 분량이 적은 『시경』 또는 『상서』를 외우거나 아이의 취향에 따라 『주역』을 외우는 경우가 많았고 글자 분량이 많은 『춘추』와 『예기』를 외우는 경우는 아주 적었습니다. 그래서 과거시험 합격자들의 선택과목을 보면 『시경』 또는 『상서』가 아주 많았습니다. 또 어린이 시기에 가르치는 대구(對句)가 유행한 것은 역사시기가 아주 이르고 병려문(騈儷文)을 잘 짓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송대에는 산문(散文)이 유행하였고 명청시기에는 논술시험 답안지에서 기승전결 4단을 8단으로 확대한 팔고문(八股文)을 짓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그래서 현대교육에서는 중국의 경전 교육이 외우기 중심의 주입식 교육이라고 평가하고 특히 팔고문 방식의 생각하기를 철저하게 배척하였습니다.
현재 이건창 선생이 45살에 지은 자서전(명미당 시문집 서전)을 보고 한문(漢文) 표현력을 평론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서전(敍傳)」에서 문구를 연결하는 접속사를 비롯하여 실사와 허사 사용 및 인용문 조합 등이 어설퍼 보입니다. 항상 단어와 문구 및 문법의 조합을 생각하면서 쓴 글입니다. 따라서 주제 설정과 문구 구성에서 표현력이 떨어지고 개인의 창의적인 주장과 감정을 세밀하게 표현하지 못하였습니다. 사실상 중국 지식인이라도 읽고 곧바로 무엇을 말하려는지 문의(文意)와 취지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한문 표현력이 떨어집니다. 문장 표현력이 떨어지면 필자가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과 감정 및 문학적 미감(美感)을 당연히 세밀하게 표현하지 못하며 결과는 독자에게 주는 전달력뿐만 아니라 호소력과 감동력이 떨어집니다.
둘째, 이건창 선생의 한문(漢文)을 보면 일부 표현은 창작하였다기보다는 외워둔 문구를 조합하였습니다. 선생의 한문 표현은 당송(唐宋)시기 또는 원명청(元明淸)시기의 문체도 아니고 또 양계초처럼 백화에 가깝게 백화(白話)와 문언(文言)을 혼합한 문체도 아닙니다. 한국 한문이 반드시 중국 어느 시기의 문체를 모방하거나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한국식 한문이라고 변명하기도 어렵습니다.
조선 선조임금이 한효순(韓孝純)과 대화에서 탄식하며 말한 것이 떠오릅니다. 조선은 문치(文治)에 치중하여 군사력이 고려 왕조보다 못하고 200년 동안의 문장력도 고려 왕조보다 못하다고 탄식하였습니다.(『조선실록』, 선조 38년(1605) 9월 28일(기해) : “大槪我國武略, 不及高麗遠焉。 未知以文治所致而然耶? 雖以文章言之, 我國二百年來, 未能及麗代之文章。 以此觀之, 文章、武略, 俱不若也。”) 선조임금은 외국어 교육에서 심각한 문제과 폐해를 지적하였습니다.
셋째, 글을 지을 때 주제와 인용한 역사적 상황이 서로 상응하도록 전고와 문구를 인용하여 작문하여야 합니다.
세 가지를 놓고 이건창 선생의 「명미당 시문집 서전(明美堂詩文集敍傳)」에서 한문 표현력의 사례 하나를 살펴보겠습니다.
「명미당 시문집 서전」에서 이건창 선생이 승정원에 근무할 때 밤에 고종 임금에게 “한나라 역사서(漢史)”를 읽고 설명해주면서 “동한시기 환제와 영제 연간에 도덕적이고 유능한 관원들이 정치와 행정에서 배제되었고 실정을 말하는 언론도 막혔기에 한나라 왕조가 결국에는 멸망하였습니다.(桓、靈之世,君子道消,以言爲諱,漢室遂傾。)”라고 분석(微言)해주었습니다. 고종 임금은 인재 등용의 실패를 말하지 않고 다만 언로가 막힌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인정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이건창 선생은 고종 임금이 개화파 인재를 많이 등용하고 수구파 언론을 막았다는 취지를 간언하였는데 고종 임금의 대답은 이런 취지를 회피하고 구렁이 담장 넘듯이 슬쩍 넘어갔습니다.
환제와 영제 연간은 동한(東漢) 말기입니다. 그런데 “君子道消”란 말은 서한(西漢)시기에 초왕(楚王) 유덕(劉德)의 아들 유향(劉向)이 서한 원제(元帝)에게 주(周)나라 말기 여왕(厲王)과 유왕(幽王)의 실정과 멸망 원인을 분석하고 재이론(災異論) 관점에서 『주역』 비괘(否卦)를 인용하여 부연 설명한 내용입니다.(“讒邪進則衆賢退,群枉盛則正士消。故『易』有「否」「泰」。”) 또 “以言爲諱”는 서한 말기 성제(成帝)의 실정에 대하여 매복(梅福)이 올린 간언(“天下以言爲諱,朝廷尤甚,群臣皆承順上指,莫有執正。”입니다. 또 “桓、靈之世,漢室遂傾”은 사실상 나관중의 『삼국연의(三國演義)』에서 인용한 역사 인식이고 나관중은 동한 멸망의 원인이 환관의 횡포에 있다는 분석을 인용하였습니다.
이건창 선생이 인용한 “君子道消”와 “以言爲諱” 두 구절에는 인과관계가 있는지 아니면 나열하듯이 병렬 묘사를 말하려는 것인지 의도를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이건창 선생의 의도는 단순히 실정 현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정 원인을 분석하려는 것입니다. 접속사 “이(以)”를 놓고 순서대로 읽어보면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유능한 관원들이 배제되고 소인(小人)들이 관직을 독점하고 권력을 행사하였기에 훌륭한 관원들이 실정을 비판하는 언론이 막혔다고 이해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억지입니다. “以言爲諱” 구절이 인용문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건창 선생의 한문 표현을 보면 주어(桓、靈之世)는 동한 말기이고 서술문(君子道消,以言爲諱)은 서한 시기의 말을 인용하고 결론(漢室遂傾)은 나관중의 말을 인용하였습니다. 아무튼지 네 구절 문구가 서로 맞대응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읽는 독자는 이건창 선생이 분석한 근거가 재이론(災異論)인지 또는 언론 탄압(言路 막힘)인지 환관 횡포인지 분석 관점이 분명하지 않고 또 무엇을 말하려는지 의도를 쉽게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의아함만 커집니다.
더구나 동한 멸망이 환제와 영제의 실정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역사 인식은 나관중의 『삼국연의(三國演義)』 제1회 「연도연 호걸삼결의(宴桃園豪傑三結義)」 : “광무제가 한(漢)왕조를 중흥하여 이어오다가 헌제(獻帝)시기에 삼국으로 분할되었다. 후한 멸망의 원인을 따져보면 환제와 영제 연간에 시작되었고 환관 횡포 때문이다.(後來光武中興,傳至獻帝,遂分爲三國。推其致亂之由,殆始於桓、靈二帝。……中涓(宦官)自此愈橫。)”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유비와 관우 장비 세 사람이 도원에서 결의하고 제갈공명을 맞아들이며 반란을 일으킨 이유를 합리화하려고 동한 왕조의 천명이 환제와 영제 연간에 끝났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정리하여 말하면 “君子道消”와 “以言爲諱” 및 “漢室遂傾” 세 구절은 잘 조합하였다고 평가할 수는 있으나 역사 사실들을 충분히 생각하고 인과관계를 분석한 뒤에 지은 창작문은 아닙니다. 또 이건창 선생이 “한나라 역사서(漢史)를 읽고 분석하여 말하였다.(因讀『漢史』,微言)”고 말한 결론 “漢室遂傾”을 보면 “한나라 역사서(漢史)”는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또는 사마광의 『자치통감』도 아닌 것이 분명하고 오히려 나관중의 『삼국연의』에 가깝습니다. 조선시기 외국어 교육은 선조임금의 탄식처럼 실패한 것이고 이건창 선생의 한문 문장을 보더라도 외국어 교육이 충실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외국어 교육의 문제점을 인지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참고 자료 :
『明美堂集』,卷十六,「明美堂詩文集敍傳」︰
在銀臺(承政院),嘗夜對。因讀『漢史』,微言︰“(東漢)桓、靈之世,君子道消,以言爲諱,漢室遂傾。”上曰︰“不言者,臣下之過也,而亦其君不能包容之故耳。”建昌賀曰︰“聖諭及此,臣民幸甚。”
君子道消︰
『漢書』,卷三十六,楚元王傳第六,「德子向」︰
原其所以然者,讒邪並進也。讒邪之所以並進者,由上多疑心,既已用賢人而行善政,如或譖之,則賢人退而善政還。夫執狐疑之心者,來讒賊之口;持不斷之意者,開群枉之門。讒邪進則衆賢退,群枉盛則正士消。故『易』有否泰。小人道長,君子道消,君子道消,則政日亂,故爲否。否者,閉而亂也。君子道長,小人道消,小人道消,則政日治,故爲泰。泰者,通而治也。『詩』又云︰「雨雪麃麃,見晛聿消」,與『易』同義。昔者鯀、共工、驩兜與舜、禹雜處堯朝,周公與管、蔡並居周位,當是時,迭進相毀,流言相謗,豈可勝道哉!帝堯、成王能賢舜、禹、周公而消共工、管、蔡,故以大治,榮華至今。孔子與季、孟偕仕於魯,李斯與叔孫俱宦於秦,定公、始皇賢季、孟、李斯而消孔子、叔孫,故以大亂,污辱至今。故治亂榮辱之端,在所信任;信任既賢,在於堅固而不移。『詩』云「我心匪石,不可轉也」。言守善篤也。『易』曰︰「渙汗其大號」。言號令如汗,汗出而不反者也。今出善令,未能踰時而反,是反汗也;用賢未能三旬而退,是轉石也。『論語』曰:「見不善如探湯。」今二府奏佞諂不當在位,歷年而不去。故出令則如反汗,用賢則如轉石,去佞則如拔山,如此望陰陽之調,不亦難乎!
以言爲諱︰
『漢書』,卷六十七,「梅福」︰今陛下(成帝)旣不納天下之言,又加戮焉。夫䳒鵲遭害,則仁鳥增逝;愚者蒙戮,則知士深退。間者愚民上疏,多觸不急之法,或下廷尉,而死者衆。自陽朔以來,天下以言爲諱,朝廷尤甚,群臣皆承順上指,莫有執正。何以明其然也?取民所上書,陛下之所善,試下之廷尉,廷尉必曰「非所宜言,大不敬。」以此卜之,一矣。
漢室遂傾︰
羅貫中,『三國演義』,第一回,「宴桃園豪傑三結義」︰
話說天下大勢,分久必合,合久必分。周末七國分爭,並入於秦。及秦滅之後,楚、漢分爭,又並入於漢。漢朝自高祖斬白蛇而起義,一統天下,後來光武中興,傳至獻帝,遂分爲三國。推其致亂之由,殆始於桓、靈二帝。桓帝禁錮善類,崇信宦官。及桓帝崩,靈帝即位,大將軍竇武、太傅陳蕃共相輔佐。時有宦官曹節等弄權,竇武、陳蕃謀誅之,機事不密,反爲所害,中涓(宦官)自此愈橫。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