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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申涌)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2C2E0C6A9FFFFU9999X0
자(字) 계수(季收)
호(號) 하은(霞隱)
생년 1561(명종 16)
졸년 ?(미상)
시대 조선중기
본관 고령(高靈)
활동분야 문신 > 문신
[관련정보]
[중앙관] 조선중기 중앙관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관인정보]
제수년월 1594 [갑오(甲午)] 배(拜)
[품관 정보]
품관 정9품
[과거 정보]
과거 신묘(辛卯)
[관력 정보]
관직 참의(參議)
[출전]
『청선고(淸選考)』(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K2-603])
[상세내용]
신용(申涌)
1561년(명종 16)∼미상.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계수(季收), 호는 하은(霞隱).
조부는 신서(申漵)이고, 부친은 신중엄(申仲淹)이다. 대사헌(大司憲) 졸재(拙齋) 신식(申湜)의 종제(從弟)이며, 만전(晩全) 홍가신(洪可臣)의 사위이다. 선조 조(宣祖朝)에 문과(文科)에 등제한 뒤 벼슬은 한림(翰林)‧군수(郡守)를 거쳐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에 이르렀다.
아들은 신득패(申得沛), 주서(注書) 신득유(申得游), 함경도사(咸鏡都事) 신득홍(申得洪), 신득명(申得溟)을 두었다.
이조판서(吏曹判書)‧대제학(大提學)을 증직받았고 청주(淸州)의 봉계서원(鳳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술로는 『의례고람(儀禮考覽)』, 『상례통재(喪禮通載)』, 『오복통고(五服通考)』가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朝鮮人名辭書 CD-ROM 司馬榜目(韓國精神文化硏究院) 國朝文科榜目 淸州邑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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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설(申渫)
[문과] 선조(宣祖) 24년(159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8위(28/34)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2C2E0C124FFFFB1561X0
개명(改名) 신용(申涌)
자(字) 계수(季收)
호(號) 하은(霞隱)
생년 신유(辛酉) 1561년 (명종 16)
합격연령 31세
본인본관 고령(高靈)
거주지 한성([京])【補】(주1)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시대 홍문관검열, 대사간, 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초명은 신용(申湧). 자는 계수(季脩), 호는 하은(霞隱).
영의정 신숙주(申叔舟)의 현손이며, 신광윤(申光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서(申서)이고, 아버지는 신중엄(申仲淹)이며, 어머니는 유엄(柳渰)의 딸이다. 형이 신식(申湜)이다.
1591년(선조 24)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홍문관검열이 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이 되어 활약하였다. 1596년 저작(著作)·수찬(修撰)을 거쳐 승지 대사간 등을 역임하고 뒤에 관찰사에 이르렀다. 청주의 봉계서원(鳳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의례고람(儀禮考覽)』·『상례통재(喪禮通載)』·『오복통고(五服通考)』 등이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신설(申渫))]
[생원] 선조(宣祖) 21년(158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38위(68/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34명 [甲3‧乙7‧丙24]
전력 선교랑(宣敎郞)
관직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
관직 한림(翰林)
타과 선조(宣祖) 21년(158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三等) 38위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신중엄(申仲淹)
[조부(祖父)]
성명 : 신서(申漵)
[증조부(曾祖父)]
성명 : 신광윤(申光潤)
[외조부(外祖父)]
성명 : 유엄(柳渰)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홍가신(洪可臣)[進]
본관 : 남양(南陽[土])【補】
[처부(妻父)2]
성명 : 이문형(李文馨)
본관 : 미상(未詳)
[안항(鴈行)]
형(兄) : 신저(申渚)【補】(주2)
형(兄) : 신식(申湜)[文]
[가족과거]
자(子) : 신득홍(申得洪)[文]
[주 1] 거주지 : 『만력16년무자2월24일사마방목(萬曆十六年戊子二月二十四日司馬榜目)』(하버드옌칭도서관(Harvard-Yenching Library)[K 2291.7 1746(1588)])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주 2] 안항 : 『만력16년무자2월24일사마방목(萬曆十六年戊子二月二十四日司馬榜目)』(하버드옌칭도서관(Harvard-Yenching Library)[K 2291.7 1746(1588)])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안항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106])
신숙주(申叔舟)
[문과] 세종(世宗) 21년(1439) 기미(己未) 친시(親試) 을과(乙科) 3[探花郞]위(03/15)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C2E0C219C8FCB1417X0
자(字) 범옹(泛翁)
호(號) 보한재(保閑齋)
시호(諡號) 문충(文忠)
생년 정유(丁酉) 1417년 (태종 17)
졸년 을미(乙未) 1475년 (성종 6)
향년 59세
합격연령 23세
본인본관 고령(高靈)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전기 병조판서, 대사성,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신숙주는 조선전기 병조판서, 대사성,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417년(태종 17)에 태어나 1475년(성종 6)에 사망했다.
세종 때에는 성삼문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세조의 각별한 지우를 얻어 병조판서로서 예조의 외교업무와 야인 소굴 소탕 등을 수행했다. 성종 재위기에는 『동국통감』 편찬, 『국조오례의』 완성, 역서 편찬, 『해동제국기』 저술 등의 업적을 남겼다. 특히 외교·국방 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 사대교린의 외교문서는 거의 신숙주의 윤색을 거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설체 글씨에도 뛰어났다.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 또는 보한재(保閑齋). 신덕린(申德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조참의 신포시(申包翅)이고, 아버지는 공조참판 신장(申檣)이며, 어머니는 지성주사(知成州事) 정유(鄭有)의 딸이다.
1438년(세종 20) 사마양시에 합격하여 동시에 생원·진사가 되었다.
이듬해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농시직장(典農寺直長)이 되고, 1441년에는 집현전부수찬을 역임하였다.
1442년 국가에서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게 되자 서장관으로 뽑혔다.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참가하여 공적이 많았다. 중국음을 훈민정음인 한글로 표기하기 위하여 왕명으로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유배중이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의 도움을 얻으러 요동을 열세차례나 내왕하였는데, 언어학자인 황찬은 신숙주의 뛰어난 이해력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1447년 중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집현전응교가 되고, 1451년(문종 1)에는 명나라 사신 예겸(倪謙) 등이 당도하자 왕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시짓기에 나서 동방거벽(東方巨擘)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 해 장령(掌令)·집의(執義)를 거쳐, 직제학을 역임하였다.
1452년(문종 2) 수양대군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갈 때 서장관으로 추천되어 수양대군과의 유대가 이때부터 특별하게 맺어졌다.
1453년 승정원동부승지에 오른 뒤 우부승지·좌부승지를 거쳤다. 같은 해 수양대군이 이른바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외직에 나가 있었으며, 수충협책정난공신 2등에 책훈되고, 곧 도승지에 올랐다.
1455년 수양대군이 즉위한 뒤에는 동덕좌익공신(同德佐翼功臣)의 호를 받고 예문관대제학에 초배(超拜)되어 고령군(高靈君)에 봉하여졌다. 이어 주문사(奏聞使)로 명나라에 가서 새 왕의 고명(誥命:임명장)을 청하여 인준을 받아온 공으로 토전(土田)·노비·안마(鞍馬)·의복을 함께 받았다.
1456년(세조 2)에 병조판서로서 국방에 필요한 외교응대의 일을 위임받아 사실상 예조의 일을 전장하게 되었다. 곧이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가 되어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겸하고, 우찬성이 되어서는 대사성까지 맡았다.
1457년 좌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오르고 1459년에는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 무렵 동북 방면에 야인(野人)의 잦은 침입으로, 강경론을 폈다.
1460년에 강원·함길도의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야인정벌을 위하여 출정하였다. 군사를 몇 개 부대로 나누어 여러 길로 한꺼번에 진격하는 전략을 펼쳐 야인의 소굴을 크게 소탕하고 개선하였다.
1462년에 영의정부사가 되고, 1464년에 지위가 너무 높아진 것을 염려하여 사직한 적이 있으며, 1467년에 다시 예조를 겸판하였다. 이듬해 예종이 즉위함에 유명(遺命:유언)으로 승정원에 들어가 원상(院相:어린 임금을 보좌하던 공신)으로 서무를 참결(參決:참여하여 결정)하였다.
같은 해 이른바 남이(南怡) 옥사를 처리하여 수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輸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듬해 겨울에 예종이 승하하자, 대왕대비에게 후사(後嗣)의 택정을 서두를 것을 건의하여 대통(大統)의 승계에 공이 컸다.
성종이 즉위함에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의 호를 받고, 영의정에 다시 임명되었다. 노병(老病)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고, 1472년(성종 3)에는 『세조실록(世祖實錄)』·『예종실록(睿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세조 때부터 작업을 해온 『동국통감(東國通鑑)』의 편찬을 성종의 명에 의하여 신숙주의 집에서 총관하였다. 그리고 세조 때 편찬하도록 명을 받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개찬·산정(刪定)을 위임받아 완성시켰다.
또한 여러 나라의 음운(音韻)에 밝아, 여러 역서(譯書)를 편찬하였으며, 또 일본·여진의 산천 요해(要害)를 표시한 지도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리고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지어 일본의 정치세력들의 강약, 병력의 다소, 영역의 원근, 풍속의 이동(異同), 사선(私船) 내왕의 절차, 우리측 관궤(館餽:객사로 보내는 음식)의 형식 등을 모두 기록하여 일본과의 교빙(交聘)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많은 업적을 남기고 1475년(성종 6)에 일생을 마쳤다.
세조는 일찍이 “당태종에게는 위징, 나에게는 숙주”라고 할 정도로 세조와의 관계가 깊었다. 이러한 관계는 사육신·생육신을 추앙하는 도학적(道學的)인 분위기에서는 항상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나, 당대에서의 신숙주의 정치적·학문적 영향력은 큰 것이었다.
신숙주를 좋게 평가하는 표현으로는 ‘항상 대체(大體)를 생각하고 소절(小節:작은 절의)에는 구애되지 않았다.’든가, ‘큰일에 처하여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강하(江河)를 자르듯 하였다.’는 것과 같은 것이 있다.
과거시험의 시관(試官)을 열세 차례나 하여 사람을 얻음이 당대에서 가장 많았고, 예조판서를 십 수년, 병조판서를 여러 해 동안 각각 겸임한 것은 드문 일이었다. 이렇게 특별한 배려는 외교·국방면에서 신숙주의 탁월한 능력에 따른 것으로서, 저술 대부분이 이에 관계 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대교린의 외교문서는 거의가 신숙주의 윤색을 거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글씨를 잘 썼는데 특히 송설체에 뛰어났다고 한다. 전하는 필적으로는 송설체의 유려함을 보여 주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의 찬문(贊文)과 진당풍(晉唐風)의 고아한 느낌을 주는 해서체의 「화명사예겸시고(和明使倪謙詩稿)」 등이 전한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는 『보한재집(保閑齋集)』이 전하는데, 1644년(인조 22)에 7세손 신숙(申洬)이 영주군수로 있을 때 교서관본 완질을 얻어 간행한 것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신숙주(申叔舟))]
[문과] 세종(世宗) 29년(1447) 정묘(丁卯) 중시(重試) 을과2등(乙科二等) 1위(04/19)
[진사] 세종(世宗) 20년(143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진사] 1등(一等) 1[壯元]위(1/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15명 [乙3‧丙10]
전력 진사(進士)
관직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
관직 문형(文衡)
공신 정난(靖難)‧좌익(佐翼)‧익대(翼戴)‧좌리공신(佐理功臣)
봉호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
문과시제 책문(策問):이학(理學)
타과 세종(世宗) 20년(143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1등(一等) 1위[壯元]
본인문과 세종(世宗) 29년(1447) 정묘(丁卯) 중시(重試) 문과(文科) 을과2등(乙科二等) 1위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신장(申檣)[文]
[조부(祖父)]
성명 : 신포시(申包翅)[麗文]
[증조부(曾祖父)]
성명 : 신덕린(申德隣)[麗文]
[외조부(外祖父)]
성명 : 정유(鄭有)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윤경연(尹景淵)
본관 : 무송(茂松)【補】
[안항(鴈行)]
형(兄) : 신맹주(申孟舟)【補】
형(兄) : 신중주(申仲舟)【補】(주1)
제(弟) : 신송주(申松舟)[文]
제(弟) : 신말주(申末舟)[文]
[가족과거]
자(子) : 신정(申瀞)[文]
자(子) : 신준(申浚)[文]
자(子) : 신형(申泂)[文]
[주 1] 안항 : 『씨족원류(氏族源流)』 [고령신씨]편(627쪽)을 참고하여 안항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卷之二(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신장(申檣)
[문과] 태종(太宗) 2년(140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동진사(同進士) 4위(14/33)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2C2E0C7A5FFFFB1382X0
자(字) 제부(濟夫)
호(號) 암헌(巖軒)
생년 임술(壬戌) 1382년 (우왕 8)
졸년 계축(癸丑)【補】(주1) 1433년 (세종 15)
향년 52세
합격연령 21세
본인본관 고령(高靈)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전기 춘추관동지사, 공조좌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제부(濟夫), 호는 암헌(巖軒).
신사경(申思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고려 전의판서(典儀判書) 신덕린(申德隣)이고, 아버지는 고려 공조참의 신포시(申包翅)이며, 어머니는 김충한(金忠漢)의 딸이다.
아들은 신숙주(申叔舟)·신말주(申末舟)이다.
1402년(태종 2)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여 상서녹사(尙書錄事)가 되었다.
다음 예조정랑 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춘추관동지사로서 『정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뒤에 중군도총부총제(中軍都總府總制)·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을 거쳐 공조좌참판에 이르렀다.
대제학을 오래 맡아, 당시 유학에 통달한 권위 있는 학자로 추앙을 받았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신장(申檣))]
[이력사항]
선발인원 33명 [乙3‧丙7‧同進23]
전력 생원(生員)
품계 가정대부(嘉靖大夫)
관직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
관직 공조참판(工曹參判)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신포시(申包翅)[麗文]
[조부(祖父)]
성명 : 신덕린(申德隣)[麗文]
[증조부(曾祖父)]
성명 : 신사경(申思敬)
[외조부(外祖父)]
성명 : 김충한(金冲漢)(주2)
본관 : 경주(慶州)【補】
[처부(妻父)]
성명 : 정유(鄭有)(주3)
본관 : 나주(羅州)【補】
[가족과거]
자(子) : 신숙주(申叔舟)[文]
자(子) : 신말주(申末舟)[文]
자(子) : 신송주(申松舟)[文]
[주 1] 졸년 : 「『세종실록』 59권, 세종 15년(1433) 2월 8일」 졸기 기사를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2] 외조부 : 『씨족원류(氏族源流)』 [고령신씨]편(627쪽)을 참고하여 외조부 본관을 추가.
[주 3] 처부 : 『씨족원류(氏族源流)』 [고령신씨]편(627쪽)을 참고하여 처부 본관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一(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신포시(申包翅)
[고려문과] 우왕(禑王) 9년(1383) 계해(癸亥) 계해방(癸亥榜) 동진사(同進士) 12위(22/33)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C2E0D3ECC2DCB1361X0
생년 신축(辛丑)【補】(주1) 1361년 (공민왕 10)
합격연령 23세
본인본관 고령(高靈)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전기 좌사간, 공조참의, 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검교군기감사(檢校軍器監事) 신성용(申成用)의 현손으로, 할아버지는 신사경(申思敬)이고, 아버지는 전서 신덕린(申德隣)이다.
1377년(우왕 3) 사마시에서 진사로 합격하고, 1383년(우왕 9)에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조선 개국 후 좌사간 등 언관의 직임을 수행하면서 불교배척, 양천의 분별에 관한 주장을 펼치는 등 개국 초창기에 있어서 문물제도의 설행에 유교이념적 언론활동을 하였다.
뒤에 벼슬이 공조참의에 이르렀고, 죽은 뒤에는 찬성에 증직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신포시(申包翅))]
[고려사마] 우왕(禑王) 3년(1377) 정사(丁巳) 진사시(進士試) 십운시(十韻詩) 3등(三等) 6위(20/42)
[이력사항]
선발인원 33명 [乙3‧丙7‧同進23]
전력 생원(生員)
관직 공의(工議)
타과 우왕(禑王) 3년(1377) 정사(丁巳) 진사시(進士試) 진사(進士) 3등(三等) 6위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신덕린(申德隣)[麗文]
[조부(祖父)]
성명 : 신사경(申思敬)
[증조부(曾祖父)]
성명 : 신인재(申仁材)
[외조부(外祖父)]
성명 : 정신호(鄭臣扈)(주2)
본관 : 광주(光州)【補】
[처부(妻父)]
성명 : 김충한(金冲漢)(주3)
본관 : 경주(慶州)【補】
[가족과거]
자(子) : 신장(申檣)[文]
[주 1] 생년 : 「『세종실록』 52권, 세종 13년(1431) 6월 15일」 기사를 참고하여 생년을 추가.
[주 2] 외조부 : 『씨족원류(氏族源流)』 [고령신씨]편(627쪽)을 참고하여 외조부 본관을 추가.
[주 3] 처부 : 『씨족원류(氏族源流)』 [고령신씨]편(627쪽)을 참고하여 처부 본관을 추가.
[출전]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4650-10])
신덕린(申德隣)
[고려문과] 충목왕(忠穆王) 99년미상(未詳) 시년미상(未詳)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C2E0B355B9B0U9999X0
자(字) 불고(不孤)【補】(주1)
호(號) 순은(醇隱)【補】(주2)
본인본관 고령(高靈)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전기 예의판서, 보문각제학 등을 역임한 서화가.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불고(不孤), 호는 순은(醇隱).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성용(成用)의 4대손으로 벼슬은 예의판서(禮儀判書)를 거쳐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을 지냈다.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 등과 친교가 있었고 고려가 망한 뒤에는 광주(光州)에서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는 해서·초서·예서에 모두 능하여 당대에 이름이 높았으며, 특히 예서의 한 종류인 팔분체(八分體)로 많은 글을 썼다고 한다. 그의 필체는 독특하여 당시 사람들이 덕린체(德隣體)라고 불렀다.
그의 그림으로는 구 덕수궁미술관 소장인 「산수도(山水圖)」가 있으나 양식면으로 볼 때 조선 후기의 남종화(南宗畫)와 유사점이 많이 보이는 작품이므로 그 진위여부를 알기 힘들다.
그의 서체의 모간(模刊)은 『고금법첩(古今法帖)』에 전한다.
두문동 72현의 한사람으로 고령의 영연서원(靈淵書院)에 배향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신덕린(申德隣))]
[이력사항]
관직 예의판서(禮儀判書)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신사경(申思敬)【補】(주3)
[조부(祖父)]
성명 : 신인재(申仁材)【補】(주4)
[증조부(曾祖父)]
성명 : 신강승(申康升)【補】(주5)
[외조부(外祖父)]
성명 : ▣○○(▣○○)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
본관 : 미상(未詳)
[가족과거]
자(子) : 신포시(申包翅)[麗文]
[주 1] 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자를 추가.
[주 2] 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호를 추가.
[주 3] 부 : 『월정집(月汀集)』 別集卷4, 漫錄, [만록(漫錄)]을 참고하여 부를 추가.
[주 4] 조부 : 『월정집(月汀集)』 別集卷4, 漫錄, [만록(漫錄)]을 참고하여 조부를 추가.
[주 5] 증조부 : 『월정집(月汀集)』 別集卷4, 漫錄, [만록(漫錄)]을 참고하여 증조부를 추가.
[출전]
『高麗時代 蔭叙制와 科擧制 硏究』(朴龍雲, 一志社, 1990.[474_8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