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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노트북
이 홍사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종조부께서 읽으신 축문에 의하면 그야말로 영천종결하신 것이다.
한문으로 어떻게 쓰는지 모르지만 할아버지께서 영천종결하실 적에 나는 내 방에서 수음을 하고 있었다. 열일곱에서 열여덟으로 한 단계 업 되는 나이에 시도 때도 없이 발기되는 그것을 주체할 수가 없어 방문을 걸어 잠그고 지현의 섹시한 허벅지, 그 희고 눈부신 속살을 떠올리며 수음을 하고 있었다. 지현은 정시를 준비하고 있지만 나는 수시 전형에 합격되었으니 수음할 정도의 심리적 여유는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할아버지 운명의 순간에 장손이 그런 짓을 하고 있었다니 그런 아이러니도 없다는 생각과 한편으로 이름 모를 자괴감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다. 휴지에 사정할 때쯤 할아버지 방에서 쿵, 하고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아파트 방바닥을 울릴 정도로 탁하고 둔했으며 어딘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할아버지께서 쓰러진 것을 가장 먼저 발견한 것도 장손인 나였다.
나는 수음을 마치고 뒤처리를 깔끔하게 하고 나와서 할아버지 방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어 문을 열어보니 의자와 함께 할아버지께서 방바닥에 쓰러져 계셨다.
-할아버지!
소리치며 달려가 흔들어보니 대답은커녕, 미동도 없었다. 코에 귀를 대어보니 숨을 쉬지 않는 것이다. 순간 내 머리 회로에 스파크가 일어나 불꽃이 튀었다.
엄마는 마침 집을 비우고 있었다. 할아버지를 몇 번 흔들다가 엄마에게 전화를 때렸다. 남의 속도 모르고 느긋하게 ‘오! 잘 생긴 아들!’ 하며 느긋하게 전화를 받은 엄마는 시장을 봐서 아파트 입구 현관이라고 했다.
너무 당황해서 상황을 설명할 겨를도 없이 빨리, 빨리만 외치고 전화를 끊었다.
현관에서 집까지 도착하는 시간이 왜 그리 긴지, 엄마가 도착해서 사태를 파악하고 엄마는 119가 몇 번이냐고 나에게 물었다. 엄마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119 차가 와서 할아버지를 태우고, 아니 싣고 나와 엄마를 태우고 응급실에 들어갔다가 바로 영안실로 내려갔었다.
향연을, 역시 한문으로 어떻게 쓰는지 모르지만 향연76이라고 영안실 전광판에 적혀 있었다. 건강 백세라고 외치는 이 시대에 단명하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보통 삼일장으로 하는 장례식을 아빠가 우즈베키스탄에 파견 근무하시는 관계로 연락을 받고 오시는데 시간이 걸려 사 일 만에 장례를 치루고 돌아왔다.
할아버지는 화장을 하지 않고 내가 중학교 삼 학년 때, 그러니까 삼 년 전에 돌아가신 칠곡의 양지바른 공원묘지, 할머니께서 먼저 터를 잡은 곳에 쌍분으로 모셨다. 할아버지와 동갑인 할머니는 잦은 지병으로 돌아가시기 전에 늘 병원에 입원 퇴원 또 입원 퇴원을 거듭하시며 골골거렸지만 할아버지께 지병이 있던 게 아니다. 그 연세에 혈압약도 복용하지 않을 정도로 지극히 건강하셨고 정정하셨다. 영천종결 하시던 그날도 아침을 잡수시고 아파트 뒤의 야산을 한 바퀴 돌아오신 눈치였다. 그런데 병원에서 사인은 심장마비란다. 너무 급작스런 일이라 나도 심장마비가 걸릴 지경이었다.
나흘에 걸쳐 장례를 마치고 절에 들러 사십구재를 올리고 집으로 돌아온 식구들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잠이 들어있다. 장례를 치루는 동안 모두들 잠을 설쳤다. 아버지는 큰방에서, 엄마는 작은 방에서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죽은 듯이 잠이 들어있다. 일가친척들은 절에서 모두 헤어졌다. 일주일 후에 있을 첫 제사에서 절에서 만나기로 하고.......
삼촌마저도, 아니 숙부님이라고 해야 한다. 언젠가 삼촌! 이라고 불렀다가 할아버지께 된통 혼이 난 적이 있다. 고추에 털이 난, 다 큰 녀석이 삼촌이 뭐냐고 ‘숙부님’이나 ‘작은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삼촌은 촌수이지 결코 호칭이 아니>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 때 할아버지 표정은 싸늘하면서 엄했다. 할아버지께선 영천종결 하셨지만 그 말씀은 거역할 수가 없다. 숙부님이라고 부르니 어딘지 모르게 거리감이 생기지만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숙부님마저도 집으로 들리지 않으시고 회사 일이 밀렸다며 절에서 바로 올라갔다.
나는 장례를 마치고 사십구재를 올리기로 한 효천사까지 할아버지 영정사진을 들고 장손답게 앞장을 섰다. 스님이 시키는 대로 법당 수미단에 사진을 올리고 흰 장갑을 벗는 것으로 내 장손인 내 임무는 끝이 났다.
스님과 제사 절차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고 나오자 절까지 동행한 일가친척은 돌아가고 숙부님은 충혈된 눈을 부비며 숙모와 사촌 동생 숙경이를 태우고 집과 회사가 있는 대전으로 바로 올라가고 아버지와 엄마는 집으로 돌아오자 약속이나 한 듯이 잠부터 자고 보자는 식이었다.
아버지가 귀국했지만 할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집안은 어딘가 모르게 썰렁했다. 나는 보일러를 좀 올렸지만 썰렁하긴 마찬가지였다. 몸이 추운 게 아니라 마음이 추운 것이다.
할아버지께서 이 아파트로 들어오신 것은 겨우 일 년이 조금 넘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고향집을 지키며 이 년 동안 손수 밥을 해서 자시며 평생 지어오신 사과 농사를 지으셨다. 혼자서 빨래와 밥을 해 드시는 것이 마음에 걸린 아버지가 살림을 합치자고 했지만 그 좁은 아파트에 가서 뭐하느냐고 반문하셨다. 엄마는 갈 적마다 세탁기 돌리는 법과 압력밥솥으로 밥을 하는 방법을 할아버지께 일러주셨다. 그래도 마음이 불편한 아버지는 우즈베키스탄으로 떠나시기 전에 살던 스물일곱 평 아파트를 팔고 서른여덟 평 아파트로 이사를 강행했다. 순전히 할아버지를 모셔오기 위해 방이 하나 더 있는 아파트로 평수를 늘린 것이다. 그래도 할아버지께서는 고향을 지키겠다고 완강히 버티셨다. 숙부와 상의한 아버지는 작년 여름에 같이 할아버지께 내려가셨다. 할아버지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일주일 후, 어느 일요일에 화물차를 가지고 가서 할아버지의 간단한 옷가지와 필요한 물건을 싣고 올라왔다. 그 화물차에 할아버지도 타고 오셨다.
그때부터 할아버지는 내 옆방을 차지하고 들어앉았다. 아파트에 들어오셨다고는 하지만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버스로 두어 시간 걸리는 고향에 가셔서 농사일을 돌보고 오시곤 했다. 사과나무는 손이 많이 간다.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할아버지는 고향에 남은 재종조부에게 전화를 해서 작황을 묻고 또 무슨 일을 하라고 부탁을 하시곤 했다. 할아버지는 아파트에 앉아서 농사를 짓는 셈이었다. 그런 할아버지가 영청종결하신 것이다.
겨우 일 년이 좀 넘었지만 옆방이 비어있으니 어딘가 모르게 썰렁하며 내 행동이 자연스럽지 못하다. 나도 잠이 모자란다. 하지만 눈만 좀 시리고 따가울 뿐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
할아버지께서 심장마비를 일으킬 일이 무엇일까? 그렇게 정정하셨는데........
책상 앞에 앉아 곰곰이 생각하다가 할아버지 방으로 들어갔다. 할아버지의 방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책상위에 노트북이 그대로 있고 노트북 옆에 작은 라디오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잠시 외출하신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방은 정갈했다.
노트북은 아버지께서 국내에 근무할 때 쓰시던 팔 년이 넘은 구형이다. 속도가 느려서 그렇지 버리기에는 좀 아깝다 싶을 정도다. 우즈베키스탄으로 파견 되면서 노트북을 새로 바꾸어 나가시고 속도가 느린 구형 노트북을 두고 가셨다. 자판의 글씨가 세월의 흔적에 지워지고 아버지의 지문에 닳아 없어진 곳이 있어 내 컴퓨터로 프린트를 해서 받침을 보기 좋게 붙여놓은 곳도 두세 군데 있다. 어느 날 베란다에서 할아버지께서 그 노트북을 들고 들어오셨다. 노트북 가방에는 온통 먼지 투성이었다.
-얘야! 이거 쓸 수 있는 거냐?
-제가 쓰실 수 있도록 만들어드릴게요.
나는 그 노트북을 살렸다. 마우스가 불편하니까 내 방에 있는 쓰지 않는 유선마우스를 꽂아드리고 공유기의 선을 끌어다가 인터넷이 되게 만들어드리고 아버지가 쓰시던 문서와 잡다하게 다운받은 모든 것을 포맷시켰다. 아파트 생활이 무료하시다는 할아버지께 인터넷을 가리키면서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내가 정해주고 심심하시면 영화를 보시라고 곰 플레이어를 깔아놓고 그것을 켜고 끄는 방법부터, 쓰는 방법을 일러주었다. 또 ‘한글2007’을 다운받아 다이어리에 정리하시던 것을 내 문서에 저장하는 방법까지 일러주었다.
할아버지는 돋보기를 끼시고 자판과 모니터를 번갈아 보시며 칡뿌리처럼 거칠고 투박한 손가락이지만 독수리 타법으로 나에게 수시 전형에 합격하라고 응원을 보낼 정도였고 우즈베키스탄에 계시는 아버지께도 메일을 보낼 정도였고 어느 카페에 들어가서 내가 이름을 알 수 없는 가수들이 부르는 흘러간 노래나 창부타령을 무료로 들으실 정도로 노트북에 익숙해지셨다. 나는 할아버지께서 김영임이라는 민요가수의 노래를 듣는 것을 보고 경태네 집에 가서 경태가 컴퓨터를 바꾸면서 쓰지 않는 스피커를 얻어다 연결해 드렸다. 노트북 스피커의 음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스피커를 받은 할아버지는 그 스피커로 노래를 들으시며 흥분하실 정도로 좋아하셨다.
네티즌으로 등극하신 할아버지께선 그 노트북을 보물단지처럼 아끼시며 애용하셨다. 엄마가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시간에는 절대로 거실에 나오지 않고 노트북으로 뭘 하시는지 방에만 계셨다. 아마도 신문이나 텔레비전 대신에 인터넷으로 올라오는 뉴스를 실시간 검색하시는 것이 신기하고 상당히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불쑥 무슨 창이 뜨면 지우지 않고 조심스레 내 방문을 두드리고 나에게 묻는다.
-얘야! 잠깐만........ 이게 뭐 하라는 소리냐?
-할아버지 필요 없는 거예요. 이렇게 지우세요.
-아무거나 잘못 지우면 고장날까봐 그러지.........
-아무렇게나 해도 절대 고장 나지 않아요. 뭐든지 자꾸 해보세요.
-그러냐?
그 연세에 중학교까지 나온 할아버지의 탐구심은 실로 대단했다. 한글에 들어가서 한시를 짓고 그 풀이까지 내 문서에 정리하실 정도였다. 할아버지는 내가 수시전형에 합격하고 나서 시간이 많아지자 나를 불러서 직접 지은 한시를 보여주시며 그 풀이를 들려주시곤 했다. 사과 수확기가 끝이 나니 할아버지의 고향 발길도 뜸해 지셨다.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 또 내 방문을 두드리셨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보니 노트북 바탕화면에 할머니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고운 한복을 입은 할머니는 바탕화면에 부활해서 웃고 있었다.
깜짝 놀랐다.
-이 사진을 어떻게 구하셨어요?
-네 할머니 증명사진을 카메라로 찍어서 내 문서에 올리고 거기서 다시 다운받아 깔았다. 어때?
-할아버지 최고예요.
나는 엄지를 세워 내밀며 할아버지를 추겨 세웠다. 할아버지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묻어 있었다. 실로 대단한 탐구심이다. 증명사진을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서 바탕화면에 깔 수가 있다니.......
-이 사진이 어디서 났어요?
-내가 갖고 있지.
할아버지는 지갑에서 할머니의 증명사진을 꺼내 보여주셨다. 사진이 상할까 봐 비닐에 싸서 지갑 속 주민등록증 뒤에 넣고 다니시는 것이었다. 그걸 보는 순간 콧날이 시큰했다. 할아버지께선 할머니와 저렇게 노후생활의 무료한 시간을 동행하고 있는 거구나. 순간 나는 낙타 한 마리를 떠올렸다. 사막을 묵묵히 걸어가는, 어디론지 모르게 그저 모래밭을 하염없이 걷고 있는 지독히 외로운 한 마리의 낙타를. 낙타가 일으키는 모래바람이 내 입으로 들어와 버석거리는 느낌이었다. 모래가 버석거리는 입으로 낙타, 아니 할아버지께 여쭈어 보았다.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그리 좋아하시지 않으셨잖아요? 정도 없었고?
-겉으로 보기에 그렇지. 오십 년을 같이 살았는데 속정이야 왜 없겠냐? 가고나니 아쉬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바탕화면에서 웃고 있는 할머니는 그 말을 듣고 더욱 활짝 웃었다.
-할머니랑 잘 노세요.
할아버지 방문을 조용히 닫아주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 때 할아버지께 많은 시간을 할애해 드리지 못한 점이 아쉽다. 얼마나 적적했으면 할머니 사진을 바탕화면에 깔아서 적적함을 달래셨을까 생각하니 콧날이 시큰하다.
그러나 지금 할아버지 방은 빈방이다. 나는 방문을 열고 서서 할아버지 방을 지켜보고 있다. 며칠 만에 들여다보지만 정갈하고 깨끗하다. 할아버지께서 잠시 고향에 내려가신 것으로 착각이 일 정도다. 정갈한 가운데 책상 위에 얹힌 노트북이 유독 내 눈길을 사로잡았고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부팅시켰다.
-혁이........ 자냐?
어느 틈에 일어났는지 엄마가 일어나서 내 방문을 열어보고는 나를 찾았다.
-여기, 할아버지 방에 있어.
엄마가 할아버지 방문을 열어보았다.
-너는 게서 뭐하는 거냐? 저녁 먹어야지.........
-엄마는 이제 좋겠네?
-너 그게 무슨 소리냐?
-이젠 그 옛날처럼 브래지어만 하고 집안을 활보할 수가 있잖아?
-내가 언제 그랬다고? 쉬어터진 소리 그만하고, 저녁 뭐 먹을래?
-밥? 밤 아홉 시가 넘었는데 이제 저녁을 먹어?
-아빠 좀 깨워라. 저녁 준비할게.
-할아버지 안 계시니 시간이 되어도 때도 챙기지 않는구먼!
나는 부팅시키던 노트북을 끄고 아버지가 주무시는 방으로 갔다. 아버지는 깨우기 민망할 정도로 곤하게 자고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비보를 접하고 날아와 나흘간에 걸친 장례를 마쳤으니 생에서 가장 피곤한 날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
나는 나직이 아버지를 부르며 조금 흔들었다. 아버지는 내가 살짝 흔들었는데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나시는 것이었다. 오히려 내가 놀랄 정도였다.
-손님 오셨냐?
-웬 손님은요? 저녁 자시고 옷 벗고 주무시라고요.
-아! 난 아직 장례기간인줄 알았다. 여기가 빈소인줄 알았어.
아버진 빈소에서 긴장을 했던 모양이다. 그 긴장이 아직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며칠간 면도를 하지 않아 더욱 까칠한 모습이 애처롭게 여겨졌다.
-넌 좀 잤냐?
-잠은? 할아버지가 없으니 어쩐지 썰렁한 게 잠이 오질 않아요.
-너도 그러냐? 나도 허망하다.
-아버지! 언제 우즈베키스탄으로 가실 거예요?
-왜?
-가시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첫 제사를 지내고 빨리 가야지. 일이 밀렸어.
아버지마저 해외로 가고 없을 것을 생각하자 정말이지 견딜 수가 없을 거 같았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옛날의 할머니가 자주 쓰시던 말이 불쑥 떠오르고 실감났다.
-썰렁한 집에서 어떻게 견디지? 걱정이네요.
-엄마가 있잖냐? 적응이 되면 괜찮을 거야.
-엄만 철이 안 들어서 말이 통하지 않아요. 할아버지가 좋은 친구였는데.......
-농담할 기분이 아니다. 밥이 다 되었냐?
콘크리트 불럭처럼 딱딱한 표정으로 하신 말 떨어지기 무섭게 때를 맞추어 엄마가 주방에서 밥을 먹으라고 소리쳤다.
김치찌개를 두고 식탁에 둘러앉았지만 썰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가 영천종결을 하셨는데 이렇게 입에 밥을 쑤셔 넣어야 한다는 게 금기사항이나 죄악처럼 여겨졌다. 아버지는 늦은 저녁을 먹는 내내 굳은 표정으로 말 한 마디가 없었다.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의 눈치만 살피는 것 같았다. 정말이지 불편한 밥상이었다. 식탁위로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천정에서부터 부슬부슬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발은 점점 굵어져 함박눈이 되어 아버지 머리 위에도 수북이 쌓이고 식탁과 김치찌개 위에도 수북하게 쌓였다. 금세 눈사람이 되어버린 아버지와 엄마는 말없이 꾸역꾸역 밥을 먹고 있었다.
-넌 밥 먹다가 뭐하냐?
눈사람이 되어버린 아버지가 퉁명스레 물었다.
-웬 눈이 이렇게 오지? 온통 눈이잖아요.
나는 팔꿈치로 식탁의 눈을 훔쳤다. 그 사이 아버지의 커다란 손바닥이 내 목덜미를 철썩 때렸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밥이나 처먹어! 이 자식아.
아버지께 한 대 맞고 보니 눈이 깨끗이 사라졌다. 멀쩡한 식탁이었다. 내가 환시를 본 건가? 이 썰렁한 밥상 앞에서. 왜 눈이 보였을까? 천정을 보니 날리던 눈은 어디로 가고 형광등이 식탁을 비추고 있을 뿐이다.
이상한 일이라 생각하며 밥을 먹었다. 나는 분명히 눈을 보았다. 식탁위에 가득하고 아버지 머리 위에도 쌓인 눈을. 할아버지께서 영천종결하시니 느닷없이 나타나는 이상한 환시였다.
밥상을 물리자 아버지와 엄마는 또 자러 들어갔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는 것이다.
-너도 오늘은 일찍 자거라.
아버지의 갈라진 탁한 목소리가 방문을 통해 거실을 건너왔다.
-알았어요. 아버지! 고아가 되었다고 울지 말고 주무세요.
거침없이 한마디를 거실 밖으로 던졌다. 아버지께서 들었는지 모르겠다. 대답이 없다. 하긴 대답할 기운도 없이 그세 잠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저녁을 먹고 나니 열 시가 넘었다. 나도 며칠간 잠을 설쳤다.
자야지!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런데 잠이 오지 않는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수험기간에는 그렇게 쏟아지던 잠이 이렇게 자려고 누우니까 잠이 달아나버린다. 며칠간 잠을 설쳤는데........ 불 끄진 천정만 쳐다보다가 일어나 앉기를 몇 번이나 했다. 다시 누우니 지현이의 허벅지가 떠올랐다. 침을 꿀꺽 삼켰다.
언젠가 지현이와 피자집에 갔다가 지현이의 교복치마 끝자락 속으로 슬쩍 훔쳐본 섹시하고 눈부신 그녀의 허벅지가 떠올랐다. 아슬아슬했다. 조금만 더 구부렸으면 팬티까지 볼 수가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마를 쳤다. 할아버지께서 영천종결을 하셨는데 그런 외설스런 생각을 하다니, 장손인 내가 기도를 해도 모자랄 판에. 지현이의 생각을 접었다.
할아버지.........
나직이 불러보았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할아버지께서 옆방에 앉아 노트북으로 뭔가를 쓰고 계실 것만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옆방에서 할아버지의 기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귀를 기울이니 정말 옆방에서 기침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어라, 이상하다. 침대에서 일어나 할아버지 방의 문을 노크했다.
-누구냐?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큰방에서 주무시고 계시는 줄 알았던 아버지가 할아버지 방에 계시는 것이다.
-아버지! 거기서 뭐하세요?
-할아버지 돌아가시던 날 할아버지 메일을 받고 답장을 했는데 읽으셨나 싶어서........ 수신확인하고 싶은데 아이디와 비밀 번호를 못 찾아서 못 열겠다.
아버지는 잠옷 바람으로 노트북을 켜고 앉아서 나를 돌아보았다.
-무슨 내용이었어요?
-내용은 별 다른 게 없고 안부였어.
-할아버지 아이디와 비밀번호는 내가 만들어드렸어요.
아버지가 나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아버지를 재치고 익숙한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눌러주었다.
메일을 열어보니 받은 메일과 보낸 메일이 빼곡히 들어있었다. 맨 위에 있는 것이 아버지께서 보낸 메일이다.
-읽으셨구나. 이게 아버지에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가 될 줄 몰랐다.
아버지 눈가에 또 이슬이 맺혔다. 아버지는 며칠간 눈물을 달고 사셨다. 빈소에서도 그랬고 공원묘지에서도, 절에서도 할아버지 사진을 보고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나 엄마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는 할아버지의 존재는 엄마에게 있어서 옛날 아파트에 살적에 키우던 애완견 삐삐만도 못하다. 삐삐가 죽었을 적에 엄마는 하도 울어서 눈두덩이 퉁퉁 부을 정도였고 이틀간 식음도 전폐했다. 그런 엄마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셔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묵묵히 손님을 맞고 일만 했다. 요즘 말에 며느리와 함께 살려면 입은 자주 열지 말고 지갑을 자주 열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집에서 청동입술이었다. 사과농사 지은 돈으로 지갑은 자주 열었지만 엄마의 가슴을 열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지갑을 자주 열었지만 엄마에게 있어서 할아버지의 영천종결은 삐삐의 죽음만큼 진한 감동과 서러움을 주지 못한 것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삐삐보다 못한 할아버지! 아니, 개보다 못한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 등 뒤에 서서 속으로 중얼거려보았다. 아니다. 엄마는 억지로 눈물을 참고 있는지 모른다. 아버지가 가시고 나면 며칠이고 식음을 전폐하고 눈이 붓도록 우실지도 모른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랬던 것처럼. 작년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다른 이모들은 빈소에서 눈이 붓도록 울었지만 엄마는 눈물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런데 장례를 마치고 집에 와서 사흘 동안 혼자서 울고 있었다.
하여튼, 엄마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아버지! 그만 하시고 가서 주무세요. 이젠 제가 메일을 확인할 차례예요.
재촉을 하자 아버지는 말없이 일어서서 눈시울을 훔치고 방을 나갔다. 나에게 무슨 소리인가 하고 싶어 머뭇거리는 눈치를 보이다가 그 말을 꿀꺽 삼키고 나갔다. 아버지께서 삼키시고 나간 말씀은 안 들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다. 할아버지께서 하늘나라에서 지켜볼 것이니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진부한 소리일 게다. 분명히 그 비슷한 말씀일 거다.
아버지가 나가시고 나는 노트북 전원 코드를 빼고 스피크를 떼어내고 알맹이만 들고 프린트기가 있는 내 방으로 들고 왔다.
조심스레 책상 위에 올려놓고 전원을 다시 꽂고 부팅을 시키니 바탕화면에서 할머니가 웃고 있는 사진이 여전히 깔려있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심정으로 그 사진을 이윽히 바라보았다. 전체 화면으로 깔려 있어서 실제 사진보다 넓적한 할머니가 넓적한 웃음을 물고 있었다. 그 화면을 보니 가슴이 뭉클했다. 나는 할머니의 지독한 총애를 받았다. 바탕화면을 보다가 내 문서를 클릭했다.
내 문서에 맨 먼저 눈에 뜨인 것은 할아버지께서 지은 한시였다. 그 파일들이 여러 개 있었다. 그 중에 한시 하나를 클릭했다. 한문으로 앞에 써놓고 그 뒤에 풀이를 달아놓은 것이다.
일종의 망향가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 시를 찬찬히 읽었다.
한문으로 운율을 붙여 읽으면 폼이 나겠지만 그렇게 읽은 것이 아니고 한글 풀이를 읽었다. 그 시의 마지막 구절, 짝을 잃은 기러기는 혼자서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다는 내용이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다.
다음에 있는 한시를 읽었다. 비슷한 내용이었다.
할아버지는 이 한시를 운율에 맞추어 외우도록 읽으셨을 것이다. 팔짱을 끼고 앉아 한시를 외우며 그 장단에 맞추어 어깨를 옆으로 흔들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렸다.
나는 스무 편이 넘는 한시를 읽어보고 몽땅 프린트를 했다. 그 A4용지를 내 책꽂이에 있는 빈 파일을 찾아 정성스레 끼워 넣었다. 한시 사이에는 돌아가신 할머니에게 보내는 편지도 있었다. 고운 임자에게~ 아니면, 그리운 당신에게~로 시작되는 편지형식의 글이었다. 다 열거하기 어렵지만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글이었다. 그리움이 끈끈하게 묻어나고, 쓰시는 동안 고독한 심정을 헤아리며 그 편지를 읽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편지도 중요하다는 생각에 프린트를 해서 파일에 넣었다.
지금은 경황이 없지만 내년 제사 때 쯤 숙부님과 아버지에게 보여줄 생각이다. 그 동안은 내가 보관해야지. 그리고 가끔 할아버지가 생각나면 나도 좀 읽어보고.
파일 정리를 다하고 할아버지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쳐서 메일로 들어갔다.
할아버지는 메일함을 한 번도 비우지 않았다. 받은 메일과 보낸 메일이 잔뜩 들어있었다.
어느 것부터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받은 메일은 대게가 아버지와 나의 메일이었다. 그 중에 띄엄띄엄 낯선 닉네임이 하나 들어 있었다. 바로 ‘초롱이’라는 닉네임이다. 메일이 들어온 날자를 훑어보니 근래 들어서 간간히 메일이 들어와 있었다.
-초롱이가 누구지?
고개를 갸웃하며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낯선 닉네임은 내 궁금증을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맨 위의 초롱이가 보낸 메일을 클릭했다. 보름 전쯤에 보낸 메일이었다. 그 메일 내용을 보면 할아버지가 돈을 얼마 보내신 모양이다. 돈을 잘 받았다. 요긴하게 잘 쓰겠다는 간략한 내용이었다. 오라버니라고 할아버지를 지칭하는 것으로 미루어 여자인 모양이다. 오라버니라고 할아버지를 부를 사람이 누가 있는가?
내 궁금증은 극에 달했다.
-할아버지께서 연애를 하셨나?
나는 마우스를 끌어내려 맨 밑에 있는 초롱이의 편지를 찾았다. 읽어보니 카페에서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다. 부디 성불하시고 부처님 품에서 가피를 받기 바란다. 자신은 지금 베트남에서 포교활동을 하고 있는 쉰 살을 일 년 앞둔 비구니다. 호치민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곳에서 고아원을 세울 생각이다. 포교를 목적으로 왔는데, 와서 보니 부모 없는 아이들이 발목을 잡았다고 했다. 부처님이 만든 인연으로 부처님이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으로 생각한다. 아무튼 카페에 자주 들러 좋은 말씀을 남겨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불교카페에서 만난 여자 스님이구나.
고개를 주억이며 그 다음에 보낸 편지를 클릭해서 읽었다. 클릭하자 사진이 한 컷 떴다. 편지 첫머리에는 실린 사진이었다. 자그마한 체구의 여승이 야자수 아래서 서너 살짜리 아이 셋을 껴안고 있는 사진이었다. 아마도 베트남인 모양이다. 그 아래 적힌 글로는 아이들과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행복하다. 요즘은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을 먹고 산다. 포교활동을 마치고 돌아가서 종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작은 암자를 하나 지어 조용히 생활하며 정진하고 싶었는데 그것도 허황된 욕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시주는 필요 없다. 그냥 고아원을 짓지 않고 혼자 힘으로 아이들을 힘껏 거둘 생각이다. 말만 들어도 고맙다. 그리고 속가의 큰 오라버니의 충고라고 생각하고 건강을 생각하고 몸을 돌보며 살겠다는 내용이었다.
첫 편지 다음에 할아버지가 보낸 편지를 읽지는 않았지만 유추가 가능했다. 내용으로 미루어 그렇게 힘들게 아이들을 거두는데 할아버지가 얼마를 시주하겠다는 내용일 것이다. 할아버지 성품으로 미루어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다. 나는 할아버지께서 보낸 편지를 읽어볼까 하다가 그만두고 다음에 온 초롱이의 편지를 읽었다.
인터넷 접속이 시원찮아서 이제야 편지를 읽고 쓴다. 모니터 메일에는 먼 이국의 정취가 그대로 묻어 있었다. 법명은 법륜이다. 청도 운문사로 출가했는데 청도에서 사과농사를 지으셨다니 반갑고 또 하나 뿐이었던 동생이 옛날 월남전에 맹호부대 참전 용사라니 더욱 반갑고 이곳에서 전사를 하였다니 참으로 안타깝다. 이런 인연은 필시 부처님이 맺어주신 것이다. 그 옛날의 전쟁을 치르고 유골을 수습하던 그 베트남이 아니다. 지금은 엄청 발전했고 하루하루 발전하고 있다. 오라버니 고집을 꺾지 못하겠다. 그렇게 시주를 하고 싶으시면 한국계좌로 돈을 넣으면 여기서 카드로 인출할 수가 있다며 한국계좌를 하나 적어놓고 속가의 이름이 최명희라며 예금주 최명희라고 적어놓았다. 흔한 이름을 적어놓고 또 밑에 토를 달았다. 많은 금액이 필요 없다. 오라버니 정성으로 조금만 보내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할아버지께는 동생이 한 분 계셨다. 나에게 종조부가 되시는 그 분은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 글을 읽고 번개처럼 머리를 스쳐가는 무엇이 있었다. 보이스피싱이 한창 극성을 부리는데 이런 방법으로 할아버지께서 사기를 당한 것이 아닐까? 그 충격으로 할아버지 심장마비까지 이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하자 마음이 바빠졌다.
나는 편지를 거기까지 읽고 자주 가는 카페를 클릭했다. 카페에 가입하는 방법과 카페를 찾는 방법도 내가 할아버지께 일러드렸다. 자주 가는 카페를 클릭하니 할아버지께서 가입한 카페가 열 개도 넘었다. 칠십 대가 노는 카페, 중년 노래 듣기. 민요 카페. 사과 향기 카페 등. 그 카페 이름을 쭉 훑어보았다. 그 중에서도 그 중에서도 ‘아미타불’이라는 부처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이게 맞지 싶어 카페를 클릭하니 베트남의 야자수가 있는 풍경과 부처님을 합성해서 만든 사진이 카페 대문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 카페지기가 바로 초롱이었다. 가입회원은 겨우 이백 명을 상회하는 작은 카페였다. 그 카페에는 불경 해설. 염불 듣기. 베트남 날씨부터 베트남 소식. 사진. 등 여러 개의 방이 나열되어 있었다.
이 방 저 방 들어가서 훑어보고 사진이 있는 방을 살펴보았지만 보이스피싱 같은 사기가 아니라 초롱이라는 비구니는 베트남에서 고아들을 데리고 수도 생활하는 게 분명하다. 종교로서 건전한 카페였다.
-그럼 그렇지. 할아버지께서 그런 사기를 당하실 리가 없지.
할아버지는 이 카페에 들어와서 초롱이라는 비구니를 알게 되었고 또 사연을 듣고 얼마를 시주하신 게 분명하다. 얼마를 시주하셨을까? 그 금액이 갑자기 궁금하였다.
다시 메일함으로 들어가 할아버지께서 초롱이께 보낸 편지를 찾아서 읽었다. 할아버지 닉네임은 그 카페에서 ‘노처사’ 로 되어있는 모양이다. 할아버지 편지는 살아온 궤적을 많이 적어두고 있었다. 자신의 소개였다.
세 번째 보낸 편지에서 시주를 하고 싶다고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 했고, 네 번째 편지에서 정성이니 그러지 말고 시주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했으며, 유골도 수습하지 못한 동생을 위해 기도를 부탁한다고 했다. 아마도 돈 얘기가 나오자 초롱이라는 비구니스님이 정중히 거절한 모양이다. 여섯 번째 편지에서 삼백 만원을 보냈으니 좋은 곳에 써 주었으면 고맙겠다고 했다. 알 것은 다 알았다. 삼백이다. 아버지나 엄마께는 극비사항이다. 나만 알고 있어야할 사항이다.
나는 노트북을 덮으려다가 그 초롱이라는 스님에게 편지를 썼다. 물론 할아버지 닉네임인 ‘노처사’ 이름으로 보내는 편지다. 내용은 간략하게 썼다. 꼭 할아버지의 근황을 전해야하는 것이 편지를 읽은 자의 의무처럼 여겨졌다.
올해 대학에 들어가는 ‘노처사님’의 손자다. 놀라지 말라. 할아버지께서 나흘 전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할아버지 노트북을 뒤지다가 우연히 메일을 발견했다. 스님께서 베트남에서 고생하시는 줄 알고 있다. 할아버지를 위해 기도해시면 고맙겠다는 짧은 내용이었다.
간략하게 적고 보내기를 클릭했다. 메일은 정상적으로 전송되었다는 메시지가 떴다. ‘노처사의 닉네임으로 ‘초롱이’께 마지막으로 보내는 편지가 될 것이다.
새벽 한 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그만 둘러보고 노트북을 덮으려다 할아버지께서 여태 무엇을 보시며 놀았는가 싶어 휴지통을 뒤졌다. 할아버지께선 휴지통을 한 번도 비우지 않은 듯 버린 파일이 거의 여러 개가 휴지통에 들어있었다. 내가 휴지통을 비우기를 가르쳐드리지 않았던가? 아니면 할아버지께서 휴지통 비우기를 깜빡하셨는지 모르겠다. 휴지통을 열었다. 시조를 짓다가 버린 파일부터 성인사이트부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파일이 들어있었다. 할아버지께서 어떤 성인사이트를 접속하셨을까? 다운 받은 것을 보시고 버리셨을까? 휴지통을 뒤지기 시작하는데 또 갑자기 천정의 형광등에서부터 눈이 흩날리는 것이었다.
-어라? 또 눈이네!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금세 함박눈으로 변해 책상 위에도 자판 위에서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노트북에 눈이 쌓이면 안 되지! 나는 휴지통을 뒤지다 그만두고 모니터로 자판을 덮었다. 그리고 눈이 쌓인 방바닥을 조심스레 걸어와 벽에 붙은 스위치를 내려 형광등을 껐다. 침대의 펼쳐둔 이불위에도 눈이 쌓여있었다. 이불위의 눈을 털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누웠다. 할아버지께서 성인사이트에서 어떤 내용을 보셨을까? 이불속에서 잔뜩 웅크리고 생각했다. 눈은 하염없이 내려 이불을 짓누르고 있었다. 눈의 무게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아버지! 그 방에도 눈이 와요? 큰방을 향해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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