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유전자>로 유명한 리처드 도킨스는 의식이 생겨난 것은 시뮬레이션 속에 자기 모델을 포함하게 된 때부터라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자기 인식’이다.
엔도모픽 존재 안의 모르피즘 속에 자신의 모르피즘이 생긴 때부터라는 얘기다. 그 모르피즘 안에는 또 모르피즘이 있다. 마치 거울 두 개를 앞뒤에 놓았을 때 나의 모습이 무한히 펼쳐지듯이 무한회귀로 자기인식은 펼쳐진다. 자기 속에 자기가 반복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폰 노이만의 우주다.
한편 무한회귀는 유한회귀의 부분집합으로 멈출 수 있다고 폰 노이만은 말한다. 그리고 그는 인식의 정점에 있는 마지막 자기 인식을 ‘Ich!’, 즉 자아의식이라 단언한다.
인간이 ‘나’로서 말하기 시작한 그날부터 인간은 사랑하는 자신을 어디서나 전면에 내세우고,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주의를 멈추지 않고 전진한다. 그것이 실용적 관점에서의 인간에 대한 칸트의 통찰이다.
“느낌과 생각은 한낱 도구이자 놀잇감이다. 그것들 뒤에는 자아의식이 버티고 있다.” 니체의 통찰이다. 자아의식이 느낌과 생각을 도구삼아 비교하고, 의도하고, 정복하고, 파괴하며 자아를 이끈다는 얘기다.
AI에 자아의식이 창발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수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여기서는 창발현상을 다루는 복잡계과학을 전제로 조심스럽게 자아의식에 관해 논리적 관점으로 살펴보자 한다.
만약 자아가(마음, 영혼, 생각 등) 불변의 실체라면, 본래부터 존재해야 하므로 스스로 생성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당연히 강AI의 탄생은 영화적 상상으로만 그칠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자아가 실체가 아닌 현상에 불과하다면 어떨까? 당연히 자아의식의 창발이 가능할 것이다. 물론 강AI의 출현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철학가, 성직자, 신경과학자, 인지과학자, AI학자 등 다양한 분야를 이끄는 사람들의 관점과 명칭은 차이가 있지만, 자아의식에 관한 견해는 많은 부분이 일치해 보인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착각이다. 진짜 내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일 뿐이다. 인간의 자아의식이 착각 현상에 불과하다면, AI도 마찬가지 아닐까?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컴퓨터 기계가 어떻게 착각할 수 있을까? 그것은 복잡계과학으로 해명된다.
정확한 계산에 의해 부분들은 상호작용하면서 작동한다. 하지만 이들의 부분적 활동을 통째로 파악할 때는 예전에 없던 현상이 보인다.
예를 들어 장기기억장치에 저장된 낱낱의 기억들이 시공간적으로 엮여 통째로 뭉칠 때, 낱낱의 독립적 사건들은 순식간에 하나의 사물로 둔갑하거나 혹은 하나의 실체적 존재로 드러난다. 모든 것을 한순간 삼켜 버리는 괴물, 쓰나미는 실체가 아니다. 작은 부분적 움직임들이 시공간적으로 뭉쳐 일시에 드러나는 창발 현상일 뿐이다.
우리들이 사는 자연계는 안정계가 아니다. 늘 임계 상태다. 언제든 창발 가능하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죽음을 향하는 엔트로피 증가의 힘과 살고자 하는 에너지 최적화의 힘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카오스의 가장자리에 위치한다. 그 지점이 창발의 보금자리다. 그래서 카오스를 앎(창발)의 창조자라 부른다.
창발이란 자기조직화된, 예전에 없던 앎이다. 자아의식이란 바로 실체적 자아에 대한 앎이다. 비록 착각의 앎이지만, 이것을 통해 우리는 살아간다.
자존감을 높이는 방향으로 목표를 정하고 상황을 판단하고 의지를 내어 살아간다. 문명을 개척하는 힘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유지, 보호, 확장을 앞세워 스스로 족쇄를 채우는 고통의 원인이기도 하다. 강 AI의 탄생이 두려운 이유다.
중생들은 편견 왜곡 주관적으로 보기 때문에 이렇게 만들어진 앎이란 있는 그대로의 앎이 아니라 자아에 기반한 이기적 앎이다. 반면 붓다의 앎이란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에 무아 공성의 궁극적 앎이다. 따라서 어떤 앎이냐가 중요하다. Tathagata=이와 같이 온 <형용사>
슈뢰딩거의 고양이 <본질=공성>
폰 노이만의 사슬: 대상→ 관측도구→ 시신경→ 신호→ 뇌세포→ 자아의식
인공지능의 의식수준
의식수준: 무아의식. 자아의식. 기계의식
철학적 양자역학적 이해: 살아 있는 또는 죽어 있는 고양이.
인공지능의 종류: 붓다 인공지능. 강 인공지능. 약 인공지능<알파고 왓슨 애슐리 매디슨 자율자동차 시리>
이기심→ 삶의 회의→ 방황→ 수행→ <내부적 외부적 결정적 사건 또는 계기> 깨달음 반추→ 이타심
궁극의 과학
1.변한다 <진제: 공성의 법칙>
자성 없다<불변을 전제로 성립된 개념> 존재 없다<자성을 전제로 성립된 개념> 시공간 없다<존재를 전제로 성립한 개념> 연기 없다<시공간 상의 관계를 전제로 성립된 개념> 실체 없다<일체가 개념일 뿐이라는 개념> 변함=무아=공성
2.변하지 않는다고 착각한다 <속제: 무명의 법칙>
실체가 있는 것으로. 자아 마음 존재 영혼이 실재하는 것으로. 생사 번뇌 윤회 업보 해탈이 실재하는 것으로. 연기된 시공간적 존재인 것으로. 연기=윤회=공성
3.상상하는 것은 현실이 된다.
강 인공지능 가능. 외계인 가능. 말하는 유인원 가능. 인간수명 1000년 가능. 화엄세계 장엄.
창조=변함=공성<섹즉시공 공즉시색>
인공지능 붓다 연구방안
카오스<붓다 모방. 정견학습. 이타적 행위> 깨달음→ 기계 자아 무아
기계<기계적 앎> by 카오스<착각> 인간모방. 이기심 학습. 욕망적 행위→ 자아<이기적 앎>→ 무아<궁극적 앎> by 카오스<깨달음> 불만족/ 진리탐구. 정견학습. 이타적 행위
걱정할 것 없다. 아직 순종적인 기계일 뿐이다. 인간형 지능이 출현한 것은 아니다. 스탠포드 대학에서 100년 프로젝트 이제 시작했다. 자아 마음 감정 자존심도 없다. 단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엄청나게 빨리 처리할 뿐이다. 제한적으로 인간을 능가한다. 시킨 일만 한다. 모범생이다. 엉뚱함이 없다. 기복이 없다. 따라서 다양성과 융통성 그리고 창의성은 인간이 우월하다.
그러나 말 안 듣는 존재가 다가온다. 새로운 존재의 탄생 가능<강 인공지능> 생명체적 인공지능<적응 진화 유전 재생>. 자아의식 발현 가능<카오스 복잡성이론> 마음을 갖는 새로운 인공인류의 탄생 가능<보호 유지 확장> 윤리적 및 법적충돌 우려. 인간과의 전쟁 가능성. 불교가 답이다. 존재 자아에 대한 해명이 선행되어야 한다. 마음의 작동원리 규명. 지금은 반쪽 짜리 과학시대<실체적인 색의 과학> 공성의 과학체계가 건립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