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욱토마스크랜머
2016년 12월 13일 오후 04:06 친구공개 나만보기 필독 0명 우리끼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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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상촌 김자수의 후손이다1
선비의 기품과 절의가 서린 생애
이은순 박사 축사 전문고려 충신 상촌선생에 대한 축사를 부탁 받고 사료를 정리하다 보니 새삼 감회가 새로워짐을 느낍니다.
상촌선생은 안동땅이 낳은 사림의 거봉으로 충절과 효행을 겸비한 선비였습니다. 이집(李集 遁村,1314-1387), 권근(權近 陽村,1352-1409), 황희(黃喜 1363-1462)와 함께 고려말 사촌(四村)의 한 분이시며, 이색(牧隱), 정몽주(圃隱), 이숭인(陶隱) 삼은(三隱)과 더불어 우리나라 성리학을 대표하는 학자요 석학이자 지식인의 사표로 추앙받는 인물입니다.
선생은 고려 충정왕 3년(1351)에 출생하여 19세(공민왕 18년,1369)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그해 11월 성균관에 입학하여 이색, 정몽주, 박상충, 정도전, 이숭인 등 당대 석학들의 가르침에 힘입어 성리학의 이념과 실천기반을 터득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균관에 입학한 지 1년이 되지 않아 안동 향리에 계신 홀어머니 손씨부인의 병환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귀향하여 향리에서 학문을 닦으면서 어머니의 쾌유를 위해 지극 정성으로 봉양 하였다고 합니다.
얼마후 어머니가 별세하자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충실히 지켜 상례를 치루었고 3년간 여묘살이를 하면서 한 번도 집에 들른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선생의 효행은 국가적으로도 인정을 받아 광해군때 편찬된 동국삼강행실도(東國三綱行實圖)에는 선생의 여묘살이 모습이 그림으로 그려져 후세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또 그의 효자비가 지금까지 안동읍내에 전해 오고 있습니다.
24세가 되는 공민왕 23년(1374) 선생은 다시 장원급제하여 정 6품 덕녕부 주부(德寧府 主簿)에 임명이 됩니다. 그 후 문하부 좌정언(左正言), 전교시부령(典敎寺副令),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 충청도 관찰사, 성균좨주(祭主)를 거쳐 성균대사성, 형조판서 등 고위직을 역임하였습니다.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에 선생은 무엇보다도 군왕 앞에서 직언을 서슴치 않는 강직함으로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하였습니다. 우왕 때에는 왕의 잘못을 직간하다가 전라도 돌산수(突山戍)에 유배되기도 하였으며, 공양왕 때에는 봉불(奉佛)의 잘못과 연복사탑의 공사를 중지할 것을 간언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고려가 패망하자 정몽주, 이색 등과 더불어 뜻을 같이 한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서 안동에 내려가 은거하면서 절의를 지켰습니다.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창업이라는 역사의 격변 속에서 정도전 등 일부 사대부층이 새 왕조의 창업에 적극 참여하였던 반면 상촌 선생은 태조의 부름도 거부한 채 절명사(絶命詞)를 남기고 자진하셨습니다. 뒷날 황희 선생은 만사 중에서 충과 효를 실천한 학자 상촌을 잃었다고 애도하였습니다. 선비의 기품과 절의가 서린 선생의 생애는 이미 600여년이 지났지만 기회주의가 팽배한 현실 속에 사는 우리를 다시금 숙연하게 합니다.
동국여지승람 (東國與地勝覽)에서는 선생이 본조(조선)에서 사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른 듯 합니다. 선생이 이 책 경주부(慶州府) 고려의 인물조에 수록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때 조선에서 벼슬하였다는 것은 왜곡된 사실이 분명한 듯합니다.
상촌선생의 충절은 현종6년(1665)에 와서야 비로소 초강서원에 봉안됨으로서 인정을 받게 되었고, 그 후 안동의 물계서원, 보은의 병산서원, 충주의 지천서원 및 최근에는 경남 산청의 효산서원에도 봉안이 되었습니다. 이는 선생의 절사론(節死論)이 유림 뿐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공인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일일 것입니다.
경주 김씨 가문의 가승에 따르면 상촌의 가문은 대를 내려갈수록 크게 번창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 근(根)은 봉열대부 평양소윤이었으며, 그의 아들 영년(永年), 영원(永源), 영전(永?), 영유(永濡) 등도 모두 벼슬하여 이름을 떨치게 됩니다.
영년은 문종때 강릉 판관을 지냈고, 영원은 호조시랑, 영전은 사헌부 시랑, 영전은 사헌부 사승(司丞), 영유는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성을 역임하고 이조참판 중추부사를 거치면서 공평한 관리로 이름을 떨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