犬岩
문경시 농암에 가면 개 바위가 있습니다..(犬岩) 의병대장 운강 선생이 안동관찰사 김석중등을 효수형 시킨 장소 이기도 합니다.
**********************************************************************************************************************************************
한천서원(寒泉書院)
소재지 : 문경시 농암면 농암리(가실목)
연 혁 : 숙종 23년(1697)에 창건. 사직(司直) 안귀손(安貴孫), 처사(處士) 신숙빈(申叔彬)을 봉향하고 있다.
정조 11년(1787)에 추담(秋潭) 성만징(成晩徵)을 추배(追配),
고종 5년(1868)에 훼철되었다. 그 후로 설단(設壇)하여 매년 3월 중정(中丁)에 봉사(奉祠)하고 있다.
배향일 : 매년3월 중정
ᆢ현재 문경에 남아있는 서원은 가은에 있는 소양서원과 산북에 있는 근암서원이 있고, 산양의 의산서원과 웅연서원, 농암의 한천서원 등이 있었습니다.
배향인물
1) 안귀손(安貴孫)
관은 순흥(順興), 회헌(晦軒) 문성공(文成公) 유(裕)의 현손이며 사간(司諫) 기(耆)의 아들이다. 사직(司直)으로 연산조때 국정이 문란하고 무오사화에 어진 선비들이 참화를 당함을 보고 가은 소양에 낙향하여 후진을 가르쳤다.
부인은 강릉최씨인데 부인의 정려비가 가은 전곡 삼강정안에 있다.
강릉최씨 정려비는 가은읍에서 농암면 방향으로 가는 길 전곡리 산기슭 단애(斷崖)의 상강정(上江亭) 안에 위치한다. 비석이 세워진 후 약 470여년 동안 현재까지 4번 옮겨져 평산신씨 한천처사공 후손들에 의해서 관리되고 있다. 비석의 상태는 양호하며 높이 106㎝, 하단너비 41㎝, 상단 너비 45㎝로 되어 있다.
비석의 전면에는 “열부사직안귀손처최씨지려(烈婦司直安貴孫妻崔氏之閭)”, 후면에는 열부 최씨가 남편 안귀손이 죽은 후,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여 직접 지은 제문으로 시의 형식으로 음각이 되어 있다.
원래의 위치는 현재 위치의 반대편 마을에 있었다고 전해지며, 비석의 기단은 탑 옥개석을 뒤집어서 사용하고 있다. 비석을 세울 당시부터 기단부가 탑 옥개석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며, 비를 보호하기 위한 비각이 정면 1칸, 측면 1칸, 홑처마에 민도리 형식을 취하고 있다.
강릉 최씨는 조선 세종때 이조참판을 지낸 최치운(崔致雲, 1390(고려 공양왕 2) ~ 1440(세종 22), 우리가 익히 잘 아는 강릉 오죽헌을 처음으로 건립한 사람임) 자식으로서, 사직공 안귀손(安貴孫)과 혼인하여 슬하에 딸을 셋 두었다. 사직공 안귀손은 당시 이조판서 안수도의 아들로서 품행이 단정하기로 이름난 사람이었으며, 조선왕조실록 문종조에 서산군사(瑞山郡事)를 지냈다고 알려져 있다. (조선왕조실록 문종원년 11월 4일조)
남편 안귀손이 죽자, 제문을 남기고 강릉 최씨도 자결하자, 왕의 특명으로 정려가 내려져 정려각을 세웠다 한다. 현 비문에 적혀 있는 강릉최씨의 제문은 다음과 같다.
鳳凰于飛 和鳴樂只 - 봉황이 함께 날 때 즐겨 노래 불렀는데
鳳飛不來 凰獨哭只 - 봉이 돌아오지 않아 황이 홀로 운다
搔首問天 天??只 - 하늘에 물어봐도 말이 없긴 마찬가지
天長地久 恨無極只 - 하늘같고 바다같이 넓은 한이 끝이 없구나
(출처 : 문경신문 )
2) 신숙빈(處士公 申叔彬; 1457세조 3년 ∼ 1520 중종15년)
세조 3년(1457)에 출생. 관은 평산(平山) 문희공(文僖公) 개(개)의 손이며, 대사성(大司成) 자승(自繩)의 아들이다. 연산 무오(1498)에 거창현감으로 있다가 어진 선비들이 주륙됨을 보고 관직을 버리고 빙장인 안사직(安司直)과 가은 소양에 낙향하여 후진교회(敎誨)에 전념하였다. 일찍이 시를 지어 자신의 뜻을 보였으니 有山有水處 無榮無辱身 耕田消白日 採藥送靑春(산있고 물있는 곳 영화도 욕됨도 없는 내몸, 밭 갈아 날 보내고 약초 캐며 청춘을 보냈도다.)라 하였다.
신씨가 문경 가은에 정착한 것은 지금부터 500여 년 전 1498년 연산 무오사화 때 문장(文章)과 행의(行誼)가 당세(當世)에 고명(高名)하던 학자 한천처사 신숙빈이 벼슬을 버리고 고개를 넘어 문경 가은에 오면서부터이다. 이후 중종이 여러 번 공(公)을 조정으로 청하였으나, “내가 대대로 큰 벼슬한 명문으로 혼조(昏朝)를 만나서 어진 이들을 죽여 없애던 날에 능히 한마디 말로 바르게 구해내지 못하였는데, 마침 성명(聖明)을 만나서 도리어 사명(思命)을 받는다는 것은 나의 죄이다” 하며 고사하였다.
신숙빈은 자손 다섯을 두어 후손들이 전곡리․민지리․농암리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었고, 계(契)가 농암 가실목(加項)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살며 자손들을 가항파(加項派)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왜군과의 싸움에서 순절한 700의사의 묘(금산, 칠백의총)에 묻힌 좌승지 경일(慶一)의 셋째 아들 탁(鐸)으로부터 계속 14대까지 종손으로 이어져 14대 종갓(재선)집에 이르고 있다.
신숙빈의 후손 중에 농암 가실목(현 농암초등학교 터)에서 묘소를 정할 때였다. 지관이 두 명당을 추천하였는데 한 장소는 “여기에 묘소를 정하면 자손들이 만석지기로 부자가 될 것이요” 다른 장소는 “이후 8대손 후손에서 혈식군자(혈식천추 도덕군자 血食千秋 道德君子: 선도 문화가 꽃피던 고조선시대 이후로 도덕군자가 되고자 뜻을 세운 이들이 함께 모여 자신들의 피를 섞어 나누어 마심으로써 영원토록 그 의지가 흔들리지 않도록 다짐한 군자)들이 추앙하는 인물이 배출되나 집안의 자손이 귀하게 되며, 집안의 부는 가난이 극에 달할 것이다”고 하였다. 선택은 부보다는 명예를 중요시하여 후자 쪽을 택하였다.
이후 정말로 자손은 독자만 나오든지 아니면 양자를 들여야 하였다. 또 집에 불이 나 가옥이 전소되고 소 10여 마리가 불타는 등 재난이 시작되고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였다. 자손 8대에 거의 이르러(약 6대) 그 명당이 성묘가 힘들다고 후손들이 이장을 하기로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어른들은 이장을 하지 못하도록 부랴부랴 묘소를 찾아갔으나 이미 때는 늦어 산 밑에 다다랐을 때 개장을 하여 묘소 위치에서 흰 기운이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과연 기운이 하늘로 솟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명당이거늘 생각이 부족한 너희들로 말미암아 애석한 일이 되었다”고 하였다고 한다.
이후부터는 옛 영화는 찾지 못하였지만 어느 정도 자손도 번창하고 가문도 일으키면서 평산 신씨 가문의 정신은 뚜렷이 계승하여 매사 하는 일은 주위 표본이 되고 마을의 중심이 되어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