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회 참회하는 모습으로 [참회문]
안녕하세요. 마음나라 여행 가이드 최 보산 입니다. 반갑습니다. 우리는 매일 하는 식사에서 사용한 그릇을 설거지 하여 다시 사용하고 집안이나 도량도 날마다 청소를 하며 큰일을 맞이할 때는 대청소를 한다. 또 생활하면서 지난 일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성찰하고 다짐을 하듯이 내가 지은 잘 못한 일은 반성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는 데 이것을 우리는 참회한다 한다. 오늘은 공부인의 아름다운 모습 가운데 참회하는 모습으로 [정전]에 있는 참회문을 소개하고자 한다.
인간의 욕구는 한이 없고 자기 스스로 만족하는 것을 모르니 욕망도 끝이 없다. 이 욕구는 원초적 욕망으로 우주 자연의 음과 양이 서로 밀고 따르는 음양상추의 원리로 유교에서는 이 우주의 기본 원리를 음양오행으로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이 한없는 욕심의 원인을 불교에서는 탐심 진심 치심이라 말하고 인간의 모든 죄업은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음이 근본이 되어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지었다 한다.
성당에서는 일곱 가지 성스러운 일 가운데 하나로 고해성사가 있다. 고해성사는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지은 죄를 진심으로 낫낫이 뉘우치면서 사제를 통해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고 용서의 은총을 받는 성사로 비밀이 유지되는 가운데 사제에게 고백함으로 모든 죄를 속죄할 수 있다고 한다. 교회에서는 예수를 믿고 거기에 의지하여 모든 죄를 대신하여 용서받고 사후에 천국에 태어나기를 바란다. 사찰에서는 출가한 승려들이 한 달에 두 번 모여 “자자”라고 하여 그동안 자기의 죄과를 고백하고 대중에게 훈계를 받는 자리를 마련한다고 한다.
소태산 대종사는 [정전]에 “참회문”이 있어 공부인들은 모두 참회하는 공부를 하도록 하였다. 공부인이 마음공부를 처음 시작하거나 세상에서 종교의 문을 두드리고 새로 입회하여 처음으로 해야 할 일이 지난날의 나를 돌아보고 이제까지 지나온 길을 살펴보는 일이다. 거듭나는 삶을 다시 시작하는 계기를 몸을 깨끗이 씻는 목욕을 하는 것처럼 참회를 한다. 참회하는 것은 공부인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특별한 경우에만 하는 것이 아니고 일상생활에서 매일 상시일기를 기재하며 반성 참회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소태산 대종사는 참회문을 열어 모든 이들이 이문에 들어 새 마음으로 새 생활로 거듭나기를 염원하였다.
참회를 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 데 하나는 잘못한 일에 대한 참회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죄업의 근본이 되는 탐심 진심 치심을 제거하는 일이다. 이러한 사항은 [정전]의 “참회문”에 자세히 밝히고 있는데 “참회문” 전문을 이곳에 소개하면 좋겠지만 문장이 길어서 여기에서는 간단히 설명하고 필요한 공부인은 인터넷 검색창에서 “원불교 참회문”을 검색해 찾아보면 좋겠다.
참회라 하는 것은 비하건대 큰 솥 가운데 끓는 물을 차게 만들고자 하는 것과 같은 데 이때 방법이 두 가지가 있다. 펄펄 끊는 뜨거운 물을 차게 만들고자 하면 위에다는 찬물을 붓고 밑에서 타는 불을 꺼야할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이렇게 끓는 물을 냉수를 만드는 것이 참회라 한다면 위에다가 찬물을 갖다 붓는 것은 일을 참회하는 사참이요 밑에서 타는 물을 꺼버리는 것은 원리적으로 삼독심을 제거하는 이참이다.
냉수를 많이 갖다 붓는 것은 지난 날 일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좋은 일 착한 일 선한 일을 많이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동안 잘못한 일에 대한 뉘우침이 실제 행동으로 표현될 것이다. 그리고 밑에서 타는 불을 꺼 버리는 것은 마음 가운데 잘못을 하는 불씨인 탐내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을 제거하는 것으로 죄는 본래 마음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라 이 마음이 멸함을 따라 반드시 없어질 것이니 원리적 접근을 한 것이다.
참회의 끝은 공부인이 성심으로 참회 수도하여 적적 성성한 자성불을 깨쳐 마음의 자유를 얻어야 한다. 마음의 자유를 얻으면 하늘이 하는 일을 임의로 하고 생사를 자유로 하여,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고 미워할 것도 없고 사랑할 것도 없게 되어, 욕계 색계 무색계 곧 온 우주와 천도 인도 수라 축생 아귀 지옥의 온 세상이 평등하여 하나의 맛이 되고, 일 있을 때나 일 없을 때 그리고 어려운 일과 편안한 일에 항상 걸리지 않게 된다.
이러한 사람은 모든 죄와 괴로움이 더운 물에 얼음 녹듯 하여 괴로움도 괴로움이 아니요, 죄도 죄가 아니며, 항상 자성의 지혜광명이 나타나 모든 세계가 이 도량이요, 모든 세상이 이 정토라 내 외 중간에 털끝만한 죄상(罪相)도 찾아볼 수 없게 되니, 이것이 바로 참으로 하는 참회이니 이 지경에 이르러야 가히 죄업을 마쳤다 할 것이다.
요즘에는 스스로 도통하였다는 사람이 가끔 나타나서 계율과 인과를 무섭게 알지 아니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무애행(無碍行)이라 하여 공부 풍토를 어지럽히는 일이 있는데 이것은 자성의 분별없는 줄만 알고 분별 있는 줄은 모르기 때문이니, 이는 유무 초월의 참 도를 알지 못하였다 할 것이다.
또는, 견성만으로써 공부를 다 한 줄로 알고, 견성 후에는 참회도 소용이 없고 수행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나, 비록 견성은 하였다 할지라도 천만 번뇌와 모든 착심이 동시에 소멸되는 것이 아니요 또는 삼대력(三大力)을 얻어 성불을 하였다 할지라도 정업(定業)은 능히 면하지 못하는 것이니, 마땅히 이 점에 주의하여 사견(邪見)에 빠지지 말고 불조의 말씀을 오해하여 죄업을 가볍게 알지 않아야 할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아무리 한 때에 악을 범한 사람이라도 참 마음으로 참회하고 공덕을 쌓으면 몸에 악한 기운이 풀어져서 그 앞길이 광명하게 열릴 것이요, 아무리 한 때에 선을 지은 사람이라도 마음에 원망이나 남을 해칠 마음이 있으면 그 몸에 악한 기운이 싸고 돌아서 그 앞길이 암담하게 막힌다.” 하였으니 공부인의 참회하는 모습은 겸손이 바탕하여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 공부인이 지은 모든 죄업 생각해보면 탐심 진심 어리석음 근본이 되어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지은 것이다. 이때를 당하여 모두 깊이 참회하고 선업을 행하는 것은 사참을 하는 것이다. 죄업이 자성에는 본래 없으므로 마음 따라 모든 죄가 일어났으니 그 마음 없어지면 죄도 생기지 않을 것이니 모두 없는 그 자리에 그치는 것은 이참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참과 사참을 아울러 행하는 것이 진정으로 참회하는 모습이 되고 진정으로 용서를 빈다면 지은 죄도 가벼워지며 평소에는 겸손할 것이다.
오늘 준비한 내용은 여기까지 이다. 다음 시간에는 2 과정인 “공부인의 아름다운 모습” 둘째 시간인 기도하는 모습으로 “심고와 기도”를 공부할 예정이다. 오늘도 마음공부 잘 하여서 새 세상의 주인 됩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