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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했으나 실패한 에서의 후손
2010년 10월 31일 / 대예배 / 창 36:1-8
막 8:34-36 / 그러고 나서 제자들과 군중을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35)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자기 목숨을 잃어버린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2010년 연말이 점점 다가옵니다. 낙엽이 떨어지며 멀지 않아 겨울이 올 것입니다. 그러면 늘 생각나는 것은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남은 기간 동안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 유대인 랍비 한 사람이 90세가 되어서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까?” 하니 랍비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건강과 장수를 구한다는 것은 살만큼 살았기 때문에 미안해서 구하지 못했고, 지혜를 구할까 하다가 ‘지혜는 솔로몬에게 가서 배워라’ 할 것 같아서 그것도 못 구했습니다. 부귀영화를 구할까 하다가 ‘네 주제에 무슨 부귀영화냐’ 할 것 같아서 그것 역시 구하지 못했습니다. “빨리 구하라”고 독촉하자 “아무 것도 구할 것이 없네요.”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너는 어찌 90 평생을 살면서 너만 위해서 구하고, 너만을 위해서 살았느냐? 나는 너를 통해서 내가 증거 되길 원하고 내가 너에게 베푼 은혜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길 원했는데, 너는 이웃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한 일이 없구나. 빨리 꺼져라.” 해서 쫓겨났다고 합니다.
▶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초대 교회로 돌아가서 사도행전적 부흥을 원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생각대로 되지 않습니다. 교인들도 신앙이 성숙하기를 바라지만 제자리걸음인 경우가 많습니다. 초대 교회와 현대 교회가 이런 차이를 보일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본질의 차이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은과 금은 없었으나 예수님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현대 교회, 교인들은 은과 금은 많지만 예수님이 없습니다. 현대 교회는 은과 금으로 편안함을 제공합니다. 교인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각종 첨단 시설로 무장합니다. 그런데 예배 시간까지 단축할 뿐 아니라 심지어 주일 저녁예배를 드리지 않는 교회도 있습니다. 신앙은 편안함이 아니라 위로부터 임하는 평안입니다. 재미가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또한 내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막 8:34). 다른 길로 가면 멸망과 죽음뿐입니다(마 7:13). 예수님의 발자국만 밟고 가는 것이 생명이며, 은혜요, 축복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발자국을 따름으로, 예수님의 흔적을 내 몸에 가질 뿐만 아니라 믿음의 발자국을 남기는 분들이 됩시다.
▶ 창세기 36장은 다른 장에 비해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은 장입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사람들의 이름은 우리가 외울 필요도 없고 큰 의미도 없습니다. 단지 이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면 4천 년 전에 살았던 에서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에서는 세상적으로 볼 때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이름을 가진 한 왕국(에돔)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그 자손들 중 8명이 왕이 되었고, 11명이 족장들이 되었습니다. 물질적인 부요와 쾌락을 누렸고, 정치권력도 소유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부분에서는 비참하게 실패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아주 작은 부분에도 성공하지 못한 아주 철저하게 실패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후손들은 ‘에돔’이라는 왕국을 이루어 번창을 했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36장을 통해서 ‘하나님을 벗어나서 세상적으로 성공한 에서와 그 후손들의 삶의 결과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세상적인 성공은 가시적(可視的)인 성공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기적(短期的)인 성공에 불과합니다. 차원 높게 이야기한다면 세상적인 복을 받았다면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감사와 더불어 경건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성공은 불가시적이지만 이것은 영원한 성공이요,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성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권면하셨습니다.
마 6:19-21 / 이 땅위에 재물을 쌓아두지 말라. 땅에서는 좀이 먹어 없어지거나 도둑을 맞기 쉽다. 20) 그러므로 그것들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서는 그 가치를 잃어버리는 일도 없고 도둑이 들어와 훔쳐 갈 염려도 없다. 21)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도 성공하고 세상적으로도 성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최상의 삶일 것입니다. 그렇게 되라는 것이 하나님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신 28:1-14 / 여러분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며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전한 주님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세상의 모든 민족들보다 높여 주실 것입니다. … .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모르고 있는 분들도 많거니와 알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하는 분도 많습니다. 힘이 들고 어려워도 찬송하며 그 길을 걸어가십시다.
에서는 언뜻 보면 4가지 영역에서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영혼의 관점에서 보면 실패했습니다.
1. 세상적으로 번창한 가정도 하나님께 축복받은 가정과 비교할 수 없다.
그의 가정은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의 가정은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이 되지 못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셨고 에서는 미워하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로 세상적인 기준으로 번성한 가정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축복받은 가정과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에서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고 하는 결정적인 증거는 그것은 할아버지 아브라함, 아버지 이삭 때부터 계속 되어온 경고를 무시한 것입니다. 그 경고는 ‘너희들은 가나안 족속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라. 아내를 취할 때는 반드시 본토 친척 아비 집에 가서 취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어떻게 했습니까?
창 36:2 / 에서는 가나안 여자 가운데서 두 사람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헷 사람 엘론의 딸 아다와 히위 사람 시브온의 손녀이자 아나의 딸인 오홀리바마가 에서에게 시집온 가나안 사람이다.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싫어한 여인들 중에서만 아내를 취한 것입니다. 이렇듯 에서는 철두철미하게 육적인 사람이요, 영적인 분별력에는 조금도 없는 사람이요, 하나님 말씀에는 관심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는 백성이라 해서 아이를 낳는데 어려움을 당하라는 법은 없습니다. 에서의 아내들 가운데 아이를 낳는데 어려움을 겪은 사람이 없습니다. 에서의 아내들은 아들 다섯을 낳았습니다. 딸들도 많지만 딸들의 이름은 열거되어 있지 않습니다. 에서는 가정적으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강하고, 유능하고, 다복하여 자녀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자기 힘으로 가정을 세우고 일으켜 번창한 사람의 대명사가 된 것입니다.
▶ 반면에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은 어떻습니까?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아브라함의 나이 75세, 자신의 나이 65세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25년이 지난 후 사라의 나이가 90세가 되었을 때 비로소 아들을 주셨습니다. 참으로 기적적인 방법으로 겨우 아들 하나를 주셨습니다. 이삭도 아내 리브가와 결혼을 한 후 20년이 지나도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했더니 쌍둥이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복중에서부터 싸운 이 아들들은 후에 원수는 아니지만 껄끄러운 사이로 지냈습니다.
야곱의 경우를 봅시다. 4명의 아내가 있었는데, 덜 사랑하는 레아에게서는 6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을 얻었으나 그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은 가까스로 아들 둘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라헬은 두 번째 아들 베냐민을 낳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원리는 의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의 교만을 꺾으시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내 힘으로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애초부터 꺾으시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셨습니다.
반면 에서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세상적으로는 매력있는 가정입니다. 아내들은 아름답고, 자녀들도 출세를 해서 족장이 되고 왕들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외적으로 성공해 보이는 명문가가 한 가지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는 실패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정의 호주(戶主)가 되지 못하셨다는 것입니다. 에서의 가정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에서는 성공한 듯 보이지만 영원하고 중요한 일에서는 실패한 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2. 물질의 성공은 영적인 성공과 비교할 수 없다.
에서는 물질에 성공한 사람이었지만 영적으로는 영원히 실패한 존재였습니다. 에서는 가나안 땅에서 재물을 많이 얻었습니다. 후에 에서는 동생 야곱을 떠나서 가나안 땅을 벗어나 세일산으로 갑니다. 세일산은 해발 1,500m 이상의 가나안 땅 남부, 시내 광야 동쪽에 있는 높은 땅입니다. 이곳은 에시온 게벨(Ezion-Geber, 현재 아카바)이라는 항구를 끼고 있고, 왕의 대로(大路)가 있어서 통행료만 받아도 부를 유지할 수 있는 곳입니다.
여기에서 에서가 야곱을 떠난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펴봅니다.
창 36:6-7 / 에서는 자기 아내들과 아들딸과 집에서 함께 사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자기 재산뿐 아니라 모든 가축 떼를 이끌고 야곱이 살고 있는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겼다. 7) 에서가 그곳을 떠난 까닭은 야곱의 식구와 자기 식구가 함께 살기에는 그 땅이 좁았기 때문이었다. 야곱이 거느리고 있던 가족과 가축 떼도 엄청나게 많았을 뿐더러 에서가 거느리고 있던 식솔과 가축 떼도 매우 많았다.
에서는 부자가 되어서 야곱과 함께 가나안 땅에 거할 수 없기 때문에 세일산으로 내려갔습니다. 에서가 가나안 땅을 떠난 이유는 합당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은 가나안 땅을 영영히 차지할 것이라, 가나안 땅에 거하라”는 말씀은 의중에도 없었습니다. 에서는 자신의 물질을 ‘어디에 가면 더 번창시키고 잘 지킬 수 있을까?’에 관심이 있었지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어디에 거하라고 말씀하시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 그렇다고 에서가 물질에 있어서 인색하다거나 욕심꾸러기만은 아닙니다. 야곱이 에서의 분노를 두려워해서 물질을 주고 노를 누그러뜨리려 했을 때 에서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창 33:9 / 에서는 극구 사양하였다. ‘아니다. 나는 괜찮다. 나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걱정 말아라. 네 살림을 축내서야 되겠느냐?’
하지만 야곱이 강권하니까 할 수 없이 받았습니다. 짐승들은 먹을 만큼 먹으면 더 이상 먹지 않습니다. 에서도 취할 것만 취하지 욕심에 사로 잡혀 자기 동생의 것을 취할 만큼 욕심쟁이는 아닙니다.
에서와 같은 실패자가 눅 12장에도 있습니다.
눅 12:16-21 / 그러고 나서 비유로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기름진 농토를 가지고 있었는데 풍년이 들었다. 17) 그래서 곳간을 가득 채우고도 곡식이 남아 더 넣어 둘 데가 없었다. 그는 어떻게 할까 궁리하다가 18) 속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지어야겠군. 그러면 충분히 쌓아둘 수 있겠지. 19) 그리고 내 영혼에게 이렇게 말하리라. 나는 물건을 몇 해 동안 쓰고도 남을 만큼 쌓아 두었다. 이제는 편안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기자.’ 20)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밤에 내가 네 영혼을 찾아가리라. 그러고 나면 네가 모은 재산이 다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21) 그렇다.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지 않고 땅에 쌓아 두는 사람은 모두 이와 같이 어리석은 사람이다.”
농사꾼은 물질에 성공해서 부자가 되었지만 하나님께는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어리석은 부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고 하나님께 대해 부요해야 됩니다. 물질의 성공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 대하여 성공하는 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되지 않을 만큼 중요합니다. 물질을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하여는 다음 기회에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3. 세상의 정치권력은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비교할 수 없다.
에서는 정치권력에서 성공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능력은 알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성도들과 불신자들을 구분하는 결정적인 기준은 성령을 받았느냐 아니냐 입니다. 불신자들은 성령의 체험이 없습니다.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성령을 따라 살겠습니까?
남자들은 여러 가지 힘 중에 정치적인 힘을 좋아합니다. 어느 나라에서는 대통령 4년 임기를 마친 후에 사형을 시키겠다고 해도 대통령을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는 확인이 안 된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린 남자 아이들만 봐도 골목대장이 되기 위해서 늘 싸웁니다. 이렇듯 아이나 어른이나 정치적인 싸움의 규모만 달랐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싸우는 것은 여전합니다. 이처럼 에서도 큰 정치권력을 소유했습니다.
15절 이하에 보면 그의 아들들은 ‘족장’이라 불렸습니다. 그리고 31절 이하에 보면 그의 아들들은 ‘왕’이라 불렸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리는 왕이 이러하더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사울 왕이 있기 훨씬 이전에 에돔은 왕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에돔에 왕이 있었던 때는 야곱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던 때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세상정치를 하지 말라는 말만은 아닙니다. 정치를 직업으로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 가운데 좋은 정치가가 나와야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세속 정치권력을 장악했다고 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대적한다면 영원한 패배자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정치권력을 장악했다고 해도 이 권력 위에 더 위대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며 백성들을 위한 바른 정치를 해야 합니다. 다니엘과 같이 흠과 티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단 6:4-5 / … 다른 총리들과 지방장관들은 나라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다니엘을 걸고 넘어져 고소할 수 있을까 하고 모함하기에 골몰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허물을 찾아내려 해도 또 잘못을 발견하려고 해도 도무지 찾아낼 길이 없었다. 다니엘이 나라 일을 보는 과정에서 도무지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또한 허물이 될 만한 일을 전혀 하지 않은 까닭이다. 5) 그러자 사람들간에는 다니엘에 대해 이런 말이 오갔다. ‘다니엘을 걸고 넘어지려면 다른 일을 가지고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러니 이제 그가 믿는 종교에 대해서 시비를 걸어야 무슨 빌미라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더 강조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 나라에서 총리가 되었던 다니엘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단 2:21 / 주께서는 때와 시대를 마음대로 움직이시는 분, 왕을 세우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시는 분, 지혜와 깨달음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셔라.
▶ 그런데 에돔의 큰 잘못이 나옵니다. 에서의 왕국인 에돔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대적합니다. 오바댜서의 내용은 ‘에돔에 대한 심판’입니다. 에서의 후손들은 바벨론이 침략해서 예루살렘을 공략할 때에 바벨론과 한편이 되어 야곱의 후손들을 침략하고 핍박합니다. 또 함께 제비 뽑아 그 땅을 빼앗고 도망치는 야곱의 후손들을 사거리에서 막아 죽이는 자에게 내어 줍니다. 이런 포악을 행하는 에돔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에돔은 멸망하되 전멸하여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야곱은 내가 잠시 징계하여도 회복해서 왕국을 이룰 것이다!” 이 내용이 오바댜서입니다. 정치적인 힘도 좋지만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은 심판을 자초할 뿐입니다.
4. 세상의 일시적인 명예는 영원한 하나님의 인정하심과 비교할 수 없다.
에서는 큰 명예를 얻었지만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일시적인 명예는 영원한 하나님의 인정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에서의 후손들은 족장이 되고 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까지 그 왕족의 계보가 이어졌습니다. 이때 에서의 후손들을 ‘이두메인’이라 불렀습니다. 이들이 로마의 정치권력과 결탁을 해서 이스라엘의 왕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헤롯 왕가가 바로 에서의 후손입니다. 헤롯 대왕이 동방박사가 와서 유대인의 왕이 새로 나서 경배하겠다고 하자 베들레헴 근처에 두 살 이하의 어린 남자 아이들을 다 죽였습니다. 메시아를 끊으려고 하는 사단의 종이 된 것입니다. 헤롯 안티파스라고 하는 왕은 세례 요한의 목을 쳐서 소반에 담아 자기 딸에게 주는 잔인한 왕이었습니다. 이렇게 왕권을 누리는 에돔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AD 70년에 로마 장군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Titus Andronicus)가 예루살렘을 멸망시킬 때에 에돔도 멸망되었습니다.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야곱, 이스라엘은 다시 회복시키셨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강대국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지 않습니까!
오바댜서의 결론도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야곱의 후손은 불이 되고, 요셉의 후손은 불꽃이 되고, 에서의 후손은 초개(지푸라기)가 되어 날아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 에서가 잘 나갈 때에 야곱의 후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였습니까? 그들은 아직도 들에서 양이나 치고 있었으며, 그러다가 극심한 가뭄이 오자 애굽에 가서 살다가 결국에는 거기서 오랜동안 종살이나 하게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야곱의 후손과 에서의 후손을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 어떻게 보면 야곱은 하나님 중심적 신앙으로 산다고는 했지만 형편이 피질 못했지만 에서는 자기 중심적 신앙으로 살아도 하는 일마다 잘되었고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주의 깊게 그들을 바라보아야 하고 그들 후손의 역사를 바라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더디지만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성공하는데 빨랐느냐 늦었느냐가 아니라,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삶의 방식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냐가 더욱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에서의 후손을 보면 지금은 대단하다고 자랑하는 족장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고 왕국을 창설하여 그 왕정을 이어가는 왕들의 이름을 열거하지만, 그들의 후손 가운데는 ‘아말렉’(12절)이 태어나 자기 민족을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를 거슬리는 족속으로 이끌며 존재하다가 끝내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망합니다. 이것을 보면 결국에는 야곱의 후손이 더욱 번창하고 복 받은 가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에서의 후손보다도 야곱의 후손이 족장의 수나 왕들의 수가 더 많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민족을 이끄는 이스라엘의 열왕(列王)은 다 야곱에게서 다 야곱의 허리에서 나왔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역사를 너무 단편적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사는 현재를 너무 가볍게 보고 함부로 판단합니다. 우리는 현재를 귀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 형편이 어떠하냐? 잘 되고 있느냐? 아니냐? 이런 시각에서 보아야 할 것이 아니라 항상 기초에 충실하고 원리에 충실하여 그가 하나님 중심적 신앙을 잘 견지하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눅 12:29-34 /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30) 이 세상 사람들은 날마다 양식을 그러모으느라 애쓰지만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이미 너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알고 계신다. 31) 그러니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너희에게 날마다 필요한 모든 것을 덤으로 주실 것이다. 32) 그러므로 작은 무리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33) 너희가 가진 것을 팔아 필요한 사람에게 주라. 이것이 하늘에 재물을 쌓아 두는 것이 된다. 하늘에 쌓아둔 재물은 없어지거나 좀이 쓸 일이 없다. 34)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과 생각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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