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교회 역사이야기’ 회고와 아시아천주교사연구회의 사명[중국교회 역사이야기 20. 끝]
시련과 갈등 극복해야 ‘아시아 복음화’ 미래가 보인다
공산화 이후 계속된 교회 탄압
주교 임명 놓고 교황청과 갈등
120명 시성식 이후 대립각 커져
한국교회가 특별한 관심 갖고
관계 개선 위해 적극 노력해야
지난 5월 22일 한국교회사연구소 4층 회의실에서 열린 제41차 아시아천주교사연구회 정기모임. 아시아천주교사연구회는 아시아천주교사 연구 분야의 국제적 허브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신의식 교수 제공
아시아천주교사연구회는 한국교회의 뿌리를 알기 위해 ‘중국교회 역사이야기’를 가톨릭신문에 연재해 왔다. 20회에 걸친 ‘중국교회 역사이야기’ 연재를 통해 집필자들은 물 흐르듯 중국교회사를 풀어 가며 독자들이 중국교회와 한국교회의 관계를 쉽게 이해하기를 희망했다. 중국교회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소개해 본다.
■ 중국교회사 이해의 길잡이
무엇보다 중국과 한국의 국토 크기 차이, 회수(淮水)를 경계로 하는 중국 남방과 북방의 차이, 해안가와 내지의 차이 그리고 본토와 변방의 차이, 소수민족 지역과 한족 지역의 차이를 구분해서 사건이나 역사를 살펴본다면 훨씬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이것은 중국 역사를 이해하는 가늠자가 된다.
다음으로는 주의해야 할 점으로 외국 선교사들의 중국 이름에는 동명이인이 있다는 것이다. 예로 페르비스트(Verbiest)는 남회인(南懷仁)이란 이름을 사용했는데, 후대에 중국에 온 라임베크호벤 주교(Laimbeckhoven) 역시 남회인(南懷仁)이므로 누구를 언급하는지 확실하게 구분해야 한다.
예수회 선교사인 바뇨니(Vagnoni)는 왕풍숙(王豊肅)에서 고일지(高一志)로 이름을 바꿨던 경우도 있고, 아예 다른 수도회 선교사의 이름을 그대로 차용하는 경우도 있다. 스페인 도미니코회 선교사인 나바레테(Navarrete)는 민명아(閔明我)라는 이름을 사용했는데, 그 후에 중국에 들어온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인 그리말디(Grimaldi) 역시 민명아(閔明我)라는 이름을 사용하므로 같은 이름을 쓰는 두 선교사에 대한 구분이 필요하다.
셋째로는 중국 지역에서 활동한 수도단체를 구분지어 보는 것도 중국교회를 이해하는 좋은 잣대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와 독일 성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에 의해 선교가 이뤄졌지만 중국의 경우에는 북경, 하북, 천진은 라자로회, 북경(예수회 해산 이전)과 상해(아편전쟁 이후)와 강남지역은 예수회, 복건은 도미니코회, 호광은 프란치스코회, 마카오, 운남, 동북은 파리외방전교회가 선교했다.
교리와 신학을 중시했던 도미니코회 및 프란치스코회와 중국에서 적응주의 선교방침을 따랐던 예수회의 차이점에서 야기된 의례논쟁을 생각하며 ‘중국교회 역사이야기’를 다시 본다면 이전보다 훨씬 흥미로운 내용들을 발견할 것이다.
1989년 5월 14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을 접견하는 공핀메이 추기경.
신의식 교수 제공
■ 중화인민공화국 치하의 교회
1949년 중국 대륙이 공산화된 이후 중국교회는 상당한 시련을 겪게 된다. 특히 1955년 9월 8일 상해시는 상해교구의 공핀메이(?品梅) 주교와 판중량(範忠良), 진루셴(金魯賢) 신부를 포함한 다수의 신부 및 신자들을 반혁명세력으로 투옥시키면서 교회 탄압을 한층 강화했다. 1956년 7월 19일에서 25일까지 북경에서 36명의 발기인으로 구성된 ‘중국천주교우애국회’ 준비위원회 예비회의가 개최됐다. 1957년 8월 2일에 중국천주교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국천주교우애국회가 결성돼 피수스(皮漱石) 대주교를 주석으로, 양스다(楊士達)를 부주석으로 선출했다.
1958년 3월 18일에는 프란치스코회 둥광칭(董光?) 신부가, 19일에는 프란치스코회 위안원화(袁文華) 신부가 연이어 자선자성(自選自聖, 교황 승인 없는 주교 서품)의 중국 최초 주교로 한구(漢口)교구와 무창(武昌)교구에 임명되면서부터 교황청과의 갈등은 더욱 극렬해졌다. 교황청에서는 이 두 비법주교(非法主敎, 교황 승인을 받지 못한 애국회 주교)를 파문시키며 자선자성 주교를 인정하지 않았다.
1962년 1월 5일부터 19일까지 개최된 중국천주교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국천주교애국회’(이하 애국회)가 공식 명칭으로 사용됐다. 중국교회는 교황청과의 단절 그리고 자체 독립을 표명하면서, 1980년 5월 30일 애국회 제3차 회의에서 ‘중국천주교주교단’과 ‘중국천주교교무위원회’ 설립을 결정지어, 중국교회는 ‘양회일단’(兩會一團, 애국회와 교무위원회, 주교단)으로 형성됐고 1992년 9월 중국천주교 제5차 전국대표대회에서는 교무위원회를 주교단 아래에 두었다. 이로써 현재 중국교회는 ‘일회일단’(一會一團, 애국회와 주교단)으로 구성돼 있다.
2000년 10월 1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거행한 중국교회 120명에 대한 시성식에 중국정부는 강하게 불만을 표출했는데, 그 첫째 이유는 시성 자격이 미달되는 인물들이 시성됐다는 것이고 또 다른 이유는 중국 국경일(건국기념일)인 10월 1일에 시성식을 거행했다는 것이다. 자격 미달 여부는 앞으로의 연구에 의해 밝혀질 것이나, 10월 1일 시성식 논란은 중국 측이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 날은 선교사들의 수호성인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의 축일이기에 10월 1일에 시성식을 거행한 이유는 타당하다. 그러나 시성식 이후 중국과 교황청 간의 대립은 극에 달했고, 중국교회는 애국회, 지상교회, 지하교회(忠貞敎會), 공개교회로 더욱 첨예화됐다. 교황 승인을 받은 합법주교와 교황 승인을 받지 못한 비법주교의 갈등도 더욱 커졌다.
■ 판중량(範忠良), 진루셴(金魯賢) 주교
교황청과 중국의 갈등에 대한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 우리는 상해 주교 진루셴을 통해 그 가능성을 타진해 본다. 진루셴은 1955년 9월 8일 교난으로 17년간 옥고를 치르고, 9년 동안 노동개조형을 거쳐 1982년에 석방됐다. 석방 후 그는 애국회 신부로 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는 로마의 지시를 준수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나의 바람은 오로지 가톨릭교회를 살려야 한다는 것”라고 말했고, 애국회의 상해 주교 임명을 받아들였다.
이후 진루셴은 1989년 미사 중 교우들과 교황을 위한 기도를 바침으로 교황청과 관계 개선을 추진했고, 교황청과 중국정부 모두에서 상해교구 보좌주교로 정식으로 인정받게 됐다. 교황청에서 진루셴을 보좌주교로 승인했다는 것은 진루셴의 주장에 동의한다는 뜻일 것이다. 당시 상해에는 교황청에서 임명한 지하교회 주교단 단장인 판중량(範忠良) 주교가 교구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진루셴은 보좌주교로 임명된 것이다.
■ 아시아천주교사연구회의 사명
중국교회의 일면을 들여다보았는데, 이렇게 복잡다단한 중국교회를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쉽지 않은 문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1984년 한국 103위 시성식 강론에서 하신 “중국교회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한국교회에 위임한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큰 울림으로 남아 있다. 이는 아시아천주교사연구회의 역할이자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아시아천주교사연구회의 바람은 아시아천주교사 연구 분야에 있어 명실상부한 국제적 허브(International hub)가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교회기관과 신자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격려 그리고 성원이 절실히 요구된다. 많은 노력과 희생으로 갖춰진 우리 연구회의 연구 인력(20명)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실질적인 연구 공간과 연구 여건 마련이 시급하다. 우리 연구회가 보다 큰 영광을 하느님께 돌릴 수 있는 날을 기대해 본다.
신의식(멜키올)아시아천주교사연구회 회장·충북보건과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