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우. 김이우. 김현우
최초의 박해 사건의 주인공과 그 형제들
김범우 : 1751 〜1786. 세례명 토마스. 단양에서 옥고의 여독으로 순교
김이우 : ?〜1801, 세례명 바르나바, 포도청에서 매맞아 순교
김현우 : ?~1801, 세례명 마태오,서소문 밖에서 참수
김범우(金範禹, 토마스)와 이우(履禹,바르나바), 현우(顯禹. 마태오)는 영조 때 사역원 판관(司譯院 判官)을 지낸 김의서의 아들들이다.
맏형 범우가 적자이고, 넷째와 다섯째 동생인 이우와 현우는 그의 이복동생으로 서자였다. 김범우의 본관은 경주인데, 경주 김씨는 영조 대 이후 많은 역과 합격자를 낸 당시의 대표적인 역관 가문이었다.
그러나 경주 김씨이면서도 김범우의 집안은 원래 무반직(武班職)에 종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김의서는 무과가 아니라 역과에 응시하여 역관으로 활동하였고, 아버지에 이어 그의 자손들 역시 역관 직에 진출하였다. 김범우는 1773년에 실시된 역과에서 2등급으로 합격한 뒤 종 6품인 한 학우의 별주부까지 올랐고. 셋째 동생 적우(績禹)는 그보다 10년 뒤에 역과에 합격하여 역관직에 종사하였다.
첨례 활동의 중심인물이었던 김범우
서울 명례동(明禮洞)에 살던 김범우는 비록 신분은 달랐지만. 일찍부터 조선 천주교회 창설의 주역인 이벽, 이승훈 등과 학문적으로 접촉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784년 9월 서울 수표교 근방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정약전, 약용 형제. 권일신, 최창현 등과 함께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정식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그 후 그는 자기 집을 새로 입교한 천주교 신자들의 비밀 집회 장소로 제공하여 세례받은 신자들이 정기적으로 일정한 장소에 모일 수 있게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김범우의 집은 국가의 예악 관계 일을 담당하던 ‘장악원’ (掌樂院) 앞에 있었다고 한다. 당시의 행정 구역으로는 한성부 명례방 명동계 명례동으로. 한적한 남산골에 자리 잡은 집이었다.
이처럼 서울에 신앙 공동체가 생겨났다는 것은. 그때까지 학자들이 학문적으로 연구해 온 서학(西學)이 이제 학자와 중인을 주체로 하는 조직적인 신앙 실천 체로 발전해 감을 뜻하는 것이었다. 또한 ‘양반도 서민도 아닌 중인 집에서 출발한 것은 모든 계층의 사람을 받아들이는, 즉 개방성을 지닌 공번된 천주교회의 출발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김범우의 집에는《천주실의(天主實義)와《칠극》(七克) 등 여러 천주교 서적이 비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천주교를 연구하는 지식인이나 관심 있는 사람은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나 드나들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집에서 알게 된 신자들과의 친교로 천주교에 입교하는 사람도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따라서 김범우는 첨례(目鮮豊) 활동의 핵심 인물이었으며, 모범적이고 열렬한 신앙으로 교회의 지도자 역할을 하였다.
세례를 받은 김범우는 즉시 선교 활동에 나서 이우, 현우 등 동생들뿐만 아니라 최인길, 최필공, 허속, 김종교 등을 교회로 인도하였다. 또 양반인 홍익만, 윤지충 등은 김범우의 집에 드나들며 천주교 서적을 접함으로써 입교한 사람들이었다. 이처럼 김범우는 중인 신분이었지만, 계층을 초월하여 선교 활동을 하였다. 그 결과 김범우로부터 교리 지도를 받거나 신앙적 영향을 받은 신자들이 많았는데, 특히 그들 중에는 초기 교회에 상당히 기여한 인물들이 많았다.
▲ 김범우는 자기집에서 이승훈 등 10여명의 천주교 신자들과 함께 첨례를 지내다가
추조 순라꾼 들의 급습으로 체포되어 형조로 연행되었다.
최초의 박해’을사추조적발 사건‘
1785년 봄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던 교회는,‘을사 추조 적발 사건’ (乙巳秋曹摘發事件)이 벌어지면서 그 실체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것은 이승훈을 중심으로 정약전, 정약용, 권일신 등 1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김범우의 집에서 첨례를 지내다가 사직 당국에 적발된 사건이었다. 당시 김범우의 집 근처에는 사람이 그다지 많이 살지 않았는데,,일정한 기간을 두고 정해진 날에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자주 회합을 하니,자연히 추조(秋曹, 형조의 별칭) 순라군들의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순라군들은 이들이 모여 술 마시고 정부가 금하는 노름을 하는 줄 알고, 어느 날 그 집회 현장을 급습하여 모여 있던 이들을 잡아 형조로 연행하였다. 형조에서의 취조결과, 도성(都城)안의 양반 자제와 중인 신자들이 모여 종교적인 행사를 조직적으로 행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당시의 형조 판서는 일이 심상치 않다고 파악하였으나, 신중을기하여 양반 출신 신자들은 훈방 조치하고, 김범우만을 문제 삼았다. 이에 권일신은 그의 아들들과 이윤하, 정섭 등을 데리고 형조로 가서 김범우의 석방과 압수한 성물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최인길 등 중인 신자들도 자청하여 김범우와 같이 벌을 받겠다고 나섰다. 이 소동으로 사태가 악화되어 김범우는 심한 악형을 받았고, 배교를 강요당하였다. 그러나 김범우는 끝내 배교를 거부하고 충청도 단양(丹陽)으로 유배되었다.
‘을사 추조 적발 사건' 은 조선 천주교회 최초의 박해 사건으로, 비록 관형(官刑)을 받고 유배된 신자가 김범우뿐이었지만, 이 사건으로 비밀리에 있던 교회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자식들이 천주교를 믿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란 사대부 양반들은 천주 신앙을 받아들인 자식들에게 배교를 강요하며 눈물로 호소하거나 위협하는 등 이른바 가정 박해를 가하였다.
이에 혈육의 배교 강요와 간곡한 설득에 못 이겨 마음을 돌린 이들도 생겨나게 되니, 이제 신생 조선 교회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빗발치둣 올라오는 척사 상소로 인해 당국의 태도는 더욱 경직되어 갔다.
한편 홀로 투옥되고 유배된 김범우의 문제를 신분이 중인이었기 때문에 받게 된 신분적 차별 대우로만 볼 수는 없다. 그가 신앙을 위한 집회 장소를 제공하고, 신자들의 교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하던 핵심 인물로 여겨졌기 때문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가 옥중에서 받은 형벌은 그만큼 가혹하고 잔악하였다. 박해자들은 갖은 수단을 다하여 배교한다는 자백을 얻고자 하였으나, 끝내 신앙을 취소한다는 자백을 받아 낼 수 없었다. 김범우는 체포된 후 1년 이상 옥고를 치른 다음 충청도의 벽지인 단양 땅으로 유배되었고, 얼마 있다가 옥고의 여독을 추스르지 못한 채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유배지의 짧고 괴로운 생활 속에서도 큰소리로 기도문을 외우고. 자기의 말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천주 신앙을 가르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범우가 순교한 연도에 대해서는 관련 기록의 혼선으로 여러 가지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790년 말 이승훈이〈북경의 선교사들에게 보낸 조선 교회에 관한 보고 서한〉이나,그의 동생 김현우가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법정에서 한 심문 기록. 그리고 김범우의 후손 김동엽(金東曄)의 집에 보관되어 있던 선조들의 기일(忌日)을 적은 장생보록(長生寶錄) 등을 종합해 볼 때. 1786년 여름 서른여섯의 나이로 유배지 단양 땅에서. 옥고의 여독으로 사망 순교한 것으로 여겨진다.
선교 활동의 거점이었던 김범우의 집
김범우의 여덟 형제자매 가운데 그와 신앙을 같이한 사람은 끝의 두 동생인 이우(履禹)와 현우(顯禹)였다. 그들은 큰형 범우와 배다른 형제였고 나이 차도 있었으나. 어릴 때부터 큰형을 믿고 잘 따랐다. 그리하여 이들 두 동생은 큰형의 신앙적 인도를 받아들여, 이승훈으로부터 각기 바르나바와 마태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정식 신자가 되었다.
그러다 '을사 추조 적발 사건’ 이 일어나 큰형 범우가 단양으로 유배된 뒤 그곳에서 순교하자, 이제 막 입교한 어린 나이의 이우와 현우는 큰 충격을 받았다. 비탄과 공포와 정신적 타격으로 그들은 교회 활동에 나서지 못한 채, 다만 숨어서 간절히 기도하는 생활을 열심히 해나갔다.
사건의 충격이 가라앉은 후 서울의 신앙 공동체는 이승훈을 중심으로 활동을 재개하였고, 이러한 움직임에 따라 이우, 현우 형제의 천주 신앙도 다시 불붙게 되었다.
특히 이들은 주 신부가 명도회(明道會)를 조직하자, 그 하부 조직인 ‘육회’ (六會)의 책임을 맡아 중간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최필제, 이용겸, 손경윤, 현계흠, 손준렬 등 열성적 인 중인 신자들과 어 울렸다. 특히 김 이우의 집이나 홍문갑의 집에서 비밀리에 정기적으로 미사나 첨례를 드리며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는데,김이우의 집과 홍문갑의 집이 '육회’ 의 거점이었다.
매월 7일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김이우의 집에 미사에 필요한 물건을 준비하고, 십자고상을 모신 뒤 신부님을 청해 미사를 드렸다. 주문모 신부를 윗자리에 모시고 김이우 형제와 여러 참석자가 줄지어 앉아. 기도를 드리고 강론을 들으며, 교리 공부도 하였다. 집안 여성들은 창밖에서 동참하였는데, 그 수가 하나 둘이 아니었다고 한다.
1801년 신유박해가 본격적으로 벌어지면서 교회의 주요 인물들이 속속 체포되었다. 이우와 현우 형제도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엄한 취조를 받았다.
특히 이우는 그의 집이 정기적인 신앙 집회의 장소였고, 그의 활발한 선교로 많은 사람들이 입교한 사실이 밝혀져 매우 혹독한 악형을 받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곤장을 맞고 숨을 거두었다. 박해자의 기복에 ‘포청장폐죄인'(捕廳杖斃罪人)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이우가 포도청의 취조 과정에서 형리들의 곤장에 의해 타살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순교 날짜와 나이는 알 수 없다.
한편 현우도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 5월 22일(양 7월 2일) 강완숙, 김연이, 강경복, 한신애, 문영인 등 5명의 여자 신자와 최인철, 이현, 홍정호 등 3명의 남자 신자와 함께 서소문 밖 형 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양반이 아닌 중인 가문 출신의 김씨 문중 세 형제는 순교 방법과 시기는 달랐지만, 한국 교회 발전에 잊을 수 없는 공을 쌓았고, 모범적인 신심을 지켰으며, 끝내 신앙을 고수한 순교자들로 오늘날까지 그 이름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