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자연물을 보며 그 안에서 삶의 교훈을 찾아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번에 다룰 시 '가지가 담을 넘을 때'에서도 이러한 면이 드러나는데요. 이시는 가지가 담을 넘어가는 것을 보고 배운 교훈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단, 특이한 점은 '담'이 일반적으로 쓰이는 '장애물'로 기능하기도 하지만 다른 이중적인 의미 역시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담'의 의미를 생각하며 시를 읽고 해석을 통해 학습해보도록 합시다.
가지가 담을 넘을 때 - 정끝별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 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 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친구에게 상처 받았을 때, 애인에게 배신 당했을 때, 세상에 절망했을 때, 가만히 이 시를 읽어도 좋겠군요. 좀 거창하게 말하면, 이 시는 불교에서 말하는 화엄의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 다. '너' 없는 '나'는 존재할 수 없다 는 것이지요. '나'를 둘러싼 모든 것 들이 '너'가 아니라 결국은 온전한 '나'라는 것입니다. '나'를 가두는 담 도 감옥도 '나'라는 것입니다. 시의 마지막 석 줄을 읽고 나니 설렘으로 마음이 출렁입니다. 담을 넘어야 비 로소 이름을 얻는다고 하니까요. 그 게 도박이라 해도 알고 보면 도반이 라 합니다. 느낌표를 하나 꽝, 찍어두 고 싶습니다.
2008.04.14, 문학집배원 안도현 시인의 글.
시는 먼저 가지가 담을 넘을 수 있게 하는 내적인 원동력에 대해 말합니다. 그후 가지가 담을 넘을 수 있게 하는 외적인 원동력에 대해 말하며 미지의 영역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용기와 협력의 가치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고 다른 가지들을 나열함으로써 이 것이 비단 수양가지의 일만이 아님을 표현하며 대상을 확대합니다. 그리고 가지에게 담이 지니는 의미와 가치에 대해 말합니다. 이 시는 가지에게 장애물로 작용했을 것들, 즉 비나 폭설, 그리고 담 자체마저도 가지가 신명 나게 담을 넘는 시도를 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특징으로 앞에서 말했던 담은 특히, 가지에게 담을 넘는다는 것은 성공이 보장되어 있지 않은 위험한 일이지만 애초에 담이 있어서 가지가 그토록 가치있는 일을 시도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중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자음운을 반복하면서 리듬 창출하는 것이 정끝별 시인의 특징. 발음을 부드럽게 하는 유음인 ㄴ, ㄹ,ㅁ, ㅇ을 집중사용하면서 ㄱ, ㅅ, ㅎ 등을 반복 사용하고 있다.
정끝별
1964년 11월 28일 전남 나주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88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시 「칼레의 바다」가,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평론 「서늘한 패로디스트의 절망과 모색」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 『자작나무 내 인생』(1996), 『흰책』(2000), 『삼천갑자복사빛』(2005), 『와락』(2008)을 간행하였다. 정끝별은 리듬과 이미지가 충만한 시정으로 독특한 시 세계를 보여주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패러디에 관한 이론을 체계화하고 우리 현대시에 접목, 해석하여 그 문학적 역할과 의의를 정립한 『패러디 시학』(1997), 시 자체가 가진 무한한 언어의 가능성을 지적하며 열린 비평적 태도에 입각한 『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1999) 등의 평론집이 있다. 그의 평론은 분석 및 해석이 치밀하고 정교하며 텍스트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기반으로 한다는 평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