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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어릴 때 받은 유아세례는 무효이기 때문에 성인세례(成人洗禮)를 다시 받아야 참 신앙인이 된다고 했다. 이와 같이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한다는 주장 때문에 이들을 재(再) 세례파라 불렀다.
그래서 그들은 당시의 그들 외의 모든 기독교인들과 교회들을 모두 명목상의 기독교인 혹은 명목상의 교회들이라고 지칭했다. 진정한 교회는 자기들과 같은 참 교인들만의 공동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하나님의 외적인 말씀과 성례를 성령의 주관적인 내적 경험에 예속시켰다. 이들은 성령이 모든 것을 하기 때문에 외적 말씀의 형식논리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성례의 집례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시민정부를 부인하는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 anarchism)를 주장했다. 그래서 어떤 지역에서는 정부의 요구에 대해 공적으로 맹세하는 것을 거부하는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물론 국가를 위해 군대에 복무하는 것도 거부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극단적인 생각과 행동은 점차 약화되어 후에 네덜란드의 메노 시몬스(Menno Simons, 1492-1559)에 의해 그 정신들이 재정립되어 메노나이트(the Mennonites)라는 종파로 발전했다.
이 같은 재세례파와 같은 급진주의 개혁파들은 특히 칼빈의 종교개혁에 방해 세력으로 등장했으며 칼빈은 그의 대작인 ‘기독교강요’에서 이들의 잘못 된 비(非) 성경적인 가르침에 대해 많은 논쟁을 하고 있음을 우리가 찾아 볼 수 있다.
(2) 혁명적 과격파
재세례파들 가운데는 무력을 동원한 혁명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자들도 있었다. 토마스 뮌쳐(Thomas Müntzer, 1489-1525)가 바로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뮌쳐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계시와 환상 그리고 꿈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교회당 안에서 하나님과 직접 대화를 했다고도 주장했다. 그의 주된 주장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며 그것은 모든 물건을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성취하기 위해 기존의 사회질서를 전복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신명기 3장의 계명을 문자적으로 적용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이로 인해 모든 불경건한 것들은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죽여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그의 운동은 독일의 농민반란(Peasant‘s War)과 합세하여 혁명의 주도적인 지도자로 등장했다. 뮌쳐는 농민들에게 불리하게 행동하는 루터 등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그러나 정부군에 의한 농민전쟁의 진압과 더불어 뮌쳐 자신도 처형당하고 말았다. 뮌쳐의 이 같은 혁명적 개혁사상은 오늘날도 기독교 국가에서 무력을 통한 개혁을 주도하는 자들에게 나타나기도 한다.
6. 영국의 종교개혁
대륙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있을 때 영국은 헨리 8세(Henry Ⅷ, 1491-1547)가 통치하고 있었다. 그는 로마 가톨릭의 간섭을 싫어했기 때문에 영국에서 개신교의 활동에 간접적인 유익을 주었다고 볼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그는 개신교의 교리를 수용하지는 않았다. 이미 영국의 캠브리지대학(University of Cambridge)과 옥스퍼드대학(University of Oxford) 교수들은 루터의 교리를 받아들여 학자들 간에 논쟁을 하고 있을 정도로 개신교의 영향이 영국에 형성되었다.
헨리 8세는 이들 논쟁 중 개신교 반대편에서 개신교를 공격했기 때문에 교황 레오 10세(Pope Leo X)로부터 신앙의 수호자(守護者)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였다. 이는 전통적으로 영국의 주화에 새겨진 국왕을 신앙의 수호자(F.D, Defenser Fidei)로 상기시키는 역사를 만들었다. 헨리 8세와 개신교와의 관계는 그의 교황과의 정치적인 관계와 연류 되어 있었다. 헨리 8세는 형 아서(King Arthur)가 죽은 후에 그의 아내였던 캐서린(Catherine of Aragon)을 아내로 받아들여 교황의 허락을 받는 데 성공했다.
헨리는 캐서린에게서 왕위를 계승할 아들을 낳아 줄 것을 기대했으나 태어난 두 아들은 그만 일찍 죽고 말았다. 이에 헨리는 다시 이혼을 허락해 줄 것을 교황 클레멘스 7세(Pope Clement VII)에게 요청했다. 그는 다른 사람과 다시 결혼하기 위해 자유의 몸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하지 않았다. 교황은 허락 대신에 유보하는 방향으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캐서린은 당시 보름스(Worms)에서 교황 편에 서서 루터를 재판했던 독일 황제 칼 5세(Karl V)의 조카였기 때문이었다.
헨리는 이에 분노하였고 교황의 결정이 있기도 전에 앤 볼린(Anne Boleyn)과 결혼했다. 대신 그는 캔터베리(Canterbury)의 대주교였던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의 허락을 받았다. 왕은 이 보다 더 큰 용단을 내렸다. 그는 이제 스스로를 영국교회의 수장임을 선포하였다.(首長令, Acts of Supremacy, 1534) 그리고 이를 반대한 토마스 모어(Thomas More)와 죤 피셔(John Fisher, 1469- 1535)를 참수했다. 교황권력의 끄나풀이었던 수많은 수도원들을 폐쇄시켰고 교회의 새로운 법령과 국법을 의회를 통해 통과시켰다. 이는 로마 가톨릭에 대한 일종의정치적인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핸리 8세가 개신교에 호의를 보인 것은 아니었다. 교리에 는 여전히 로마 가톨릭의 입장을 고수하였고 이를 어기는 개신교도들을 무참히 처형했다. 헨리의 통치 하에서 이루어진 하나의 개혁적인 공적은 바로 그가 1538년에 영어로 번역된 성경을 전국에서 사용하도록 교구들에게 비치했다는 점이다. 교회를 하루 종일 개방하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성경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물론 순교자 틴데일(William Tyndale, 1494-1536)의 영어성경 번역의 공로가 기초가 되었다.
새 왕비 앤 볼린도 아들을 낳지 못하자 핸리는 다시 제인 세이무어(Jane Seymour)와 결혼하여 에드워드(Edward)라는 아들을 낳게 되었다. 헨리 사후 에드워드 6세(Edward VI of England)는 겨우 9세에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1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영국 왕실에 새로운 정치적인 판도를 가져왔고 이와 더불어 영국의 종교개혁도 영향을 받게 되었다. 다행히도 어린 에드워드 왕의 통치기간 동안(1547-1553) 영국은 종교개혁이 계속 진행될 수 있었다.
그의 외숙부인 서머셋 공작(Duke of Somerset)이 섭정을 했는데 그는 개신교를 옹호하는 사람이었다. 영국의회는 곧 성찬식에 평신도의 참여를 허락했다. 1548년에는 성상(聖像)들을 교회당에서 철수했으며 이듬해는 교직자들의 결혼을 허락했다. 특히 순수한 개신교지도자였던 크랜머의 역할이 있었다. 그는 왕의 섭정 자들과 협력하여 교회에서의 우상을 제거하는 일과 개신교의 입장에 맞도록 공동기도서를 발간했다.
그러나 어린 왕의 죽음은 이러한 개혁운동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만들었다. 개신교도들은 개신교에 우호적이 어서 개혁에 적합한 재인 그레이(Jane Grey)를 왕 으로 세우려고 하였으나 실패했다. 결국 헨리 8세와 캐서린 왕비의 딸이었던 메리가 여왕 (Mary I, 1516-1558)으로 옹위되었다. 새로운 여왕이 된 메리는 노팀블란드를 처형하는 등 개신교의 개혁운동을 포기하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복권을 위한 정책을 시도하였다.(그림 개신교에게는 피의 여왕으로 악명 높았던 퀸 메리)
서머셋 공작은 스코틀랜드와 연합하기 위해 에드워드를 스코틀랜드의 여왕인 메리와 결혼시키려 했다. 이에 분노한 스코틀랜드 인들은 메리를 후에 프랑스 왕이 된 프란시스 2세와 결혼을 시켰다. 그러므로 이에 실패한 서머셋 공작은 섭정 직에서 물러나고 노범벌란드 공 워윅(Warwick)이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영국을 통치하였다.
그녀는 개신교에 대한 박해를 시작했으며 황제 카알 5세의 아들인 스페인의 필립과 결혼했다. 이때 많은 개신교도들은 박해를 받아 대륙으로 피신하였으며 독일이나 스위스로 옮겨갔다. 메리 여왕의 통치기간 동안에 자행되었던 박해에 대해 죤 폭스(John Foxe)는 ‘순교자 열전’이란 책을 통해 기록을 남겼고 그에 의하면 무려 300명의 개신교도들이 화형에 처해졌다. 이때 토마스 크램머도 화형을 당했다. 사실 메리는 헨리 8세의 죽기 전의 상태로 영국을 복귀시키는 정책을 폈다.
메리의 사후(1558년) 그녀의 뒤를 이어 엘리자베스 여왕이 권력을 계승하였지만 그녀는 뚜렷한 종교관이 형성된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결혼을 무효로 만든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원한을 갖고 있었고 메리의 로마 가톨릭 선호 정책에 회의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집권한 후 서서히 개혁을 추진하였다. 1559년에 국회는 수장령(首長令, Acts of Supremacy)을 통과시켜 로마 가톨릭과의 단절을 시도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에드워드 6세의 공동기도문을 정정했는데 특히 교황의 권위에 대한 반항적인 내용을 삭제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양면 정책을 썼다. 엘리자베스는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여러 가지 갈등 가운데서 이의 해소를 위해 지금까지 사용해 온 양편의 공동기도문을 수정하여 39개 신조로 영국교회의 신앙 진술의 공식적인 고백문을 완성하여 개혁을 마무리하였다. 그러자 메리 여왕 때 피신을 갔던 개신교인들이 다시 엘리자베스 통치기간 동안 돌아왔지만 영국의 종교개혁은 대륙에서보다 훨씬 더 정치적이었기 때문에 루터나 칼빈과 같은 개혁자들은 나오지 않았다.(*) 글쓴 이 / 심창섭 (목사/교수) 출처 / 기독교 교회사(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2004년) < 다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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