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사도행전 4장 23-26절『사도들이 놓이라고 찬양한다. 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그들이 듣고(아쿠산테스)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아쿠산테스(ἀκούσαντες 아오리스트 시제:순간 들었다)는 사도들의 말을 들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다. 그런 후에 사도와 동료들이 호로고스께 예언적인 기도를 합심해서 하는 것이다. 호로고스는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라고 찬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시편 2편 1-2절을 인용하여 말하고 있다.『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하나님께서 시온산에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을 다스릴 왕으로 임명한다. 그런데 세상의 왕들이 모여 하나님의 계획을 거역하기 위하여 모여서 반역을 모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 왕들은 너무나 초라하고, 유치하다. 숫자는 많아 보이고, 온갖 무기를 갖춘 듯하나. 세상을 창조하신 위대하신 하나님께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이 무능하고 어리석다. 세상 사람들과 왕들의 어리석은 도전에 하나님께서 분노를 나타내시며, 엄위하신 명령을 내린다. 당장에 무릎을 꿇고, 내가 세운 왕에게 입 맞추고 엎드리는 자들은 용서와 은혜를 베풀겠지만, 그렇지 않는 자들은 질그릇을 깨뜨리듯이 심판하시겠다는 것이다.
이 상황 속에서 세상의 왕들과 재판관들을 향하여 심판을 피하고, 항복할 것을 권면한다.『너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왕, 그의 아들에게 입 맞추고 항복하면, 즉 무기를 버리고, 하나님께 나오는 자(피하는 자)는 복을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 왕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은 세상 왕들의 연합이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이길 수 없으며, 역사와 우주를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며, 그 방법은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다스리신다는 것이다.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마치 바벨탑을 쌓았던 인간들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A.I.와 같은 현대 과학 기술과 지식이 마치 모든 것을 대신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은 채 일상의 세속적 삶에 매몰되어 있다. 그들은 애써 하나님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무시하려 들고, 현세의 쾌락과 편리함에 빠져든다. 또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긴 하지만, 마치 하나님을 자신들의 자유와 즐거움을 얽어매는 거추장스러운 분으로 여기고 있다.
마치 어린애들이 자기 생각에 갇혀 떼쓰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하려 하고, 반항하려 든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을 때 대부분의 군중들은 그를 멸시하고, 외면하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이기까지 하였다.
하나님의 심판은 엄중하며, 애써 외면할 지라도 결코 피할 수 없다. 성경은 분명히 선포하고 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였다. 지금이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께 돌아오면 복을 얻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가는 길에서 멸망하게 될 것임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여전히 하나님의 관용과 은혜는 남아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의 이 경고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돌이키는 사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부활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에게 나아오는 사람은 하늘의 복을 누린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내 속의 옛사람(탐욕)이 죽고, 자기를 부인하고, 세상 권력과 재물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자기 인생의 피난처로 삼고 겸손히 나아오는 사람에게는 복을 받게 될 것이다.
복은 하늘의 복으로서 부활생명을 의미한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게 되는 것이 복이 된다. 오늘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예수를 믿는다고 말을 하면서도 현재적 부활의 복음을 믿지 않는 자들이다. 예수님 당시에 사도들을 잡아가둔 자들 역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을 했던 유대 지도자들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현재적으로 살아있을 때, 부활생명을 주시겠다고 하시는데, 마치 많은 교회 공동체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허사를 경영하는 것과 같이 비유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왜 현재적 부활을 믿지 못하는가? 육체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육체가 죽은 후에, 죽은 육체가 부활한다고 믿으므로, 허사를 경영하는 것이다. 영적으로 죽었던 영이 살아나서, 영의 몸을 입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우편에 성도가 있게 된다고 말을 하는데도, 영적인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우편에 앉는다는 말은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여기는가?
초대교회 당시에서 사도들이 예수의 부활을 전했을 때, 유대교 지도자들은 극도로 예민했다. 왜 그들은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했는가? 부활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처음 말한 것도 아니다. 구약성경에서도 부활에 대해서 많은 선지자들이 직접 또는 비유로 말을 한 바가 있다. 그런데, 유대 지도자들은 오직 율법주의에만 가로 막혀서 복음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 지도자나 신도들이 육체적 부활을 믿는 원인 중의 하나가 사도신경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판단된다. 사도신경으로 몸이 다시 산다고 고백하므로, 마치 사도들이 이렇게 신앙고백 했다고 말하지만 그 증거는 없는 것이다.
서방교회에서는 최초로 라틴어 사도신경의 본문을 작성하고 거기에다 주석을 덧붙인 사람으로 루피누스가 있는데, 그가 404년에 소위 루피누스의 신조를 작성하였다. 이 신조는 아퀼레이아 교회에서 사용되었다. 오늘날의 사도신경 본문이 확정된 것은 7-8세기로 본다. 사도신경이라는 이름이 처음 사용된 것은 AD 390년 암브로시우스의 글에서였다. 그리고 이것을 범교회적으로, 범국가적으로 사용하게 한 것은 샤르망(742-814)대제 때였다. 사도신경은 모든 신조와 신앙고백 가운데서 역사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신조이다.
사도신경 내용 중 문제를 삼을 수 있는 몇가지가 있으나, 가장 핵심은 몸이 다시 사는 것이다. 사도신경은 몸이 다시 산다는 말을 부활과 적용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려주셨다. 죽었던 나사로를 살려주셨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셨으며,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 주셨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첫열매라고 한다. 이전의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것은 부활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부활은 부모로부터 받은 육체가 다시 사는 개념이 아니라, 그 육체는 흙으로 사라지고, 죽었던 영이 일어나서 하늘로부터 오는 영의 몸을 입는 것이 부활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도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하늘에 앉히신바 되었다고 에베소서 2장 5-6절에서는 말하고 있다.『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이 말은 현재 부활에 참여한 자들이 이렇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