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조연현 기자가 쓴 '나를 찾아 떠나는 17일간의 여행' 이라는 책을 하겠는데, 이 기자가 직접 전 세계의 참선 수련장을 다니면서 기록한 글인데, 그것을 통해서 인간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그것을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여기에 책에 보면 먼저 '진지함'이 나오는데, 이런 진지함의 반대말이 경박스러움이고 말이다. 사실은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경박스러운데, 특히 요즘 젊은 사람들은 진지함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그냥 살면 사는 것이지, 도대체 진지하게 산다는 것이 어디 있기는 있는가?" 라는 것이다.
◈ 인간은 언제 진지한가?
그런데 옛날에는 진지하게 살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 생계문제와 관련이 되어있는데, 즉 "식구는 많지요, 먹는 것은 없지요"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을 때, 그때에 사람들은 "인생은 무엇인가?" 라고 하면서 자기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노숙자나 외국 불법노동자들처럼 생계의 위기를 느끼지는 않는데, 다만 남들이 하는 것을 자기가 차지하지 못해서 안달을 내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런데 남들이 하는 것이 자꾸만 변하니, 그래서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한다는 말이다. 그것을 '촐삭댄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아무튼 그렇게 경박스럽다는 것이다.
그것을 옛날사람은 '겸손하다' 라고 했는데, 즉 인생을 참으로 겸손하게 산다고 말이다. 어떻게 보면 이런 표현은 상대방을 모독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당신은 참으로 겸손해!" 라고 하는 것이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유행처럼(?) 되었는데, 자기를 찾아서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렇게 살아가는 인간의 그 마음 밑바닥에 무엇이 있느냐는 것인데, 그야말로 경박하고 촐삭대는 그 마음, 일종의 파도가 치는 것인데, 도대체 그런 마음의 저 깊은 심연에는 어떤 마음이 담겨있느냐는 것이다.
◈ 먼저, '정토 수련원'을 !!
아무튼 이 책에서 제일 처음 나오는 곳이 바로 '정토 수련원' 이라는 것인데, 아마 경북 문경근처에 있는 것 같은데, 이곳에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는 것을 질문함으로서, 평소에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작업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데, 촐삭거리는 경박하고 파도와 같은 그 마음을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파도치는 촐삭거리는 마음이 어디에서 나오는고 하니,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에서, 거기에서부터 파도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파도가 치는 하나 하나의 봉우리를 두고서, 과연 어느 봉우리가 자기의 모습인지 찾아간다는 말이다.
지금부터 이 책에 나오는 글을 하나 소개하겠는데, 상당히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 A : 박은영씨?
* B : 예.
* A : 당신은 누구십니까?
* B : 박은영입니다.
* A : '박은영' 이란 글씨가 당신입니까?
* B : 아닙니다.
* A : 그러면 당신은 누구십니까?
* B : 예, 몸입니다.
* A : 그러면 어릴 때 몸과 지금의 몸이 다른데, 어느 것이 당신의 진짜 몸입니까?
* B : ? ? ?
* A : 당신은 누구십니까?
* B : 세 아이의 엄마입니다.
* A : 만약에 두 아이의 엄마라면 당신이 아닙니까?
* B : ? ? ?
* A : 당신은 누구십니까?
* B : 마음입니다.
* A : 그러면 어제 마음은 어디로 갔습니까?
* B : ? ? ?
그렇게 어제의 마음이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하면, 지금 박은영씨의 마음은 도대체 어디에서 생겼느냐고 묻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답변이 없으니, '깨장(?)'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이 깨장은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사회자를 줄여서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깨장은 자꾸만 물어서 그만 상대방이 할 말이 없어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이 깨장이 '노수진' 이란 분에게 묻는데,
* A : 노수진씨?
* B : 예.
* A : 당신은 누구십니까?
* B : 노수진입니다.
* A : 노수진이 당신 이름이 맞습니까?
* B : 예, 맞습니다.
* A : 그러면 그 '노수진' 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으면 당신이 아닙니까?
* B : ? ? ?
이렇게 상대방이 답변을 하지 못하도록 질문을 계속해서 하는데,
* A : 다시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 B : LA에서 살고 여기 깨달음의 장에 온 사람입니다.
* A : 그러면 LA에서 살지 않고 여기에 오지 않으면 당신이 아닙니까?
* B : 그렇지 않습니다.
* A : 그러면 당신은 누구십니까?
* B : 한 남자의 아내입니다.
* A : 그 남자의 아내가 아니라면 당신이 아닙니까?
* B : ? ? ?
◈ 나는 누구인가?
그러니 "내가 누구인가?" 라고 질문을 할 때, 사람들은 선뜻 자기가 누구인지 직접적으로(?) 대답을 못하고 자꾸만 다른 곳에서 빌려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정토 수련회 사회자는 그렇게 대답을 할 때마다, 자꾸만 그것을 끊고 끊어버린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을 찾기 위해서 파도를 살펴보는데, 그것이 바로, "LA에 살고, 세 아이의 엄마이고, 자기 남편은 누구이고" 라는 것인데 말이다. 그런 방식으로 그것들을 끌어와서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에다 채우니까, 정토 수련회 사회자는 그런 것들을 잘라내 버린다는 것이다. 심지어 '노수진' 이라는 이름조차도 말이다.
그렇다면 몸인가? 하지만 몸도 과거의 몸과 지금의 몸이 역시 다르다는 것이다. 아니라면 마음인가? 하지만 지금의 마음은 어제의 마음에서 인수된 것인데, 그러니 어제의 마음에 어떻게 흘러와서 오늘의 마음이 되었는지, 그것을 답변해보라는 것이다. 즉 어제의 마음은 어제의 용도이지, 오늘 용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 '김광훈' 이라는 불교신자가 있다고 하면, 다시 질문에 들어가는데, 그런데 이 양반은 앞에서 한 말을 다 들었기 때문에 자기는 뭔가 다른 답변을 준비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을 집단참선이라고 하는데, 개인참선은 혼자서 벽을 바라보고 하든지 하면 되는데 말이다.
◈ 집단참선의 경우에 !!
하지만 이 집단참선은 어떤 효과가 있는고 하니, 다른 사람들이 대답하는 것을 보고는 "저런 대답은 누구든지 다 하는 것인데" 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을 비판할 수가 있는데, 바로 그런 것을 노린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이 대답을 할 때는 다른 사람들이 또 보게 하고 말이다.
그렇게 질문을 해보면, 정작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상태지만, 하지만 남을 비판하는데는 달인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되풀이하면 결국 무엇인고 하니, 정작 중요한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은 잡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런 기회를 본인이 부여하지 않는데 말이다.
예를 들어서, 학원을 그만 둔 선생님이 있다고 한다면, 그 선생님이 "내가 누구인가?" 라고, 즉 자기를 찾기 위해서 그만 둔 것이 아니기에, 그래서 다시 촐삭거리면서 경박스럽게 자기 일자리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 체인지 파트너 ??
그러니 정작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은 자꾸만 놓치고, 외부에서 엉뚱한(?) 것을 수입해서 채우게 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다" 라고 해서 또 다른 것을 수입해서 채우게 되면, 그것은 또 다시 다른 곳으로 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나이트클럽에서 파트너를 바꾸듯이 말이다. '체인지 파트너' 라는 팝송도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다음에 또 무슨 사건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이것이 자꾸만 되풀이가 되니, 그것은 '나'를 자꾸만 비켜 지나간다는 것이다. 마치 한 곳에서 사진을 계속해서 찍게 되면, 분명히 굴뚝은 한 자리에 그대로 있는데 구름이 엄청나게 빨리 지나가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는 말이다.
◈ 이게 뭡니까? 이게 !!
그렇게 인생이라는 것이 '나'는 그대로 있는데, 그런데 유학을 갔다가 그만두고, 결혼을 했다가도 그만두고, 사업도 했다가 그만두고, 그리고 파프리카도 재배했다가 그만두고 말이다. 즉 '나' 라는 굴뚝은 그대로 있는데 구름은 마구 지나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가 나이가 들면 결국에는 굴뚝은 허물어지는데, 즉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그러니 도대체 이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촐삭거리고, 경박스럽고 말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불교를 좀 공부했다고 하는 김광훈씨에게 묻는데,
* A : 당신은 누구십니까?
* B : 김광훈입니다.
* A : 그러면 김광훈은 누구입니까?
* B : 예, 업(業)입니다.
* A : 그 업이 없으면 당신은 당신이 아닙니까? 당신은 누구십니까
* B : 많은 사람이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 A : 그럼 지금 인연을 맺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있다고 하면, 그러면 당신은 당신이 아닙니까? 그러면 당신은 사라집니까?
* B : 그렇지 않습니다.
* A : 그러면 당신은 누구십니까?
* B : ? ? ?
아무튼 그래도 이 양반을 불교를 조금 공부를 했기에, 인생이란 모든 업들이 모여서 현재의 자기를 이루고 있다고 하고, 또 인연을 이야기하면서 나름대로 답변을 해보지만, 그러나 결국은 답변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번에 '정재용' 이라는 사람이 가방을 들고 오니 질문을 하는데,
* A : 정재용씨?
* B : 예.
* A : 이 가방은 누구의 것입니까?
* B : 저의 것입니다.
* A : 정말로 당신의 것입니까?
* B : 예. 제가 돈을 주고 샀습니다.
* A : 그렇게 돈을 주고 사면 당신의 것입니까?
* B : 예, 그렇습니다.
* A : 그러면 저 하늘의 해와 달도 돈을 주고 사면 당신의 것이 됩니까?
* B : ? ? ?
이것은 깨장이 무엇을 요구하는고 하니까, 아까는 '나' 라고 하는 주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것이고, 지금 여기서 말하는 것이, 이 '가방' 이라는 사물을 들면 그것은 소유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자기의 소유는 자기 것임을 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무슨 뜻이지 알겠지요? 즉 자기도 모르면서 어떻게 자기 것은 아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가방의 경우에, 가방을 가지고 있어서 자기 것이라고 한다면, 만약에 빼앗기면 누구 것이 되느냐는 말이다. 또 가방을 이용한다고 해서 자기 것이라고 하면, 그렇다면 그 가방을 다른 사람이 이용하면 과연 누구의 것이 되느냐는 것이다.
* A : 정재용씨?
* B : 예.
* A : 이 가방은 누구의 것입니까?
* B : 저의 것입니다.
* A : 왜 당신의 것입니까?
* B : 예. 제가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 A : 그러면 만약에 제가 이용하면 제 것입니까?
* B : ? ? ?
이것이 중요한데, 돈을 주고 산 자가 그 물건의 주인이 되는가? 아니면 사용한 자가 주인이 되느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남편이 아내를 만났을 때, 남자는 보통 여자를 자기 소유로 여기는데, 그런데 그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가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여전히 아내인가? 아닌가? 그리고 아내가 친정에 가버리면 누구의 소유가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깨장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가 아무리 돈을 주고 구입을 해서 사용하더라도, 그 가방은 역시 가방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그 가방은 남의 소유물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그 가방의 마음을 묻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 가방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당신은 누구의 소유인가요?
사실은 여자의 경우에도, 결혼을 해서 남자의 소유물이 될 마음이 전혀 없고, 오히려 남자를 자기의 소유로 삼으려고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 놈의 남자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내 여자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왜 사람을 볼 때, 여자면 그냥 여자로 보면 되는데, 그렇지 않고 누구의 소유인지를 물으면서, 그 사람을 보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한국대표팀이 한 골을 넣으면, 그냥 '1:0' 이라고 말하면 되는데, 왜 누가 넣었는지를 묻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고 물어보는데,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상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이것과 관련해서 재미있는 것이, '자책골' 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누가 넣었는가? 분명 상대방이 넣은 골인데, 그런데 그 자책골을 유도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것을 반드시 물어서 그 공로를 주어서, 자꾸만 영웅을 만들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왜 나타나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 존재의 정당함을 계속해서 찾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즉 자기가 지금 이렇게 여기에 존재하는 것은 누가 봐도 정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자기를 죽이면 벌을 받는다는 말이다.
◈ 혹시 '뮌헨' 이라는 영화를?
혹시 '뮌헨' 이라는 영화를 아는지 모르겠는데, 실화를 소재로 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작품인데 말이다. 그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1972년 그 이름도 유명한(?) 검은 구월단이 베를린 올림픽 때 이스라엘 선수단을 습격을 해서 11명의 인질을 잡고 자기 동료 200명을 풀어달라는 조건을 걸게 되는데, 결국은 자신들과 인질들도 다 죽게 되지만 말이다. 그런데 검은 구월단을 보낸 상부조직을 이스라엘 정보부가 일일이 찾아내어서 모두 죽여버린다는 것이다. 1979년까지 7년이나 결려서 말이다.
젊은 사람들은 거의 이 영화를 보지 않았지 싶은데, 별로 재미가 없어서 말이다. 그래서 이런 영화가 있었는지도 잘 모르고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재미로 보는 영화가 아닌데, 이 영화의 주제는 도대체 인생의 근본이 무엇으로 짜여져 있는지, 그것을 탐구하는 영화인데, 그것이 바로 '원한(怨恨)' 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검은 구월단과 이스라엘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일부 돌출된 것에 불과하고, 제 아무리 행복한 가정이고 안정감이 있는 직장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을 그렇게 움직이게 하는 근본적인 동기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원한' 이라는 말이다.
◈ 인생의 추진력은 '원한' !!
우리나라의 '서편제' 라는 영화도 역시 이런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자기 딸에 자꾸만 득음(得音)에 실패를 하니, 아버지가 어떻게 하는가? 그만 독약을 먹여서 봉사를 만들어버리는데, 그렇게 되니 그 딸이 한(限)을 품게 되는데, 즉 자기 인생을 누가 이렇게 앞도 보지 못하도록 힘들게 만들어버렸냐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득음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인생' 이라는 것이 이렇게 힘이 들지 않고 한이 맺힌 것이 없으면, 마치 로켓이 추진력이 없으면 발사가 되지 않듯이 말이다. 그렇게 인간은 힘이 들지 않으면 앞으로 돌진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원한이 없으면 의미 있는 행동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 원한이 성장을 가져오고 진보를 가져오고 발전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보다 발전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사회주의는 평등을 주장하지만, 자본주의는 원한을 양상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점수를 매겨서 1등과 2등과 꼴찌를 구분한다는 말이다. 즉 "너는 대가리가 나빠서 서울대학도 안 되지? 내 아들은 갔는데"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원한을 자꾸만 키우는데, 그 원한이 쌓여서 폭발하면 그게 추진력이 되어서 사회가 발전하니 말이다.
그래서 직장생활을 아주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는 배후에 열등의식이 있을 수가 있는데, 즉 "앞으로 두고봐라" 라는 식으로 말이다. 평소에 하고 싶은 욕도 자제하면서, 그렇게 광적으로 일에 매달리는 사람은 평소에 치유되지 않은 원한이 마치 마그마처럼 마구 들끓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분출하는 방식의 하나로서 그렇게 일에 매달리는 것이란 말이다.
모든 인간에게 이런 원한이 다 있는데, 이런 원한이 없으면 진지함이 나오지 않고 촐삭됨이 나오는데, 젊은 아이들의 노래가 그렇다는 것이다. 이들의 노래는 원함이 없이 그냥 즐기는 것이고, 그러나 나이가 좀 든 사람들이 부르고 듣는 흘러간 노래를 들어보면, 원한이 맺혀있다는 것이다. "일본놈, 너거들 두고보자" 라는 식으로 말이다.
◈ 요즘 젊은이들이 왜 퇴폐에 빠지는가?
지난 월드컵에 붉은 악마가 등장해서 500만이 거리로 나가서 응원을 했는데, 여기에 대해서 7080세대는 굉장히 좋게 보고 환호를 했는데, 그들은 원한에 쌓여있던 세대로서(아닌데, 5060세대가 아닌가?)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어떠한가? 이러한 원한이 없고, 위쪽 동네와 아래쪽 동네가 안정관계에 들어가니 그만 사람들이 퇴폐에 빠진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사회의 외부의 충격으로서 그런 원한이 주어지지 않으니, 스스로 자기의 원한을 만들게 되는데, 그래서 술과 마약을 하면서 그렇게 몸부림을 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만들려고 하니 엄청 힘이 든다는 것이다. 요즘 젊은 세대들이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50대나 60대 세대는 아예 사회자체가 그들을 조져놓았다는 것이다. 지금의 대표적인 보수논객인 이문열의 경우에, 열심히 해서 서울대학에 들어갔지만 사회가 그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는데, 물론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는 가족들의 문제지만 말이다. 아무튼 학교도 그만 두었다는 것이다.
물론 황석영이나 김지하씨도 그러한데, 이 사회가 이들을 얼마나 괴롭혔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젊은 아이들이 하는 짓을 보면, 사는 것도 아니고 노는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완전히 개판인데, 그런데 드디어 붉은 악마가 등장하니, 드디어 힘의 집결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 인간은 뭔가 맺힌 것이 있어야 !!
이것이 '뮌헨' 이라는 영화의 주제인데, 즉 원한이 있을 때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완벽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게 되는데, 이 이스라엘이란 나라는 누가 건드리면 바로 항상 터지게 되어있는데, 세계평화이고 나발이고 없다는 것이다. 즉 원한으로 인해서 완벽한 힘의 집결을 이루게 된다는 말이다.
이 이스라엘에 가면 '통곡의 벽' 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런 것이 있어야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유지가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인간은 통곡을 해야 되는데, 그것이 시편에 나오는데, 시편의 모든 내용이 다 통곡이고 원한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주께서는 우리의 복수를 해주시는 하나님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의 개념이 결국 무엇인고 하니,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인간의 원한을 갚아주는, 그런 복수의 신이 될 때, 그러한 신이 바로 우리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힘이 되는 신이라는 말이다. 그냥 장난 삼아(?) 믿는 신이 아니라, 자기에게 구체적으로 힘이 되는 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보면, 최근에 찍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스필버그 감독이 지금은 폭파되어 버리고 없는 미국의 쌍둥이 빌딩을 화면에 등장시키는데, 2시간 40분 짜리 영화인데, 제일 마지막 장면에 말이다. 아마 그 쌍둥이 빌딩이 그런 원한의 총화(?)가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 아이쿠, 어서 오세요 !!
지금 새로 오신 분이 있어서 다시 정리를 한번 해보겠는데, 수학강사를 하시는 분인데, 칠곡에 살고 있는데 말이다. 우리도 복습 삼아서 다시 한번 더 해보면, 제일 처음에 나오는 '정토 수련원'에서 하는 것은,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묻는 것은, 정작 자기 자신은 없는데, 그런데 외부에서 자꾸만 수입한 것을 가지고 자기를 만든다는 것이다. 분명히 자기의 것이 아닌데 말이다.
예를 들어서, 누구의 아내라든지, 누구의 엄마라든지, 어디에 산다든지, 심지어 자기 몸이나 마음이나 이름도 그렇고 말이다. 그렇게 자기 것이라고 우기고 싶어서 결국 제대로 답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 거기에 대해서 답변도 하지 못하면서도, 그래도 끊임없이 설치는데, 자기에 대한 허무감을 채우기 위해서 말이다.
거기에 대해서 제가 영화 '뮌헨'을 언급하면서, 즉 인간에게는 '원한' 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 원한이 자기를 움직이게 하고, 또한 사회가 발전하는 동기유발이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원한이 없으면 사회가 그만 퇴폐적으로 흐르고 말이다.
◈ 둘째로, 인천의 '용화선원 시민선방'을 !!
이제 두 번째로 살펴볼 곳이 바로 그러한 인간의 원한을 끊어버리자고 하는 곳인데, 인천의 '용화선원 시민선방' 이라고 말이다. 이곳도 역시 깨달음을 추구하는 곳인데, 여기서는 아예 '나' 라고 하는 그 자체를 없애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만 남는고 하니, 순간적으로 성공한 것으로 재조합을 하게 되는데, 그런 조합으로 뭉쳐진 자기 마음을 바로 알게 되면, 즉 인간에는 마음이 세계가 있는데, 그 마음의 세계에서 빠져 나와서 '나' 라고 하는, 따로 자기만의 것을 조합을 했다는 것이다. (??)
이렇게 마음의 세계를 빠져 나오니, 원래 마음의 세계는 부드러운 곳인데, 이 마음의 반대말은 물질이나 권력과 힘과 같은 것을 의미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물질과 권력과 힘을 추구하다보니, 여기서 번민이 생기고 불안이 생기더라는 말이다.
◈ 아, 무심의 세계로 !!
그래서 이 인천의 '용화선원 시민선방'에서는 어떻게 하는고 하니까, 무심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면, 즉 넓고 넓은 마음의 세계로 들어가면, 이 '나' 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 불거져 나온 혹과 같은 것임을 깨우쳐서 모든 마음의 고통을 다 버리고, 결국에는 청정하고 깨끗한 마음만 남게 되는 훈련을 받는 곳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 참선체험 프로그램에는 불교 신자들뿐만이 아니라 신부와 수녀와 목사들까지도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 그러면 원한은 어디에서 오는가?
아까 이야기한 '원한'을 다시 해보면, 그 원한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설명하지 않아서 말이다. 인간에게는 알 수 없는 분노와 원한이 있는데,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지 말이다. 이것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데, 그래서 아이들도 젖을 빨리 안 주면 운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분노인데,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원대로 제대로 안 되면 분노가 쌓인다는 말이다.
◈ 과연 '가정'이 있기는 있는가?
지금부터 어렵고도 중요한데, 잘 한번 들어보라는 것이다. 제가 먼저 질문을 하나 하겠는데, 가정이란 것이 있는가? 꼭 제가 깨장이 된 것 같은데(ㅋㅋ), 집에 가면 아버지도 있고 어머니도 있고, 그렇게 있는데, 그러나 사실 이 '가정'은 상징으로만 있지 실체는 없다는 것이다.
마치 '대학교' 라는 것이 상징인 것과도 같은데, 왜 그런고 하니, 캠퍼스가 있고 교수가 있고 학생은 있지만, 이러한 것들이 합쳐서 '대학교'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대학교' 라는 것은 실체는 없고, 상징만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좀 쉽게 이해가 되는데, 그런데 가정은 더 어렵다는 것이다. 가정은 없는데, 그런데 아버지가 가장으로 상징성을 가지는데, 그러니 아버지가 없는 가정은 소위 '결손가정' 이라고 하는데, 즉 뭔가가 문제가 좀 있다는 말이다. 마치 기어에 톱니바퀴가 빠진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있는 가정에서는 아버지가 말하기를 "모두 밤 11시까지 집에 들어오너라" 라고 하면, 즉 아버지라는 가장이 상징으로서 법을 만들어내는데, 이 상징의 특징이 법을 만드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아들놈이 그만 11시 40분에 왔다고 하면 그만 법을 어긴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아버지와 아들 !!
* 아버지 : 늦어도 밤 11시까지 들어오너라.
* 아 들 : 예. 알겠습니다.
* 아버지 : 어, 왜 11시 40분에 들어왔지?
* 아 들 : 친구들하고 놀다보니 좀 늦었습니다.
* 아버지 : 그러면 법을 어겼잖아?
* 아 들 : 왜 좀 어기면 안 됩니까?
* 아버지 : 안 되고 말고.
* 아 들 : 그것은 가정의 법이라기보다 아버지 혼자만의 법이 아닙니까?
* 아버지 : 너는 가정의 질서를 무시하는가?
* 아 들 : 아닙니다.
* 아버지 : 아니면 왜 그렇게 하나?
* 아 들 : 그런데 어제는 아버지가 11시 40분에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 아버지 : 그래? 그렇다면 법을 수정해서 밤 12까지로 한다.
* 아 들 : 완전히 아버지 마음대로이네요.
* 아버지 : 그러니 내가 이 집의 가장이지.
* 아 들 : ? ? ?
그러므로 결국은 이러한 '법' 이라는 것이, 상징적인 인물로 간주되는 사람이 자기가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법을 만든다는 것이다. 모든 법이 다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결국은 바로 이러한 법 때문에 가정이 깨어지고, 또한 국가도 그렇게 깨어진다고 보는데, 왜냐하면 국가도 일종의 상징이니까 말이다.
◈ 원한은 법을 지키지 않음으로서 !!
그런데 여기서, 아버지가 그렇게 12까지 들어오라고 했는데도 그 아들은 그 말을 듣지 않고 12시 20분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원한이 발생하는데, 그래서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는 다른 자식들보다 상속을 좀 적게 해준다든지, 아니면 손자를 낳으면 두 번 앉아줄 것을 한 번만 앉아준다든지,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 모든 관계에 있어서 이런 원한관계가 마치 거미줄처럼 꼬여있는데, 모든 것이 다 그렇다는 말이다. 본인이 상징적인 존재로, 즉 신화적인 영웅으로 항상 군림을 하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가 나름대로 법을 만들고 이 법에 의해서 다른 사람들이 준수하도록 기다린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 가정에 밤 12시에 들어오라는 법이 있으면, 그러면 옆집 아이에게는 그 법이 적용되는가? 그 가정에는 그런 법이 없으면 당연히 상관이 없는데, 그런데 아버지는 뭐라고 하는가? 옆집 아이가 밤 12시가 지나서 들어오면, 그것을 보고 그냥 지나가지 않고 자기 식구들에게 뭐라고 하는가? "저 옆집 자식놈은 밤 12시가 지나서 집에 오는 법을 어긴 나쁜 놈이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내가 진작 그럴 줄 알았지 !!
그런데 그러다가 그 옆집 아이가 어느 날 자기에게 인사를 하지 않으면, 그 아버지의 입에서 당장에 튀어나오는 말이 무엇인가? "내가 그럴 줄 알았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그렇게 법을 어기는 나쁜 놈이니 인사를 하지 않는고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것들이 다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자기가 만든 법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데, 즉 자기가 만든 법을 어겼다고 해서 그 아이에게 보복을 한다는 것이다. 인사도 할 줄 모르는 나쁜 놈이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사를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데 말이다.
◈ 원한관계가 전 세계에 거물망처럼
이러한 것이 바로 원한관계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이러한 것이 지금 전 세계에 거물망처럼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이다. 원한관계가 말이다. 매사 다 그러한데, 그러니 사람을 만나도 서로가 서로에게 자기 법을 지킬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상징적 존재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게 인간은 해서 자기가 법을 만들게 되고, 또한 그 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분노와 원한을 만들고 쌓이게 해서 복수심에 불타고, 그러한 복수심은 마침내 행동에 나서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얽히고 얽혀있는 사람들의 관계라는 말이다.
◈ 셋째로, '천도교 시천주 수련'에 대해서 !!
여기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해결책이 있을 수가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 넷째로 나오는 '천도교 시천주 수련'에 대해서 먼저 하겠는데, 그들은 "시천주 조화정…"으로부터 시작되는 주문을 되풀이해서 외우는데, 천도교의 교리를 말이다.
여기서는 인간의 원한관계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는고 하니, 원한이 행동하는 원동력이 되는데,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한번도 제대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을 원한으로 푼다는 말이다. 아름답고 고귀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남에게 베풀 줄도 모르고 말이다.
◈ 나의 한울님이여 !!
그래서 여기에서는 부부가 같이 왔으면 먼저 남자가 여자에게 큰 절을 하는데, 아버지가 자식에게도 큰 절을 하고, 또한 꽃에게도 절을 하고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자기를 제외하고 모든 것이 다 어른이라는 것이다. 즉 기존의 이 세상적인 사고방식을 완전히 역으로 엎어버린다는 말이다.
그런데 남편에 아내에게 절을 하면서 뭐라고 하는가? "나의 한울님이여!" 이라고 하는데, 수련원이니 계속해서 반복을 하고 말이다. 즉 마누라에게 "한울님, 이제 오십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까 말한 정토 수련원에서는 숟가락으로 서로에게 떠서 먹여주는데, 물론 처음에는 음식을 흘리고 하면서 잘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평생을 자기 숟가락으로 자기가 먹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해서 자기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한울님으로, 즉 하나님으로 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 속에는 하나님이 다 계시니 말이다. 그것이 바로 천도교의 교리인데, 즉 '인내천(人乃天) 사상' 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곧 하늘이고, 하늘이 곧 인간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원한이 없어지는데,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을 푸근하고 아름답게 볼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스트레스를 풀고 마음의 병을 고치는 것이 바로 천도교의 '시천주 수련' 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장사를 해도 공짜로 마구 먹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연구를 많이 해서 한다는 말이다.
◈ 하느님, 오늘도 학교를 잘 갔다 오셨습니까?
그렇게 서로서로 하느님이라고 해주면 좋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자식에게도, "야, 이 놈아!" 라고 하지 않고, "하느님, 오늘도 학교를 잘 갔다 오셨습니까?" 이라고 하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말이다. 그렇게 하면 무슨 원한이 생겨서 그렇게 아둥바둥하겠느냐는 것이다.
* 질문 -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도 원한이 생길 수 있지 않나요?
물론 그러한데, 자식에게 그렇게 해도 자식의 반응이 시원치 않을 때 말이다. 그러면 당장에 "이게 왜 이래? 내가 이렇게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아나?"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이전보다 더 폭발력이 강한 폭탄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 책에 보면, 이렇게 해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간증이 적혀있는데, 그 이전에는 병든 시어머니에게 마구 짜증을 내고 했는데, 수련회에 갔다와서는 하느님처럼 보이고, 또 시어머니가 아무리 심한 소리를 해도 모두 다 하느님의 음성으로 들리게 되었다고 한다는 말이다.
◈ 넷째로 '위빠사나' 수련법 !!
그 다음에 네 번째로 '위빠사나' 인데, 이것은 석가모니가 부처, 즉 '깨달은 자'의 경지가 될 때 행했던 수행법을 그대로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호흡할 때 들쑥날쑥하는 자기 배를 한 시간동안 뚫어지게 보는 것이라든지, 혹은 10m 거리를 10분 동안이나 걸리도록 서서히 걸으면서 자기 발을 집중적으로 바라보는 수행법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하게 되면, 그 동안 자기가 너무나도 외부에 휩쓸려서 빠르게 살았는데,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를, 즉 왜 그렇게 빨리 살았는지, 도대체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모르고서 말이다. 그렇다면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지만 여기에 대한 해답이 있는 게 아니라, 그렇게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라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고 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사업을 하든지 무엇은 하든지 간에 과속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자기를 살펴가면서 하게 되고, 또한 가정에 무슨 일이 있고, 또한 아이들을 야단을 치더라도 다시 한번 더 생각을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즉 이런 석가모니의 참선법을 배워서 이제는 더 이상 촐삭거리지 않고, 경박스럽지 않게 살아가게 되는데, 물론 이렇게 수련을 받으려면 돈이 많이 들지만 말이다.
◈ 다섯 번째로, '아봐타(Avatar)' !!
이제 다섯 번째로 '아봐타(Avatar)' 라고, 이것은 "깨달은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의 준말인데,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것을 두고서 "아, 봤다!" 라고 하기도 하는데, 물론 우스개소리이지만 말이다. 이것은 미국의 교육가인 '해리 팔머' 라는 사람이 창안한 의식개발 프로그램인데, 즉 전지전능한 창조자가 곧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창조력을 극대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하나님인데, 그렇다면 하나님의 특징이 무엇인가? 무한한 창조력인데, 즉 예전에는 없는 것을 창조하는 말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그 창조력을 말이다. 그런데 그동안 이런 창조력을 가로막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신으로 보지 않고, 그 신에게 종속된 노예처럼 살 때는 자기 속에 있는 신의 창조력을 본인이 스스로 가로막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 바다야, 갈라져라 !!
마치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바다야, 갈라져라!" 라고 선언할 때는, 자기는 신의 위치에 있게 되는데, 그래서 바다라도 그 명령에 순종해서 갈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가 신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그동안 왜 그렇게 되지 않는가? 그것은 남의 눈치를 봐서 그러한데, "이제 제가 어떻게 할까요?"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자기 창조력을 발휘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꾸만 남에게 기대게 되는데, 물론 남에게 일일이 묻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남을 의지하는 것에서 벗어나서, 자기에게 있는 신의 창조력을 발휘하라는 것인데, 그것이 곧 아봐타 프로그램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사람들이 잘도 만들어내는데 말이다. 그것도 신의 창조력인가? (ㅋㅋ)
◈ 여섯 번째로 '의식혁명' !!
그 다음이 여섯 번째로, 제가 제일 주목했던 부분인데, 즉 '의식혁명' 이라고, 데이비드 홉킨스 박사의 워크숍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교재를 보면 "의식은 육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의식은 그 스스로 존재한다. 질문이 진실이면 근육에 전류가 들어가고, 거짓이며 근육에 전류가 꺼진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가지고 실험을 해보는데, 즉 "해가 서쪽에서 뜹니다" 라고 했을 때는, 그러면 근육이 긴장을 해서 떨린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짓말이기 때문에 말이다. (거짓말 탐지기?) 그런데 "해가 동쪽에서 뜹니다" 라고 하면, 긴장을 하지 않기에 근육이 그냥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즉 이것을 통해서 의식과 육체는 하나임을 증거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 몸 자체가 좋지 않는 감정에는 약한 반응을 보이고, 반면에 좋은 감정에는 강한 반응을 보이는데, 즉 기분만 좋게 해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의식을 기분이 좋은 상태로 계속해서 유지하는 사람들이 곧 도사들인데, 아무튼 이런 의식의 기준을 '100'으로 잡아서, 즉 이러한 진실 됨을 감지의식능력의 수치로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의식의 기준을 '100'으로 잡아서 말이다.
◈ 감지의식능력의 수치 !!
수치심은 20, 죄의식은 30, 무기력은 50, 슬픔은 75, 두려움 100, 욕망은 125, 분노는 150, 자존심은 175, 용기는 200, 중용은 250, 자발성은 310, 포용은 350, 이성적 태도는 400, 그리고 인류가 자랑하는 지성인인 아인슈타인과 프로이트는 499 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수치심이 20이고, 죄의식은 30인데, 이렇게 100이하가 되면 어떻게 되는가? 원래 100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거기에 미치지를 못하니 근육이 저항을 해서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100에서 빠지는 80이나 70만큼 말이다.
◈ 예수님은 무려 1000 포인트 !!
그런데 500부터가 깨달음의 세계로 도약하기 위한 발판이 되는데, 사랑은 500, 기쁨은 540, 평화가 600, 깨달음은 700∼1000 라는 말이다. 그리고 예수님 1000이지만, 실제 역사적으로 볼 때에 예수님의 가르침은 2세기 때에는 930이고, 6세기 때는 540이고, 또 11세기초 십자가운동 때는 498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을 수치로, 즉 양적으로 계산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런 것을 보면 무엇을 느끼는가? 구체적으로 수치가 나오니, 그것을 보고 시도한다는 것이다. 즉 "야, 기쁨으로 설거지를 하면 도대체 이게 얼마인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비록 설거지가 힘이 들이지만, 그래도 이런 것을 보고 기쁨으로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래도 부르면서 웃고 하면 좋다는 말이다.
◈ 그러면, 윤리학자들이 뭐라고 반박을?
여기에 대해서 많은 윤리학자들이 뭐라고 비판을 하겠는가? 그들은 인간을 짐승과 다르게 그 근본을 선과 악으로 보는데, 그런데 이렇게 수치로 해버리면, 이러한 선과 악이 전혀 개입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나쁜 짓을 하더라도 기쁨으로 해버리면 그것이 나쁜 짓이 안 된다는 말이다. 즉 거기에서 새로운 창조성이 나온다고 하면, 그런 악한 짓도 용서가 된다는 것이다.
◈ 용사들이여, 오늘은 마음껏 즐겨라 !!
예를 들어서, 베트남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의 경우에, 그들이 전투에 한번 참가한 다음에는 중대장이 그들을 어디에 보내는가? 집단적으로 사창가게 보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 분명 음란한 짓인데, 하지만 왜 보내는가? 그 다음 전투에서 힘을 내어서 승리하게 되면, 앞서 사창가에 간 것을 일시적으로 나쁜 짓이지만, 그러나 전체로 봐서는 선한 일이 된다는 것이다. 적들을 쳐부수고 승리를 하니 말이다.
이렇게 되면, 이 데이비드 홉킨스의 워크숍은 결국은 이 사회에서 성공한 놈이 의인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가난은 그만 죄의식이 생겨서 그만 30 포인트밖에 되지 않고 말이다. 그러니 "그래, 나는 어쩔 수 없는 가난한 놈이야" 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 속에 있는 창조의식을 완전히 박살낸다는 말이다.
그러니 가난함이 곧 죄가 되고, 그 어떤 식이든지 부자가 되면 그 무슨 짓을 했더라도 부자가 되었기 때문에 남들로부터 용납이 되는데, 그 어떤 과정을 겪었든지 말이다. 그래서 이웃들이 와서 "형님요, 반갑습니다" 라고 하면서 옆에 와서 빌어먹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비로소 인간답게 살아갈 맛이 난다는 것이다. 참 재미있지요?
◈ 여섯 번째로 '아리랑 풀이'를 !!
이제 여섯 번째로 '아리랑 풀이'를 살펴보겠는데, 이 수련 프로그램에 의하면, 처음에는 북을 치는데, 그렇게 북을 치게 되면 처음에는 사람들이 낯설어서 어리둥절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 북소리의 음파가 우리 뇌파를 자극하게 되고, 그렇다면 우리 몸 속의 75%가 물인데, 그 물이 북소리의 파동에 의해서 춤을 추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세포가 춤을 추게 되니, 즉 외부에 있는 음파에 동조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맞지 않던 발도 점점 맞아지게 되고 말이다. 이러한 동조현상에 의해서 신나는 북소리에 맞추어 춤을 춘다는 것이다.
◈ 디오니소스적인 요소가 발생 !!
그렇게 춤을 추게 되면,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디오니소스적인 요소가 발생하게 되는데, 그런데 디오니소스 종교에서는 무엇이 환상이고 무엇이 진실인고 하니까, 술에 취해서 자신의 이성, 즉 로고스의 도덕과 논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진정한 본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술이 깨어서 현실로 돌아오게 되면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는데, 자기 감정은 무의식의 세계로 보내고 말이다. 즉 "참아야지, 참아야 하느니라. 그렇게 낮술을 마시면 안 돼. 음주운전을 하면 바로 구속이야"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참으면서 점잔을 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짓인데, 단지 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행동을 스스로 자기에게 강제적으로 요구하고, 또 정치적으로 타협을 한다는 것이다. 즉 "지금은 더러워도 고개를 숙여. 그래야 거래가 성사되고 돈이 되지. 그리고 나서 오늘밤에 한잔하면 되잖아" 라고 하면서 말이다. 자기가 스스로 자기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즉 타협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디오니소스의 입장에서는 이런 것이 오히려 이것을 일시적 환상이라는 말이다. 즉 "개뿔도, 법을 지켜서 무엇을 한다는 말인가? 니는 꿈에서도 법을 지키는가?" 라고 말이다. 그러니 법을 지킨다는 것은 잠시 보류한 것으로서, 즉 밤에 잠을 자는 것은 휴식인데, 모든 스트레스와 법에서 해방된 순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것에서 해방되어서 마구 날아다니는 꿈이 그리워지는데, 그런 꿈을 즐겨야 하고 말이다.
◈ 질병을 친구 삼아서 !!
이런 수련회 중에서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 징크스나 딜레마나 질병이 있을 때, 그러한 질병을 겁을 내거나 물리치지 말고 같이 즐기라고 한다는 것이다. 슬럼프가 나가와도 그것을 즐기고 말이다. 잠이 오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 상태를 즐기면 잠이 온다는 말이다. 마음에 평안함이 찾아오니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그런 게 나쁜 것이라고 해서 저항을 해버리면, 즉 "나쁜 짓은 나의 본심이 아니야. 그것은 착각이야. 나는 착한 인간이야" 라고 하는 것 자체가 디오니소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거꾸로 보는 것인데, 왜 환상에 잠겨서 자기를 우수한 인간으로 보려고 하느냐는 말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다 중력에 맡기라는 것이다. 제법 괜찮은 표현 같은데(ㅋㅋ), 허공에서 모든 것에서 손을 다 놓게 되면 본래의 자리에 떨어지게 되는데, 나중에 따지면 거기에 대해서 죄의식이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하지만 결국은 자기의 원래 자리로 돌아오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보다도 더 편안한 상태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리랑 풀이' 라는 인데, 수련회 이름도 참 독특하고 재미가 있는데 말이다. 이 '아리랑' 이라는 것이 곧 우리의 노래이고 춤인데, 그러니 자기 몸이 가는 대로 그냥 흔들어 봄으로서 순수한 느낌을 느끼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 아니, '욕'으로도 명상을 ??
이것이 춤 명상인데, 이것이 끝나면 드디어 '욕' 명상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요즘말로 하면 '야자타임' 인데, 결국 하나님과 야자타임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동안에 자기가 하고 싶었던 욕이란 욕은 모두 해보는데, 즉석에서 만들기도 하고 말이다. 두 명씩 짝이 되어서 그동안 싶은 말을 욕설로 푸는 방식인데, 그렇게 하면 그동안 지탱한 자존심이 무너지면서 몸과 마음이 치료가 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그렇게 자아가 마구 춤을 추고 욕을 실컷 했으니 이제는 괜찮고 훌륭하다고 하는, 그런 붙잡을 '나' 라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어디 멋있는 춤을 추었겠는가? 난잡하고 그야말로 저질스러운 막춤에 막춤을 춘 것인데, 욕도 그야말로 쌍욕에 쌍욕을 마구 한 것이고 말이다. 그러니 그러한 자아를 잡으려고 해도 더러워서 잡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아를 놓게 되니, 결국 자존(自存), 즉 자기가 최고라고 하는 것이 무너지면서 몸과 마음이 치유가 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기발하고 멋진(?) 아이디어인데, 이러한 프로그램을 교회에서 실시하면 그야말로 능력이 있는 목회자가 되지 싶은데, 그렇지 않은가? 더 이상 무슨 위로와 치유의 목회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여러분, 담임 목사를 마음껏 욕을 하십시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야말로 '자기부정'이 아닌가?
◈ 일곱 번째로 원불교의 '마음공부'를 !!
이제 일곱 번째로 원불교의 '마음공부' 라는 수련방식인데, 이것은 방금 이야기한 아리랑 풀이와 정반대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나는 원래 훌륭한 사람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것을 아이들에게 많이 하는데, 왜냐하면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상처를 많이 입는데, 특히 부부싸움이 심한 가정에서는 말이다.
그래서 원불교에서는 그러한 불손가정(?)의 아이들을 모아서 수련회를 갖는데, 즉 "설령 엄마 아빠가 그렇게 하더라도, 너 만큼은 천사이다" 라고 하는데, 즉 "아무리 환경이 힘들고 어려워도, 너는 분명히 천사이니 천사답게 살아야 한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 이 경계선을 넘으면 안 돼 !!
그런데 그렇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곧 '경계' 라는 것인데, 이것이 쉬운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경계에 대해서, 원불교에서는 아동들에게 이렇게 가르치는데, 걱정이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어떤 선을 자기가 그어놓았기 때문에 생긴다는 것이다. 즉 "이 선을 넘으면 안 되는데" 라고 하는데, 그 선을 넘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나는 컴퓨터 게임을 하루에 한 시간만 한다" 라고 했다면, 그런데 하다보니 2시간 째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원불교 선생님이 자기를 천사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만 시간을 어기게 되었으니,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자기는 누가 뭐라고 해도 천사이니 말이다.
그럴 때는 가만히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도대체 그 '한 시간' 이라는 경계를 누가 결정했는지 말이다. 그런 경계가 있으니 그만 자기가 나쁜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경계만 없으면 되는데, 그래서 경계를 멀찍하게 4시간으로 정한다는 말이다. 사실은 그런 시간조차도 없애야 하는데 말이다.
◈ 결국, 경계마저 얽매이지 않는 진정한 자유로움을 !!
그렇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모든 일에 그러한 경계선을 계속해서 지워버린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해서는 안 돼" 라고 하는 철조망을 말이다. 그러면 자기는 계속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고, 또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결국 경계마저 얽매이지 않는 진정한 자유로움을 누리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원불교의 '마음공부' 라는 수련방식이라는 말이다.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실제로 행하고 있는 여러 가지 수련방식들을 모두 다 배우고 있는데, 물론 조금씩 차이는 나지만 말이다. 나름대로는 다 의미가 있는데, 결코 대충대충 해서 만든 프로그램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 여덟 번째로 '동사섭(同事攝)'을 !!
이제 여덟 번째로 '동사섭(同事攝)' 이라는 것인데, 제가 볼 때는 이것이 제일로 효과적이지 싶은데, 이것을 사람들이 들어오면, '딸기', '노을', '달님' 등이란 아주 생소한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서는, 다른 사람에게 자기 말을 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 대화를 나눔으로서, 자기 마음속의 응어리진 것과 사슬을 모두 풀게 하는 수련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동사섭(同事攝)' 이라는 말 자체가 무엇인고 하니, 고통받는 중생과 희노애락을 함께 나누어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 소위 '나지사' 명상 !!
그리고 여기에 보면, 요타 스님이 제창한 '나지사' 명상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먼저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 "아하, 그랬구나"의 '나'와, 또한 일단 그것을 긍정하고, 둘째로 "그만한 사정이 있겠지" 라는 것의 '지'와, 그런 상황을 다 이해하고, 셋째로 "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는 것을 감사하자" 라는 것의 '사'를, 그렇게 이러한 세 글자를 따서, 즉 '나지사' 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 프린트물에 보면 '나시사' 라고 되어있는데, 그것을 '나지사'로 고치면 되는데,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제가 "여러분, 죄송합니다" 라고 하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원불교의 마음공부에 의하면, 그렇게 하면 나쁜 사람이 되니 말이다. (ㅋㅋ)
◈ 생소한 이름표를 내 가슴에 !!
여기서 이렇게 생소한 이름표를 달고 서로 대화를 하는데, 예를 들어서, 아버지가 회사에서 돌아오면 그것을 있는 사실만을 이야기하면 안 되고, 즉 "아버지, 잘 갔다 오셨어요?" 말이다. 그렇다면 뭐라고 하면 되는가? "아버지가 와서 너무나 기분이 좋습니다.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라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버지가 왔다는 사건만이 아니라, 자기의 느낌까지도 이야기할 때, 바로 그것을 마음 나누기, 즉 '동사섭'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이렇게 녹차가 있다고 하면, "이것은 녹차이다" 라고 하면 안 되고, 그것은 마음 나누기를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아, 제가 이 녹차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정말로 맛이 있습니다" 라고 하면서 자꾸만 자기의 감정을 가져다 붙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경상도 남자들처럼 퇴근하고 나서 마누라에게, "아는? 묵자. 자자" 라고 하지 말고 말이다. 그렇게 자기의 마음을 이야기하게 되면, 상대방이 자기의 마음을 다 들어주고, 자기도 그 상대방의 마음을 들어주게 되면, 서로 마음을 같이 하게 된다는 것이다.
◈ 천주교의 '예수살이 공동체 배동교육' !!
그리고 천주교의 '예수살이 공동체 배동교육'에서 실시하는, 자기의 영정사진을 바라보도록 하는 수련방법도 있는데, 실제로 관속에 들어가서, 즉 자기가 한번 죽어본다는 것이다. 돌발적으로 어떤 이벤트성으로 하는 것으로서, 이런 것을 일컫는 용어가 있는데, 왜 백남준이 바이올린을 켜고 하는 것인데 말이다. 요즘은 기억이 나는 것이 없는데, 이제 관속에 들어갈 되어서 그런지 말이다. (??)
아무튼 자기가 관속에 들어가고, 또 거기에다가 위에서는 실제로 흙도 뿌리는데, 그렇게 해서 관속에 한번 들어있어 본다는 말이다. 물론 숨쉬는 구멍도 만들어놓고, 나중에는 꺼내주겠지만 말이다. 물론 안 꺼내주면 할 수 없고 말이다. (ㅋㅋ)
◈ 범사에 감사는 인간이 !!
그렇다고 하면 그 관속에서 도대체 무슨 생각이 나겠는가? 이제 나올 수 없다고 하면 말이다. 배가 고파서 돈까스가 생각이 나겠는가? 자기가 살아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즉 모든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이 들것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제부터는 내가 이 세상에 다시 나가면, 남도 용서하고 항상 감사하면서 살아갈 거야. 그리고 마누라에게 짜증을 내지 않을 거야" 라고 하는 마음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이렇게 숨쉬고 살아있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는 말이다.
◈ 장신대 경건 훈련원 !!
그 다음에는 통합측인 장신대에서 하는 '경건 훈련원' 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인데 말이다. 물론 성경적이라서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말이다. 어떤 수련방식인고 하니까, 예수님과의 상상을 통해서 성경에서 일어난 사건을 현재 자기에게 일어나는 사건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즉 성령께서 상상을 사용해서 기도자와 성경사건을 중계한다고 할까,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처럼 살아갈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성경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이 자기의 사건이 되는데, 그러니 예수님처럼 이웃을 사랑할 수도 있고, 그렇게 관심을 이웃에게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관심인데, 그러니 그들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목회를 제대로 못하는 것은 그런 관심이 없어서 그렇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장신대에서 신학생을 대상으로 하니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관심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다 풀리게 되는데, 목회뿐만이 아니라 자녀교육도 그렇고, 학원을 하든 식당을 하든, 무엇을 해도 그렇고 말이다. 그러니 그렇게 관심을 가지려고 하면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 예수회, 핀도혼(?), 등등 !!
그리고 그 뒤에 보면 공동체 운동이 나오는데, 태백의 '예수회'고 그러한데, 즉 자기 생각은 없으니, 그런 자기 생각을 고집하지 말고 남의 이야기만 자꾸 들으라는 것이다. 즉 "제 생각은 없습니다" 라고 해야 이웃사랑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핀도혼(?)' 공동체는 무엇인고 하니, 인간과 자연과 신은 진실로 하나라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아까 말한 경계심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 이제 결론적으로, 비판을 !!
이제 결론적으로 오늘 공부한 것을 비판해야 하는데, 무슨 좋은 아이디어가 있나요? 우리가 살펴본 대로 인간에게서 별의 별 아이디어가 다 튀어나왔는데 말이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것을 뒤엎을 만한 아이디어가 있느냐는 것이다.
* 질문 - 이 모든 것이 자기 신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닌가요?
불교에서 자기 신체라고 하는 것은, 오옴이 무작위적으로 집합이 되어서 세포가 되고, 그래서 현재의 자기를 이룬다고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방금 집사님의 질문처럼, 인간이 자기 신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면, 불교에서는 뭐라고 반박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 신체가 끝이 아니라 의식이, 즉 우주의 기(氣)가 헤어졌다가 모이면 인간이 되고, 또 헤어졌다가 모이면 돼지가 되고, 또 헤어졌다가 모이면 원숭이가 되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되면 곧 해탈인데, 그러니 '나' 라는 것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무아(無我)에 빠지는 해탈인데, 그렇게 해탈을 함으로 모든 걱정과 근심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이 자기 신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고 이야기하게 되면, 불교 쪽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이미 자기들은 그러한 신체의 문제는 극복했다고 한다는 말이다. 해탈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해야 비판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여기 원불교의 마음공부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는데, 예를 들면, 아이들이 마음에 '짜증'이 일어날 때, 그 짜증 직전의 마음의 그 후의 마음의 경계를 알아차리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원래의 마음으로 돌아서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집으로 곧장 가지 않고 PC방으로 들어서려다, "앗, 경계다" 라고 생각하고서는 즉시로 집으로 발길을 돌린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중에 경계마저 매이지 않는 진정한 자유로움을 누릴 수 있다고, 즉 마음공부를 공부를 통해서 그런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 구약은 '언약 공동체'이기 때문에 !!
여기서 제가 내린 해결책은 무엇인고 하니까,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해결책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제가 알기로는 구약은 '언약 공동체'이기 때문에, 즉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작정한 백성이 아니라고 하면, 여호와를 전혀 알지 못하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만, 더욱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들이 그냥 그렇게 자기들이 꼴리는 대로 살아가도록 놔두는 것이 바로 해결책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인간의 모습이란 결국은 "아하, 인간은 결국 저렇게 빠질 수밖에 없구나" 라고 하는 것을 기분 좋게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그 어떤 이야기를 해주어도 그들이 거기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주께서 알아서 하시는 문제이기 때문에 말이다.
고린도후서에 보면, "모든 것이 예수님 안에서 '예'가 된다" 라고 했는데, 즉 예수님 안에 있을 때만 '예'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사람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출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을 하기 때문에, 그러니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으려고 해도 그 길은 완전하게 차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힘으로 예수님을 믿고 새사람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 부디, 편안히 잘 살펴가세요 !!
그러니 그냥 인간은 자기 갈 길로 가는 것이고,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부디, 편안히 잘 살펴가세요"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냥 방치하면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해주겠는가?
물론 이것은 저의 상상인데, 여기 책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전부가 다 모여서 과연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거기에 대해서 토론을 한번 해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마음이 최고라고 해도, 그러나 결국 그 마음을 규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결론은, I DON'T KNOW !!
그러므로 정답은 무엇인고 하니, 이미 정답이 나왔는데, 그것은 바로 "모르겠다" 라는 것인데, 이것이 정답이고 그야말로 속이 편한 것인데, 왜냐하면 무엇을 하나 안다고 하면, 마음공부에서 한 것인데, 그 안다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 경계가 생겨서 사람을 아주 심란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또한 진지하게 만들고 말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이러한 진지함도 귀찮고 모두가 싫은데, 그것이 바로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 이라는 말이다.
◈ 다중중심의 사회에서 !!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렇게 모든 네트워크가 한 중심에 모이는 것은 옛날의 고대의 모습이고, 그런데 중심이 여러 개가 되면서 서로 서로가 연결되는 것이 오늘날 자본주의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즉 회사에 다니면서 직장 신우회 모임이 있고. 또 교회에 다니니 교회의 모임이 있고, 또 낚시동우회 모임도 있고 말이다. 그런 것을 중심의 여러 개라고 해서 '다중중심의 사회'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대의 중심이 하나인 것은 우리나라로 보자면 유교사회인데, 일종의 가부장제도인데, 그래서 제사를 지내면 모두가 다 모인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식들이 회사의 사장이든 부장이든 간에 모두가 다 모여서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이, 그것이 곧 고대사회의 특징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아버지, 이번에 회사 일로 바빠서 못 가겠습니다" 라고 하면, 그것은 다중사회이고 말이다.
그런데 앞으로 이 사회가 후기자본주의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까, 하나의 중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여러 개의 중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차별적으로 중심이 없다는 것이다. 네트워크가 그런 식으로 형성이 된다는 말이다. 아예 중심이 없는 사회로 말이다.
◈ 이제 매트릭스의 사회로 !!
이럴 경우에는 중심이 없기 때문에 점 하나 하나가 중심이 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매트릭스' 라는 영화라는 것이다. '매트리스'는 아니고, 그것은 에로 비디오고 말이다. 매트릭스, 즉 교차가 되는 그 밑바탕이 된다는 것이다. 이 '매트릭스' 라는 영화가 상당히 철학적으로도 깊이가 있어서, 박사학위논문들도 제법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 영화가 너무 도발적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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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트릭스(matrix) - 레코드를 제작할 때에, 네 개 채널의 각 채널신호에 기호를 달아 정리한 다음 두 개의 채널로 나눈 것(국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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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매트릭스는 그냥 숫자인데, 다른 말로 하면 정보인데, 즉 이 세상은 그런 숫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숫자의 우연적인 조합이 오늘날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인데, 그래서 자기 이름이 없다고 하면, 불빛이 깜박깜박하다가 그냥 꺼져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죽는 것인데, 그러니 그 관계에서 그만 사라진다는 말이다.
◈ 이름이 없으면 곧 죽은 사회 !!
연예인들의 경우에 유명하다가 사라지면, 그것은 곧 이름이 없어지는 것인데, 그러면 그 사람은 어느 강원도 산골에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다시 레코드판을 내고 연예 프로그램에 나오면, 그것은 다시 이름을 내는 것이란 말이다.
우리가 30년 전에 유명했던 축구선수의 이름을 다 아는가? 모르는데, 그렇다고 해서 모두 죽은 것이 아니라, 어느 중고등학교에서 축구감독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축구감독을 해도 이름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매트릭스의 세계에서는 죽은 자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죽은 자와 동일한 것이 이름이 없는 것이란 말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 여자가 시집을 가면 이름이 없어지는데, 실제로 족보에 보면 성만 덜렁 남아있지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요즘은 여자이름도 올려주지만, 아무튼 여자는 시집을 가면 이름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여자가 계모임에 가면 이름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매트릭스의 세계에서는 활동을 하면 살아있는 것이고, 활동을 하지 않고 잠적을 해버리면 잠적을 한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이란 말이다. 내세울 만한 이름이 없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실제로 죽어서 죽은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에서는 활동을 하지 않고 있으면, 그것은 곧 죽은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 현대인들이 왜 휴대폰을 좋아하는가?
이것이 곧 현대인들의 생활백서인데, 왜 사람들이 휴대폰을 좋아하는가? 그것은 전화를 주고받기에 편리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바로 휴대폰만 있으면 관계망이 형성이 되고, 자기는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즉 전화를 통해서 "나 여기 있어" 라고, 자기 존재를 외친다는 것이다. 인터넷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 또한 경제코드는 '묻지마 투자' !!
그러므로 이 시대는 활동을 하지 않으면 죽은 자가 되고, 무엇이라도 하게 되면, 즉 활동을 하게 되면 살아있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특히 이 시대에 있어서 경제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까, 소위 '묻지마 투자' 라는 것인데, 물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럴 것이고 말이다.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결코 약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튼 지금의 이 시대는 "나, 취직했어" 라고 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그렇게 취직을 했으면 살아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후기 자본주의는 그렇게 취직을 해도 회사 사장님이 자기 이름을 다 대신해버리기 때문에 자기 이름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사업을 해야 하는데, 카드 빚을 내든지 해서라도 말이다. 그렇게 해야 '매트릭스' 라는 사회의 일원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회사의 말단사원이라면, "에이, 그것은 죽은 자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회사의 대표이사나 이름이 있는 것이지, 자기 이름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요즘 젊은 사람들이 회사에 취직을 했다가도 금방 나오고 하는데, 그것은 참을성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자기 이름이 없기 때문에 개인사업 쪽으로 방향을 그만 돌린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해야만 이러한 매트릭스 사회에서 살아있는 사람이 되고 말이다.
◈ 오로지 경제만이 최고 !!
하지만 이것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과도한 대출과 그것으로 인한 한탕주의가 판을 치게 되는데, 또한 맞벌이 정도가 아니라 '투 잡'으로 나가게 되는데, 철저히 경제우선이고 말이다. 선이고 악이고 간에,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고, 오로지 경제에만 매진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제가 단언을 하는데, 앞으로 가면 갈수록 그런 현상이 심해진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지금 이 시대와 앞으로 다가올 시대의 모습인데, 그러한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답은 무엇인고 하니, 물론 지나간 시대에서는 "이것이 무엇인가?", 또 "이것이 무엇인가?" 라고 묻다가, 이 시대에 들어오면 "I DON'T KNOW" 라는 것이다.
◈ 하지만 성도에게는 !!
하지만 성도에게는 진짜 생명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는 메시야 언약에 준해서만 주어질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이 진리를 거부하는데, 그들은 예수님의 '채찍 맞음'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채찍을 따로 가지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만큼 교묘하게도 자기 의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악마는 사람들을 이런 방식으로도 지옥으로 가게 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 저희들이 매트릭스의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정말 주님의 은혜가 아니라고 하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가면 갈수록 이 시대가 점점 더 이렇게 진행이 될 것인데, 오로지 예수님에게만 생명을 있음을 알고, 또한 예수님에게서만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02,07 00시 35분에 마침.
MB 속에 매트릭스를 침투시켜라 !
68. [ 나를 찾아 떠나는 17일간의 여행 ] 조연현 저 한계레신문사
진지함을 잃고서 경박함으로 생활하는 현대인들의 풍조는 교회까지 파급되었다. 모든 것을 가볍게 처리하려는 태도로 말미암아 이제 하나님이 예수라는 존재까지 추상적인 대상으로 취급당한다. 그렇다고 해서 진지함은 열광을 통해서 얻어지지는 않는다. 도리어 열광을 잠재워야 한다. 산만하고 떠들썩한 삶을 제거하고 진정 마음 밑바닥에서 남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본 책은 이것을 시도한 각가지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다. 과연 이들이 얻은 진리는 과연 무엇인가?
1. 정토 수련원
이곳은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물음으로부터 시작해서 평소에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모두 무너뜨리는 작업을 수행하는 곳이다. 그렇게 해서 기존에 행했던 모든 것이 자기 중심적 사고가 빚어낸 제한적인 것이고 보다 깊고 넓게 세상을 보니, 너 나 모두가 한 몸이며 한 몸이기에 더불어 살아야 될 처지에 놓여 있음을 깨달아 알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자기 편익 위주의 인생관을 가지고 살게 되면 자신과 남과 세상을 왜곡되게 바라보게 되고 이것은 모두를 힘들게 한다. 자기 자신을 바로 아는 순간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되고 그 때부터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2. 인천 용화선원 시민선방
참선하는 곳이다. 일단 모든 생각 자체를 끊어보는 것이다. 일종의 사고(思考)의 스위치를 내리는 식이다. 그렇게되면 그동안 자신을 괴롭혀 왔던 걱정과 번뇌도 같이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그 다음은 순간적으로 의식의 스위치를 올린다. 그렇다면 이 때부터 무심의 경지의 들어가서 예상치도 못한 놀라운 큰 능력과 최고의 역량을 발휘하게 해 주는 것이다. 자기와 바깥 세계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고 하나가 될 때만 이런 능력이 나온다. 모든 흐름을 끊을 때, 오직 청정한 마음만이 남게 된다. 고통에 집착하지 않으면 원래 고통이란 없는 법이다. 이러한 참선 체험 프로그램은 불자뿐만 아니라 신부, 수녀, 목사들까지 참여하고 있다.
3. 위빠사나
이것은 석가모니가 부처(깨달은 자)의 경지가 될 때 행했던 그 수행법을 그대로 전수 받는 것이다. 예를 들면 호흡할 때 들쑥날쑥하는 자기 배를 한 시간동안 뚫어지게 보는 것이라든지, 혹은 10m 거리를 10분 동안이나 걸리도록 서서히 걸으면서 자기 발을 집중 바라보는 수행법이다. 현재의 실제상태를 있는 그대로 제대로 바라보게 한다. 그렇게 되면 실제라는 것은 자기가 생각해 놓은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 순간부터 번뇌는 물러간다. 모든 현상이란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다. 따라서 지관(止觀), 즉 정신통일로서 하는 관찰 수행법으로 일체의 모든 것이 붙잡아 둘 가치 있는 것이 아님을 안다. 심지어 마음마저도 그러하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이다. 번뇌가 스며들면 그 번뇌에 집중함으로서 번뇌를 소멸시켜버린다.
4. 천도교 시천주 수련
'시천주 조화정…'으로부터 시작되는 주문을 되풀이하게 되면 강령체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심하게 울게 된다. 그리고 난 뒤 상대가 누가 되었던 겸손하게 큰절을 하게 된다. '그동안 나 자신도 모르고 기고만장했던 것'을 후회하면서 상대를 이제부터 섬기는 상전으로 모시려는 것이다. 부부끼리 배우자나 부모나 자식 같은 가까운 식구부터 시작하게 된다. 근본을 안다는 것은 세상 만물, 즉 사람과 동물과 식물과 천지만물이 다 마음과 마음으로 통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한울님의 주파수와 자신의 주파수가 딱 맞으면 통하게 되어 있다.
5. 아봐타(Avatar)
미국의 교육가인 해리 팔머가 창안한 의식개발 프로그램이다. 전지전능한 창조자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창조력을 극대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창조력을 막는 것은 자기 속의 저항이다. 원치 않는 창조인 이 저항을 제거하므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원하는 삶을 위해서는 스스로 자신이 창조를 선언하는 것이다. 마치 모세가, "바다야! 갈라져라!"라고 선언할 때 바다라도 갈라지는 것처럼 그렇게 사는 것이다.
6. 의식혁명 - 데이비드 홉킨스 박사의 워크숍
의식은 육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의식은 그 스스로 존재한다. 질문이 진실이면 근육에 전류가 들어가고, 거짓이며 근육에 전류가 꺼진다. 이것으로 우리 몸 자체가 좋지 않는 감정에는 약한 반응을 보이고 반면 좋은 감정에는 강한 반응을 보이게 한다. 이 진실 됨을 감지 의식 능력을 그는 수치로 표현했다. 수치심은 20, 죄의식은 30, 무기력은 50, 슬픔은 75, 두려움 100, 욕망은 125, 분노는 150, 자존심은 175, 용기는 200, 중용은 250, 자발성은 310, 포용은 350, 이성적 태도는 400, 그리고 인류가 자랑하는 지성인인 아인슈타인과 프로이트는 499이다. 그런데 500부터가 깨달음의 세계로 도약하기 위한 발판이 된다. 사랑은 500, 기쁨은 540, 평화가 600, 깨달음은 700∼1000이다. 예수님 1000이지만 실제 역사적으로 볼 때 예수님의 가르침은 2세기 때에는 930, 6세기 때는 540, 11세기초 십자가 운동 때는 498로 떨어진다고 한다.
6. 아리랑 풀이
이종헌 성장상담연구소에서 내 놓은 수련 프로그램이다. 신나는 북소리에 맞추어 몸 가는 대로 흔들어 봄으로서 순수한 느낌을 느끼는 방식이다. 이러한 춤 명상이 끝나면 욕 명상이 시작된다. 둘 씩 짝이 되고 그 동안 하고 싶은 말을 욕설로 푸는 방식이다. 이렇게 되면 그동안 지탱한 자존심이 무너지면서 몸과 마음이 치료가 되는 것이다.
7. 원불교 마음공부
아동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선언함으로서 마음 공부가 시작된다. "나는 원래 훌륭한 사람입니다"그 다음부터는 이 훌륭함과 훌륭치 않음의 경계선을 아동들 스스로가 지키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자기 마음이니 자기가 스스로 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자각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짜증'이 일어날 때, '짜증' 직전의 마음의 그 후의 마음의 경계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래서 원래의 마음으로 돌아서게 되는 것이다. 또 집으로 곧장 가지 않고 컴퓨터 방으로 들어서려다, "앗 경계다"하고 생각하고서는 즉시로 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이렇게 마음공부를 하게 되면 나중에 경계마저 매이지 않는 진정한 자유로움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8. 동사섭(同事攝)
딸기, 노을, 달님이란 생소한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다른 사람에게 자기 말을 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 대화를 나눔으로서 마음 의 응어리진 것과 사슬을 다 풀게 하는 수련법이다. 동사섭이란 고통받는 중생과 희노애락을 함께 나누는 가지는 것을 말한다. 특히 요타 스님이 제창한 '나지사' 명상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랬구'나'하고 일단 긍정하고 둘째로, 그만한 사정이 있겠'지'라고 상황을 이해하고, 셋째로 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는 것을 감'사'하자는 것으로 이 세 글자를 따서 '나지사'라고 하는 것이다.
그밖에 자기 장례식 거는 영정 사진 앞에서 자신의 실존을 바라보게 하는 천주교에서 하는 '예수살이공동체 배동교육'이라는 것도 있고, 깨달음에 대한 욕심조차 버리라는 천주교 영신수련을 담당하는 '천주교 예수회 말씀의 집'도 있고, 또 '성령께서 상상을 사용해 기도자와 성서적 사건을 중계한다'고 가르치는 장신대 경건 훈련원도 있다.
평가: 생명이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는 메시야 언약에 준해서만 주어질 뿐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이 진리를 거부한다. 이들은 예수님의 '채찍 맞음'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채찍을 따로 가지려고 한다. 그만큼 교묘하게도 자기 의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악마는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도 지옥으로 가게 한다.
* 평가 : 생명이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는 메시야 언약에 준해서만 주어질 뿐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이 진리를 거부한다. 이들은 예수님의 '채찍 맞음'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채찍을 따로 가지려고 한다. 그만큼 교묘하게도 자기 의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악마는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도 지옥으로 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