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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생명 말씀(2020.5.3.) 말씀/ 이사야 49:5 존재를 보시는 하나님
" 나는 여호와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이사야 49:5)
헤르만 헷세는 데미안이란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의 일생이란 것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기 위한 여정이다. 그곳을 찾아 길을 떠나는 여행이다! 지금 어떤 형태의 삶을 살던 종국에는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기 위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자기를 모른다는 것이면 자기를 찾는 것이 일생일대의 과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자기 자신에게 도달했다고 생각합니까? 어떻게 자기 자신에게 도달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자신을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잘 모릅니다. 조금만 알면 잘 아는 것처럼 생각하며 더 이상 알려하지 않습니다. 내가 내가 아니냐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도 ‘어떤 사람이다’ 라고 자기 생각으로 쉽게 단정을 짓습니다.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에게 그 무지를 가르쳐주고자 대화를 하였습니다. 그것을 대화법이라고 하는데 그의 제자 플라톤이 책을 써서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청년들에게 계속 묻고 또 물으며 질문을 했고 결국 모른다는 대답을 끌어냈습니다.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자신을 아는 길이 열린 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심령이 가난해야 비로소 사람들은 배고픔을 느끼며 배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실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은 몇 가지 질문을 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동안 열심히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많은 말씀을 들었지만 실상 예수님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질문을 해보면 바로 들통 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자꾸 질문을 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사는 것이 정말 바르게 사는 것인지? 재가 지금 하는 것이 옳은지, 지금 최상의 삶을 사는 것인지? 더 높은 차원, 더 나은 삶은 없는지? 이런 질문이 있어야 답이 나오게 되어 있고, 그런 질문 속에서 자신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앞전 선거에서 떨어진 차명진이나 김현아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이유는 막말입니다. 수많은 생명을 잃고 슬퍼하는 세월호 가족들을 찜쩌먹고 회쳐먹고 징글징글 이렇게 폄하하고, 또 김현아 경우는 한나라의 대통령을 한센병자라고 막말을 했는데 둘 다 떨어졌습니다. 이분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상대방을 안다고 하는데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는 본인들 자신들 스스로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알면 겸손해 지고, 알면 부드러워집니다. 알면 이해심이 생기고, 긍휼의 마음이 생깁니다. 참고 기다리게 됩니다. 함부로 말 하는 것은 상대방뿐 아니라 자신도 모른다는 증거입니다. 한 유튜버가 김현아에 대해서 처음에는 안 그랬는데 그렇게 까지 막말을 하게 되었는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상식을 벗어난 말을 시작하게 되면 그 끝에는 폭력과 배제와 막말이 난발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상식이 아닌 진실을 알고 말해야 하는데 구분을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이 아니라 나부터 내가 누구인가 알아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가 알게 되면 우리는 더욱 겸손해지고, 다른 사람에게 더러운 말, 막말을 하거나 비판을 하지 않게 됩니다.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눈의 티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더러운 막말들이 어디서 나옵니까? 자기 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본인들도 똑같은 취급을 받으며 버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민경욱이는 낙선하고 선거 부정이라고 다시 조사해야한다고 팻말을 들고 나와 선관위와 실랑이 버리기도 하였습니다. 얼마나 안 쓰럽습니까? 성경은 더러운 말을 입밖에도 내지 말라 하였고,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정치라고 더러운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던지 인격적으로 말하고 인격적으로 싸울 수 도 있는 것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차명진, 김현아 민경욱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을 알고 인격 수양을 하면 훨씬 멋있게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알고 더욱 겸손히 성찰하면 누구나 지금 그 이상의 존재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만한 자리에 머물러 막말이나 하는 존재로 썩고 후퇴하는 것입니다.
최근 읽은 책 중에 감명 있게 읽은 책이 있습니다. 30년 동안 정신과 의사를 했던 정혜진이 쓴 ‘당신이 옳다’는 책입니다. 이 책은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집단상담을 이끌고 있는 정신과 의사가 쓴 책으로 2020년 독서클럽 북 킹에서 선정한 첫 책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들은 '나'가 흐려지면 반드시 병든다. 공항발작은 자기 소멸의 벼랑 끝에 몰린 사람이 버둥거리며 보내는 모르스 부호같은 급전이다. “내가 희미해지고 있어요. 거의 다 지워진 것 같아요.”라는 단말마라는 것 이다.” 결국 사람을 살리고 치유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존재 그 자체를 인정하고 살리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게 없을 때 인간은 희미하게 ‘꺼져가는 불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가장 큰 불행이라는 것입니다. 있는 모습 그 자체로 존재를 인정해주는 것, 그게 최고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아주 잘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삶이 변화되고 감동을 받는 이유가 그 때 문입니다. 상한 갈대도 꺽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셨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건 그 존재를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이 베데스다 못가에서 한 중풍병자를 만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베데스다 못가에는 천사가 내려와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각색 병자들이 있었습니다. 중풍병자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경쟁에서 한참 밀리고 있었습니다. 아에 체념적 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낫기를 원하는가 물으시니 그는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간다고 대답합니다. 그 세월이 벌써 38년이 되었습니다. 희미하게 존재가 꺼져가고 아무도 돌아보는 이가 없었지만 예수님은 아무 조건 없이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고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그는 38년된 자리를 들고일어났습니다. 마태복음 8:1-3 에는 한 나병환자가 나옵니다. 예수님께 절하며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며 자신을 치유해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는 감히 누구에게라도 자신을 도와 달라고 가까이 갈 수 없는 부정한 자 였습니다.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다면 더러운 문둥병자를 받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손을 내밀어 대시며 말씀 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님은 당연히 너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도 즉시 그의 나병에서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마가복음 3:1-5을 보면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서 한쪽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신 사건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인정받을 수 없고 이용만 당하는 처지의 불쌍한 존재였습니다. 회당에서도 맨 뒷자리가 그의 차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한 가운데에 일어서게 하시고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질문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모두가 잠잠하자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사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의 손을 내밀게 하여 고쳐주십니다.
여기에 세 종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38년 된 중풍병자, 나병환자. 한 손 마른 자. 보통 사람들과 예수님의 이들을 보는 차이점이 달랐습니다 그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그들 존재를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38년이나 된 아무 쓸모없는 무가치한 중풍 병자. 죄의 저주를 받은 더럽고 부정한 사람,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사람, 한 손이 오그라들어 병신이 된 사람. 사람들은 이들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고 자신들과 다른 종족으로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존재를 보셨습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생명을 지닌 소중한 존재들임을 보셨습니다. 그들 존재가 겪는 아픔을 느끼셨습니다. 기꺼이 손을 대서라도 고쳐주어야 할 가치 있는 존재로 보셨습니다. 더 이상 그렇게 누워서 살아서는 안 될 의미 있는 존재들로 보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따스한 시선을 받고 모두가 살아났습니다. 일어나 희망의 삶속으로 일어나 걸어갔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태어나서 무가치한 인생은 없습니다. 아무렇게 나 살아도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처음부터 비난 받고 정죄 받고 버려져야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 합니다. " 나는 여호와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이사야 49:5) 나에 대한 정의를 이처럼 분명하고 명확하게 표현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인간을 이해 할 때 우리는 누구를 대하던지 여기 이 전제로부터 출발해야합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 여호와 앞에 존귀한 존재!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도 안 되는 이유도 레위기는 다른데 두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이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 존재자체를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부족해도, 역할을 못하고 있어도 남편은 남편 존재로 아내는 아내 존재로서 부모는 부모 존재로서, 자식은 아무리 어려도 아이 그 자체로서, 학생은 학생 자체로서 그 존재를 인정 해 줄 때 변화가 오고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일단 있는 모습 그대로 ‘나’라는 존재를 인정해야 내가 변화되는 데. 나를 인정하지 않고 내가 변화되기를 바란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내가 변화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존재 자체를 인정해주시고 사랑해주셨고, 그 후 서서히 변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5절은 이렇게 말 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다시 책의 내용으로 들어가서 정혜신씨가 세월호 특별법 서명을 받던 곳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합니다. 어떤 노인들이 서명대 집기를 부수고 유가족들에게 욕설을 퍼붓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고통스러운 소동이 끝난 뒤 행패를 부리던 노인 중 한 명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소란에 대해서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고향이 어디세요.” 물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오래전 세상을 떠난 아내와 살았던 시절로 갔다가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아들과 며느리 이야기로 옮겨왔습니다. 거리에 버려진 장롱과 같은 그의 삶을 듣다가 눈물이 차올랐습니다. 한 참 있다가 노인이 말했습니다. “내가 아까 그 세월호 유가족에게 한 건 좀 부끄럽지.” “그런 마음 이셨군요. 그러셨군요”. 노인은 스스로 바란 것은 아니지만 사과를 하였고, 속으로 미안한 마음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장혜신 씨는 이렇기 말 합니다. “소동에 관한 이야기 자체만으로는 소동에 관한 진짜 이야기를 할 수 없다. 씨우려는 것이 주목적이 아니라면 방금 전 별였던 소동과 소란을 성찰하기 위해서 노인에게 다른 이야기가 필요하다. 다른 이야기가 바로 ‘나 ’ 이야기 이다. 자기 존재에 대한 이야기 이다. 자기 존재에 집중 받고 주목받은 사람은 설명할 수 없는 안정감을 확보한다. 그 안정감 속에서만 비로소 사람은 합리적인 사고가 가능하다. 사람들이 대화가 안 되는 이유가 비로 이 것입니다. 나를 주목하지 않고 나의 단점이나 약점만 붙들고 잘잘못 옳고 그름만 따지려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애를 써고 증거를 들이밀어도 문제는 제자리에서 꼼작 달싹 움직이지 않습니다.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오랜 경력의 인부들도 힘들어하는 그랜드피아노를 혼자서 옮기는 전문 이사꾼이 있다고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피아노의 어느지점에 집중적으로 힘을 모아야 피아노가 중심을 잃지 않고 들리는지를 몸으로 익힌 사람 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정확한 한 지점도 그랜드피아노처럼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걸 알면 사람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말 합니다. 그 지점이 바로한 개별적 존재로서 그 사람의 고유한 '자기'라는 것입니다. 세월호 폭력 사건 노인이 후회한 것도 자기 삶에 귀 기울어준 사람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변화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도 예외 없이 변하게 하는 그 지점이 바로 ‘자기’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에 공감해주는 사람에게 반드시 반응한다고 합니다. 인간은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고유한 존재들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 존재 자체가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호범씨의 책에도 그런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애틀 동쪽 벨뷰라는 동네에 사는 부부가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다른 것이 아니고 열 다섯 살의 한국 소년을 입양했는데 아무리 잘 해줘도 겉돌기만 한다는 것입니다. 한 살 때 생모가 고아원에 맡긴 후 늦은 나이에 입양된 아이 였습니다. 부탁을 듣고 신호범씨는 아이를 돕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가 농구선수라 3개월 동안 일주에 세 번씩 찾아갔습니다. 그러다 함께 점심을 하게 되었고,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피터야 나도 네 나이에 입양 와서 어려움이 많았는데 너는 어때?” 네 마음은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고개를 숙이더니 닭똥같은 눔물을 떨어트렸습니다. 그러면서 말 했습니다. “나를 입양했으면서 왜 자식대접을 안 해줍니까?” “도대체 어떻게 안 해준다는 거지?” ”저는 진심으로 가족을 그리워했고 자식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아이들은 겨우 일곱 살과 네 살밖에 안되는데도 일을 시키고 말을 안 들으면 때리면서 나한테는 손님처럼 대접만 하는데 어떻게 내가 그 집 자식 입니까? “ 뜻밖의 말을 듣고 그 양부모에게 피터의 마음을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농구장으로 갔더니 그가 웃으면서 뛰어왔습니다. ”닥터 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세요? 어제 우리 아버지가 나를 때렸어요. 내가 아버지에게 맞았다니까요. 하하하!“ 때리고 안 때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아들 존재로 인정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좋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다 자기 존재에 주목을 받은 후부터 제대로 된 내 삶이 시작된다고 장혜신씨는 말 합니다. 청년도 노인도 아이도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도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변화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우리 존재 자체를 보시고 사랑하고 인정해주시는 예수님, 누군들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그랬습니다. 남과 비교하며 경쟁하며 주목 받지 못하고 뒤쳐진 인생을 살 때 행복하지 못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이론적으로는 행복자라고 고백을 하며 살아도 사역 중심이 되고 여전히 경쟁적일 때 저는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용써 봐야 가난하고, 가방끈도 화려하지 못하고, 경쟁에 늘 밀리는 인생입니다.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도 모르고 내 은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며 늘 주변 환경만 바라보며 입에서 부정적인 말과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조금 성과가 있고 잘 될 때는 잠시 행복했지만 그 후에는 어두운 생각들이 또 다시 지배 합니다. 그럴 때마다 나도 좋은 환경에서 무엇인가 새롭게 하면 성공적이지 않을까 먼 산을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이 곳 무안을 떠나 새로운 도시로 가면 어떨까 생각도 많이 해보았습니다. 내가 없으면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곳을 떠나지도 않고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지만 전혀 다릅니다. 내 스스로 행복자임을 느낍니다. 행복을 나누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언제부터? 나 자신을 주목하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성취를 하는가 보다도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존귀한 자인가 나를 스스로 인정하고, 나의 색깔을 찾고, 나 자신의 성장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후부터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이 꽃자리 이고, 나는 세계적으로 하나밖에 없는 부러울 것이 없는 존재, 행복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33: 29말씀도 잘 아시겠지만 존재의 기쁨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저와 여러분들 모두 앞으로는 하나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내 존재가치를 인정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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