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의 꿈 / 송혜영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내가 나를 보고 있다.
두부처럼 허옇고 굵은 팔이 다 드러난 검정색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다. 몸에 딱 붙는 디자인인지 싸이즈가 작은 건지? 어쨌든 허리에 두른 두둑한 전대가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무릎 위로 썩 올라간 스커트 라인도 천박스럽기 그지없다. 왜 저런 민망한 입성을 두르고 있단 말인가.
내가 서있는 곳은 전시장이다. 홀 가운데에 길게 세팅 된 테이블 위에는 과일과 쿠키를 담은 접시와 음료가 일정한 간격으로 죽 놓여있다. 개인전 오픈 파티가 마련되어 있나본데…. 축하객들로 북적거려야 할 전시장에 나 외에 아무도 없다. 꽃다발도 화환도 물론 없다.
아니 저건 또 뭐야. 그림은 칙칙한 색감의 밑도 끝도 없는 비구상이다. 더 나쁜 건 액자도 없이 벽에 압핀으로 고정되어 있는 작품이다. 마치 내가 발가벗겨져 사지가 벽에 못 박혀 있는 것 같다. 내 작품만으로는 전시의 명목이 시원치 않은지 비단에 모란꽃을 화려하게 수 놓은 중국풍의 자수가 고급스러운 치장을 하고 걸려있다. 더욱이 내 작품은 사람들의 눈높이 보다 훨씬 위에 걸려있다.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뇌진탕을 감수해야할 판이다.
이윽고 혀를 차며 바라보고 있던 나와 관찰의 대상이었던 내가 하나가 된다. 최대한 체적을 줄여보려고 아랫배에 힘을 주고 몸을 꼿꼿이 세운다.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전시장으로 들어온다. 혹 대중에게는 좋은 평가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은근히 몸이 단다. 구차한 기대는 곧 차갑게 외면당한다. 그들은 테이크아웃 커피를 손에 들고 잡담을 나누며 어딘가로 가기 위한 통로로 전시장을 이용할 뿐이다.
누구의 눈길도 끌지 못하는 작품이 부끄러워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생각 같아선 실밥이 투두둑 터져나갈 것 같은 원피스를 벗어 던지고 전시장을 뛰쳐나가고 싶다. 하지만 일주일은 채워야 된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진저리를 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식은땀을 삐질 삐질 흘리며 쩔쩔 매다 새벽닭 우는 소리에 꿈에서 놓여났다.
집수리를 앞두고 예사롭지 않다고 기록해 두었던 꿈이 생각났다. 더불어 꿈의 배경과 관련된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옷걸이 노릇을 하며 방구석에 멀뚱히 서있던 이젤을 쳐다보았다. 저도 나도 민망했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채 긴 세월 잊혀졌던 화구들을 들여다보았다. 말라비틀어져 뚜껑과 한 몸이 된 물감과 마당 빗자루처럼 뻣뻣해진 붓, 물감을 덕지덕지 바른 캔버스. 오래 전 마음을 접으면서 왜 그대로 두었을까. 그건 혹시라도 다시 붓을 잡을 여건이 될 때 그들이 몸을 추스르며 자리를 마련해주길 바래서인가. 비싼 물감 팍팍 쓰던 한 때의 영화를 추억하는 도구였나. 어쨌든 구석구석 숨죽이고 있던 이것들이 악몽의 모티브였나 보다.
배경은 그림을 그리던 시절이지만 꿈의 핵심은 그동안 저질러온 창조행위 전반을 관통하는 ‘인정’에 대한 조바심과 그 결과물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그리고 앞으로 절대 입을 수 없는 44 사이즈 원피스로 기차는 벌써 떠났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웅변했다. 오래 묵혀두었던 꿈은 이제야 미련 청산의 계시로 다가왔다.
집수리와 더불어 불가능한 열망과 미욱한 미련에 덜미가 잡혀 쌓아두었던 물건부터 다 정리하기로 했다. 대용량 쓰레기봉투에 각각 다른 성격의 미련 덩어리를 꾹꾹 눌러 담았다. 옷걸이 대용 목재 이젤은 원래의 용도에 관심을 보인 목수의 트럭에 실려 갔다. 오래 전에 망한 구시대의 명품 재킷과 어깨 넓은 코트도 허리가 안 채워지는 꽃무늬 스커트도 다 쓰레기로 전락시켰다. 수많은 나무를 희생 시킨 잡다한 책은 고물로 처리 했다. 긴 세월 벽에 기대어 서있던 죄 많은 캔버스를 마당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잣나무 가지를 밑에 깔고 화장을 시킬 때는 좀 비장한 심정이었다. 불꽃에 녹아내리는 아사 캔버스와 물감 가격을 생각하니 눈물이 찔끔 나왔다.
이제 집안에 불필요한 물건은 없다. 장식도 치장도 없이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기능만 가동하고 살기로 했다. 새로운 필요가 생기지 않도록 자제하는 일이 최대 과제다.
기왕 과거를 청산하는 김에 방마다 꽉꽉 차 냄새를 피우는 머릿속 오물도, 끊어질 듯 위태로운 창조 의지도 다 버리고 싶었는데…. 원치 않아도 서서히 비워져가는 징조가 보이는 걸 굳이 미리 방을 뺄 일은 아니다싶어 그 생각은 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