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온천의 명성과 더불어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동래온천의 기생들 가운데 특히 한동년(韓東年·본명 한설양)은 영남지역의 풍류객이나 한량들 사이에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그는 동래 교방(敎坊:기생양성소) 기생 출신으로 기생조합 창설의 주인공이었다. 용모가 뛰어나게 아름답고 기품이 넘치는 데다 가무(歌舞)에도 일가를 이룰 정도였다. 더욱이 성격이 활달하고 적극적이며 지도력이 뛰어난 여장부의 기질을 타고나 초창기 기생조합 운영의 기틀을 바로 잡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한동년은 서른이 되도록 빼어난 미모를 간직하며 정상의 인기를 누렸다. 그녀는 어느 날 선교를 목적으로 동래 권번을 찾아온 김만일(金萬一) 목사를 기생들을 대표해 만나게 되었다.
기생들의 대모 한동년
김 목사는 독립지사의 외아들로 미국에서 신학대학을 마치고 동래 온천장에 막 창설된 교회로 배치 받은, 당시로서는 드문 한국인 목사였다. 그는 나이 서른이 넘은 노총각이었으며 독신주의자였다.
한동년은 김만일 목사의 정중하고 열정적인 설득에 크게 감동하여 막연하지만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녀는 평소에 아끼던 몇몇 기생들을 모아 시간 나는 대로 김 목사를 찾아가 성경 공부도 하고 설교도 들었다. 그녀는 차츰 종교적 감화를 받으며 깊은 신앙심을 키우게 되었다. 하루는 김 목사를 따라 그 무렵 기독교 재단에서 건립한 용호동의 나환자촌과 고아원을 둘러보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들보다 더 참혹한 불행으로 고통받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권번기생들 봉사활동에도 한마음
한동년은 마침내 김 목사와 의논해 권번 생활을 청산하고 고아들을 돕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그 동안 알뜰하게 모아두었던 꽤 많은 재산을 모두 처분하여 고아원에 기증했다. 일부는 당시 김 목사가 자리를 옮긴 동래 수안교회에 헌금했다. 수안교회에서는 그녀의 지극한 신앙심을 기리기 위해 교회 뜰 안에 공로비(功勞碑)를 세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후일 교회를 신축하면서 비를 없애버렸다고 한다. 그녀는 고아원으로 들어가 아이를 돌보는 보모가 되었다.
김 목사는 한동년의 고귀한 희생정신과 정성에 감동하여 얼마 후 그녀에게 자기와 결혼해 주기를 간청했다. 그녀는 자기는 목사의 아내 될 자격이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나 김 목사는 물러서지 않고 일년이 넘도록 청혼을 거듭했다. 그제야 그녀는 처음의 고집을 꺾고 청혼을 받아들였다.
한동년은 그 후 김 목사를 따라 서울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는 남편을 도와 여러 가지 사회사업에 헌신적으로 봉사하며 여생을 참으로 행복하고 보람차게 보냈다. 그들 사이에는 딸 하나가 태어났다. 그 딸 역시 사회사업가의 아내가 되어 현재 부산에 살고 있다.
힘들게 모은 재산 사회에 환원
뿐만 아니라 한동년은 동래온천의 많은 기생들에게 가장 추앙받고 존경받는 권번의 대선배로 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그녀 이후에도 권번 생활로 어렵게 모은 재산을 여러 사회사업에 기탁하거나 직접 참여하여 여생을 보내는 기생들이 계속 이어졌다. 만년을 사회와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며 의롭게 보내는 일이 동래 권번 출신들의 보이지 않는 전통처럼 되었던 것이다.
1930년대 남도창(唱)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후일 ‘호산장’이란 요정을 경영하기도 했던 이연숙(李蓮淑)도 한동년의 맥을 이어 사회사업으로 여생을 보낸 대표적 인물이다. 그녀는 동명목재 강석진(姜錫鎭) 사장 등과 더불어 부산에서 BBS운동을 가장 먼저 일으켜 청소년 선도운동에 앞장선 주인공이기도 하다.
역시 설득력과 지도력이 뛰어난 여장부였던 그녀는 지방의회의 역할을 대신했던 부산직할시 자문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그녀는 각종 사회복지 시설의 지원과 봉사활동에 헌신하며 만년을 보내다가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삼남매도 모두 훌륭하게 자라, 특히 의학을 전공한 큰아들은 암(癌) 연구 분야에 정통한 박사로서 국내외에 잘 알려진 인물이 되었다.
그밖에도 한동년의 맥과 전통을 이어 권번에서 물러나 요정이나 여관업을 하며 사회와 이웃을 위해 헌신적인 봉사활동으로 일생을 마감한 동래 권번 출신은 꽤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충렬사 찾아 제향 올리기도
동래 권번의 기생들은 해마다 동래시장 안에 있는 송공단(宋公壇)에서 모시는 송공제(宋公祭)와 충렬사(忠烈祠)에서 모시는 향사제(享祀祭)에 참석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송부사와 함께 순절한 금섬(金蟾)을 추모하는 제사를 모시고 있다. 그러니까 동래 권번의 기생들 사이에는 옛날부터 알게 모르게 금섬의 굳은 절의와 기개가 전해져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어느 지역에서건 기생들이 어렵게 모은 돈이나 재산으로 가난한 자기 집안을 도와 형제들을 훌륭하게 공부시키거나 뒷바라지하는 경우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동래 기생들처럼 사회사업에 쾌척하거나 스스로 봉사하는 생활로 뛰어드는 경우는 전국의 어떤 기생사(史)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1940년대로 접어들면서 동래 온천장은 우리나라 온천의 대명사처럼 통용되며 전국적인 관광휴양지로 발돋움했다. 온천장의 요정과 여관업자들은 2km나 떨어진 동래에 있는 권번을 온천장으로 옮길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비록 인력거나 택시로 빠르게 오간다고 해도 불편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불편하기는 기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그 무렵에는 아예 온천장에 자리를 잡고 사는 기생들도 늘어났다. 낮에는 동래 권번까지 가고 오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지만, 밤늦게 동래로 되돌아가기란 아무래도 성가시고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함께 모여 살며 동료애 발휘
그러나 기생들은 자신들의 신분의 특수성 탓에 되도록 한 이웃에 몰려 살고자 하였다. 서로의 속내를 잘 아는 사람들끼리 이웃해 살면 아무래도 낯선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사는 것보다 안도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당시 온천장의 기생들은 지금의 늘봄호텔 맞은 편이자 동일호텔의 왼편에 자리잡고 있는 주택가 일대에 몰려 살았다. 그래서 온천장 사람들은 그곳을 광복 후에도 오랫동안 ‘기생마치(妓生町)’이라 불렀다.
어쨌거나 온천장 요정과 여관업자들의 요청과 기생들의 불편함이 서로 맞아 떨어져, 동래 권번은 30년 간의 명륜동 시대를 청산하고 1940년 온천동 188번지(지금의 온천시장 통 온천 슈퍼마켓)로 자리를 옮겼다. 바로 중일전쟁이 일어난 그 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