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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신앙 ( 민 13: 25-14: 10 )
<무엇을 보십니까?>
아버지와 아들이 사막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여러 날 동안 정처 없이 인가(人家)를 찾아 방황했습니다. 가도 가도 사람 사는 마을은 나타나지 않고 두 사람은 지쳐버렸습니다. 먹을 것은 물론이고 물도 마시지 못한 채 사막길을 헤맸기에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갔습니다. 그 때 저 멀리서 공동묘지 같은 것이 보였습니다. 그 순간 아들은 완전히 절망했습니다. "아버지, 이제 모든 것은 끝장났어요. 우리같이 길 잃은 사람들이 헤매다가 죽은 무덤이 저기 있잖아요. 우리도 저 사람들처럼 죽어서 무덤에 묻히고 말거예요." 그러나 아버지의 태도는 달랐습니다. "애야, 그게 아니란다. 저기 저렇게 공동 묘지가 있다는 말은 인가가 가까이 있다는 말이 아니겠니? 우리 조금만 더 걸어가 보자. 분명히 마을이 나타날 거란다."
누구의 말이 옳을까요? 아들일까요? 아버지일까요? 아버지의 말이 옳습니다. 공동묘지가 있다는 말은 누군가 그 무덤을 만든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니 과연 무덤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있어서 두 사람은 구조되었습니다.
아들이나 아버지나 육신의 눈을 가졌으니 눈앞에 나타난 무덤은 똑같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무덤을 바라보는 태도는 전혀 달랐습니다. 아들은 부정적이고 비관적으로 보았습니다. "야, 저기 저렇게 무덤이 있는데 우리처럼 길 잃은 사람들이 죽어 넘어진 곳이 아닌가? 이제 우리도 저 사람들처럼 비참하게 죽어 저 곳에 묻히겠구나." 무덤의 이미지가 죽음이니 즉각적으로 자기들의 죽음을 예감하고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무덤을 보았습니다. 무덤 안에 들어가 있는 죽은 시신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 죽은 사람들을 장사지낸, 산 사람들을 먼저 떠올렸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 이제는 살았구나!" 하고 희망의 탄성(歎聲)을 질렀던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현실은 똑같은데 보는 사람의 태도는 이렇게 서로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현실이 아니라 이 현실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이것은 '육의 눈'과 '영의 눈'의 차이입니다. 육의 눈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눈앞에 보이는 것만 봅니다. 그것도 부정적이고 비관적으로 보기 쉽습니다. 반면에 영의 눈을 가진 사람은 보이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없는 것까지 봅니다. 현실이 아무리 암담하고 절망적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미래에 하실 일들을 미리 봅니다. 그리하여 언제나 희망적이고 낙관적으로 사물을 봅니다!
<12정탐꾼들의 가나안 탐지 보고서>
여러분, 이러한 원리는 오늘 본문 말씀에도 어김없이 나타납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코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이미 그 땅에는 강대한 토착민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무혈입성(無血入城)이 아니라 정복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모세에게 가나안 땅에 정탐꾼, 즉 스파이들을 미리 보내어서 탐지(探知)할 것을 지시하셨습니다. 12 지파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들을 각 지파대로 12명을 뽑아서 가나안 땅에 밀파(密派)를 했던 것이지요.
민 13: 18-20을 보면 정탐꾼들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는 땅을 살피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요, 약속의 땅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오라는 것이지요. 출 3: 8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출 3: 17 참조). 이렇게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오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미리 약속해 주신 축복의 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정탐꾼들에게 주신 사명은 바로 이 땅을 살피고 오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땅을 살피는 것이 주임무였는데, 이 땅을 살피기 위하여 부차적인 임무도 주어졌습니다. 예컨대 그 땅에 사는 백성들이 강한지 약한지, 숫자가 많은지 적은지, 땅이 좋은지 나쁜지, 그들이 사는 마을이 장막촌인지 요새화된 성읍인지, 토지가 기름진지 메마른지, 거기에 나무가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고 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스파이 활동의 증거물로서 그 땅의 과일도 가져오라고 명령했습니다(민 13: 20). 때마침 포도가 처음 익을 무렵이었기에 포도송이를 따오기에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결국 12명의 정탐꾼들은 40일 동안 가나안 땅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돌아왔습니다. 40일이라는 숫자는 완전 숫자이므로 정탐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문제는 스파이 활동을 마친 정탐꾼들의 보고가 판이(判異)하게 달랐다는 사실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된 정사인 황윤길(黃允吉, 1536-?)과 부사인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의 보고가 달랐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김성일 쪽에서는 일본이 쳐들어 올 기미가 없으니 안심하라는 보고였고, 황윤길 쪽에서는 일본이 곧 침략을 할 것 같으니 단단히 방비를 해야 한다는 보고였습니다. 결국, 당시 동인(東人)과 서인(西人) 간의 당파 싸움 때문에 조정에서는 괜찮다는 동인 쪽의 보고를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 아닙니까?
비슷한 맥락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의 정탐꾼들은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 곳에 정착해 살고 있는 토착민들이 너무 강하고 담대해서 우리 이스라엘 사람들은 도저히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보고였습니다. 이와 같이 부정적인 보고를 듣자 백성들 사이에 동요가 일어났습니다. 바로 이 때 갈렙이 일어나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에 얼마든지 들어가 토착민들을 이기고 땅을 얻을 수 있다는 보고였습니다!
자, 중요한 것은 오합지졸(烏合之卒)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렙의 보고는 듣지도 않고 10명의 정탐꾼들 이야기만 들었다는 사실입니다. 10 대(對) 2, 벌써 숫자부터 부정적인 보고를 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으니 믿음 없는 백성들은 부정적인 보고에만 귀가 솔깃했던 것은 당연하지요. 이렇게 하여 백성들이 밤새도록 소리를 지르고 통곡했습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을 퍼붓습니다.
본문 14: 2-4를 보세요.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참 기가 막힌 광경이 아닙니까? 부정적인 보고를 하는 사람들 말만 듣고서는 원망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를 여기에 끌고 와서 죽게 만드느냐? 이제 우두머리 한 사람을 세워서 당장 애굽땅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도 전에 적전분열(敵前分裂)이 일어나 벌써 심리적으로 패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부정적인 보고는 이렇게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대중들은 부정적인 보고만 듣고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는 시도(試圖)를 한번 해보기도 전에 두려움에 떨게 된 것입니다. 이 때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대는 회중들 앞에서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은 어떤 자세를 취했습니까? 14: 5을 보세요.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무슨 말입니까? 믿음 없고 어리석은 백성들이 태도에 그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자, 이제 중요한 것은 이렇게 형편없이 흔들리는 백성들을 보다가 두 사람이 분연히 떨쳐 일어났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었습니다. 이들은 극한 의분(義憤)의 표시로 옷을 찢고 외쳤습니다. 14: 7-9을 보세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정탐꾼들 중에 절대 다수인 10명이 안 된다고 해도 두 사람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다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10명의 정탐꾼들과 달리 여호수아와 갈렙은 적극적인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12사람이 똑같은 현실을 보고 돌아왔지만 그 결과에 대한 보고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10명의 정탐꾼들과 여호수아/갈렙의 차이점>
이제 우리의 관심을 부정적인 보고를 했던 10명의 정탐꾼들과 긍정적인 보고를 했던 여호수아와 갈렙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 살펴봅시다. 초점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질문을 이렇게 한번 만들어 봅시다. 10명의 정탐꾼들이 본 것과 보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요? 이 질문은 거꾸로 "10명과 달리 여호수아와 갈렙이 본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도 될 것이기 때문에 아주 중요합니다.
① 문제가 되는 장애물들만 보았지 정탐의 주목적이 되는 땅은 보지 못했습니다.
모세가 12명의 정탐꾼들을 보낸 곳은 가나안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기에 땅을 살펴보라고 스파이들을 보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탐의 주목적은 땅을 살피는 것입니다. 거기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어떤 장애물들이 도사리고 있는지는 두 번째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명의 정탐꾼들은 주목적인 땅보다는 땅을 둘러싸고 있는 문제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여러분, 어떤 일을 하든지 문제없는 곳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 크고 작은 문제가 있습니다. 넘어서야 할 장애물들이 첩첩산중(疊疊山中)으로 기다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문제가 많고 장애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압도당해서는 안 됩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을 보세요. 모세가 시킨 대로 포도 한 송이가 달린 가지를 꺾어서 두 사람이 막대기에 꿰어 둘러매고 왔습니다(13: 23). 가나안 땅이 비옥한 곳이었기에 석류와 무화과도 가져왔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의 처음 보고를 보면 그런 대로 긍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13: 27을 보면 가나안 땅에서 가져 온 과일들을 보여주면서 그 곳이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말이 끝나자마자 부정적인 말을 합니다. 땅은 좋은 땅인데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13: 28-29을 보세요.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하더이다." 땅은 괜찮은데 그 곳에 살고 있는 토착민들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들어가기에 장애가 된다는 것입니다.
자, 여기까지는 그런 대로 객관적인 사실을 보고했다고 보여지지만 13: 31-33이 문제입니다. 부정적인 보고를 하는 10명의 정탐꾼들을 보다 못해 갈렙이 일어났습니다. 30절에 보면 "우리 다 올라가서 그 땅을 점령합시다. 우리는 반드시 그 땅을 점령할 수 있습니다!" 확신에 차서 긍정적인 보고를 했던 것이지요.
이 때 이 말을 들은 10명이 벌떼처럼 덤빕니다. 31-33절을 보세요.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가로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갈렙의 긍정적인 보고를 듣자마자 태도가 돌변(突變)해서 아주 부정 일색의 보고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너무도 강한 사람들이어서 우리가 이길래야 이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나안 땅에 대해서만큼은 좋게 이야기하다가 태도를 급변하여 악평을 했습니다. 가나안 땅이 거민을 삼키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여러 족속들이 전쟁을 해서 끝없이 사람들을 잡아먹는 저주의 땅이라는 것이지요.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신장이 다 장대한대 특히 거인족 네피림(창 6: 4 참조) 후손인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니 우리는 메뚜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주목적인 가나안 땅은 점점 초점으로부터 멀어졌고 그 땅을 정복하기 위하여 넘어야 할 장애물들만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10명의 정탐꾼은 문제는 크게 보고 주목적인 땅은 작게 보았습니다. 반면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땅은 크게 보고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 넘어야 할 장애물은 작게 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양쪽 진영의 건널 수 없는 차이였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일을 하시든지 간에 목표를 분명히 정하십시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문제가 있고 장애가 있습니다. 그러나 목표가 중요한 것이지 문제와 장애물에 의하여 압도당하면 안 됩니다! 목적 의식이 분명한 사람은 어떤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② 사람만 보았지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주목적인 땅 이야기는 아주 조금만 언급하고 내내 사람들 이야기만 하고 있습니다. "이러이러한 족속들이 살고 있는데 다 강하고 큽니다. 거인족인 그들에 비하면 우리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뚜기와도 같아서 이길래야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사람만 보고 왔습니다. 아무리 장대한 거인족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은 보지 못했던 것이지요!
반면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의 배후에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을 보면 두렵고 실망스럽지만 가나안 땅을 주시마 약속하셨던 하나님을 보면 얼마든지 승산(勝算)이 있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14: 7-9을 보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므로 능히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 한 분이시지 원주민 거인족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밥으로 삼으셨다고 선언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똑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다고 할지라도 사람만 보는 사람은 넘어집니다. 낙심합니다. 포기합니다. 두려워 떱니다. 염려합니다. 그러나 문제의 배후에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를 쥐고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일어섭니다! 희망을 갖습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담대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문제를 만나더라도 사람만 보아서 안 됩니다. 사람을 지으시고 모든 문제 해결의 원동력(原動力)이 되시는 주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우실 것입니다!
③ 현재만 보았지 미래는 보지 못했습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의 현재만 보았습니다. 그 곳 토착민들이 보통 강한 것이 아니고 성읍들이 얼마나 견고한 요새로 되어 있는지 모르며 장대한 거인족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은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쓰러지고 말 것이라는 비관이지요. 사실, 이들이 본 것이 결코 틀린 말은 아닙니다. 어쩌면 정확한 실상을 보고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 땅의 현재만 보았지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복하여 누리게 될 축복의 땅은 미쳐 보지 못했습니다. 믿음 없이 세상적인 현실만 보았지 하나님께서 다스리실 미래의 땅, 영광의 땅, 축복의 땅, 약속의 땅은 미쳐 보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사과 속에 있는 씨앗은 셀 수 있지만 씨앗 속에 있는 사과는 셀 수 없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사과 속의 씨앗'은 현재를 말하며, '씨앗 속에 있는 사과'는 미래를 말할 것입니다. 현재는 뻔히 보이지만 미래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리해서 현재는 보이는 것만 가지고 너무나 쉽게 계산할 수 있지만 미래는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쉽게 헤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과 속에 있는 씨앗'보다 '씨앗 속에 있는 사과'가 장차 훨씬 더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당장 눈앞에 보이지는 않지만 엄청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옳습니다. 미래에 대한 푸른 꿈을 가진 사람들만이 오늘 사과 씨앗 속에서 열리게 될 무수히 많은 열매들을 미리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히 11: 1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믿음을 가진 사람은 현실이 아무리 실망스럽다고 할지라도 현재만 보지 않습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될 미래를 미리 보면서 용기를 갖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문제를 만나더라도 그 답답한 현재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찬란하게 다가올 미래의 영광도 함께 보셔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만 약속의 땅, 축복의 땅을 밟을 수 있습니다!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향하여>
부정적인 보고를 했던 10명의 정탐꾼들과 이들의 말만 듣고 동요를 일으켰던 백성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민 14: 29을 보면 끔찍한 말씀이 나옵니다. 백성들 중에 20세 이상이 된 사람들 중에 하나님을 원망한 사람들은 광야에서 시체가 되어 나뒹굴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14: 33-34을 보면 이들의 불신앙 때문에 정탐한 날수 40일의 하루를 일년씩 환산하여 자그마치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방황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태도가 이렇게도 무서운 심판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14: 36-38을 보면 가나안 땅에 대하여 나쁜 소문을 퍼뜨린 10명의 정탐꾼들은 하나님 앞에서 재앙을 받아 죽어 넘어졌지만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 살아남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부정적인 보고를 했던 10명의 정탐꾼들이나 이들의 말만 듣고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던 백성들은 모두 애굽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길들여진 불신앙과 현실안주의 소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갈 자격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미래에 펼쳐 주실 약속과 축복의 땅, 가나안 땅은 보지 못하고 사람들과 온갖 장애물로 둘러싸인 가나안 땅의 현재만 보았기에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은 이와 같이 애굽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백성들을 광야에서 모조리 쓸어버리시고 긍정적인 믿음, 미래 지향적인 믿음, 진취적이고 개척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들을 새로 일으켜서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원하십니까?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삶의 태도를 버리셔야 합니다. 애굽적인, 병든 신앙을 과감히 청산해야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이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믿음으로 무장하여 불가능성 속에서 가능성을, 장애물 속에서 해결 방법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가 제 2의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가나안 땅의 주인공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글쓴이: 엘리야
이병천 목사 / 믿음의 안경 (민 13:30-14:10)
I. 서론
오산교회에서 사역할 때의 일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예배당 정면의 스크린이 뿌옇고 글씨가 잘 안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생각하기를 ‘빔프로잭트의 전구가 낡아서 조도가 많이 떨어졌구나! 그렇다면 전구를 빨리 갈던가, 글씨를 더 크게 해서 잘 보이게 해야 되는데...’ 그리고 어느 날 직원회의 때, 예배 시에 정면 스크린의 글씨들이 잘 안보이는데 전구를 새것으로 갈든가 아니면 글씨를 크게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모든 직원들이 저를 바라보며 하는 말이, ‘우리는 잘 보이는데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전도사님이 말씀하시기를 ‘목사님, 안과에 가보세요. 목사님 시력이 문제인 것 같은데요!’
그래서 일부러 시간을 내어 안경점에 들렀습니다. 그리고 시력검사를 하고 난 후, 안경을 써보았습니다.
‘와~... 이럴 수가.... 이렇게 잘 보이다니....’
그동안 잘 안보이던 주변여건들이 환히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이제는 언제 어디서나 안경을 꼭 쓰고 다니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물들을 또렷이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주었습니다. 밝은 세상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눈이 어두워지고 말았습니다. 저마다 세상을 바로 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늘도 희미하고 사람도 희미하고 내가 가야할 세상도 희미하기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세상을 주신 것이 아니라, 밝은 세상을 어둡게 볼 수밖에 없는 어두운 우리의 눈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들에게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믿음의 안경을 주셨습니다. 이 믿음의 안경을 쓴 사람에겐 구원의 길이 보입니다. 영생의 길이 보입니다. 추한 세상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어두운 세상이 밝게 보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교인이 되었다 하면서도 이 믿음의 안경을 쓰지 못해 만사를 어둡게만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II. 본문의 배경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그 곳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이요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생전에 자기 가족 무덤으로 사용된 몇 평 남짓 막벨라굴 외엔 자기 땅을 갖지 못했고 이삭도 야곱도 이 가나안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 가나안을 아브라함 씨족에게 주었더라면 큰일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필시 주변 강대국들이 아브라함 가족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차지하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을 관리할 수 있을 때까지 약 400년간 당시 초강대국이었던 애굽의 품안에 숨겨두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애굽을 일컬어 이스라엘 민족의 어머니 품, 혹은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것이라고 부릅니다. 400년 종살이가 끝나고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 그 땅을 정탐하는 사건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요 영적 선민이요 영적 이스라엘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을 위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예비하셨듯이 오늘날도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축복의 땅, 약속의 땅을 예비해 놓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땅을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불신앙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고, 기쁨과 환영과 신앙으로 영접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전자를 눈 나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면 후자는 믿음의 안경을 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열두 명의 정탐꾼을 보낼 때 그 가나안 땅을 무엇이라고 부르는고 하니, 민수기 13장 2절에 보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이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땅을 불신앙으로 거부한 일단의 무리들이 있는가 하면 믿음의 눈으로 쟁취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장애물만 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목표와 약속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곤충연구가로 유명한 쟝앙리 파브르가 날벌레를 연구하다가 그들의 우매함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날벌레들은 앞에 무엇이 있으면 죽자사자 따라다닙니다. 기아상태에서 질식하여 죽을 때까지 따라다닌다는 겁니다. 가까운 곳에 먹을 것이 있건만 방향 없이 무턱대고 행동하는 놈이 날파리입니다. 여러분 날파리 보셨지요. 아마 세상에서 가장 분주히 날아다니는 벌레가 날파리, 하루살이 일 겝니다. 주체성 없는 놈이지요. 곤충 가운데도 보호색 곤충이 있다고 합니다. 초목에 따라 피부색이 변하는 보호색 곤충은 대개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습니다. 눈이오나 밤이나 낮이나 자기 색깔을 가지고 있는 곤충들이 오래 살고 건강합니다. 세상 돌아가는데로 보호색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목표도 없이 하루살이처럼 분주하게만 뛰어 다니는 사람들은 건강하지 못한 신앙인입니다. 독야청청, 푸른 신앙인 그가 건강한 신앙인이지요. 목표 없이 헛수고하는 사람은 날벌레와 같은 사람입니다.
마하트마 간디에게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군사도 없이 병력도 없이 돈도 없이 그토록 강력한 대영제국으로부터 당신의 조국을 해방시킬 수 있었습니까?" 간디가 대답합니다. "내게는 내 조국을 해방시켜야 되겠다고 하는 목표가 있었습니다." 목표는, 믿음은, 군사력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III. 두 개의 눈(관점)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열두 명 가운데 열 명은 이렇게 말합니다.
13장 18절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13장 31절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13장 32절-33절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한마디로 "불가능하다. 포기합시다" 철저히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보고 외에는 아무 것도 내어놓을 것이 없었습니다.
이에 반해 긍정적이고 신앙적인 눈, 믿음의 안경을 가졌던 갈렙과 여호수아 두 사람의 얘기를 들어봅시다.
14장 7절-9절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이것 보십시오. 이들 두 사람도 다른 열 사람과 똑같은 땅을 보았습니다. 같은 산야 를 탐지했습니다. 똑같은 환경을 보고 왔습니다. 그러나 보는 시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열 사람은 인간의 눈, 불신앙의 눈으로 상황을 보았고 갈렙과 여호수아는 신앙의 눈, 하나님의 시각으로 믿음의 안경을 쓰고 그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이들의 시각 여하에 따라서 펼쳐지는 세상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십니까?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을 어떻게 해석하십니까? 날마다 부딪히는 커다란 난관과 인생의 문제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살아가십니까? 시각여하에 따라 우리 삶의 모습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병원 같은 병실에 두 사람의 환자가 있었습니다. 안쪽 침대에 있던 사람은 조용해서 묵상하기가 좋고 정신적으로 안정이 되어 좋다고 말했습니다. 창가의 환자는 밖이 산만하여 혼란스럽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래서 양해를 구하고 침대를 바꿔 주었지요. 안쪽으로 바뀐 불평환자는 이번엔 보이는게 하얀 벽뿐이니 우울증에 시달렸고 미치겠다고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그러나 창가로 옮겨진 감사환자는 지나가는 사람을 바라보며 자신의 건강을 꿈꾸었고 부지런히 돌아가는 세상을 보며 이 세상 한켠에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무한히 감사하며 살 수 있었던 게지요.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있는 자리에 문제가 아니더란 말입니다. 위치와 환경의 문제가 아니더란 말입니다.
불평하다 보면 불평도 체질화되어 집니다.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면 기뻐하는 삶이 내 앞에 펼쳐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삶의 상황여하에 상관없이 감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IV. 불신앙의 눈
우선 약속의 땅을 자신의 땅으로 정복하지 못한 불신앙의 눈을 살펴보십시다.
가나안 정복을 그토록 불가능한 일이라고 열을 내어 외쳤던 그들을 살펴보십시다. 그들의 태도를 성경은 건전한 평가이거나 일리 있는 관찰이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악평"이었다고 단언합니다. 13장 32절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불신앙의 눈은 상황을 악평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내 인생의 계산에 넣지 않는 삶, 인간이 가진 자원과 능력만 영악하게 계산하고 따지는 주판놀이에는 언제나 불가능뿐입니다.
열 사람의 보고를 잘 관찰해 보면 하나님 얘기가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 이 두 사람의 짤막한 보고 가운데는 "여호와 하나님"이란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나아가 하나님의 눈을 가지지 못한 그들은 문제를 과장하고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능력이나 자원을 비굴하리만큼 왜곡하고 맙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상대는 거인이요 우리는 메뚜기와 같았다" 이 얼마나 비굴한 자학이었으며 잘못된 열등감이었습니까? 이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시각은 염병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퍼져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망하며 괴로워했습니다.
14장 1절부터 보십시다.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이 광야에서 죽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대답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광야에서 죽기를 원하느냐. 광야에서 죽게 해 주마.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너희에게 해 주리라.”
좀더 나아가 보십시다. 신앙적인 보고를 했던 갈렙과 여호수아를 향해 군중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14장 10절입니다.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했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자만 가지고 다가오는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은 약속을 쟁취할 수 없습니다. 두려움의 눈으로 미래를 보는 사람에겐 승리는 아무런 약속을 주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기적을 믿지 않는 불신앙의 눈은 늘 세상과 환경을 불가능한 도전으로만 생각합니다.
만사를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을 만나든지 긍정적인 믿음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이 긍정적인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밥 한 그릇을 먹어도 어떤 사람은 이것은 이래서 맛이 없고 저것은 저래서 몸에 안좋다고 얘기하며 밥을 먹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은 이래서 맛있고 저것은 저래서 몸에 좋다고 그러면서 밥을 먹습니다.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는 사람들도 보면 결혼은 연애의 무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결혼은 연애의 꽃이요 열매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결혼해도 후회하고 안해도 후회한다고 말 합니다. 그것이 진리인양 떠벌리고 다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결혼해서 후회 하지 않습니다. 설사 결혼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불신앙적 태도를 한마디로 하나님을 "멸시"하는 태도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태도라고 말합니다.
이어지는 1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고 나무라십니다.
환경만 바라보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믿노라고 하면서 조금만 어려워지면 물러서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었습니다. 반석이 터져 샘물이 쏟아져 나올 때 그들은 믿는다고 얘기했습니다. 홍해가 갈라질 때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만나가 내려지는 아침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에 부딪히니까 힘든 일에 부딪히니까 그들의 믿음은 맥을 추지 못하고 후퇴하고 맙니다. 삶의 난제와 어려운 환경 속에서 그들의 믿음은 구체적으로 문제를 공략하지 못했습니다.
이것 보십시다. 문제 앞에서 그들은 먼저 포기했습니다. 불가능하다고 선언했습니다. 악평했습니다. 여기에 머문 것이 아니라 문제를 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나 문제는 문제자체보다 문제를 과장하는 데에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마침내 이들은 삶의 현장, 믿음의 대열에서 비틀거리다가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믿노라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하나님의 시각을 갖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히10:38) 하나님의 사람들도 이 세상 살아 갈 때 어려움 만날 수 있지요. 태산 같은 문제가 우리 앞에 가로놓여 있을 때가 있지요.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고독에 울 때가 있지요. 그러나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의 시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믿음의 말을 하며 살아갑니다. 믿음의 소망을 안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승리하기를 원하십니까? 믿음의 눈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약속의 땅을 정복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믿음의 안경을 끼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정복하며 악을 정복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품위 있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V.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산 사람
이제 믿음의 안경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가나안 땅을 바라본 사람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9절) 이 얼마나 당당한 외침입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선언입니까?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우리가 예수를 나의 주님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순간 성령의 능력이 내게 찾아옵니다. 지금까지 내가 가지지 못했던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이 내 삶의 중심에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이 순간 우리의 눈은 하나님의 눈으로 바뀌어 집니다.
사람의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면 황량한 사막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그 땅을 보는 순간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다운 땅으로 바뀌어 집니다.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면 오합지졸을 데리고 가나안을 정복한다고 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안경,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가나안을 바라보는 순간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능히 이길 수 있다. 무한한 힘이 용솟음치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여러분 속에 하나님의 성품이 있습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떠나지 않고 동행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여러분을 감동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눈이 이미 여러분에게 주어 졌습니다. 이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만 하면 세상은 여러분의 몫이 될 것입니다.
루즈벨트는 성경의 수많은 인물 가운데 여호수아를 가장 존경했습니다. 수많은 글들 가운데 여호수아서를 가장 많이 읽었다고 합니다. "강하라 담대하라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을 읽을 때 가슴이 두근거리며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 말씀을 부둥켜 쥐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땅을 정복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미래를 정복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내게 부딪히는 인생, 불가능을 정복하기 원합니다.’ 그는 과연 장애를 디디고 일어섰습니다. 세계적인 대공항을 극복하는 위대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여호수아처럼 믿음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미래는 바로 당신의 밥으로 보이게 될 것입니다. 밥은 클수록 좋은 것입니다. 밥이 강하면 얼마나 강하겠습니까? 사나이 대장부가 밥이 크다고 밥그릇 끌어안고 우는 사람 봤습니까? 정히 먹다가 못 먹으면 남기면 그만입니다. 저들은 우리의 밥이다.
왜 두려워하십니까? 무엇을 두려워하십니까? 왜 그렇게 슬퍼하십니까? 왜 그렇게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까? 왜 짜증을 내며 살아가십니까? 삶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면 삶은 의미가 있습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힘을 내십시오.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갈렙은 미래의 땅 가나안을 보고 외쳤습니다. "야, 이 땅 아름답구나. 이 땅은 내 밥이다. 내 땅이다. 나는 이 백성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우리에게 맡기시든지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은 절대로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며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 모든 환경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사람에게는 축복에 복을 더하여 주십니다.
세상 살다보면 역경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외치십시오. "야, 이것 정말 감사하구나. 하나님께서 내 앞에 진수성찬을 차려 놓으셨구나. 이것 꿀꺽 삼키고 나면 더 큰 은혜를 주실 거야. 이 태산 넘고 나면 축복의 땅이 펼쳐 질 거야. 이 고난의 강이 갈라지고 나면 하나님의 약속이 내 앞에 펼쳐지게 될 거야." 믿어지시면 "아멘" 하십시다.
VI. What then? (결과)
불신앙의 눈을 가진 사람과 믿음의 안경을 가진 사람들의 결국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선 불신앙적 안목으로 세상을 보았던 사람들을 향한 말씀이 14장 2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그 조상들에게 약속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반면 믿음의 안경을 쓰고 가나안을 바라보았던 갈렙과 여호수아에게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이어지는 24절 말씀입니다.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믿음을 가진 사람과 그 자손이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되리라. 할렐루야!
1960년대 초 미국에 등산하는 청년들 가운데 세계의 최고 높은 산인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하려는 수차례의 시도들이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일단의 청년들이 다시 정복하기로 결심하고 에베레스트 등정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출발하기 직전 몇몇 심리학자들과 기자들이 이 젊은이들과 함께 인터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신들이 이번에는 이 산을 정복할 수 있다고 믿는가?" 첫 번째 청년이 대답하기를 "글쎄요" 두 번째 청년은 "그렇게 하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세 번째 청년은 "최선을 다해보겠다"고 말했습니다. 네 번째 청년은 "한번 해 보지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다섯 번째 청년 짐 위트카는 "I can do! 나는 할 수 있습니다." 1963년 5월 1일 네 명의 친구들의 목숨을 그 산길에 파묻고 차가운 얼음장 밑에 두고 위트카는 홀로 8,880m 에베레스트 정상에 미국의 성조기를 최초로 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내려와 외쳤습니다. "I can do, you can do, every body can do. 나는 할 수 있습니다.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할 수 있습니다."
한 해의 삶의 정복을 위해서 우리는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새해를 출발했습니다. 여러분을 짜증스럽게 만들고 포기하게 만드는 수많은 난제들이 여러분 앞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인생에서 하나님을 빼고 계산을 하면 언제나 불가능 밖에 해답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기뻐하시면, 여러분이 걸어가는 그 길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나는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할 수 있습니다. 약속의 땅 정상에 여호와 닛시! 승리의 십자가 깃발을 보라는 듯이 꽂고 하나님 나와 함께 하셨습니다. I can do! 외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홍문수 목사 / 거인 나라 소인 나라 (13:30-14:10)
흔히 이 시대를 가리켜 ‘불안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현대인들은 비교적 안정된 사회에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문제로 두려워하며 살아갑니다. 질병, 사건, 사고, 노후, 그리고 죽음 등 매사에 불안감을 느끼며 삽니다.
「대한불안의학회」의 연구자료(주간동아 2006년 3월)에 의하면, 우리나라 성인 4명 중 1명꼴로 불안과 관련된 증상으로 시달린다고 합니다. 서울과 5대 광역시 성인남녀 1천명 대상으로 면접 조사를 실시했는데, 그 중 25%가 불안 관련 증상을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6%는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을 정도의 심한 불안감을 느껴 상담이나 치료 필요한 케이스였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안을 느끼며 사는지 놀라울 정도입니다.
최근에는 경제 위기와 여러 가지 사회 불안으로 두려움이 증폭되는 것 같습니다. 일단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결코 행복할 수 없고 인생에서 승리할 수도 없습니다. 세계대공황 당시였던 1930년대에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국민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 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말대로 많은 사람들이 현실보다 과도한 두려움의 허상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로 인해 스스로 불행해지고 쉽게 실패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해결해야 될 중요한 문제가 바로 ‘두려움의 문제’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통해 두려움의 문제를 해결하고 늘 행복하고 승리하는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 광야를 통과할 때의 기록입니다. 그들은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 부근에 와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정탐을 실시합니다. 지파별로 1명씩 대표를 뽑아서 12명의 정탐꾼이 40일간 정탐을 다녀옵니다. 그런데 정탐꾼 12명의 의견이 두 패로 갈렸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나머지 10명으로 갈린 겁니다. 그 내용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 두려움 : 실패로 가는 지름길
본문을 살펴보면, 무엇보다 먼저 두려움이 우리 인생에 얼마나 나쁜 것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두려움은 실패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두려운 마음을 품은 채 승리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이 뭐라고 보고합니까? 그 땅이 좋기는 한데 거주민들이 워낙 강해서 ‘정복 불가능’이라는 겁니다. 13:31절을 보시죠. “...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 그들은 이미 두려운 마음에 사로잡혔습니다. 싸워보지도 않고 패배의식에 움츠러든 겁니다. 13:33절.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아낙 자손은 네피림의 후손인데 거인족입니다. 자기들보다 덩치도 크고 무장 상태가 만만치 않아서, 자기들은 마치 메뚜기 같이 보였다는 겁니다. 난쟁이나 소인만도 못하니 승리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보나 마나 실패할 게 뻔했습니다.
그들의 한심한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 어떤 조치를 내리십니까? 14장 후반부를 읽어보면, 먼저 10명 정탐꾼을 즉결 처단합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20세 이상 제1세대는 몽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정탐 기간 40일을 하루 당 1년으로 환산해서 40년 동안 광야를 뱅글뱅글 돌게 만드셨는데, 그러는 동안 기성세대는 모두 시체가 됩니다. 구약 신학자 레온 우드에 의하면, 하루 평균 80명 시간 당 7명꼴로 죽었다고 합니다. 그 동안 성인 남녀 120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저기서 애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을 겁니다. 가나안 땅의 축복에서 제외된 것도 비참한데, 날마다 슬픔과 고통으로 탄식할 수밖에 없었으니 얼마나 한심합니까?
이처럼 두려움은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다 망가뜨립니다. 그리고 결국은 멸망으로 끌고 갑니다. 예를 들어 질병의 문제만 해도 두려움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요즘 의학이 많이 발달되어 웬만한 병은 다 고칩니다. 중병으로 인식되는 암도 완치율이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치료 과정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치병(治病) 이전에 치심(治心)해야 된다는 겁니다. 한 영국인 의사가 질병과 마음의 상관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임상 실험을 해보았답니다. 암환자들에게 항암제 대신 소금물을 투여했더니, 환자들 중 30%에게 탈모 현상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두려움이 그런 결과를 낳은 겁니다.
여러분, 서울의대 명예교수이며 대통령 주치의를 역임한 고창순 박사에 관해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 분은 본인이 의사이면서 대장암, 십이지장암, 간암 등 암을 달고 살았던 분입니다. 다행히 암을 잘 이겨내고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가 강조하는 바가 바로 두려움을 이기고 담대하라는 겁니다. 그의 책 제목「암에게 절대 기죽지 말라」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두려워하는 대신 웃으라고 충고합니다. 웃음은 부작용 없는 항암제라는 겁니다.
이처럼 두려움이 얼마나 우리 인생에 나쁜 것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두려워할수록 현실의 문제가 더 커 보이고 그 문제에 사로잡혀 살게 됩니다. 인간이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100전 100패입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고양이 앞의 쥐걸음”이라는 말이 있죠. 쥐는 본래 뒷다리가 길어서 얼마나 빠르지 모릅니다. 그런데 일단 고양이를 보면 부들부들 떨면서 맥을 못 추고 기어갑니다. 결국 잡혀 먹고 맙니다. 어떤 문제든지 그 앞에 두려운 마음이 생기면 실패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2] 두려움이 생기는 이유 : 불신앙
그러면, 이렇게 나쁜 ‘두려움’이 왜 생기는 걸까요? 결심하고 노력하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신앙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본문 14:1절을 보시면, 10명 정탐꾼들의 말을 듣고 두려워 떠는 백성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그들은 철야 통곡을 했습니다. 이럴 때 신앙이 있다면 당연히 무엇을 해야 마땅합니까? 철야 기도를 했겠죠. 그런데 밤새 두려움에 사로잡혀 울고불고 난리가 났습니다. 또 14:3절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그들은 두려움에 이미 죽은 것 같았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야단입니다. 그들의 안중에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여호와를 불렀지만, 단지 원망을 위해서였습니다.
불신앙은 두려움을 낳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은 인간을 움츠러들게 합니다. 마침내 스스로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불신앙으로 인해 두려워했습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이 한없이 큰 거인으로 보였습니다. 결국 그들 앞에서 스스로 자멸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불신앙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거인 나라’가 된다.” 그러니 불신앙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요즘 세월이 갈수록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리 험한 세상에서 신앙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정말 간이 크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면 간이 큰 게 아니라, 반대로 간이 콩알만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무슨 짓을 하나요? 두려움을 극복한답시고 세상의 다른 것들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무엇으로 인간의 마음 속을 엄습하는 두려움을 이길 수 있을지! 재력? 권력? 학력? 그 어느 것으로도 불가능합니다.
[3] 두려움을 극복하는 비결 : 신앙
그러면 어떻게 하죠? 그냥 그러다 망하고 그러다 죽어야 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즉효약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앙’입니다! 노만 V. 필 목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앙은 두려움의 치료제이다.”
잘 아시는 대로, 다윗은 구약 인물들 가운데 대표적으로 용맹스런 사람입니다. 물론 그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때로는 두려워 떤 적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가 담대한 용기를 갖고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 때문입니다. 시56:3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또 시27:1을 보면,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그의 담대한 모습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 때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인생의 적수인 두려움을 이기고 싶으십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무장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대로 그 신앙을 크게 키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의 신앙을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요? 세 가지로 정리해서 말씀드립니다.
① 영적인 안목 키우기 :
첫째는, 영적인 안목을 키우면 우리의 신앙 커집니다. 신앙은 눈을 달라지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모든 사물이나 문제를 육신적으로 보고 판단합니다. 10명 정탐꾼들이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단지 육신적인 안목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 능력과 가나안 원주민들과 비교하면서 두려워 떨었던 겁니다.
반면에 믿음의 사람인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땠습니까? 가나안 원주민의 모습을 보기는 보았습니다. 그들이 거인인 줄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14:7절~9절 보시죠. “7 ...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 ” 그들이 보기에 가나안 땅은 분명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땅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원주민들이 아무리 거인족이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앞에서는 먹이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여기서 ‘먹이’라는 단어는 영어 성경(NASB)을 보니까, prey 즉 사냥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먹이라”는 말은 다른 영어성경(NIV)을 보니까, swallow up 즉 ‘꿀꺽 삼켜버리다’ ‘먹어치우다’ 등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영적인 안목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면 세상의 문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주 작아 보입니다. 반대로 영적인 안목이 없어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면 이 세상의 문제가 한없이 커 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원리를 또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소인 나라’가 된다.”
아마 많은 분들이 이런 경험 있으실 겁니다. 어른이 된 후 초등학교 운동장에 가 보면 얼마나 작은지 “애걔~”하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그동안 세월이 흐르면서 운동장이 줄어들었나요? 아니죠. 내가 커진 겁니다. 마찬가지 영적인 안목이 생기고 신앙이 커지면 세상이 작아 보입니다. 세상의 문제들이 별 게 아닙니다.
왕하6:14~27을 보면, 엘리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람은 당시 이스라엘의 적대국가로 이스라엘의 국경을 수시로 침범합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그때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방비함으로 위기를 넘깁니다. 약이 오른 아람 왕이 엘리사를 제거하고자 야밤에 군대를 보내 도단 성을 완전 포위합니다. 아침 일찍 밖에 나간 사환이 그 광경을 보고 절망합니다. “아! 이젠 죽었구나!” 그러나 엘리사는 태연합니다. 왜 그랬나요? 왕하6:17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불말과 불병거는 천국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엘리사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두려워할 수 있었지만, 영적인 눈으로 하나님이 보낸 천사들이 대거 호위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담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가 큰 게 아니라 내 신앙이 작은 겁니다. 부디 영적인 안목을 키움으로 세상을 소인 나라로 보고 넉넉히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② 임마누엘 신앙 키우기 :
둘째로, 임마누엘 신앙을 키우시기 바랍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God with us)는 뜻이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두려움을 이기고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14:9절을 보십시오. 여호수아와 갈렙이 어떤 모습인지! “ ...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넘칩니다.
그렇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으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사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또 시3:5~6을 보십시오. 역시 다윗의 시편입니다. “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6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고 하나님이 붙잡아 주시는데 뭐가 두렵냐? 이겁니다.
어린아이가 아빠 어깨 위에 무동을 탑니다. 그러면 세상이 다 아래로 보입니다. 어른들도 작아 보이고, 세상이 다 자기 것 같습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르죠. 우리도 마치 하나님 어깨 위에 무동 탄 아이와 같습니다.
지난 주일 말씀드린 것 기억하시나요? 탕 중의 최고는? ‘돌탕’입니다. 탕자는 나쁘지만, 돌아온 탕자 ‘돌탕’은 좋습니다. 라면 중의 최고는? ‘주님과 함께’라면입니다. 주님과 함께 라면 세상에 두려울 게 없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Golden Gate Bridge)를 잘 아실 겁니다. 다리를 놓은 때가 1930년대였으니까 옛날이야기이죠. 공사를 하는데 다리가 너무 높고 위험해서 기술자들의 마음이 늘 불안했습니다. 현기증이 나고,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일의 능률이 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5명이 추락해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고심 끝에 철망으로 안전그물을 설치했습니다. 요즘은 공사 기술이 발달해서 아무 것도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새로운 아이디어였습니다. 안전그물을 설치한 후 신기하게도 아무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안전그물에 떨어지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떨어져도 죽지 않는다는 안도감 때문에 실족하지 않은 겁니다. 안전그물 정도만 해도 그렇게 안도감을 주고 일이 잘 되게 해 준다면,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신다는 확신이 있으면 얼마나 일이 잘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신다는 임마누엘 신앙은 우리에게 큰 힘과 용기를 줍니다. 부디 임마누엘 신앙으로 세상을 소인 나라로 보면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③ 하나님의 약속 붙들기 :
세번째, 하나님의 약속을 꼭 붙드시면 신앙이 커집니다. 13:30절을 보시죠.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 ” 갈렙은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까 무조건 가자는 겁니다. 이어서 14:8절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에 직접 가보니까 정말 약속하신 그대로였다고 증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외칩니다. 그들은 정말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출애굽 1세대 중 그 두 사람만 가나안 땅의 축복을 차지하고 신앙의 영웅으로 성경에 기록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성경에 기록된 약속의 말씀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얼마나 많은 약속의 말씀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 모든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향한 약속이 됩니다. 그 말씀을 붙들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승리합니다! 예를 들어 요16:33도 예수님이 직접 하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신 예수님께서 승리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저의 신학교 동기생 중에 박종민 목사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동기생인데, 나이는 저보다 15살 더 많습니다. 옛날 전매청에 다니다 신학을 늦게 하셨죠. 이분이 목회하시다 60세나 넘어가면서 조기은퇴를 결심하셨습니다. 젊었을 때 선교를 위해 기도하셨는데, 실천하려고 필리핀으로 떠나신 겁니다. 한 2년 하시더니 연락이 왔어요. 그곳에는 선교사도 많고 편해서 아프리카로 가려고 하는데, 선교지를 소개해 달라는 겁니다. 그 당시에는 저도 아직 아프리카에 가보지 않았는데, 소개해 준다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자꾸 말씀하셔서 차드의 양승훈 선교사님을 소개해 줬습니다. 그랬더니 좋다고 가시겠다는 겁니다. 그래도 한번 답사해 보고 가시라고 하니까, 비용도 많이 나고 하나님이 부르시면 그냥 가면 되지 무슨 답사냐며 그냥 떠났습니다. 하기는 천국 답사해 보고 가나요? 그냥 믿음으로 가지. 그로부터 2년 후 제가 차드에 가보고 얼마나 죄송했는지! 정말 너무 열악한 나라입니다. 그래도 당신은 그곳에서 기쁨으로 사역하셨습니다. 양승훈 선교사님과 협력해서 차드선교센타와 현지인 교회 여러 군데 건축 공사 감독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그 후 안식년을 보내신 후에는 이제 차드에 선교사들이 여럿 들어갔으니 또 다른 데로 가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직 저도 가보지 않은 가봉에 선교사가 꼭 필요하다고 말씀드렸더니 좋다며 그곳에 가셨습니다. 역시 답사도 하지 않고 그냥 가셨습니다. 지금까지 사역하고 계신데 만70세까지 채우시겠다고 합니다. 가끔 전화 통화하면 좋다고 말씀하십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 목사님 부부가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다른 데도 아니고 아프리카에, 말만 듣고, 그것도 가보지도 않은 사람의 말만 듣고 가는 분들이 어디 있습니까? 무모하다는 생각을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게 어디 인간의 말을 듣고 간 겁니까? 당신들 나름대로 말씀 묵상하고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꼭 붙드신 것이죠.
여러분!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거인 나라로 보입니까? 소인 나라로 보입니까? 그게 바로 내 신앙의 수준입니다. 세상이 거인 나라로 보이면 내 신앙이 ‘소인 신앙’인 겁니다. 반대로 세상이 소인 나라로 보이면 내 신앙이 ‘거인 신앙’인 겁니다. 아무쪼록 여호수아와 갈렙 같이 거인 신앙으로 무장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운 문제 앞에서도 두려워 말고 담대한 신앙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