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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바울사랑님
주 안에서 잘 지내시는지요.
님의 질문을 받고 답글을 준비하겠다고 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한참이나 되었습니다. 날마다 답글이 올려졌을지를 기대하며 그 기다림에 있었을 님을 생각하면 이제야 답글을 드림에 미안한 마음입니다.
님은 열왕기하 5장에 나오는 문둥병에 걸린 아람의 장군인 나아만과 관련하여서 다음과 같이 두 가지를 질문해 주셨습니다.
(1)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여 문둥병 치료를 받은 후의 여호와에 대한 나아만 장군의 믿음을 본받을 만한 믿음으로 보아야 합니까, 아니면 은혜를 입고서도 자기 개혁없이 적당히 타협한 위선적인 믿음으로 보아야 합니까? 하는 것이었으며,
(2) 5장19절을 보면 림몬 신당에서의 일에 대한 나아만의 양해(?)에 대해 엘리사는 '너는 평안히 가라'라고 하는데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지요? 라고 하면서, 나아만의 말에 대한 용납으로 이해해야 하는지...아니면 무시라고 보아야 하는지요? 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다음과 같이 답변을 드립니다.
먼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님이 질문한 것에 답변이 있기 위해서는 이 질문이 나오게 된 내용인 님이 나아만 장군의 믿음으로 알고 있는 내용에 이해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설명을 해 나가면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아람 왕의 군대 장관, 그러니까 그 당시에 군대의 총사령관이라는 높은 직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훌륭한 장군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사람, 즉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아만이 이러한 사람으로 있는 것에는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란 이유 또는 근거에 대한 설명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말이죠. 하나님께서 나아만에 의해서 아람에게 큰 승리를 안겨주셨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나아만이 왕 앞에서 높은 관직에 있고 왕의 신임과 총애를 받게 된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아만이 왕 앞에서 크고 존귀한 사람으로 있는 것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그러한 사람으로 있게 하셔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설명으로 군대 장관인 나아만이 “용사요 또한 문둥병자더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군대 장관 나아만은 용맹한 군사이나 그런 그가 문둥병에 걸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아만을 아람 왕의 군대 장관이란 높은 관직에 오르게 할 뿐만 아니라, 그런 그를 문둥병에 걸려 있게 하신 것은, 이러한 상태에 있게 하는 것을 통해서 그를 엘리사 선지자에게 보내게 하는 것을 통해서 아람 족속들이 섬기는 림몬 신을 섬겨온 그가 여호와이신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을 통하여 당시에 아합왕과 그 뒤를 잇는 여호람이 행해온 여호와이신 하나님께 악을 행하므로 - 여호람은 아합의 둘째 아들로 그의 형 아하시야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고서 아합이 바알을 위하여 만들어 세운 돌기둥 우상을 제거하였으나, 그는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오도하여 죄를 짓게 한 그 우상숭배와 음행에서는 떠나지 않음으로써 그 또한 하나님께 악한 왕으로 있었다 -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에게서 떠나 우상을 섬기게 하는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하며 참되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밝히 드러내는 일을 하시는 것에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좀 더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아만을 통해서 아람에게 큰 승리를 안겨준 것은 다른 나라와의 전쟁이 아닌 북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입니다. 아람이란 나라는 셈족의 후예로서 이스라엘 땅 북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아람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와의 관계를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서 우호적으로 때로는 적대적으로 가져나갔습니다. 즉, 자신들에게 상황이 여의치 않아 불리하면 우호적 관계로 가져나갔으며, 자신들에게 상황이 유리하면 적대적 관계로 가져나갔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있던 당시는 북이스라엘과 적대적 관계를 가져나갔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아람은 북이스라엘과 자주 충돌하였는데 그러한 전투 중에서 간헐적으로나마 휴전을 가졌습니다. 열왕기하 5장은 바로 그러한 휴전 기간에서 있었던 일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아람은 전에 북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을 때 포로들을 잡아오면서 한 소녀도 붙잡아 왔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녀는 나아만 장군의 아내를 수종드는 하녀의 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해서 그 소녀는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소녀는 나아만 장군의 아내에게 정보를 제공하여 주었습니다. 그것은 나아만 장군이 사마리아에 사는 선지자를 찾아볼 것을 권하며 그 선지자가 주인(나아만)을 고쳐주실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내에게서 이 말을 들은 나아만은 왕궁으로 들어가서 자기 집의 하녀로 일하는 이스라엘 소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전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람 왕은 자신이 나아만 장군의 치료를 위하여 이스라엘로 보내는 내용을 담은 친서를 써서 이스라엘 왕에게 보내도록 하며 예물로서 은 10달란트와 금 6천개와 예복 열 벌을 주도록 하며 곧 바로 이스라엘로 떠나도록 하였습니다.
아람 왕의 친서를 받은 북이스라엘 왕인 여호람은 이 편지가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을 고칠 것을 빌미로 전쟁을 일으킬 심사에 있는 줄로 알고는 크게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길갈에 있었던 엘리사 선지자가 이 소식을 듣고서는 왕에게 전갈을 보내서 아람 왕이 보낸 문둥병에 걸린 나아만 장군을 자기에게로 보낼 것을 말하면서 그러면 그가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그대로 조치를 취하자 나아만은 말들과 병거들을 데리고 엘리사의 집 앞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를 만나주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을 내보내 말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할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나아만 장군은 크게 화를 내며 엘리사의 집에서 물러갔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상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쳐줄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런데 이게 무엇이냐? 요단 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게 고작이냐? 요단 강물에서 몸을 씻어 문둥병에서 나을 것이라면 강물이 이곳에만 있더냐? 요단 강보다 더 나은 강은 내 나라 땅에서 많다. 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그러니 요단 강에서 내 몸을 씻어 나을 것이라면 내가 이보다 더 좋은 내 나라 땅의 강에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않겠느냐?” 하고 몸을 돌이켜 화를 내며 떠났습니다.
나아만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는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는 조심스럽게 말하였습니다. “그만한 일로 화를 내시며 돌아갈 일이 아닐 듯 싶습니다. 만일 저선지자가 이보다 더 크고 힘들 일을 할 것을 요구하였더라도 기꺼이 그의 말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겨우 요단 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면 깨끗해질 것이라고 말하였으니 그대로 하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그러니 그의 말대로 한 번 해 보시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그 종들이 하는 말을 듣고는 과연 그 말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 싶어서 마음을 바꾸어 요단 강으로 내려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말한 대로 물에 몸을 일곱 번 씻었습니다.
그러자 과연 엘리사가 말한 대로 나아만의 문둥병이 완전히 깨끗해져서 그의 피부가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나아만 장군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있는 곳에로 돌아와 그 앞에 서서 말하였습니다.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알았습니다. 하오니 청하건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아 주십시오.”
나아만이 행동한 이 일과 관련하여서 님은 궁금해 하는 것에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여 문둥병 치료를 받은 후의 여호와에 대한 나아만 장군의 믿음을 본받을 만한 믿음으로 보아야 합니까, 아니면 은혜를 입고서도 자기 개혁 없이 적당히 타협한 위선적인 믿음으로 보아야 합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흔히 나아만 장군에게 있었던 것을 가지고 교회는 ‘나아만 장군의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님이 한 말에서도 보게 되듯이 나아만 장군의 믿음을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여서 그 결과 문둥병을 치료받은 믿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도 나아만 장군이 보인 엘리사의 말에 순종한 것을 따라서 순종하는 좋은 믿음에 있을 것을 권하며, 만일 그러한 믿음을 보인다면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에서 고침을 받았던 것처럼 어떤 병에서도 나으며 큰 축복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님이여,
과연 엘리사의 말에 순종한 나아만은 오늘날의 성도들이 본받을 만한 믿음일까요? 아람의 군대 장관인 나아만은 자신의 문둥병을 엘리사 선지자를 통해서 고침 받을 사건을 계기로 해서 그가 왕과 함께 섬기는 아람의 신인 림몬을 더 이상 숭배하지 않고서 여호와이신 하나님만을 섬기는 그 믿음에 있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그래서 나아만이 자신의 문둥병을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를 통해서 고침을 받고 그가 말한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는 여호와이신 하나님만을 참 신으로 섬기는 믿음에서 나오는 고백이었을까요?
여기에 있어서는 먼저 님이 아람의 군대 장관 나아만에 대한 기사와 관련해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말이죠. 나아만 장군의 구원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는 믿음에 있음으로써 구원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아만 장군에 대한 이 기사는 그가 여호와이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서 떠난 패역하는 악한 죄에 있는 이스라엘을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해서 이방 나라인 아람을 하나님의 손에 들리는 막대기(몽둥이)로 쓰시면서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을 엘리사 선지자를 통하여 치료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는 이 사건으로 나아만이 이스라엘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다는 사실을 이방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되게 함으로써 정작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있으면서도 하나님에게서 마음이 떠나 있어 패역함에 있는 이스라엘의 악한 죄를 수치에 있게 하시며 그 부끄러움에 두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신약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환영하지 않는 유대인들의 악한 죄를 지적하며 책망하시는 것에서 어떤 선지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하고 배척받았음을 하나님께서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병자들이 있었으나 그들 중 아무도 문둥병에서 깨끗함을 받지 못했으나 오직 시리아인 나아만 한 사람만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을 가지고 말씀해 주셨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자 회당에 있던 유대인들은 모두 분노하면서 일어나 예수님을 성읍 밖으로 쫓아내고 성읍이 세워진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눅 4:24-30).
그렇습니다. 나아만 장군의 기사는 이방인인 그가 구원을 받았는가 안 받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악함에 이어서 그의 둘째 아들 여호람 또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림이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떠나 있으면서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악을 행하는 죄에 있게 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을 배척하는 악한 죄에 있었는지를 이스라엘에 있는 문둥병자를 고치시는 것에서 하지 않고, 그래서 이스라엘에는 전혀 자비를 베풀지 않고, 이방 나라인 아람의 군대 장관인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치시는 것에 의하여 드러내 주시는 것에서 알게 해 주시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람의 군대 장관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치는 이적을 엘리사 선지자를 통하여 하게 하심으로써 그의 입을 통해 이스라엘 외에는 참 하나님이 없음을, 그래서 이스라엘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된 하나님이심이 온 이스라엘에 증거가 되게 하심으로써 이 하나님께 믿음이 있지 못함이 이스라엘에게 수치와 부끄러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말입니다. 나아만 장군의 믿음은 우리가 말하는 ‘구원 받는 믿음’, ‘구원에 이르는 믿음’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님이 질문한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여 문둥병 치료를 받은 후의 여호와에 대한 나아만 장군의 믿음을 본받을 만한 믿음으로 보아야 합니까?”하는 것에 대한 대답에서 먼저 이해하고 있어야 할 것은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의 말에 따르는 행동을 취한 모습을 ‘믿음’으로 규정하고서 우리가 오늘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로부터 구원받은 믿음과는 연관시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요 흔히 말하는 아람의 군대 장관인 나아만의 믿음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믿음을 보는게 있는 것이 아니라, 엘리사 선지자를 통해서 그 나아만에게 그가 문둥병에서 깨끗함을 받기 위해 찾아 나온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참되신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심으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그 믿음에 있게 하고자 하신 것에서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있게 하신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보게 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가 시킨 대로 행동 한 것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문둥병을 고치는 이적을 행하심으로 이스라엘이 섬기는 여호와이신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심을 나타내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이 엘리사 선지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들의 마음을 돌이켜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이스라엘에게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 선지자가 시킨 대로 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섬기는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어 이스라엘로 하여금 알게 해주시는 일을 하셨으니, 이스라엘은 엘리사 선지자가 하는 말에 그들의 귀를 기울여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촉구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하고 그들의 눈으로 엘리사 선지자가 전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는 것에 있어야 하며 그들의 마음을 집중하여 엘리사 선지자가 전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따름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말이죠. 나아만 장군이 보인 행동이 온 이스라엘이 따라야 할 ‘믿음의 본’, ‘모범적인 믿음’이 되는 ‘믿음’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엘리사 선지자를 통하여 행하신 이적으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즉 이스라엘이 섬기는 여호와이신 하나님만이 참된 하나님이심을 나타내 보여 알게 하신 사실로 말미암아서입니다.
다음으로, 이제 님의 두 번째 질문이 있게 되는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님은 두 번째 질문으로 “5장19절을 보면 림몬 신당에서의 일에 대한 나아만의 양해(?)에 대해 엘리사는 '너는 평안히 가라'라고 하는데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지요? 라고 하면서, 나아만의 말에 대한 용납으로 이해해야 하는지...아니면 무시라고 보아야 하는지요?” 라고 물었습니다.
님이여,
님의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 선지자의 말을 따름에 있었던 것은 우리가 말하는 ‘믿음’ 문제가 아니며, 따라서 ‘본 받아야 할 믿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말했었습니다. 이것으로 여기고 생각한다면 이는 본질 문제에서 벗어나 있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니 아람의 군대 장관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양해를 구하는 말에 우리가 의문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아람의 군대 장관 나아만이 이스라엘 외에는 참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자기 왕이 신당에 들어가 림몬 신 - 림몬은 ‘천둥을 내리는 자’라는 뜻을 지닌 아람의 최고의 신으로 아람의 바알이며, 또는 하닷 림몬이 요약된 말로 아람 만신전(萬神殿)의 우두머리인 ‘폭풍의 신’ 하닷의 칭호일 것이라고 본다 - 을 숭배하는 절을 할 때 자신이 왕을 붙들고 함께 그 신당에 들어가는 자로서 왕이 절을 할 때 자기 팔에 기대어 있으므로 자신도 왕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서 절을 할 수 밖에 없음을 용납하여 줄 것을, 그래서 용서하여 줄 것을 구하는 것에서 엘리사 선지자에게 양해를 구하여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여 줄 것을 바란 것은, 이스라엘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온 천하에 또 다른 신이 없으므로 이제는 자신은 아람의 왕이 숭배하는 신 림몬에 대한 숭배를 하지 않고 온 이스라엘에 참된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배하겠다는 의도에서 한 말이 아닙니다.
나아만은 아람 왕의 군대 장관으로서 아람 족속이 섬기는 림몬 신을 숭배하는 우상종교를 좇는 신앙에 있습니다. 그런 그는 자신이 섬겨 숭배하는 림몬 신으로부터 자신의 문둥병을 치료받는 것에 있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림몬 신은 나아만이 걸려 있는 문둥병에 어떤 능력도 행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가 섬기는 여호와이신 하나님께서 림몬 신이 어떤 능력도 행하지 못하는 문둥병을 깨끗이 고쳤습니다.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께 어떤 예물을 드린 바도 없고 어떤 종교적인 의식을 행하는 일도 하지 않고서 다만 엘리사가 시킨 대로 요단 강에 가서 물로 몸을 일곱 번 씻었을 뿐인데 엘리사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문둥병에서 깨끗이 낫게 한 것입니다.
그러자 나아만은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즉 온 세상에, 온 땅에 신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당신의 종’이라고 말하여 엘리사의 종으로 자처하는 표현을 하였습니다. 나아만은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가 섬기는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고는 여호와 하나님을 신으로 섬길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실증으로 그는 자신이 주는 예물을 엘리사 선지자가 받을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사 선지자는 “나의 섬기는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는데 내가 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예물을 정중히 거절하였습니다. 나아만이 거듭 강권하며 받을 것을 청하였으나 엘리사 선지자는 끝내 고사하였습니다. 그러자 나아만은 “그러면 청하건대 노새 두 마리가 싣고 갈 수 있을 만큼의 흙을 퍼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나는 그 흙으로 제단을 만들어 여호와께만 번제와 제물을 바치고 다른 신에게는 바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나아만은 님이 두 번째 질문을 하게 된 내용인 “오직 한 가지 일이 부탁드릴 것이 있는데 당신의 종인 저를 여호와께서 용서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내가 모시는 왕이 (아람의 신)림몬을 숭배하러 신당에 들어갈 때 내가 왕의 곁에서 붙들고 함께 들어가는데 왕이 절할 때 내 팔을 의지하여 절을 합니다. 그래서 왕이 림몬에게 절할 때는 나도 함께 절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이 일에 관해서는 그럴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잘 이해하여서 여호와께서 제발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말이죠. 나아만이 보인 행태인 “5장19절을 보면 림몬 신당에서의 일에 대한 나아만의 양해(?)”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요? 그는 분명 앞서에서 이스라엘 외에는 온 땅에 어떤 하나님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며 자기가 본국으로 돌아가서는 제단을 만들어 세우고 다른 신에게는 번제와 (희생)제물을 드리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께만 드림으로써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말하였는데 말입니다. 그의 마음이 금방 혼합 신앙으로 바뀐 것일까요?
나아만이 엘리사 선지자에게 말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자신이 섬기겠다고 말한 것은 진심입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진심이 금방 바뀐 것도 아닙니다. 그럴만큼 나아만이 의지가 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그가 그렇게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하였을지라도, 그래서 이스라엘 땅에서 퍼간 흙으로 제단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께만 번제와 제물을 드릴지라도, 그것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있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에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가령, 니느웨 성 안에 있는 왕을 비롯하여서 많은 사람들이 요나가 전한 말을 인하여 회개하고 니느웨 성을 멸망하실 하나님의 심판을 하나님께서 거두셨을지라도 니느웨 성 안에 있는 왕과 그의 백성들이 이스라엘에게 있게 하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는 나아만의 경우에서도 그렇습니다. 우선 나아만이 엘리사 선지자에게 그가 문둥병에서 고침을 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예물을 드리고자 하였을 때 엘리사가 거절한 것은 단지 겸양의 미덕으로서가 아니라 나아만이 비록 이스라엘에만 참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지극히 이교의 숭배자들이 갖는 자신이 섬기는 신에게 보다 나은 축복을 간구하는 마음에서 바치는 기복적(祈福的)이고 기원적(祈願的)인 개념에서이기 때문이며, 또한 엘리사 선지자를 그 신을 불러오는 자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엘리사 선지자가 나아만이 주는 예물을 거절한 것은 나아만을 문둥병에서 깨끗하게 낫게 한 것은 자신에게서 나온 능력이 아니라 온 세상에 생명의 주가 되신 참되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아만은 여호와이신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전적으로 자신이 섬기는 나라의 신이 하지 못한 문둥병을 고치는 능력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하셨다고 하는 것에 대한 경이로움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런 나아만에게서 그만한 하나님은 이스라엘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이 이스라엘 외에는 어떤 땅에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외에서의 어떤 땅에서도 이스라엘이 섬기는 하나님만한 신이 또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이 섬기는 하나님은 모든 신들 중에서 가장 큰 신이 되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이런 신관(神觀)에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는 이스라엘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도 섬겨나갈 것이며 이에 대하여 굳은 결심을 갖고 굳은 절개에 있을 것이지만, 왕 앞에 있으면서 왕과 함께 신당에 들어가 림몬 신을 숭배하는 절을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한 상황으로 인해서 자신도 림몬 신에게 절을 하게 되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이해를 하여 달라며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따라서 아람의 군대 장관 나아만의 신관은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에서 구속사관(救贖史觀)에 의한 언약을 통해 계시해 오신데 따른 신관에 의한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가 알고 있고 가져온 신관에 의한 믿음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나아만은 그가 개인적으로는 이스라엘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도 섬기는 종교의 믿음에 있고자 하지만 또한 왕의 신하로서 왕과 함께 아람 족속이 섬기는 림몬 신 앞에 나아가 왕이 절할 때 자신도 따라서 함께 절하여 숭배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니 나아만이 보인 믿음은 ‘다신론적 숭배’의 용납에 불과하며, ‘다원적인 종교’에 있는 것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말이죠. 엘리사 선지자는 나아만이 양해를 바라며 용서를 구하는 요청을 할 “너는 평안히 가라”고 하였습니다. 님은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지금까지의 답변에서 보면 과연 엘리사 선지자가 말한 의미가 무엇이겠는지요. 즉, 엘리사가 말한 의도가 무엇이겠는지요. 여기에 무슨 특별한 내용과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자기 나라로 돌아가고자 하는 나아만 장군에게 “네, 안녕히 잘 가세요”, “여기까지 일행과 함께 오시느라 고생하셨고 머무는 동안 불편이 많았을 텐데 모쪼록 가시는 길은 아무 일 없이 잘 돌아가시기 바랍니다”하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그러니 말이죠. 엘리사 선지자의 이 말을 나아만의 말에 대한 ‘용납’으로 이해하거나, 또는 ‘무시’라고 보아야 하거나’ 하는 어떤 성격의 것으로도 관련이 없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아람의 군대 장관 나아만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그가 어떤 믿음에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용사이나 문둥병에 걸려 있는 아람의 군대 장관 나아만이 이스라엘 사람으로 자신의 집에 여종으로 있는 한 소녀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의 선지자를 찾아 자기 문둥병을 고침 받고자 할 때 그를 불러 선지자인 자신을 찾아오게 하고 하나님의 사람인 선지자가 시키는 대로 하게 하여 그의 문둥병을 고치는 하나님의 이적을 나타내시는 것을 통해서 나아만의 입에서 나오게 하는 말에 의해 이스라엘이 섬기는 하나님 만이 참되신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온 이스라엘에 나타냄으로 하나님을 선양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나아만은 이스라엘의 선지자를 통해서 문둥병을 고침 받으려고 한 목적을 달성하고 마침내 평안히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는 이스라엘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하였고 과연 그가 말한 대로 그렇게 할 것입니다만 이것이 엘리사 선지자가 그에게 관심을 둘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나아만이 생각하는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과 엘리사 선지자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엘리사 선지자가 나아만이 자신도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면서 림몬 신에게 절을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의 양해를 구할 때 무슨 ‘용납’하거나 또는 ‘무시’하거나 한 것이 아닙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다만 나아만 장군이 그의 일행과 함께 평안히 돌아갈 것을 인사했을 뿐입니다.
님이여.
이상으로 답글을 마칩니다.
본 답글이 나아만이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 만나 문둥병에서 깨끗함을 받은 것을 가지고 마치 ‘나아만 장군의 믿음’이 오늘날 우리들이 본 받아야 할 믿음인양 설교되어지고 또한 가르쳐지는 형편 속에서, 그래서 우리들도 나아만 장군과 같은 믿음에 있어야 할 것이 공공연히 말해지고 있는 형편 속에서 님은 이것이 말해지고 있는 성경 본문의 이해를 올바르게 갖고서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해주고자 하신 의도가 무엇이었는가를 보고 알며 그 깨달음에 있는 것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 안에서
평안을 빕니다.
첫댓글 아! 목사님! 감사드립니다. 목사님 말씀을 통해 왕하5장을 보는 시각을 충분히 잘 교정하였습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보이네요. 온전히 주님의 일하심과 하나님을 대적하여 스스로가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보태어 구원에 이루겠다는
인본주의 신앙인들의 모습이 보이네요.
샬롬!
이부분은 목사님 해석이 참 옳습니다. 개혁신학이면 나이만 신앙은 끝난 신앙으로 해석되어 지고 가르쳐 집니다. 다니엘이 이번한번만 한적도 없습니다. 풀무불속으로 들어가는게 신앙입니다. 꺽이면 꺽이지 휘어지면 죽는게 신앙입니다. 나이만을 신앙으로 해석하는 한국교회가 교리가 타락해서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잘난체 해봐야 원래는 문둥병 걸린 나아만 같은 처지 이고 예수 그리스도 피의 공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고는 전혀 고침 받을 수 없다고 생각 됩니다. 나아만이 믿음을 굳게 가져서 고침을 받았으니 훌륭한 믿음이라는 것은 인본주의 발상이라고 생각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