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
절망의 산,
대가리를 밀어버
린, 민둥산, 벌거숭이산
분노의산, 사랑의산, 침묵의
산, 함성의산, 증인의산, 죽음의산,
부활의산, 영생하는 산, 생의산, 희생의
산, 숨가쁜 산, 치밀어오르는산, 갈망하는
산, 꿈꾸는산, 꿈의산, 그러나 현실의산, 피의산,
피투성이산, 종교적인산, 아아너무나너무나 폭발적인
산, 힘든산, 힘센산, 일어나는산, 눈뜬산, 눈뜨는산, 새벽
의산, 희망의산, 모두모두절정을이루는평등의산, 평등한산, 대
지의산, 우리를감싸주는, 격하게, 넉넉하게, 우리를감싸주는어머니
황지우의 詩 「무등」전문
무등산 입구 도착
전주에서 7시 30분에 출발하여 9시 30분에 무등산 입구에 도착하였다
무등산은 부드럽고 넉넉하다
이 산은 사람을 찌르거나 겁주지 않고, 사람을 부른다.
아마도 이 산은 기어이 올라가야 할 산이 아니라, 기대거나 안겨야 할 산인 듯 싶다
증심사(證心寺)
증심사는 신라 헌안왕 4년(860)에 철감선사 도윤이 지었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수행의 과정을 신(信)-해(解)-행(行)-증(證)으로 표현한다.
믿음에서 출발하여 이해로, 실천으로, 체득으로 나아가니, 곧 증(證)이다. 깨달음이다
무등의 마음이 곧 증심인 까닭이다. 무등산과 증심사는 손바닥과 손등의 관계이다.
당산나무
중머리재로 가는 언덕배기에서 수백살은 넉넉히 되어 보이는 당산나무가 우리을 반겨주었다
날씨가 춥다고 잔뜩 껴입은 옷을 여기에서 갈아입고 출발하였다
중머리재
새인봉 남쪽에 있는 중머리재는 나무 한그루 없는 억새밭을 이루고 있다
이곳은 스님의 머리처럼 민둥민둥하여 속어로 중머리재라 부르고 있다
쉬어가기에 안성마춤이어서 억새밭에 주저앉아 배추뿌리를 씹고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장불재(해발 900m)
광주와 화순의 경계인 장불재에 올라 정상쪽을 바라보니 포근한 흙산의 분위기가 바뀐다
장불재에는 날카로운 칼바람이 불고 있어서 배낭에 넣어두었던 자켓과 버프를 꺼내어 입었다
12월의 억새
그것들은 애초에 바람이었던 것처럼 바람의 숨결과 포개진다
엷은 잔광 속에서 그것들은 잔부스럼 같은 꽃을 피운다
억새의 꽃은 흩어져 멸렬하기 위하여 피어나는 꽃이다
그것들은 죽을 때 땅으로 떨어지지 않고 바람 속으로 흩어진다 .........김훈의 산문집 <풍경과 상처>중에서
입석대(立石臺)
무등산 주상절리대는 2005년 12월 천연기념물 제465호로 지정되었다
입석대는 5~8각, 둘레 6~7m, 높이 10여m의 독립된 돌기둥 수십개가 수직으로 하늘을 찌를듯 솟아있다
오랜 세월 동안 물리적 풍화작용에 의해 기둥과 병풍 모양을 하고 있어 경관이 수려하고 학술적 가치가 크다
무등을 오르면 산을 오른다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가장 편안한 어린 시절의 우리 아버지의 등이거나
할아버지의 등이다
밖으로 나가 일하시다가 돌아 온 아버지는
언제나 그 등을 내게 다 허락하시고
나는 세상을 나가지 못했지만 그 등을 타면서
세상은 따뜻하고 든든하다는 생각을 했다 .....................박정이의 詩 <무등산 오르기> 중에서
서석대(瑞石臺)
서석대는 눈보라가 몰아치고 추워서 잠시도 그냥 서있을 수가 없었다
같은 주상절리지만 서석대(해발 1100m)는 입석대보다 침식이 덜 진행되었다
무등산의 화산암을 연대측정한 결과 화산 활동은 약 4500만~8500만년 전 사이에 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서석대의 표지석
표지석 뒷면에는 '광주의 氣像(기상) 이 곳에서 發源(발원)되다', '이천십년' 이라는 글귀가 담겨 있다.
표지석의 앞면은 영암 월출산을 향하고 있고, 뒷면은 무등산 정상인 천황봉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표지석의 글씨는 국전 심사위원인 서예의 대가 학정 이돈흥 선생(鶴亭 李敦興)이 썼다.
학정 선생의 글씨는 남도의 기상과 함께 무등산의 수려함을 잘 담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점심식사
서석대를 약간 벗어난 억새밭에서 꿀맛같은 점심식사를 하였다
온몸이 떨리고 손이 시려웠지만 우리들의 뜨거운 가슴으로 인하여 온몸이 훈훈해졌다
광주 KBS 카메라 기자가 자꾸 인터뷰를 시켜서 어색한 표정으로 대꾸하느라 힘들었다
갈 수 없는 천황봉
천황봉은 1965년 군부대가 주둔하기 시작한 이후 45년 동안 `금단의 땅’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많은 시민들이 무등산의 정상을 서석대로 오해하고 있다
상고대를 뒤집어 쓰고 묵언정진하는 천황봉은 갈 수 없기에 더욱 아름다웠다
서석대의 상고대
상고대는 눈이 내려 나뭇가지에 쌓인 눈꽃과는 다르다.
공기 중에 있는 수분이 찬 나뭇가지를 만나면 순간 얼어붙어 상고대를 만드는 것이다
적당한 온습도와 풍향 등 기상 조건이 맞아야 상고대를 볼 수 있다
서석대의 상고대는 30년 전, 그녀의 뒷덜미에서 보았던 하얗고 부드러운 솜털 같았다
서석대의 참모습
서석대의 정상에서 조금 내려오니 서석대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었다
직경 1~1.5m인 돌기둥이 30m 높이로 촘촘하게 병풍처럼 서 있다.
동서방향으로 늘어선 서석대에 저녁노을이 비치면 수정처럼 반짝인다 해서 ‘수정병풍’ 이라고도 불린다
입석대, 서석대 등 무등산 정상 부근에 발달한 주상절리는 용암과 화산재가 갑자기 식어 만들어진 것이다.
중봉 가는 길
이곳 중봉 일대는 1999년부터 식생 복원 작업을 대대적으로 벌인 결과 지금의 억새 광장을 형성했다
바람 속으로 봉두난발을 이루며 흩어지고 있는 겨울 억새는 을씨년스러웠다
중봉(中峰) 해발 880m
중봉에서는 하늘과 눈높이를 맞춘 듯 광주시내가 한 눈에 보인다
이 곳은 1965년부터 1998년까지 군부대가 주둔해 민간인 통제구역이었다.
하지만 시민단체에서 중봉을 시민의 품으로 돌려보내자는 운동이 전개돼 1998년에 군부대가 이전하였다.
동화사터
기나긴 돌계단을 통과하느라 지친 다리를 동화사터에서 잠시 쉬었다
여인을 셋이나 거느리고 세상을 호령하는 황보회장님의 표정이 뭔가 못마땅하신듯...
토끼등(해발 467m)
이곳은 토끼등처럼 좁고 뾰족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멋진 쉼터가 있어서 아직까지 배낭에 남아있던 간식거리를 꺼내서 나누어 먹었다
덕산너덜
'너덜’은 암석 무너진 것이 산비탈을 덮은 것으로 한마디로 ‘돌바다’ 라고 할 수 있다
덕산너덜은 동화사터에서 바람재와 토끼등 사이에 길이 600m, 최대 폭 250m 규모로 펼쳐져 있다
용암이 흐르다가 식어버리자 산비탈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와 쌓여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지금도 멀리서 보면 돌이 흘러 내려오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국립 5.18 민주묘지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국립 민주묘지에 들러 참배하였다
그날 산화한 민주열사들의 피를 마시고 이만큼이라도 성장한 이땅의 민주주의가 참으로 소중하다
참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우리들의 가슴은 시리고 먹먹하였다
5시 40분, 전주에 도착하여 송원정에서 새로운 임원을 뽑고, 행복한 송년회를 즐겼다
첫댓글 억새밭을 지나 정상에서의 눈꽃이 신산회 회원님들 같이 아름답네요
안타까운 역사를 무등산은 묵묵히 바라보고 있데요.
좀 추웠지만 행복한 산행이었습니다.
칼바람속에서도 상고대의 순결함이 듬뿍 느껴지는 산행이었습니다. 므훗!~!
무엇보다.. 망월동에 들러 참배하고 돌아온 것이 참으로 보람있습니다
그동안 옆에 있으면서 한번도 참배하지 못해 커다란 빚을 진 기분이었는데...
처참하게 쓰러져간 민주 열사들의 명복을 빕니다
무등산 산행 즐거웠습니다.망월동에 잠드신 시대의 은사 리영희선생을 참배 할수있어 뜻깊었습니다.차가운 무덤에 누군가 밥한술과 국물을 바치었더군요..영원히 살아있는 대한의 선비이십니다.
총무님 수고많으셨습니다.
신산회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주시고, 댓글의 수준을 업그레이드 시켜준 카일라스님 고맙습니다
무등산은 잊어지지 않을산 같아요. 망월동묘지,억새풀 ,입석대 ,서석대 기억에 남은 산행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