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원생 安原生 (1905 ~ 미상)】 "白凡김구 비서, 통역, 천재 축구선수 안원생"
안원생은 1905년 2월 27일 황해도 안악군에서 안중근의 친동생인 안정근(安定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상해교통대학을 졸업하고 이후 1925년 5월 호강대학에 재학하던 중 주요한(朱耀翰) 현정주(玄正柱) 최남식(崔南植) 등과 함께 프랑스조계에서 전단을 배포하는 등 시위를 벌였다. 그는 달리기와 농구, 그리고 수영에서 모두 학교 대표 선수로 발탁될 정도로 운동을 잘했는데, 그 중에서 축구를 가장 잘했다. <동아일보> 1930년 9월 5일자 기사에 따르면, 안원생은 체력이 매우 좋아서 한번 출장하면 피로한 기색이 없고 매우 강하게 상대를 압박해서 상대가 중앙선을 넘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공수를 겸비한 천재 선수였다고 한다.
1933년 흥사단에 가입한 그는 원동반 제6반에 소속되어 활동했으며,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전 및 홍보 활동을 수행했다. 그는 중국 축구팀에서 활약해서 얻은 명성을 토대로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중국의 거물 정치인들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했고, 김구가 장제스 총통과 면담했을 때 통역을 담당했다. 1942년 1월에 임정 외무부 직원으로서 선전위원을 겸했으며, 1943년 4월에는 외무부 외사과장 겸 선전부 비서를 겸임했다. 또한 한국독립당에 입당했고, 1944년 3월에는 주석판공실 비서직을 맡았다. 1944년 6월에는 선전부 편집위원을 맡아 중국 국민당 선전부의 대적 선전위원회와 합작하여 중경 방송국을 통한 우리말 방송을 하기도 했다. 1945년 2월 8일에는 홍진, 유동열, 김붕준 등이 창당한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에 가담해 선전부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6.25 전쟁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으며 미국에 건너가 지내고 있다는 정도만 나와있다. 사망년도, 사망지 역시 알려진 바가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안원생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