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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절 부산 답사기
대림절을 앞두고 부산에서 다시 만난 은천교회는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4년 전 여름, 아미동의 돌교회가 철거를 앞두고 구명을 호소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았는데, 어느새 새로운 건물이 들어선 것이다. 1952년 피란임시수도 부산에 세운 은천교회는 유서 깊은 명물이었다. 1952년, 성탄 직전에 감리교 피난민들(한명리, 송진천 장로부부)에 의해 설립되고, 1955년에는 석축 용 돌로 아미산 비탈에 예배당을 우뚝 세웠다.
은천교회는 우람한 외양만으로도 지난 65년 동안 아미동과 감천동 인근 부산의 명소였을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건축재료가 없어 아미동 공동묘지에 있던 일본인들의 돌비석까지 집의 한귀퉁이를 가리는 데 쓰이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차근차근 쌓은 고색창연한 돌벽은 켜켜이 믿음의 무게가 신실하게 느껴졌다.
고단한 피난 시절에 하나님의 집을 먼저 지으려던 가난한 마음은 참 미더워 보였다. 그런데 부산도시공사가 행복주택 대단지를 조성하기 위해 도로를 확장하면서 은천교회 대지의 절반이 수용되고 말았다. 돌예배당은 부산지역 근대문화유산으로 충분한 자격이 있었으나, 기준을 충족하지는 못한 듯하다. 부산 KBS 등 지역 언론도 관심을 가졌으나 역부족이었다. 피란임시수도의 일부를 구성한 믿음의 유산은 그야말로 홀대를 받았다.
모처럼 다시 부산을 방문하였다. 지역NCC 전국협의회가 부산에서 모였기 때문이다. 초청하는 지역에서는 비록 하루 일정이나, 친교의 범위에 그곳의 역사현장을 답사하거나, 현재 이슈화된 사건을 포함시키곤 한다. 지난 여름 충남지역을 방문해서는 아산만 건너 평택 미군기지 일대를 둘러보며, 잔뜩 우려를 들었다. 미군기지를 일상적으로 살피는 시민감시단은 뜨고 내리는 비행기 소리만 듣고도 기종을 판별하였다.
부산에서는 점심 식사 후 먼저 용두산공원을 산책하였다. 가랑비 속에서 아름드리 은행나무들은 늦가을까지 노란 잎을 반짝거렸다. 여기저기에서 일제강점기에 자리 잡았던 신사(神社) 터를 보았다. 저 건너는 영도, 이 아래는 자갈치 시장 등 낯익은 지명들이 들렸지만 방금 부산역에서 내린 처지에서 한 눈에 분별하기는 어려운 노릇이었다.
반가운 것은 보수동 골목이었다. 그곳에 대한성공회 부산주교좌 성당이 있었다. 1924년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은 빛바랜 붉은색 벽돌 건물은 100년 된 지금도 건재하였다. 처음에는 일본인 성공회 교인들이 모이던 예배처소였는데, 해방 후 제 주인에게 돌아왔고, 1974년 주교좌성당으로 승격하였다. 점심을 함께 먹던 주임신부는 갑작스레 난 초상 때문에 교회 내부를 보여주지 못하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였다.
골목 안쪽 가파른 계단 위에 자리 잡은 중부교회는 외벽에 현대사를 증언하는 여러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영화 <변호인>의 배경이 된 부산 양서조합이니, 부산 학림사건이니 모두 이 골목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 시대를 웅변하듯 1987년 6월 24일에 찍은 흑백사진은 고 노무현 변호사 좌우로 문재인 변호사와 고 최성묵 목사를 비롯한 군중이 한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노 변호사는 무겁게 영정을 들고 있었다.
보수동 골목에서 가장 친숙한 풍경은 나란히 붙은 헌책방들 모습이었다. 이젠 한물갔지만, 원래 훨씬 많은 책방들이 어울려 있었다고 했다. 올망졸망 서점들이 다닥다닥 붙은 모습일망정 현대사의 유물처럼 보였다. 마지막 일정인 부산근현대역사관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도중 언뜻 눈에 띈 대하소설 <장길산> 한 세트를 재빨리 구입하였다. 부산방문 기념품인 셈이다. 내일 집으로 배달된다니 시간은 KTX보다 빠르게 달려가는 중이다.
역사관 앞마당에서 기다리던 박현규 목사와 만나 4년 반 만에 찾아본 은천교회는 돌교회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미련만 남았다. 새 예배당을 산비탈에 붙여 용케 신축하였는데, 헐린 돌들이 마당 가장자리마다 쌓여있었다. 일부는 강단 십자가와 예배당 ‘겸손의 문’이 되었다. 박 목사는 비록 돌교회 전체가 이전하지 못했으나, 앞으로 예산이 허락되면 나머지 돌들도 교회 외벽을 덮으며 제 자리를 찾을 것이란 희망을 전하였다. 고맙게도 역사는 들쭉날쭉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