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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장준하!
함석헌
1975년 8월 19일 아침 이 글을 씁니다.
씨알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나는 이 이틀 사이에 땅이 온통 꺼지고 하늘이 무너진 듯한 느낌입니다. 장준하(張俊河)님이 갑작스럽게 떠나가 버렸습니다.
17일 주일 아침 열시 나는 우리에게 임하여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일고여덟 되는 퀘이커 친구들과 함께 신촌 모임집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내게 문득 이런 말씀이 와서 그것을 친구들 앞에서 증거했습니다.
요사이 우리에게 가장 슬프고 놀라운 소식은 방글라데시의 라만의 죽음입니다. 나는 정치를 모르지만 세계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정치가 둘이 있는데, 그 하나는 그리스의 카라만리스요 또 하나는 라만이며, 또 가장 싫어하는 둘이 있는데 그것은 닉슨과 스페인의 프랑코입니다. 그런데 그 라만이 이제 죽임을 당했답니다.
내가 라만을 좋아하는 것은 단 한마디 말 때문입니다. 그는 여러 해를, 살아나올 생각은 하지도 않으면서, 파키스탄의 정적의 손에 잡혀 감옥에 있다가 방글라데시 씨알들의 일어남으로 인해 풀려나면서 이랬습니다. ⎯⎯ “죽기로 결심하니까 죽이지 않더라.”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라만이 죽었다니, 그것도 웬만한 것이 아니라, 그 동지와 가족까지가 몽땅 학살을 당했다니 비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소식을 들으면서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예수의 말씀입니다. ⎯⎯ “제 생명을 잃는 자는 얻을 것이요, 얻으려는 자는 잃을 것이다.”
그러면 라만이 죽은 것도 살려고 했기 때문 아닐까? 나는 감히 라만의 인격을 의심하려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깊은 의미에서 대통령이 되어 방글라데시를 다스려보려 한 것은 역시 제 생명을 건지자는 일 아닐까? 아무랬거나 세계의 평화를 위해, 영원한 진리의 밝아짐을 위해, 인간의 정신적 생명을 위해 크게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말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나를 그보다도 더 크게 더 지독하게 슬프게 하시고 놀라게 하실 일을 감쪽같이 모르게 클라이막스로 한치 한치 끌고 올라가고 계신 줄을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장준하님은 푸른 풀냄새에 코를 벌렁거리며 죽음의 골짜기로 끌려가는 어린 양마냥 그저 좋아서 앞으로 할 자기의 확신에 미소를 지으면서 포천 이동의 계곡을 한걸음 한걸음 들어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 하고 꼭 열두 시간을 지나 저녁에 잠자리에 들려 하는데 난데없는 전화가 누구라는 말도 없이 걸려와 “장준하 선생 작고하신 것을 아십니까?” 하고는 딱 끊어졌습니다. 나는 골통을 얻어맞은 사람마냥 한참 멍했다가 면목동 장선생 댁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동서 되는 유경환님이 받으면서 오늘 포천 어느 산엘 올라갔는데 갑자기 저녁때에 파출소를 통해 그런 소식이 와서 부인과 아들들이 여섯 시 경에 떠나 그리 달려갔다고 했습니다. 택시를 몰아 면목동엘 가니 집은 텅 비고 가까운 친구 두세 분이 와 있을 뿐이었습니다. 방 안을 들여다보니 빈 침대만 놓여 있고 미소를 띤 사진이 벌써 내놔져 있었습니다. 늘 보던 ‘일주명창’(ᅳ住明窓)이라 쓴 액자만이 여전히 걸려 있지만, 그 타서 밝히던 한 자루 초는 어디를 갔을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되어진 사실인 것을 번히 알면서도 그래도 믿어지지를 않아 밤새 여기저기 전 화를 걸어 진상을 확인해보려 했으나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날이 새고 18일 아침 일곱시 유해를 실은 앰블란스가 괴물처럼 와닿았습니다. 문을 여니 등산복을 입은 채 들것 위에 누워 있는 사람은 불러도 대답이 없고 귀에서는 아직 피가 흘러나고 있었습니다. 이 날, 8월 18 일은 그 30년 전 그들이 해방의 기쁨에 흥분된 가슴을 안고 새 역사를 지어보잔 결심을 품고 비행기로 중경을 떠나 처음으로 여의도에 와 내렸던지 만 30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의 둘도 없는 동지였던 김준엽님 말에 의하면, 그날 서로 모여 기념하는 회식을 하기로 약속까지 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세계가 서로 달라졌습니다. 아! 나는 “눈물도 아니 나오느냐?”고 내 가슴에 물어보았습니다.
장준하가 죽었다! 죽었다? 이 한마디가 이 8월 노염(老炎)의 무더운 공기마냥 부쳐도 부쳐도 또 오고 또 와서 가슴을 누릅니다.
사실 나는 이 몇해 동안을 하루도 장준하의 죽음을 생각 아니한 날이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께서도 짐작이 가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미리 다 알고 기대하고 각오했던 것이 막상 닥치고 보니 청천벽력 같기만 합니다. 우리 마음은 어리석습니다. 모릅니다.
이왕이면 감옥에서 죽게 하시지, 실족을 해 바위에 떨어져 죽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하나님 앞에 투정을 해보기도 합니다. 제 1호의 분향을 내 손으로 하고 들고 나는 조객 사이에서 이 구석에 앉았다가 저 구석에 우두컨하다 하며 나는 한 가지 생각에만 잡혀 있었습니다. 지금 이글을 아니 쓸 수 없어 쓰고는 있으면서도 내 마음은 아직 그 촛불과 향연 사이를 맴돌고 있습니다.
꼭 있어야 하는 사람인데 왜 갔을까?
그 의지의 사나이가 그것은 왜 못 물리쳤을까?
이날껏 나하고 한 약속을 한번도 아니 어긴 이가 이번은 왜 이렇게 져버리고 말까?
그를 한번 내세워보고 싶었는데, 그가 이 나라의 정치를 맘껏 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내가 흙덩이가 돼서라도 디디고 올라서게 해주고 싶었는데!
이런 생각을 하며 그의 시체가 누워 있는 방밖 뜰의 뙤약볕에 땀을 씻으며 섰다 앉았다 하는 동안 어느새 내 맘 속엔 이런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 “내가 뺏아간건데 뭘 그러느냐?”
그렇습니다. 분명 하나님이 뺏아가셨습니다.
죄가 있어서?
아닙니다. 물론 사람이니 죄야 있을 수 있지요. 하지만 그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 옳습니다. 그 사람의 죄 때문도 그 사람의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고 그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장준하는 죽은 것도, 떠나간 것도 아닙니다. 죽을 수가 없습니다. 떠나갈 리가 없습니다. 나는 그것을 20년 동안 사귀어보아서 압니다. 결점이 없단 말 아닙니다. 완전한 사람이란 말 아닙니다. 나는 장준하께 가까이 한다고 친구들의 충고도 많이 듣고 시비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혀 까닭 없는 것이다 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잘못도 있고 부족도 있습니다. 내가 어리석지만 그것을 모르리만큼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또 내가 무슨 기대가 있어야 속아도 속고 이용을 당해도 당하겠는데, 정말 양심으로 하는 말이지, 내가 그에게 기대한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그를 믿은 것은 부족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에게 믿어지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코 우물우물하다 썩어지고 말 부류의 인간이 아니요 뜻을 품은 사람입니다.
몸이 없어졌다고 결코 우리를 떠나버릴 사람이 아닙니다. 20년간 지내보아서 나는 그것을 확신합니다. 그는 자기가 생전이라는 때에 가졌던 목적을 소위 사후라는 때에도 결코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만 그와 교제하는 방법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가 위대하단 말도, 천사란 말도 아닙니다. 그는 뜻을 품었는데, 그 뜻이 영원한 것이고 거룩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야만 산 것 아니요, 말하고 손발을 놀려야만 언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준하는 살아서 말하고 행했지만, 또 살아 있기 때문에 자기를 붙잡고 자기를 택해서 내세운 그 뜻에 온전히 순종 못하는 점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그가 몸을 잃었으면, 현실적으로는 못하지만 다른 길로 더 자유롭게 더 온전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말씀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예배하는 자는 영과 참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했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영으로 대접하는 목적은 우리끼리가 서로 영적으로 대접할 수 있는 능력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하나님을 영적으로 믿어도 사람을 영적인 존재로 대하는 힘이 생기지 않는다면 종교는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것이, 영을 인간 사이에 실현하는 것이, 참입니다. 그래서 ‘영과 참으로’라고 한 것입니다. 이제 장준하는 벗겨주심을 입어 자유하게 됐으므로 더 깨끗하고 거룩하게 더 욕심 없이 더 용감히 우리 에게 말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여간 나는 이제 장준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빼앗아갔다고 확신 합니다. 지금이 더구나 우리가 그에게 인간적으로 바짝 달라붙으려고 필요를 느끼는 때이므로, 빼앗아갔습니다. 짓궂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제 자식에게 짓궂은 것입니다. 짓궂지 못하면 애비노릇 못합니다. 그것을 이해하는 날 가서야 아들은 아들이 됩니다.
짓궂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논리를 파괴한다는 말입니다. 논리가 온통 무너지기 때문에 사람은 허망을 느낍니다. 골목을 메우는 조객 속에 허망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하나인들 있겠습니까? 이것이 그 전에 죽을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는데 아니 죽고 아주 우연한,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말 한마디 허락 아니 되고 가게 된 이유입니다. 우리를 될수록 가만 못있게 하는 것입니다.
허망에 직면한 마음의 취할 길은 둘뿐입니다. 자신이 허망해지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 허망에 목숨을 잊고 대들든지. 허망에 무엇으로 대듭니까? 무기는 단 하나, 생각함!
그렇습니다. 장준하는 생각 없이 기다리고, 요행만 바라보고 솔피처럼 밀려가려만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무턱대고 떠들기만 하려는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기 위하여 가장 허망한 죽음으로 희생이 된 것입니다. 옥잔이 떨어져 깨지면 주부는 “어쩌지”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날카로운 생각의 칼로 제 가슴팍을 욱여 들어가면 거기 더 아름다운 옥의 광맥이 열릴 것입니다.
아, 장준하야! 네가 나로 생각케 하는구나. 내가 생각을 파고 파 빈 무덤을 발견하는 날, 너를 우리가 다 같이 누리는 영원한 나라의 영광의 자리에 앉히리라!
광복 30주년이라 합니다.
세상에 쓸데없는 것에 소위 축제란 것 같은 것 없습니다. 제사란 먹자는 것입니다. 농사꾼 어부에게 축제란 것 없습니다. 그들에게 즐거움이 있다면 하는 일 그 자체입니다. 먹어서 마셔서 배가 부른 것 아니라 심는 일, 김매는 일, 물결과 싸우는 일, 그자체가 배부름이요 힘남이요 춤추는 일입니다. 축제는 남의 일한 것을 얻어먹고 도둑해 먹으며 일함의 맛을 모르는 것들이 하는 것입니다. 일을 아니하기 때문에 그들은 늘 심심하고 무슨 재미를 찾고 싶습니다. 정말 광복은 농부의 밭고랑을 통해 어부의 그물을 통해 광부의 마치를 통해 직공의 실바람을 통해 오는 것이지 그저 책상에 앉아 아름다운 말을 만들어 명령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통해 오지 않습니다.
30년을 일대(一代)라 합니다. 이유는 다른 것 아니고 사람은 30에 성인이 되기 때문이요 따라서 30년에 대가 갈리기 때문입니다. 대는 정신 때문에 갈립니다. 사람은 생각의 틀이 한번 잡히면 그것이 일생의 언행 사업을 결정하는데, 그 틀이 잡히려면 대개 30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 30년을 일대로 잡습니다. 문명 기술은 발달하지만 비교적 고정되어 있는 것은 정신연령의 거름입니다. 학문을 아무리 많이 배워도 성년은 대개 30이 되어야 합니다.
개인이 그렇기 때문에 한시대의 변천도 그 영향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방이 되어 30년이 됐다면 하나의 민족으로 완전히 자주독립하는 자리에 갔어야 할 것입니다. 이 점에서 생각할 때 우리는 자책감이 없을 수 없습니다.
장준하는 결코 하나의 사사 사람이 아닙니다. 허하거나 말거나 어쩔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이 그는 하나의 중요한 공적 사람입니다. 그의 언행이 그렇듯이 그 죽음도 그렇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속 없는 축제 기분에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자화자찬만 할것 아니라 우리 자신을 진지하게 비판하고 앞을 내다보며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광복의 기회는 밖에서 오지만 그것을 광복으로 만드는 것은 생각하는 민족 자신에 매달렸습니다. 부흥이라 의욕이 강하다 떠들지만 덮어놓고 많이, 크게, 하는 것이 발전이 아닙니다. 이런 때에 누가 봐도 전체의 운명과 자유를 위해 누구보다도 더 열과 정성을 가지고 활동해오던 장준하님이 이제 당할 시련을 거의 다 당하고 이제부터 닦은 힘을 발휘할 때인 시점에서 갑자기 우리 사이에서 빼앗아가 버림을 당하게 된 것은 우리의 큰 손실이요, 불행인 동시에 큰 경고입니다.
그는 왜 죽어야 했습니까? 산에 오르다가 떨어져 죽었다지만 엊그제 심장병으로 가출옥한 그가 왜 무리한 등산을 합니까? 거의 매일같이 갔습니다. 주위에서 충고를 자주 해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럼 무엇 때문입니까? 누구는 그의 오기(傲氣) 때문이라 했습니다. 사실 지지 않으려는 기(氣)의 사나이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오기라도 나라 일을 스스로 제 어깨에 지는 사람이 그저 기(氣)의 종만이 될 수는 없습니다. 따로 까닭이 있습니다. 너무 무리 말라 충고하면 보통 가볍게 넘겨버렸지만 정 말 속을 주는 사람에게는 “하지만 가슴이 답답해 터질 것 같은데 어떻게 합니까?” 했습니다. 그는 속에 울화가 있어 그것을 대우주에 향해 발산시키려고 산엘 올랐습니다. 거긴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래 아주 엘리아마냥 불길로 승화시켰습니다.
생각해야 합니다. 되찾아야 합니다. 죽은 가운데서 부활시켜 영원히 말하는 자를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죽은 장준하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을 밝히 바로 알아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땅을 보지 말고 하늘을 봅니다. 말씀은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건너다보지 말고 제 속들을 봅니다. 건너편이 하늘이 아닙니다. 하늘은 우리 속에 와 비칩니다.
이제는 역사가 대를 갈아야 할 때입니다.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입어야 합니다. 그러라고 장준하는 사라졌습니다.
잡았던 소나무를 놓쳐서 딩굴었답니다.
발이 미끄러져서 잡았던 소나무를 놓쳤답니다.
그럴 때 대지의 반석은 내 원수나 되는 듯이 내 골을 깠습니다. 뇌진탕을 일으켰고 숨은 끊어졌습니다.
그의 방벽에 나무꾼을 그린 그림 한 장이 걸렸고 거기 이런 시구가 있습니다.
재래지공무심처(再來紙恐無尋處)
호기현애일고송(好記懸崖一古松)
낭떠러지 소나무를 잡았다가 떨어져 죽은 그는 그 자신 역사의 절벽의 일고송이 돼버렸습니다. 어떻게 헤매다가도 이것을 보면 잃었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예언입니다. 하늘이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입니다. 광복 30주년에 주시는 역사의 말씀입니다.
이 인봉한 두루마리를 풀 자가 누구냐?
아무도 없으므로 내가 우노라!
아, 장준하야!
씨알의 소리 1975. 7,8 45호
전작집; 8- 299
전집; 8- 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