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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6일(火) 음력 11월 19일
[1950년] ‘국민방위군 설치법’ 발효
← ‘국민방위군 설치법’에 의해 국민방위군 지게부대에 지원한 사람들이 3,4일씩 굶어가며 걸어서 대구훈련소에 도착해 줄지어 서 있는 모습
중공군이 참전하고 전황이 악화되어가자 1950년 12월 16일 ‘국민방위군 설치법’이 국회에서 통과돼, 이날 공포ㆍ발효됐다. 만17세에서 40세 미만의 장정 50여만명이 제2국민병으로 소집됐다. 전국 각지의 51개 교육연대에 분산ㆍ수용됐으나 민간조직인 대한청년단 간부들이 지도부를 맡는 바람에 조직관리가 허술했다.
이들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된 것은 1·4후퇴 때였다. 군복은 커녕 변변한 옷하나 없이 굶주린 채 도보로 후퇴하다보니 아사자·동사자가 속출했고 더구나 그 시체들이 길거리에 방치되는 바람에 민심도 흉흉해졌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국회가 진상조사에 나섰다. 조사가 진행될수록 고구마 줄기처럼 감춰진 비리들이 드러났다. 군수뇌부가 쌀, 피복 등 군수품을 횡령하는 바람에 2만여명(생존 방위군 주장)이 전선에서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간 것으로 파악되자 이시영 부통령이 개탄속에 사임하고 사건을 축소은폐한 신성모 국방장관이 경질됐다. 김윤근 방위사령관을 포함한 5명의 간부는 24억환어치의 금품을 착복하고 5만2000섬의 양곡을 부정 처분한 혐의로 총살형에 처해졌다. 국민방위군은 이듬해 5월 12일 해체됐지만, 이 사건은 우리 군 부패의 최대 치부로 기록됐다./조선
[705년] 중국 유일의 여황제 측천무후 사망
← 중국 유일의 여제(女帝)로서, 약 15년(690∼705) 동안 중국을 지배했던 측천무후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여자 황제에 오른 당나라 고종의 비 측천무후가 705년 12월 16일 사망했다. 80세였다. 본명은 무조로 산동성 문주현 출신이었다. 당나라 고종의 비로 들어와 황후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며 40년 이상 중국을 실제적으로 통치했다.
무후는 638년 13세에 당 태종의 후궁으로 궁중에 입궐했다. 이때는 당조가 태종의 노력으로 중국을 막 재통일한 시기였다. 태종은 당나라 2대 왕으로 형과 동생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이세민이다. 태종이 병사하자 관습대로 비구니가 되었으나 태종 생존시부터 깊은 관계를 맺어 왔던 고종에 의해 다시 궁궐로 들어와 소의 자리에 올랐고 32세인 655년에는 황후로 책봉됐다.
고종 사후에도 후임 황제를 자주 바꿀 정도로 절대권력을 행사했다. 소정방을 통해 백제를 멸망시킨 것도 측천무후였다. 마침내 690년 혁명을 단행하여 65세 나이로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라 국호를 주(周)로 변경하고 천수라는 연호를 썼다. 적인걸(狄仁傑)·위원충(魏元忠) 등 명신을 등용하기도 하였지만 악랄한 책략과 가혹한 탄압 정치를 하였고, 요승 회의(懷義) 및 장역지(張易之) 형제 등과 추문을 남기는 등 많은 비난을 받았다. 16년간 여제(女帝)로 군림하다 705년 정변으로 중종이 복위되고 당나라가 재흥된 얼마 뒤 병사했다./조선
[1945년] 모스크바 3상회의 개최
1945년 12월 16~25일 미국·영국·소련의 3개국 외상이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戰後) 문제 처리를 위해 모스크바에 모였다. 한반도에 먼저 ‘임시 민주정부’를 수립하고 4대 강국(미국·영국·소련·중국)이 최고 5년간 신탁통치 또는 후견을 한다는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의안은 한반도 특히 미군정의 직접 통치하에 있던 남한을 크게 뒤흔들었다. 처음에는 좌우익 모두 신탁통치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곧 현실론과 당위론으로 갈라졌다. 좌익 세력이 찬탁으로 돌아선 반면, 임시정부 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우익은 줄기차게 반탁의 목소리를 높였다. 신탁통치반대운동의 파고가 높아질수록 좌우 대립도 깊어만 갔다. 이러한 좌우익의 대립에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통일임시정부의 수립이라는 3상회의의 결정 사항은 실현되지 못했다.
[1773년] 보스턴 차 사건
1773년 12월 16일 인디언으로 변장한 보스턴 주민들이 항구에 정박 중인 영국 동인도회사 소유의 배에서 1만 파운드 상당의 차를 바다에 내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식민지 주민들이 차에 부과된 과도한 세금과 동인도회사의 차 판매 독점에 반발하여 일으킨 것이다. 1767년 영국은 식민지 의회를 일시 정지시키고 식민지에 추가세금을 엄격하게 부과함으로써 영국 본국이 식민지에 대해 전통적으로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일 목적으로 타운센드 법안을 제정했다. 그러나 곧 식민지의 거센 저항에 부딪힌 영국 정부는 1770년 차세를 제외하고 타운센드 법이 부과한 모든 관세를 폐지했다. 그러자 보스턴의 상인들은 네덜란드 밀수업자들을 통해 차를 공급받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재정난에 빠진 동인도회사를 돕기 위하여 1773년 영국 의회는 차조례의 시행규칙을 조정했다. 이 시행규칙은 동인도회사에 식민지로 수출되는 모든 차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하고 수출세를 면제해 주는 등의 특혜를 보장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러한 영국의 식민지정책은 보수적인 식민지의 상인들과 영국에 강력히 저항할 것을 주장하는 급진파와의 연합을 야기하였고 결국 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났다./브리태니커
[1866년]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출생
1866년 12월 16일 태어남 / 1944년 12월 13일 죽음
"색(色)은 건반이고 눈은 화음이며 영혼은 여러 줄의 현을 가진 피아노이다. 예술가란 ‘연주하는 손’으로, 건반을 하나하나 눌러 영혼의 떨림을 일으킨다."
- 바실리 칸딘스키
칸딘스키는 순수 추상미술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화가이자 미술이론가이다. 모스크바대학에서 법률과 경제학을 전공하고 교수로 재직하던 중 화가가 되기 위해 법률가의 길을 접었다. 1896년 뮌헨으로 이주하여 창작활동에 전념했다. 1910년 '최초의 추상적 수채화'라 불리는 <무제>를 발표했고 그 이듬해에는 독일 화가인 프란츠 마르크와 함께 '청기사파'라는 추상미술가 집단을 조직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칸딘스키는 러시아로 돌아가 교육활동과 예술집단을 조직하는 데 전념했으며 전쟁이 끝나자 독일로 돌아와 1922년 건축·디자인 학교인 바우하우스에 합류했다.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형태는 유연하고 유기적인 것에서 기하학적인 것으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잔잔한 열정 Tempered Elan>과 같이 상형문자와 비슷한 모습으로 발전했다.
[1999년] LG화학 퀴놀렌계 항생제 '팩티브(factive)' 신약 발표회
LG화학(LG Chemical)은 독자기술로 개발한 퀴놀론계 항생제 ‘팩티브(Factive)’의 임상시험을 모두 마치고 미국 식품의약국(FDA·Food and Drug Administration)에 신약승인 신청(NDA·New Drug Application)을 냈다고 16일 발표했다. 국내 제약사가 미국 FDA에 신약승인을 신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LG화학 조명재 사장은 “미국과 유럽 등 전세계 40여 국가에서 8천명 이상의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 3상을 마친 결과, 이 항생제가 하루 한차례 복용으로도 폐렴, 기관지염 등 호흡기 감염에 탁월한 효과가 있으며 내성균에 강하고 독성이 없는 것으로 확인돼 신약승인 신청을 냈다”고 밝혔다.
조 사장은 “임상시험 이전부터 미국 FDA로부터 신물질에 대한 질(質)을 평가받아왔고 임상이 성공리에 끝났기 때문에 내년 10월께 신약승인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는 “팩티브의 시장규모는 15억달러에 달할 것”이라며 “LG화학이 향후 20년간 1조5천억원 이상의 수익을 올릴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팩티브의 신약승인 신청은 임상 2상 때부터 LG화학과 전략적 제휴를 한 미국의 스미스클라인 비챰(SmithKline Beecham)사가 냈다. LG화학은 전략적 제휴의 조건으로 판매권을 스미스클라인 비챰사에 넘기는 대신 앞으로 20년간 판매금액의 6~9%를 로열티로 받기로 했다.
LG화학은 스미스클라인 비참사로부터 이미 계약금조로 3천775만달러를 받았다고 밝혔다. 이 회사는 또 원료 독점공급권과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남아 시장에서의 판매권은 LG화학이 갖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1996년] 서울고법 형사1부, 12.12 및 5.18사건 항소심에서 전두환 전대통령에게 무기징역, 노태우 전대통령에게 징역 17년을 각각 선고
두 前대통령 '세기의 재판' - 全斗煥(전두환) 盧泰愚(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12월16일 12.12 및 5.18사건 항소심에서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17년을 선고받았다. 3월11일 1심이 시작된지 9개월5일 만이었다. 전, 노씨는 상고를 포기했으나 검찰이 상고해 형이 확정되지는 않았다. 1심에서는 전, 노씨에게 사형과 징역 22년6월이 선고됐었다.
[1995년] 축구 응원단 ‘붉은 악마(Red Devils)’ 탄생
1995년 12월 16일 오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응원단 '붉은 악마(Red Devils)'의 '전설'이 시작됐다.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 ‘칸타타’에서였다. PC통신 하이텔의 10여개 '축구동호회' 운영자 10여명은 이날 축구 응원문화의 개선을 위한 회의를 갖고 이른바 '칸타타 선언'을 채택했다.
선언 참가자들은 30∼40대 직장인과 교사 등이 주축이었다. 이들은 평균 관중 1만명을 넘기지 못하고 비인기 스포츠로 전락한 프로축구의 ‘복권(復權)’을 꿈꾸며 모인 동호인 집단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후 국가대표팀 경기마다 300∼400명 단위로 한국팀 유니폼을 입고 자신들을 ‘서포터’라고 부르는 ‘단관’(단체관람:붉은 악마들끼리 사용하는 말임) 모임이 등장했다.
지난 1996년 여름 한국―중국 국가대표팀의 축구경기가 열린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3만여명의 관중들 틈새에서 300여명이 될까말까한 일단의 ‘무리’가 붉은 색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섬처럼 떠있었다. 당시엔 ‘붉은 악마’란 이름도, ‘대∼한민국’이라는 구호도 없었다. 수만명 관중들 틈에서 이들의 존재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목놓아 ‘아리랑’과 ‘애국가’를 불렀다. 이날이 PC통신에서 한국팀 응원단을 모은다는 공고를 보고 ‘붉은 악마’가 처음 국가대표팀 경기에 나간 날이었다.
‘붉은 악마’라는 이름은 조직 탄생 1년 반만에 지어졌다. 처음 이름은 ‘그레이트 한국 서포터스’였다. 그러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한 해 앞둔 1997년 5월 1일 하이텔 축구동호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한국 대표팀을 만들겠다’는 공지와 함께 명칭을 공모했다. ‘레드 일레븐’ ‘레드 맥스’ ‘꽹과리 부대’ ‘쿨리건’ ‘레드 워리어즈’ 등 아이디어가 나왔다. 이름에 ‘레드’가 들어가는 것이 가장 큰 공통점이었고, 그 중 1983년 멕시코청소년축구대회 이후 우리 대표팀의 별명으로 사용되곤 했던 ‘붉은 악마’에 대한 호응이 가장 컸다.
1997년 8월 ‘붉은 악마’가 한국 대표팀 서포터의 공식 이름으로 채택됐다. 붉은 악마를 상징하는 ‘치우천왕(蚩尤天王)’상은 기원전 2707년부터 109년간 중원의 배달국가를 다스린 인물로 전쟁에서 반드시 이겼다는 전설의 주인공. ‘붉은 악마’는 2002 한일월드컵을 통해 국제적 브랜드로 떠올라 세계인의 주목을 끌었다. /조선
[1950년] 트루먼, 국가비상사태 선언
← 트루먼
트루먼(Truman, Harry S.) 미국 대통령이 1950년 12월 16일 미국 전역에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모든 국민들에게 공산제국주의와 맞설 것을 촉구했다.
트루먼은 권리장전으로 보장된 만족스럽고 부유한 생활이 공산주의의 침략으로 위협받고 있다고 경고했다. 트루먼은 방위를 위한 무기생산에 주력할 것이며, 자유를 위해 유럽을 방위하겠다고 약속했다. 미국 정부는 크라이슬러, 포드, GM사들의 가격인상 조치를 취소시켰다. 물가인하정책을 반대해 왔던 자동차 회사들도 정부에 지지를 약속했다. 노동조합 역시 트루먼을 도와 철도파업 노동자들을 직장에 복귀시켰다.
이같은 트루먼의 결정은 북한에서의 맥아더 군대의 패배에 따른 후속조치였다. 6주 전 한국전역이 UN군 통치하에 있어서 승리가 눈앞에 있었지만 중국군의 개입으로 UN군은 평양을 빼앗겼고, 중국군은 전력을 다해 그들을 38도선 이남으로 밀어부쳤다. /조선
[1941년] 세계최대 일본 전함 ‘대화(大和)’ 진수
옛 일본해군의 전함. 세계 최대의 초대형 전함으로 2척이 있었다. 공시배수량(公試排水量) 6만 9100t, 만재배수량(滿載排水量) 7만 2809t, 전체길이 263m, 최대나비 38.9m, 공시흘수(公試吃水) 10.4m, 축(軸)마력 15만, 속력 27kn, 주포(主砲)인 46㎝포 9문, 부포(副砲) 15.5㎝포 12문이 장착되었다. 개장(改裝) 후(공시배수량 6만 9594t), 12.7㎝ 고각포 24문, 25㎜기총 150기, 캐터펄트 2대, 수상정찰기(관측기) 7대가 탑재(搭載)되었다. <야마토[大和(대화)]>는 1941년 구레공창[吳口廠(오구창)]에서 준공, 1945년 오키나와[沖繩(충승)] 공격에 항진하던 중, 미군 함재기(艦載機)의 집중공격을 만나 침몰하였다. 야마토형 전함인 <무사시[武藏(무장)]>는 1942년 나가사키[長崎(장기)] 미쓰비시조선소[三菱造船所(삼릉조선소)]에서 준공(공시배수량 6만 9594t), 1944년 필리핀해전에서 미군 함재기의 공격을 받아 시부얀해에서 침몰하였다. /yahoo
[1902년] 독립운동가 유관순(柳寬順) 출생
← 유관순(뒷줄 맨 오른쪽), 이화학당 재학시
1902. 12. 16(음력 11월 17일) ~ 1920. 9. 28.
3.1만세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유관순 열사가 1902년 12월 16일 충남 천안(옛 지명은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에서 출생했다. 이화학당 재학 중 만세운동을 벌이다가 일제가 학교 문을 닫자 고향인 충남 천안으로 내려가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유열사는 아우내 장터에 모인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며 앞장서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본 헌병에게 살해되었다. 일제의 가혹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고, 옥중에서도 만세를 부르며 동지들을 격려하다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그때가 1920년 10월 12일(9월 28일로 정정), 그녀의 나이 19세였다. 옥중에서도 굳건한 독립의지를 꺽지 않았기에 지금까지 여성독립운동가로 추앙되고 있다.
[1901년] 미국의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Mead, Margaret) 출생
1901. 12. 16 ~ 1978. 11. 15
필라델피아 출생. 1929년 컬럼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925∼1939년 사모아섬·애드미럴티제도·뉴기니·발리섬 등의 미개민족을 조사하였다. 특히 여러 부족의 청소년기에 있어서 문제와 성(性)행동에 관한 조사결과를 보고하였다.
미국 자연사박물관(自然史博物館) 인종부문 관리자로 있으면서, 1954년 이후 컬럼비아대학 인류학 조교수를 겸하였다. R.베네딕트와 함께 미국 문화인류학에 심리학적 방법을 도입, 발전시켰다. 특히 인격형성과정에 있어서의 문화영향을 중시한 입장에서 연구를 추진하고, 각국 국민성에 관한 비교연구에서도 업적을 남겼다.
1960년 미국 인류학회장을 맡았으며, 사회·교육평론가로서도 활약하였다. 저서는 미국 각 대학에서 문화인류학·사회심리학·사회학 등의 전공 학생의 교과서로 사용된다.
저서에 《사모아의 성년(成年)》(1928) 《마누스족 생태(生態)연구》(1930) 《세 미개사회의 성(性)과 기질》(1935) 《남성과 여성》(1949) 《권위에 대한 소비에트인의 태도》(1951) 등이 있다. /naver
[1859년] 독일의 형제작가 빌헬름 그림 사망
← The Grimm Brothers, 1855 (right: Jacob Grimm; left: Wilhelm Grimm)
1786. 2. 24 ~ 1859. 12. 16
형은 야코프(Jacob Grimm:1785∼1863), 동생은 빌헬름(Wilhelm Grimm:1786∼1859)이다. 헤센주 하나우 출생이다. 대학에서는 법률을 배웠고, 도서관에 근무한 후 1830년 괴팅겐대학교의 초청을 받아 교수가 되었으며, 하노버왕의 헌법 위반을 규탄하여 이른바 ‘괴팅겐 7교수사건’에 들어 공국 밖으로 추방당하였다. 1841년 베를린 아카데미 회원으로 추천되었다. 이상의 경력은 연년생인 형제가 똑같다. 경력뿐만 아니라, 전문분야도 똑같이 언어학이며, 《그림동화 Kinder-und Hausmarchen》(1812~1875) 《독일전설 Deutsche Sagen》(1816~1818) 《독일어 사전 Deutsches Worterbuch》(1852~1960) 등 공동 저작도 많다. 특히 《독일어 사전》은 1854년에 제1권을 낸 이후, 여러 학자가 계승하여 1861년에 완성하였다. 이 밖에 게르만 언어학의 창시자로서 형은 《독일어 문법》(1819~1837) 《독일어사》(1848), 동생은 《독일 영웅전설》의 저작이 있다. 그들의 전문분야인 언어학의 영역에서는 형 야코프가 보다 큰 업적을 남겼으나, 그림 형제의 명성을 세계적으로 높인 《그림동화》를 만드는 데는 동생 빌헬름이 더 큰 역할을 하였다. 수집한 옛이야기를 예술적으로 표현하고 다듬은 사람은 주로 동생이다. 그들이 게르만 언어학의 연구, 그리고 독일의 옛이야기와 전설의 수집으로 전환한 계기는 낭만파 문학에 의하여 촉발된 향토적·서민적인 것에 대한 깊은 애정에 기인한다. /naver
[1775년] 오스틴 [Austen, Jane, 1775.12.16~1817.7.18] 출생
← 오스틴, C. Austen이 그린 연필 수채화(1810경)
1775년 12월 16일 영국 햄프셔주(州) 스티븐턴에서 출생하였다. 21세에 《첫인상》이라는 작품을 쓰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완성, 아버지가 런던의 출판사에 보냈으나 거절당했다. 이것이 대표작 《오만과 편견 Pride and Prejudice》(1813)의 바탕이 되었다. 그 후 아버지가 죽고 가정형편이 곤란하여 여기저기 전전하면서도 틈틈이 창작활동을 하다가 1809년 34세 때 고향에 가까운 초턴이란 조용한 마을에 안주하면서부터 계속적으로 소설을 발표하였다.
처녀 출판된 《센스 앤 센서빌리티 Sense and Sensibility》(1811)를 비롯하여 《오만과 편견》(1813) 《맨스필드 공원 Mansfield Park》(1814) 《에마 Emma》(1815) 등의 걸작이 햇빛을 보았으나, 《설복 Persuasion》(1818)을 탈고한 16년경부터 건강을 해쳐 이듬해 42세에 죽었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는데, 담담한 필치로 인생의 기미(機微)를 포착하고 은근한 유머를 담은 그녀의 작품은 특히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높이 평가되었고, 영국의 한 여류작가로 머물지 않고 세계 문학의 대표적 작가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naver
[1631년] 이탈리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4천명 사망
높이 1,281m의 베수비오산(Vesuvio Mt.)은 나폴리 동쪽 12km 지점에 있는 현무암질의 2중식 활화산이다. 일반적으로 영어명의 베수비어스산(Vesuvius Mt.)으로 널리 알려졌다. 유럽대륙 유일의 활화산으로 산꼭대기에는 지름 500m, 깊이 250m의 화구가 있고, 그 안에 중앙화구구(中央火口丘)가 있다. 소마산(1,132m)이라고 부르는 외륜산(外輪山)과 중앙화구구와의 사이에는 아트리오라는 길이 약 5km, 너비 600m의 초승달 모양의 화구원(火口原)이 펼쳐진다. 베수비오산은 BC 8세기에 분화(噴火)했다고 하며, 63년의 지진으로 산기슭 일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79년 8월의 대분화로 폼페이를 비롯한 여러 도시가 삽시간에 죽음의 도시로 변하고 지하에 매몰되는 대참사가 있었는데 이 참사는 영국의 작가 E.G.리턴이 《폼페이 최후의 날》에서 잘 묘사하였다.
그 대분화 이후에도 수십 회에 걸쳐 산꼭대기와 산허리에서 폭발하여 용암이 흘러내렸다. 1631년에는 약 반 년에 걸친 진동 후 폭발하여 주변의 주민 1만 8000명이 희생되었고, 그 후에도 끊임없이 진동이 계속되어 산의 모습이 달라지고 분화구의 중앙에서 좀 남쪽에 화산구(火山丘)가 생겼다. 1944년에는 대용암류로 등산전차가 황폐되었으나 오늘날에는 자동차 리프트로 산꼭대기에 오를 수 있고, 둘레 72km에 이르는 화산 기슭을 둘러싸고 관광철도가 달리고 있다. 높이 600m 이하의 비옥한 화산 비탈면에서는 포도 ·오렌지류 ·호두 등의 재배와, 가축 사육이 활발하다. 산중턱의 서쪽 높이 약 600m 지점에는 1845년 세계에서 최초로 건설된 화산관측소가 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분화는 1973 ·1979년이며, 베수비오산은 나폴리 풍경의 상징으로 많은 노래와 회화, 문학작품에 인용된다. /naver
그 밖에
2002년 세계최초로 비브리오균 유전자 완전해독
1998년 이소정양, 미국 브로드웨이 뮤지컬 `미스 사이공`에 첫 한국인 주역
1997년 환율변동제한폭 철폐
1997년 위안부 참상 첫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 별세
1994년 국회, WTO가입 비준동의안 통과
1993년 록히드사건의 중심인물인 다나카 가쿠에이 사망
1990년 해방신학자 아리스티드, 아이티 대통령에 당선
1988년 강영훈 제21대 국무총리 취임
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 실시, 노태우 후보 당선
1984년 여수 돌산 연육교 개통
1984년 프랑스, 북한통상대표부의 일반대표부 격상 시인
1982년 정부, 복역중인 김대중의 서울대학병원 이송과 도미 허용 발표
1981년 폴란드 교회, 계엄당국의 군사탄압 반대 선언
1980년 유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독립창설 촉구하는 결의안 채택
1978년 카터 미국 대통령, 중국과 수교하고 대만과 단교한다고 발표
1977년 국회, 12해리 영해법안 통과
1975년 부주석 강생(康生) 사망
1975년 중국, 제5호 인공위성 발사
1969년 영국 하원, 사형폐지법안 통과
1965년 영국의 소설가 윌리엄 서머셋 몸 사망
1965년 국내 최초로 텔렉스 개통(400회선)
1963년 최고회의 해체
1960년 미국 민간여객기 뉴욕 상공서 충돌. 134명 사망
1959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 발족
1958년 콜롬비아의 보고타시 대화재 93명 사망
1957년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 정년 퇴임
1949년 페루, 한국정부 승인
1947년 북한, 화폐개혁 실시
1946년 맥아더원수, 극동군사령관에 임명
1945년 미군정장관 러치 소장 임명
1945년 모스크바 삼상회의 시작(~25일)
1920년 국제연맹총회, 상설 국제사법재판소규약 채택
1920년 중국 칸수 대지진으로 18만명 사망
1912년 발칸전쟁에 관한 1차 런던강화회의 개막(~1913.5.3)
1888년 유고슬라비아의 왕 알렉산다르 1세 출생
1882년 헝가리 민속음악의 권위자인 대표적작곡가 졸탄 코다이 출생
1869년 미학.사변철학.문학비평 분야에 중요한 공헌을 한 미국의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 출생
1866년 프랑스 화가 위슬리 칸딘스키 출생
1863년 미국의 고딕 복고양식의 건축가 랄프 아담 크램 출생
1857년 천체사진술의 선구자인 미국의 천문학자 에드워드 에머슨 바너드 출생
1850년 알렉신이라는 살균제를 발견한 독일의 세균학자 한스 부흐너 출생
1790년 벨기에 첫번째 왕 레오폴 1세 출생
1717년 영국 시인 엘리자베스 카터 출생
1568년 이황, `성학십도`를 지음
1515년 포르투갈령 인도 총독 아폰수 데 알부케르케 사망
1485년 잉글랜드 왕 헨리 8세의 첫번째 왕비 아라곤 캐서린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