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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迎日鄭氏四難契會 원문보기 글쓴이: 솔밭향기
푸르름이 잉태하는 4月에
~~~모향회 문화유적지 탐방하다<3>~~~
언 제 2015년 4월 25일
어디를 ; 경상남도 밀양일원
신비의 비, 일명 땀흘리는 비, 한비라고 하는
표충비(사명대사의 혼이 담긴)를 살펴 보고, 사명대사의 유적지와
생가지를 새롭게 탐방하고 회장 총무가 준비한 중식을 맛있게 먹으면서 그 옛날의
추억들을 상기하며 잠사나마 웃음바다를 장식하였었다.ㅇ
~~~제3코~스.예림서원에 가다~~~
있는곳 ;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 179
**예림서원**
현재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에 있는 예림서원(禮林書院)은 영남(嶺南)
유림의 종장(宗匠)인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을 사숙(私淑)하던 후학들의 교육기관으로
지금은 김종직(金宗直)을 주벽(主壁)으로, 박한주(朴漢柱, 1459~1504)을 동쪽에,
신계성((申季誠, 1499~1562)을 서쪽에 모시고 밀양 유림(儒林)에서
매년 3월과 9월 상정일(上丁日)에 향사(享祀)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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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는 1567년(명종 22)에 당시 부사(府使) 이경우(李慶祐)가 밀양 유림의 요청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자문을 받아 자씨산(慈氏山)아래 영원사(靈源寺) 옛터인
덕성동(德城洞)에 서원을 짓고 덕성서원(德城書院)이라고 불렀는데, 1635년(인조 13)에
지금의 상남면 예림리(禮林里)로 옮겼다가 1680년(숙종 6) 묘우(廟宇)가 소실되어 다시
지금의 부북면 후사포리(後沙浦里)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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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으며, 1871년(고종 8)에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강제 훼철된 바 있으나 서원이 훼철된 다음 해
사림에서는 서원의 훼철이 부당함을 진정하였고, 1874년(고종 11) 향사림(鄕士林)의
노력으로 강당(講堂) 5칸과 동서재(東西齋) 등 부속건물을 중건 보수하여 예림재(禮林齋)로
개칭하여 유생들의 강학과 사림이 집회소로 활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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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루(讀書樓)
서원의 정문 역할을 하는 정면 3칸,측면 2칸의 2층 누각이다.
누문(樓門)을 통해 서원 안으로 들어서면 좌우에 몽양재(蒙陽齋)와 열고각(閱古閣)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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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림서원의 설명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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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광복(光復)후에 사액(賜額) 현판을 다시 달았는데
그 뒤 1971년에 강당을 중수하고,1974녀에는 사당을 중건하였으며
,1985년부터 대대적인 복원 공사를 벌여 1988년에 완공하였다. 예림서원은
1974년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9호로 지정되었다. 건물은 육덕사(育德祠),
정양문(正養門), 동.서재인 돈선재(敦善齋).직방재(直方齋), 강당인 구영당(求盈堂),
몽양재(蒙養齋) ,열고각(閱古閣), 독서루(讀書樓)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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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구익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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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전체 건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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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림서원 글씨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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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재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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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재 글씨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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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덕사로 드는 정삼문 정양문도~~~
정양문(正養門)
담장을 둘러서 별도의 영역을 마련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사당은
정양문을 통하여 들어간다.
정양문은
周易蒙卦彖傳(주역몽괘단전)에
蒙以養正聖功也(몽이양정성공야)
"몽매한 자를 바르게 기르는 것은 성스러운 공이 되는 것이다"에서 유래되었다.
사당(祠堂)구역인 육덕사(育德祠)로 들어가는 내삼문(內三門)으로 평소에는 잠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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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 사이로 육덕사도 담고~~~
육덕사(育德祠)
3단계로 구역이 조성된 서원에서 가장 위상이 높은 건물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에서 묘의 영역이다. 문틈 사이로 찍다 보니 사진이 반듯하질 못하다.
육덕사 배향인물의 개요
주벽-김종직(金宗直, 1431~149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효관(孝盥)·계온(季昷),
호는 점필재(佔畢齋). 경상남도 밀양 출신. 아버지는 사예 숙자(叔滋)이고,
어머니는 밀양박씨로 사재감정(司宰監正) 홍신(弘信)의 딸이다.
1453년(단종 1)에 진사가 되고,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1462년 승문원박사로 예문관봉교를 겸하였다. 이듬해 감찰이 된 뒤 경상도병마평사·이조좌랑·수찬·함양군수 등을 거쳐 1476년 선산부사가 되었다. 1483년 우부승지에 올랐으며, 이어서 좌부승지·이조참판·예문관제학·병조참판·홍문관제학·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은 아버지로부터 수학, 후일 사림의 조종이 된 그는 문장·사학(史學)에도 두루 능했으며, 절의를 중요시해 조선시대 도학(道學)의 정맥을 이어가는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나 많은 시문과 일기를 남겼다. 1486년에는 신종호(申從濩) 등과 함께 ≪동국여지승람≫을 편차(編次)한 사실은 문장가로서 그의 면모를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무오사화 때 많은 저술들이 소실되어 그의 진정한 학문적 모습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후일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사관으로서 사초에 수록, 무오사화의 단서가 된 그의 <조의제문 弔義帝文>은 중국의 고사를 인용, 의제와 단종을 비유하면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것으로, 깊은 역사적 식견과 절의를 중요시하는 도학자로서의 참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그의 도학사상은 제자인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유호인(兪好仁)·남효온(南孝溫)·조위(曺偉)·이맹전(李孟專)·이종준(李宗準) 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의 도학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김굉필은 조광조(趙光祖)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시켜 그 학통을 그대로 계승시켰다.
그의 도학이 조선조 도통(道統)의 정맥으로 이어진 것은 <조의제문>에서도 나타나듯이 그가 추구하는 바가 화려한 시문이나 부·송 등의 문장보다는 궁극적으로 정의를 숭상하고, 시비를 분명히 밝히려는 의리를 중요하게 여긴 점이 높이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세조·성종대에 걸쳐 벼슬을 하면서 항상 정의와 의리를 숭상, 실천했는데, 그 정신이 제자들에게 전해졌고, 실제로 이들은 절의를 높이며 의리를 중히 여기는 데 힘썼다. 이러한 연유로 자연히 사림학자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고, 당시 학자들의 정신적인 영수가 되었다.
이들 사림들이 당시 훈척계열(勳戚系列)의 비리와 비도를 비판하고 나서자, 이에 당황한 훈척계열인 유자광(柳子光)·정문형(鄭文炯)·한치례(韓致禮)·이극돈(李克墩) 등이 자신들의 방호를 위해 1498년(연산군 4)에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그 결과 많은 사림들이 죽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고, 김종직도 생전에 써둔 <조의제문>과 관련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었으며, 밀양의 예림서원(藝林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김천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의 덕림서원(德林書院) 등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점필재집≫·≪유두류록 遊頭流錄≫·≪청구풍아 靑丘風雅≫·≪당후일기 堂後日記≫ 등이 있으며, 편저로 ≪일선지 一善誌≫·≪이존록 彛尊錄≫·≪동국여지승람≫ 등이 전해지고 있으나, 많은 저술들이 무오사화 때 소실된 관계로 그렇게 많지 않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박한주(朴漢柱, 1459~150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천지(天支), 호는 우졸재(迂拙齋).
돈인(敦仁)의 아들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83년(성종 14) 생원시·진사시에 합격하고 1485년 문과별시(文科別試)에 급제하였다.
전생서직장(典牲署直長)에 제수된 뒤 한성부참군·사헌부감찰·사간원정언·성균관전적 등을
지내고 부모의 봉양을 위하여 자진해서 창녕현감으로 나왔다. 이때 백성들을 지성으로 보살피고 교화시켜 임금이 비단과 교서(敎書)로서 포상, 가자(加資)하였다.
임기를 마치고 다시 내직으로 들어가 종부시주부를 거쳐 1497년(연산군 3) 사간원헌납이 되었다. 이때 연산군의 실덕(失德)을 직간(直諫)하였고 또 임사홍(任士弘) 등의 간악함을 탄핵하는 차자(箚子)를 올렸다. 연산군의 횡포가 점차 심해지자 외직을 청하여 평해군수·예천군수 등을 지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門徒)로 붕당을 지어 국정을 비방한다는 죄명으로 장(杖) 80대에 평안북도 벽동(碧潼)으로 유배되었다. 1500년 평안도로 이배되었는데, 이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처형당하였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었고, 1517년 김정(金淨)·조광조(趙光祖) 등의 계(啓)에 의하여 도승지 겸 예문관직제학이 추증되었다. 밀양 예림서원(禮林書院), 함안 덕암서원(德巖書院), 대구 남강서원(南岡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우졸재집≫이 있다.
신계성(申季誠, 1449-1562)
신계성은 본관이 평산(平山)으로, 고려 때 원훈 공신(元勳功臣)인 신숭겸(申崇謙)이
그의 시조이다. 신계성은 밀양(密陽)에 우거(寓居)하며 숨어 벼슬하지 않고 학문을 하는
데에 온 힘을 바쳤다.
건물의 구조는 교육공간은 앞에, 제사공간은 뒤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배치를 하였다.
사당인 육덕사와 유생들의 모임 및 학문을 닦는 곳인 강당, 생활공간인 돈선재와 직방재,
그리고 전사청, 독서루 등이 남아있다. 김종직의 저서인 이존록과 점필재문집의 목판이
보관되어 있다.
조의제문(弔義帝文)
김종직은 1492년(성종 23) 세상을 떠났는데,1498년(연산군 4) 그가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관이 된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났다.무오사화는 김일손 등의 사림파가 유자광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에
의하여 화를 입은 사건을 말한다. 성종이 승하하고 연산군이 즉위한 후 성종실록편찬을 위한
실록청이 설치되었다. 이때 당상관이 된 이극돈은 김일손이 기초한 사초에 자신의 비행과
함께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삽입된 것을 보고, 이는 항우(項羽)가 초 회왕(楚 懷王 : 義帝)을
죽인 중국의 고사를 비유하여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한 것이라 하여,이것을 문제 삼아서
유자광과 함께 연산군에게 고해 바쳤다.
그러나 실제로는 종래의 집권세력인 유자광 ·정문형·이극돈 등 훈구파가 성종 때부터
주로 사간원·사헌부·홍문관 등 3사에 진출하여 언론과 문필을 담당하면서, 자신들의
정치행태를 비판해왔던 김종직 문하의 사림파를 견제하기 위하여 내세운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이 사건은 무오사화로 이어져 김일손·권오복 등이 죽음을 당하고 정여창·김굉필·이종준
등이 유배되는 등 일단 사림파의 후퇴를 가져왔다. 중종이 즉위한 뒤 죄가 풀리고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1689년(숙종 15)에는 송시열과 김수항의 건의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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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선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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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방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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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고각도~~~
**열고각(閱古閣)**
열고각 안에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75호인
《점필재집점(佔畢齋集》책판과 《이존록彛尊錄》책판이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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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재도~~~
**몽양재(蒙陽齋)**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곳.'
외삼문을 들어서면 좌우에 위치한 몽양재와 열고각은 예림 서원의 3개
(몽양재 구역, 강당 구역, 사당구역)구역 중 가장 낮은 자리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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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면서 전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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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준조약 무생과실(克遵條約 无生過失)
밀양부사 이상억(李象億)이 1865년 김종직을 위해 쓴 글이라고 한다.
"이치와 규약을 잘 따르면 잘못이 생겨 날 수 없다.'라는 의미로 김종직의 성품을 지칭하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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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짝핀 영산홍이 너무 예쁘길래~~~
점필재문집책판 및 이존록(佔畢齋文集冊板 및 彛尊錄)
-경상남도유형문화재 175호(1979.12.29.지정)-
《점필재집佔畢齋集》책판은 점필재 김종직의 시문을 모은 문집 책판이다.
《점필재집》은 1493년(성종 24)에 점필재 김종직의 생질이며 제자인 강중진이
점필재의 초고를 모으고, 송계 조위(점필재의 처남)가 편집한 원고가 미처 간행되지
못하고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모두 잃어버린 것을 강중진이 다시 나머지 글을 모아
1517년(중종 12)선산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것이 초간본이다.
《점필재집》은 그 뒤 여러 차례의 수정과 보완, 교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데,
시집 23권과 문집 2권을 합쳐 모두 25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연보와 무오사적(戊午事蹟),
문인록(文人錄) 등이 부록으로 붙어 있다.
점필재문집은 조선시대 영남사림학파의 영수인 김종직의 시문집 책판이다. 김종직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1459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제학, 공조·이조참판 등 여러 벼슬을
거쳤다. 문장과 역사에 뛰어나 조선시대 도학(道學)의 정수를 이어가는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이 문집은 1493년(성종 24)에 김종직의 조카 장중진이 최초에 작성된 원고를 모아 김종직의
문도였던 조위가 편집을 하였으나, 미처 간행하지 못하고 무오사화로 인해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다시 장중진이 그 나머지 글을 모아 1517년(중종 12)에 선산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점필재문집은 시집이 23권, 문집 2권으로 총 25권이며, 연보, 무오사적, 문인록 등이
부록으로 붙어 있다. 이 책판은 1789년 이관하여 현재 예림서원에 소장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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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코~스.천왕산 표충사에 가다~~~
있는곳 ;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31-2
**표충사**
표충사 대광전(表忠寺 大光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1호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대광전은 표충사의 중심 불전(佛殿)으로 가운데 있는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질병과 무지를 다스리는 약사불(藥師佛)을, 서쪽에는 서방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각각 봉안하고 있다. 신라시대에 처음 지어졌다고 하지만, 전란
등으로 불타 버린 것을 1929년에 다시 지었다.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충 팔작
(八作) 다포계(多包系) 양식이다. 기둥머리의 용머리 조각과 추녀의 장식들이 화려하고
섬세하며. 기둥과 기둥 위 장식들의 간격이 동일하게 배치되어 균형미를 잘 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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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네 귀퉁이에는 추녀가 처지는 것을 막기 위해 4개의
기둥[活柱]을 따로 두어 추녀를 받치고 있다. 4개의 기둥 중 앞쪽의 기둥은
팔각형인 데 반해 뒤쪽의 기둥은 원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런 구성은 매우 특이하다.
건물을 받쳐주는 받침돌[基壇石]은 잘 다듬어져 있으며, 주춧돌 역시 다듬은 돌로 되어
있어 건물의 품위를 높여 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 건물은 화려하고 섬세한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유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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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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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입구에 거대한 나무숲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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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사 정문이 숲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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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누각으로 만들어진 3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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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산 표충사 설명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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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쪽도 담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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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표충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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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관 전체 건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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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관 입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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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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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은입사 향완 설명문도~~~
표충사 청동함은향완(表忠寺 靑銅含銀香琓)
국보 제75호
향로는 불전(佛殿)에 향을 피우는 용기로 고려시대에 많이 제작되었다.
이 향로는 가는 은실을 청동으로 만들어진 향로에 새겨 넣는 방법으로 제작되었으며,
외형은 굽다리접시 형태로 고려시대 향로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1957년에 발견된
이 향로는 57자의 명문으로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유품이다 명문에는 제작년월일,
발원, 발원자, 중량을 기록하고 있으며, 명칭은 함은향완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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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받침 안쪽면에는 "창녕북면용흥사(昌寧北面龍興寺)"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원래 이 향완이 있었던 곳이 창녕의 용흥사였음을 알 수 있다.
언제 표충사에 옮겨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선조가 사명대사에게 하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작연대는 1177년[명종7]으로 우리나라 향로로서는 가장 오래된
작품이며, 일본의 법륭사에 있는 향로보다 1년 앞서 제작된 것이다.
높이는 27.5Cm, 구경 26.1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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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사" 사당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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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사당의 글씨체가 굉장히 힘이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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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 영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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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대사 영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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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허대사 영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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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서원 전체 건물도~~~
***표충서원(表忠書院)***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
이 서원은 본래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서산(西山), 사명(四溟), 기허당(騎虛堂)
등 세분 대사(大師)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원래는 무안면 중산리 삼강동에
표충사(表忠祠)라는 상당(祠堂)으로 세워져 있던 것,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표충서원으로
편액을 걸었다 이 때 절 이름도 표충사(表忠寺)로 고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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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촌어르신의 다정한 모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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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예림서원의 주향으로 배향된 점필재 김종직선생은 후일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사관으로서 사초에 무오사화의 단서가 된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글을 올린것이 알려져 무오사화의 단초가되었다. 우리 생원공 후손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계기가 되어서 선무랑께서는 자양으로 은입하신것이다. 그이유는 우리 사성공(휘 從昭)을 오천선생으로 추앙하였고 목사공과도 친분이 두터워서 미칠 화를 피하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