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2:8-14 세상의 구주로 오신 예수님 24년 12월 25일
오늘 성스럽고 복된 성탄절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경배 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성탄의 은혜와 기쁨이 충만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말씀의 제목은 “세상의 구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면서 들은 가장 좋은 소식은 무엇이었습니까? 시험을 치른 사람은 합격통지서가 가장 큰 기쁨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 개인에게 좋은 소식일 뿐입니다. 떨어진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면 침울합니다. 결혼한 부부가 자녀를 원하는데 빨리 아기가 생기지 않아서 애를 태워본 사람은 임신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 모릅니다. 십 년 만에 애가 들어섰다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이전에 신대원 동기가 노방전도를 하고 싶은데 혼자 못하겠다고 함께 하자고 해서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어느 날 그 동기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느닷없이 애가 들어섰다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결혼한 지 7년이 되어도 애가 없어 기도제목이었는데 전도를 열심히 해서 그런지 하나님께서 애기를 주셨다고 얼마나 좋아하는지요. 아이 이름을 이삭이라고 지었습니다. 사라처럼 좋아 웃었는지 웃음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소식도 개인이 기뻐할 일입니다. 전쟁을 치르는 나라는 승리의 소식이 제일 좋은 소식입니다. 42.195 킬로미터를 달리는 마라톤 대회가 그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승리한 나라에겐 좋은 소식이지만 패한 나라는 그럴 수 없습니다.
오늘 10절에서 우리 예수님의 탄생은 온 인류, 온 백성에게 미칠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시대와 세대를 초월하여 현재만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다 통틀어 그렇습니다. 유대인에게만 아니라 헬라인, 로마인을 포함하여 모든 이방인에게 미칠 기쁜 소식입니다. 옛사람에게만 아니라 오늘 우리도, 다음 세대도 해당되는 기쁨의 소식, 좋은 소식, 큰 소식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나심은, 인류를 구원하는 소식이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소식이며, 병들고 연약한 자에게 치료의 소식이며, 용서와 은혜의 소식이며, 축복의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소식과도 족히 비교할 수 없는, 바꿀 수도 없는 큰 기쁨의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왜 온 세상에 미칠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려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사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직접 낮아져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미국에 존 하워드 그리핀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1920년 남부에서 백인으로 출생했습니다. 미국 남부 지방은 농장지역이기에 인종 차별이 아주 심했습니다. 흑인들이 노예생활에서 해방되긴 했어도 차별은 여전했습니다. 그리핀은 흑인들의 고통을 목격하면서 백인으로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을 돕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같은 백인들도 모욕했지만 도리어 흑인들이 그를 이해하거나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사랑의 손을 내밀고 다가갈 때마다 '당신 같은 백인은 우리를 이해할 수 없다'며 멀리하고 도리어 경계했습니다.
그리핀은 마침내 흑인이 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약품과 염료, 방사선을 이용해 자신의 피부를 검게 만들었습니다. 머리도 흑인처럼 짧게 깎고 흑인 사회로 들어가 그들과 삶을 함께 합니다.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지자 백인 사회도 그를 매도합니다. 심지어 그의 고향에서는 그의 모형을 불태우는 화형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모든 힘든 과정을 거친 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나 같은 흑인(Black like me)'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는 백인으로 태어났지만 흑인이 되어 흑인들과 함께 고난을 받으며 그들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살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를 비어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와 같이 사시다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도 담당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죄를 사하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죄인인 우리를 불쌍히 여겨 은혜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이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을 때 처음 맞이한 곳은 마구간 구유입니다. 12절에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라 합니다. 왜 마구간 구유에 뉘었습니까? 7절에 보시면 사관에 있을 곳이 없었더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구원자요, 왕으로 세상에 오셨지만 어린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그것도 베들레헴 초라한 마구간 구유에 태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왕이 오신 것을 알아보지 못했기에 영접하지 않은 것입니다. 수가성 우물가에서 주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기에 "당신은 유대인으로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내게 물을 달라 합니까?" 그때 주님이 말하길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라고 합니다(요4:10).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아들이 누구인지를 모르니까 이런 박대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누구인지 모르니까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까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방박사들과 목자들은 예수님이 왕인줄 알았기에 찾아와서 예물을 드리며 경배 드렸습니다. 마리아는 아기가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았기에, 믿었기에 자기 태라도 기꺼이 내어드립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예수님이 경배 받으실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주이심을 알았기에 향유옥합을 열어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린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예수님의 나심을 기뻐하고 경배드릴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마구간으로 보내지 아니하고 우리 마음에 모실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요 왕인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알게 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 고백할 수 없는 것입니다(고전12:3).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주님을 문 밖에 세워두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아직도 구유에 누워있게 하지 마십시오. 구주로 영접하여 우리 마음에 모시길 축복합니다.
12절에 천사는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것이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구유에 누인 아기가 왕인 표적,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인 표적이랍니다. 왜 그렇습니까? 왕이 왕궁에 태어나고 가장 좋은 침대에 누이었다면 특별한 표적이 아니라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왕이 허접한 마구간 구유에 누이었으니 이것이 도리어 특별한 표적인 것입니다. 세상 왕들은 자기를 높이고 더 크고 좋은 것으로 자기의 권능과 힘을 자랑하겠지만 예수님은 이 땅에 섬기려고 오신 왕입니다. 군림하고 착취하고 남을 짓밟고 위에 올라서는 왕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섬기고 사랑하는 겸손의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진정한 왕 되신 표적입니다. 바다가 모든 강물을 다 품을 수 있는 것은 더 넓어서가 아니라 강보다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듯이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곳, 마구간에 오심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래서 안 돼, 저래서 못해, 라고 하지만 이것은 결국 우리가 아직 자신을 비우지 못하고 낮아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테레사 수녀는 인도의 한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며 평생을 살았습니다. 어느 날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높은 사람들, 잘 사는 사람들이 부럽지 않으십니까, 나도 저렇게 한 번 멋지게 살아봤으면 하는 마음이 안 드십니까?” 그때 테레사수녀는 말했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섬기는 사람은 위를 바라볼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데 신경 쓸 여유도, 시간도, 마음도 없다고 했습니다.
더 높은 곳만 바라보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더 큰 것만, 더 귀한 것만 바라보고 살아가지는 않으십니까? 우리를 위해 주님은 낮고 천한 마구간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섬기시려고 낮아져 오셨습니다. 우리도 낮은 곳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어려움에 신음하는 소리를 들으라고 하십니다. 섬김 받으려 하지 말고 섬기는 자가 되라고 오셨습니다. 높아지려고 하지 말고 더 낮아지라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구간에 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왕이심에도 불구하고 겸손이 표적이고 낮아짐이 표적이고 섬김이 표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표적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 된 흔적이 있습니까? 시온의 대로만이 표적은 아닙니다. 형통만이 표적은 아닙니다. 그 형통으로 어떻게 다른 사람의 영혼을 돌보며 섬기느냐가 표적입니다. 높은 지위를 얻고 많은 재물을 소유하는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는 증거가 아닙니다. 그것으로 내가 얼마나 많이 섬기느냐, 베푸느냐가 하나님의 사람인 증거입니다.
마지막으로 수많은 천사들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합니다. 천사들이 이렇게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멸망에 놓인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아들을 기꺼이 내어주신 그 사랑, 그 은혜를 보고 천사들도 감탄한 것입니다.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내린 하나님의 결단입니다. 위대한 결단입니다.
그리고 이 위대한 결단은 사랑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출발입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신 뜻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아들을 희생하실 결심을 하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을 보고 천사들도 감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결단에 천사들이 흠모하여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는 영광입니다.
그리고 "땅에서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고 해서 주님이 가는 곳마다 분쟁이 사라지고 다툼이 사라지고 평화가 깃드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이 말씀처럼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주신 평화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고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구원받은 자에게, 거듭난 자에게 예수님은 참 평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이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진정한 평화입니다. 이 평화가 오늘 성탄을 맞아 함께 기뻐하며 예배드리는 우리 성도님에게도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