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당신을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이다.”(요한 8,12)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어제의 복음에 이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적 태도를 비판하시며 꾸짖으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안에서의 예수님의 비판의 강도가 어제 복음 말씀의 그 내용보다 훨씬 높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 너희 율법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 11,42ㄱ.46)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향해 그들의 불행을 저주하듯 단정하십니다. 무려 4차례에 걸쳐 불행하다고 저주하듯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처음 3번은 바리사이들을 향해, 마지막 한 번은 율법학자들을 향해 발설됩니다. 그런데 마지막 네 번째 불행의 선언이 이루어지게 된 배경이 흥미롭습니다. 예수님이 무려 3번에 걸쳐 바리사이들의 불행을 선언하자 율법학자들이 그런 예수님께 이렇게 따져 묻습니다.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루카 11,45)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간다는 말이 있듯이 그저 가만히 있었다면 예수님께로부터 저주의 말을 듣지 않았을 수 있었던 율법학자들은 자신들과 같은 편이라고 하기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그렇다고 예수님께로부터 이렇게 저주의 말을 듣는 바리사이들을 그저 모른 척 하기에는 안타까웠던 것인지 예수님께 항의하듯 따져 묻다가 본전도 찾지 못하고 그들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저주의 말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율법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 11,.46)
이 같은 오늘 복음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향한 불행선언이 이루어진 이유는 다름 아닌 그들의 태도, 곧 구원을 위해 스스로 노력하는 모습이 아닌 정작 자신은 구원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구원을 위해 나아가려 노력하는 다른 이들마저도 방해하는 그들의 이중적 태도가 예수님의 불행 선언의 직접적 이유가 됩니다.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 삶을 살아가며 그 위선의 뒤에 자신의 본모습을 감춘 채, 거룩한 척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며 산다고 자신하는 그들, 또한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이들에게 구원을 위한 무거운 짐을 지워 놓는 율법 교사들의 이 같은 행위는 예수님의 비판에서도 드러나듯 하느님이 원하시는 뜻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무거운 짐으로 여겨지는 제사의 제물을 바치는 것이 아닌, 또 겉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제사의 모습이 아닌 하느님을 바라고 희망하는 순수한 믿음, 바로 그 믿음으로 의로움과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같은 하느님의 뜻을 알려주고자 예수님은 오늘 복음의 모습, 곧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불행을 선언하며 지금이라고 하느님의 뜻을 바로 알고 자신의 잘못된 악습을 고치고 회개의 삶을 실천하라고 이 같은 말씀을 건네셨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 안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거룩한 뜻을 오늘 독서의 말씀 안에서 다시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번 주간 계속되는 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갈라티아서의 말씀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 삶 안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 그 방법에 관하여 성령의 열매를 통해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갈라 5,22-25)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처럼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닌 나의 삶을 변화시키는 회개를 통해 하느님께로 우리의 마음을 향하게 하는 것, 오직 그것뿐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육적인 욕정과 욕망을 십자가에 함께 못 박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삶으로 가능해진다는 사실. 이처럼 오늘 독서와 복음은 한 목소리로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이 우리에게 진정 바라시는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삶을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이 같은 면에서 오늘 화답송의 시편의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갈 때 우리 삶이 어떻게 변화되며 그 삶이 우리에게 어떤 선물이 되어주는지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화답송의 시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시편 1,1-4)
시편의 첫 편인 이 말씀처럼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뜻이 담긴 그 분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 때에 그 열매를 맺고 잎이 시드는 법이 없어 그가 하는 일이 무엇이든 그 모든 일이 하느님 안에서 잘 될 것이라는 말씀은 분명 어마어마한 하느님의 축복의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축복의 전제가 되는 하느님의 말씀을 좋아하고 그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겨야 한다는 사실, 바로 그러할 때에 우리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저주가 아닌 하느님의 축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오늘 들은 이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말씀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찾은 뜻을 여러분의 삶으로 실제 실천하여 여러분이 하시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축복 안에서 그 결실을 풍성히 맺게 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시편 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