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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명상의 수행-바로 한숨
게리스나이더 글/ 강옥구번역
사건들이 계속 쏟아져 생기는 이 세상 한가운데서 비록 그것이 한숨 명상일지라도-등을 똑바로 하고 한 순간이라도 마음을 맑게 하는 명상의 행위는 강물 안에서 하나의 상쾌한 섬이다. 많은 이들에게서 명상이라는 용어는 신비적이고 종교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으나 그것은 오직 단순하고 평범한 행위이다. 즉 고의적인 고요와 무언이다. 좌선을 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그 고요한 마음 안에 여러 갈래의 길이 나있고 그들이 지루하고 평범한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명상 가운데서 가끔 전혀 예기치 않은 이미지나 느낌이 튀어나오는 때가 있고 아주 눈부신 투명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이 나오건 좌선은 항상 교훈적이다. 몇 달 혹은 몇년을 좌선을 해 본 결과 어느 정도의 자아의 이해, 평정, 집중 그리고 자신감을 갖게 된 증언들이 허다하다. 그리고 또한 존재와 스승들의 가르침들로 이뤄진 이 세계에 대하여 심오한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사적인 숙고 안에서 비록 그들이 그루나 老師나 신부들일지라도 그들은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느껴야 한다고 우리를 프로그램 할 수 없다. 우리가 우리 자신들의 마음을 완전히 제압할 수 없음을 배운다. 명상은 하나의 이념으로써 고용될 수는 없다. 명상을 지도하는 스승은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제자가 그의 내적 방향으로 가야 될 것인가에 대한 조언을 주는 것으로 도울 수 있다. 그러한 스승은 나그네가 자신을 돌아보도록 지적해주는 인도자가 될 수 있고 경험이 풍부한 안내자가 그러듯이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 막다른 골짜기나 넝쿨로 막힌 길에서 벗어나도록 경고해준다. 스승은 문제점을 제시해 주나 그것에 대한 답변을 주지 않는다. 전통적인 불교도의 윤리적인 가치나 심리적인 내성의 테두리 안에서 마음은 근본적으로 그 자체를 나타내준다. 명상은 이 강물의 소용돌이로부터 혹은 이 세계의 불순으로부터의 도피나 휴식이 아니다. 그것은 그 강물로 되어지는 하나의 길이다. 그러므로 그가 물거품이나 소용돌이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며 그 자신을 그 안으로 왼통 집어넣는 것이다. 시 또한 그와 같다. 시의 경험이 거리와 참여 둘을 모두 부여하며 그것은 동시에 가까우면서 멀다.
의식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관심을 표하는 전통과 시를 짓는 전통은 인류처럼 오래되었다. 명상은 내면을 들여다보고 시는 바깥으로 향한다. 전자는 사적이고 후자는 세상 밖으로 나와 있다. 하나는 순간으로 들어가고 또 하나는 그것을 공유한다. 그러나 수행하는 때는 어느 것이 무엇을 하는지를 완전하게 명백히 할 수가 없다. 여하튼 명상과 시가 독특하고 기이하며 또한 어렵다고 여기는 현세대의 사람들의 생각에도 불구하고 그들 양자는 풀잎처럼 오래되고 평 범하다. 하나는 고요와 깊은 내면의 필수적인 순간으로 가고 또 하나는 표현과 제시의 근본적인 충동으로 나타난다.
사람들은 대체로 명상을 기도와 헌신그리고 비전으로 활동을 한다. 그들은 동일하지 않다. 하나의 수행으로서 명상은 신에게 호소하거나 또한 계시의 기회가 아니다. 사람들이 명상하는 동안 가끔 그들이 계시나 비전을 받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있긴 하다. 그러나 명상을 그들의 주된 수행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계시는 단지 의식의 다른 현상이며 그들을 특별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명상자는 단순히 단순히 의식의 바탕을 경험하며 그러한 동안 어떠한 생각이나 느낌을 제외하거나 혹은 神과 교통하는 특권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할런지도 모른는 그러한 '나'에 대한 모든 감각을 풀어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한 조심스러운 경우에 스승이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여러 세기를 꾸준하게 非神的인 수행을 따르는 불교적인 명상 전통에 대한 묘사이다.
시 또한 일찍부터 불교의 일부가 되었다. 인도의 숲속에 거주하는 승려들과 여승들에 속한 2,500여년의 역사를 지닌 노래들에서 1930년대의 일본의 겐지 미야자와의 생생한 회화체의 시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연결이 있어 왔다. 중국의 문학적인 전통 안에서 시는 가장 높은 위치에서 존경을 받아 왔으며 중국의 正典 안에서 잘 알려진 시들은 선과 도교의 영향을 받았었다. 중국의 시인들의 약간은 선의 제자임을 자인하였고 그들 중 소동파와 백거이가 있다.
'가장 하급에 속하는 승려들은 문학에 빠진 자들이다."라고 중국의 중국의 선사들이 즐겨 말했으나 우리는 그러한 책망이 선의 세계에서는 칭찬임을 알아야만 된다. 비상식적인 법문과 생생한 몸짓의 교환으로 이뤄진 법당과 유려하면서도 암시적인 중국의 서정시인들의 짧은 시들이 당초기에 서로 영향을 주었다. 선사들과 제자들은 그들의 생활 안에서 시를 써 왔었다.
공식적인 공간 공부 중에 그들의 이해가 완전하다는 증거로써 학생들이 몇 줄의 시를 읊을 것을 선사들은 요구했다. 그러한 실습을 "Capping verses 라고 불렀다. 일본의 임제종 스님인 소이쿠 시게마쓰의 저서 神林안에 그러한 교환에 대해서 기술되었다. 시게마쓰 오쇼는 중국의 시들과 격언에서 수백의 對句를 번역했다. 그들은 힘이 넘쳤다.
말, 말, 말 - 흩날리는 이슬비와 눈
무언, 무언, 무언 - 노호하는 벼락
죽은 자를 불러오라!
산자를 죽여라!
이 가락 저 가락 - 이해하는 이 없고
비 그친 뒤 가을빛 안에서 연못은 출렁인다
재난의 불이 모든 것을 불태우고
수천리 안에 이슬도 먼지 하나도 없다
하는말마다
신선한 매순간.
이러한 시들은 선승들 사이에서, 그룹안에서 어떠한 지혜를 모은 것이거나 큰 의미를 지닌 짤막한 속어들이 아니다. 그들은 선생과의 인터뷰 가운데 어떤 문제에 대한 "개인적"인 대답이 아닌 더 깊이 들어간 상태이며 더 크나큰 마음의 바탕에 닿았음을 확증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사용되었다. 그들은 문학적인 비유로써가 아니고 현순간의 비유를 몸으로써 실현하는 수련이 제시된 것으로써 그 가치가있다. 스승들은 학생들이 심볼과 추상적인 것을 땅으로 그리고 몸 안으로 유치하도록 도와준다. 선은 이 가능성을 정교하게 길러주며 그러므로 이것은 시의 자연스러운 작업이며 격언으로부터 먼 곳에 있다.
불교의 세계에서는 지금까지 추앙되고 사랑을 받고 있는 法의 시인들과 가인들을 산출해냈다. 티벳인의 가슴에서 외워지고 있는 밀라레파의 노래들, 그의 하이쿠가 세계적으로 읽혀지고 있는 바쇼가 아마 제일 유명하리라.
태평양을 낀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설산을 등반하는 중에 겪었던 아주 강력한 경험을 말로 표현하기 위해서 내 사춘기 시절에 나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내가 느끼는 대로 썼었다. 그러나 로빈슨 제퍼스와 D.H.로렌스 등의 작품을 읽고 나서 시는 그 이상인 것을 나는 발견하였다. 나는 시가 재료와 연장을 가지고 일하는 것 즉 하나의 공예이며 수천년을 통하여 세상에는 여러 다른 적용과 용법의 역사를 지니고 있음을 인식했었다. 나는 시가 언어를 촉진하는 것임을 알아 차렸다. (언어는 당신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어떤 것이 아니고 당신이 태어난 한 세계이다) 그것은 마음의 야성의 일부이다. 당신은 다섯살이 되면은 의식적인 노력이 없이 모국어를 마스터하게 된다.
굴곡적인 어구배열을 지니고 있는 언어는 기상 제도의 열역학이나 식량의 연쇄 안에서의 열의 교환과 다를 것이 없으며 철저하게 자연스럽고 생동적이며 또한 우리 일부이다. 시는 그것에로부터 혹은 그것안으로의 도약이다. 나는 우연히 제랄드 호프컨스의 시를 만났다.
오, 마음이여, 산맥을 이루는 마음;
무섭고 가파르며 그 누구도 가늠할 수 없는
낭떠러지의 절벽들, 그들을 가볍게 다루는 이들은
그곳에 결코 매달려 본 적이 없으리라
우리의 짧은 감금 또한 그 가파름과 깊음을 길게 다루지 못하리.
이것이 나로 하여금 실제적인 山만이 오직 등반할 곳이 아님을 알도록 도와주었다. 그 당시 나는 Hood 산의 겨울등반 때 얻은 동상을 치료하고 있었다. (등반은 단순히 도전적인 추구가 아니고 헌신적인 등반대들에게는 기획, 우정 그리고 협동이 수반된 그러한 것들로 만들어 주는 것임을 알리고 싶다) 등반은 또한 무상을 그 전적인 위태로움, 내 발 밑의 그 철저한 비임 그리고 소위 말해서 의식 그 자체의 내보임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저 아래의 심연을 목격하는데서 오는 그 깊고 내적인 생각들. 글쓰는 데에 대한 나의 관심, 나를 20세기의 현대시와 중국의 시로 이끌었다. 그리고 자연과 광야에 대한 내 생각들이 도교와 선으로 나를 데려다 주었다. 점점 커가는 선에 대한 인식이 중국의 산수화와 함께 어울렸다. 나는 버클리대학에서 부드버르그 교수와 첸 신샹 교수아래서 중국의 고전 문학을 공부하였다. 첸 교수의 세미나 클래스에서 한 시에 대해서 배워 그것을 스스로 번역해 보았다. 나는 가장우수한 중국의 시들이 신비스럽게도 단순한 자질을 지녔음을 보았다. 나는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알고 싶었다.
집에서 혼자 좌선을 시작했다. 그당시 1955년 여름 캘리포니아의 시에라에서 산길 닦는 인부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서로 연결이 되었다. 그 산길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고전 중국시처럼 산뜻하고 절벽 위에서 밤마다 했던 명상의 분위기를 우러내는 시들을 쓰기 시작했다. 고지의 시에라에서 밤이 참으로 밝을 때 나는 별들을 저 멀리에서 인도하는 바위들과 산길로써 보았다. 그전에 수십편의 시들을
써 보았지만 이들이 온전히 내 자신의 시들로써 인정하고 싶은 처음의 시들이었다. 그들이 내 시집 Riprap안에 수록되었다. 나는 일본에 가서 명상에 대해 더욱 더 공부할 계획을 세웠다.
일년 후 경도에서 나의 스승인 오다 셋소 노사에게 「가끔 제가 시를 쓰는데 괜찮을까요?」라고 여쭤 보았다. 그는 웃으면서 「그것이 당신의 眞我에서 나온다면 괜찮겠지요」라고 말하시면서 「당신이 알아둘 것은 시인들이 잘 놉니다, asobi.」라고 하셨다. 그 말이 퍽 이상하게 들렸는데 아소비라는 말은 빠나 유훙장으로 돌아다니는 것으로 타락한 건달이나 하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그런 것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경도 근방에서 수년간 선 수행을 하는 동안 나는 시 쓰는 작업을 거의 중단했다. 그것이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내 생각으로는 선은 진지하였고 시는 진지하지 않았다. 여하튼 선수행를 하는 동안 진지해야만 하기 때문에 나는 진지하려고 노력했고 많은 시를 쓰지 않았다. 그렇게 그 노사 아래서 6년간 공부를 했었다.
1966년 오다 선사가 돌아가시기 직전 병원에서 그와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선사님! 선은 진지하고 시는 진지하지 않지요?」라고 물으니 「아니, 아니, 시가 진지하고 선이 진지하지 않다.」라고 답변하셨다. 나는 모든 것을 잘못 알았다. 그것이 우연인지 아니면 스승으로부터의 선물인지 나는 모른다. 그때부터 나는 시를 더 많이 쓰고 좌선의 양을 줄였다. 나는 논다는 것에 대해서 어떤 이해에 도달하였다고 생각이 되었다. 참으로 진지하게 되기 위해서 당신은 놀아야만 된다. 그것이 시에도 명상에도 적용된다. 사실 논다는 것은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 차 고치는 것, 요리, 육아, 회사경영…에 필수적이다. 그리고 시는 그렇게 특별난 것이 아니다. 언어가 별난 것은 아니다. 마음 또한 별나지 않다. 의미 또한 무의미 그것 또 괜찮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기쁨으로 받아 들인다.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는 시인을 우리는 인생의 시작과 종말에서 만난다. 어린 아이들이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노래를 만드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다. 동시에 老師는 그의 마지막 행위로써 임종시에 시를 읊었다. 가장 세련되고 숙련된 이들도 그들의 깊은 이해를 시로써 표현하니 아주 초보자도 스쳐 지나가는 초월적인 순간을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어느 시가 더 좋다고 예견할 수 있는 확실한 길이 없다.
시는 민주적이고 선은 엘리트적이다! 아니다! 선이 민주적이고 시가 엘리트다. 어느 것이 응을까? 누구나 좌선을 할 수 있지만 오직 소수만이 시를 쓴다. 누구나 시를 쓸 수 있으나 아주 극소수만이 참으로 좌선을 할 수 있다. 시(혹은 문학세계)는 어떤 때는 영적 길에 위험하다고 간주되었다. 그런데 시가 가장 미묘하고 심오한 영적 이해를 표시하는데 사용되어진다.
우리는 一休의 꿰뚫는 시를 즐겨 이해할 수 있다. 문학을 조소함 인간들은 소와 말의 우둔함을 부여받았다. 시는 원래 지옥 한가운데서의 작업이었다. 자존심, 허위의 오만, 정열에서 오는 고통, 악마와 친밀한 그러한 길을 택한 이들에게 한숨을 쉴 수 밖에 없다. 15세기 일본의 선사이며 그 자신 우수한 (특별한 두려움이 없는) 시인인 一休는 그 자신 문학을 지향하는 데서 오는 한눈 팔기 그리고 유혹에 대해서 앎으로써 그의 동료시인들을 조소하였다.
그러나 그의 '악마와 친밀함' 을 서양의 소외된 것과의 로맨스로 여겨서는 안된다. 일본의 예술 안에서 악마는 소와 말처럼 확고하고 그들은 송곳니를 갈고 눈을 사팔뜨기로 만드는 우스운 작은 인물들이다. 시는 모든 면에서 非이원적인 우주의 실현을 축복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것의 위험성은 악마를 제외할 것을 거부하는데 있다. 불교는 악마를 도와 그들이 좌선을 하도록 가르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교묘한 작은 시/자아의 악마가 곁따라와서 고통과 내성, 성공과 실패로 우리를 유혹한다. 우리들과 함께 같은 방에서 명상을 수행하고 시를 쓰는 악마들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참으로 악마와 친밀하다. 그것이 一休를 괴롭히지 않았다. 一休의 시를 읽은 후 내 친구 닥이 낚시 캠프에서 이 시를 보내왔다.
'인간들이 소와 말의 우둔함을 부여받았다'고 一休는 말했다
나는 一休가 똥으로 가득찼다고 여긴다
인간은그들자신의우둔함을부여받았다
소와 말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알고
또 그들을 잘 해낸다.
시가 지옥 한가운데서의 작업이란 말은 옳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어야만 된다
현상은 그들 자체를 그대로 경험한다
그들에겐 시가 필요없다
여리게서 우리는 하나의 신비를 본다.
어떻게 그렇게 완고한 것들이
나의 의식에 의존하고 있을까?
내가 두 소년들과 낚시를 하고 있는 동안은
시가 결코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그후에 시가 떠오르며
그렇게 온 하루를 보낼 수 있다
만세! 그것이 바로 인간됨에 대해서 얘기해준다.
바로 약점이면서 강점인 것이다
당신은 언어가 우리와 함께 태어난
야성의 조직이라고 했는데 나는 그것에 동의한다
그것은 야성적인 것보다 더 야성적이다.
우리가 그저 야성적이라면 우리에게 언어는 불필요하다.
아마도 우리가 야성을 초월할지도 모르는
그것이 나를 유쾌하게 만든다.
닥 데쳐 (카나다 계곡)
야성의 초월. 그 안에 언어를 포함할 수 있다. 시는 언어가 그 자체를 어떻게 경험하는 가이다. 그것은 심오한 영적경험이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그것은 가능하다) 말이 말안에서 표현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들은 참된 현존으로 가득하다. '귀신을 살려라' 혹은 부엉이, 雨林 혹은 악마를 살리라고 당신의 스승이 요구할런지도 모른다. 그것을 연습하다 시로써 표현하는 것이 그것을 실제화하는 길에서 첫 스텝이 된다. 그러나 그길에는 여러 갈래의 길들이 있고 영적 여행은 시인의 길처럼 수많은 지뢰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모두 서로(거위처럼 풀려나듯) 주의합시다.
당신의 마음과 함께 지내는 것이 당신을 겸허하게 그리고 폭 넓게 만든다. 그것을 지휘하는 이도 없고 그것은 어떠한 생각도 오래 지속되지 않음을 상기시켜 준다. 불교의 가르침의 표적은 무상이며 무아이며 고통을 피할 수 없음이며, 연기며 공이며 견성의 길에서의 양식이다. 모범적인 인생처럼 잘 쓰여진 시는 짧은 제시, 하나됨의 특유함 그리고 완벽한 표현이다. Noh 극 바나나 나무에서 모든 시들과 예술이 부처님께 드리는 공양이라고 하였다. 극 안에서의 이러한 여러 불교적인 이념들과 더불어 고대 중국시의 감각이 우리가 神의 멋이라고 명명한 우아한 평범을 만들어 주는 짜임들이다.
'시인의 생각은 고귀하고 단순해야 한다' 라고 두보는 말했다. 선의 써클에서는 숙련되지 않은 사람들은 야한 것이나 새것을 즐기나 잘 요리된 사람들은 일상적인 것을 즐긴다라고들 말한다. 이러한 평범, 이러한 일상적인 실현이 불교도들이 말하는 여래다. 그러한 실현에 별 특별한 것이 없으니 그것이 바로 이 자리에 있는 때문이다. 그것에 주의를 기우릴 필요도 생생하게 끄집어 내어 전시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신비적' 인 불교시의 궁극적인 주제 양상은 심오하게 일상적이다. 이러한 붙들어 맬 수 없는 일상적인 실제화가 감동적이고 신선하고 그들의 상상과 언어안에서 함께 둥글려 만든 것이 모든 예술의 작품이다.
(참으로 훌륭한 시는 어떠한 직관이나 특출한 아름다음이 보이지 않는 보이지 않는 시들일런지도 모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어떠한 직관이나 교훈적인 내보임이나 문장의 감미로움에 대해서 쓰지 못했다. 그것은 요원한이상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 '명상시'는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게리 스나이더 : 미국 북서부 해안에서 자란 자연의 시인. 높은 산, 깊은 숲, 그리고 넓은 바다 등이 그가 사랑하는 생활환경이다. 그래선지 그는 젊었을적에 나무꾼 노릇도 했다. 리드대학 인류학과를 나온 뒤 민속학과 신화 등의 공부에 열중,지금도 캘리포니아주 쉐라네바다의 산기슭에서 전기나 수도나 텔레비젼도 없는 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는 불교에 열중하여 일본의 교토에 있는 대덕사에서 팔년간이나 수도하였고 긴즈버그와 더불어 비트시인에 속한다. 역자인 강옥구씨와는 친근한 사이로 우리말 번역의 그의 에세이를 준비중에 있다.
1993년 10월 미주현대불교 제 4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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