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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를 동해와 남해로 가르는 분기점은 부산 앞바다의 오륙도(五六島)다.
여섯 개의 높고 낮은 섬들이 밀물 때에는 다섯 개만 보인다고 하여 ‘오륙(5·6)’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곳 오륙도에서 동해바다를 따라 강원도 고성, 북한땅이 보이는 통일전망대까지 굽이쳐 이어진 길이 동해안 해파랑길이다.
‘해’라는 글자는 ‘뜨는 해’와 ‘바다 해(海)’를, ‘파’는 ‘파란 바다’ 또는 ‘파도’를, 그리고 ‘랑’에서는 ‘너랑 나랑’이나 ‘해랑 바다랑’을 떠올리게 만든 이름이란다.
부산 이기대길로 시작해 갈맷길과 문텐로드, 울산의 십리대숲길과 솔마루길, 경주의 주상절리길, 포항 감사나눔길, 영덕의 유명한 블루로드 그리고 울진의
관동팔경길, 삼척 수로부인길과 강릉 바우길 그리고 고성 갈래길까지, 오래전부터 있었던 동해안의 좋은 길을 하나로 묶어 해파랑길이 되었다.
이 해파랑길은 제주올레길(425km), 백두대간(690km)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트레일이 되었고, 통일이 되면 한반도 동북단의 함경북도 경흥군 서수라까지
2,000km, 아시아 최장 트레일이 될 것이다.
영덕 블루로드는 해파랑길과 거의 일치한다.
블루로드는 영덕군에서 만든 길로 영덕 대게공원에서 축산항을 거쳐 고래불해수욕장에 이르는 약 64.6km의 길이고, 해파랑길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만든 길로 부산에서 고성까지 동해안 해안선 771km를 이은 길이다.
이름은 각기 다르지만 해파랑길 19~22코스와 블루로드 A~D구간은 거의 일치한다.
날머리의 고래불해수욕장은 동해에서 가장 넓고 깨끗한 해수욕장이다.
이색 선생이 상대산에 올랐다가 바다에 고래가 뛰어노는 걸 보고 ‘고래불’이라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고래불에서 ‘불’은 ‘뿔’로도 발음하는데, ‘갯벌’을 뜻하는 옛말이다.
즉 ‘고래가 있는 갯벌’이란 뜻으로 이 해수욕장의 남쪽 백사장은 덕천해수욕장과 대진해변으로 불린다.
장장 20리(약 8km)로 걷는 데만 1시간 30분이 걸리는 타원형의 드넓은 해변과 해안방풍림이 숲을 이룬 곳이다.
상대산(185m)은 고래불해수욕장 남쪽 끝에 솟은 산으로 정상에 기막힌 경치의 정자가 있어 예부터 관어대(觀魚臺)라 불렀다.
영해면 괴시리에서 태어난 이색 선생은 유년시절 이곳에 올라 ‘관어대부(觀魚臺賦)’라는 시를 지었다.
이색 선생은 고려 말 성리학자로 충절이 높았던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등과 함께 고려 삼은이라 불린 인물이다
괴시리 전통마을은 200년 된 고옥 30여 동이 보존되고 있는 영양 남씨의 집성촌이다.
전통마을 위에는 목은 이색 선생의 생가 터와 기념관이 있으며, 기념관에는 목은 선생의 자료가 소장되어 있다.
기념관 옆에 생가가 있었지만 지금은 터만 남았고, 생가와 기념관 사이에 서당으로 사용됐던 집이 남아 있다.
GPX <해파랑길 22구간>,
영덕블루로드 C코스(축산항)에서 출발하거나 '죽도산전망대'와 '영양남씨발상지'를 그친다면 '일광대(日光臺)'와 '월영대(月影臺)'의 옛스런 표석도 만날 수 있을 것.
약 10km로 4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고도표
참고 <국제신문 개념도>
<해파랑길 22코스>
참고 <영덕 블루로드 C코스>
네비엔 '경북 영덕군 영해면 사진리 산2번지'를 입력하여 주차장 정자쉼터와 간이화장실이 있는 곳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영덕 블루로드 안내판.
A코스 '바다를 꿈구는 산길'(빛과 바람의 길): 강구항~고불봉-해맞이 공원(17.5km,6시간)
B코스 '바다와 더불어 함께 걷는 길'(푸른대게의 길): 해맞이 공원~축산항(15km,5시간)
C코스 '목은 사색의 길'(성인들의 발자취를 더듬는 답사길): 축산항~대소산 봉수대~목은 기념관(괴시리전통마을)~고래불 해수욕장(17.5km,6시간)
D코스 '나를 찾아 떠나는 아름다운 첫 대면'(쪽빛 파도의 길): 대게누리공원(장사 해수욕장)~상사해상공원-강구항(17.5km,6시간)
이정표와 새천년기념마을 표석이 있는...
너른 산길로 들어선다.
마산형님과 오형님, 그리고 병두형님도 함께 걸어가자고 하였다.
마산형님과 오형님은 나와 함께 해파랑길을 걸을 계획이고, 병두형님한테는 마지막 상대산(관어대)은 생략하고 주차장으로 곧장 가라고 하였다.
나지막한 산봉우리에 고속도로처럼 뻥 뚫린 산길, 소나무가 빽빽히 식재된 산길은...
해파랑길이기도 하고...
영덕 블루로드 이기도 하다.
체육쉼터를 지나면서...
몽환의 산길이 펼쳐진다.
'영덕 블루로드'와 '해파랑길'의 표식기.
실로 오랫만에 A코스를 함께하는 오형님. 형님은 여든이 넘은 연세에 한 쪽 눈이 잘 보이지 않아 항상 둘레길 또는 문화답사만 해 오셨다.
대소산 봉화대에 닿았다. 오늘 산행 중 제일 높은 봉우리.
대소산 봉수대는 깔끔하게 복원돼 있었다.
뒤로 돌아가자 시설물이 있고...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영덕대소산봉수대(盈德大所山烽燧臺)'는 경상북도 시도기념물 제37호로 영덕군 대소산에 있는 조선시대의 봉수대이다.
남으로는 별반봉수대(別半烽燧臺), 북으로는 평해의 후리산봉수대(厚里山烽燧臺), 서로는 광산봉수대(廣山烽燧臺)를 거쳐 진보의
남각산봉수대(南角山烽燧臺)로 이어지도록 되어있다.
대소산은 해발 282m의 영덕 동남쪽 해안의 주봉인데, 산의 정상부에 지형을 이용하여 직경 약 20m 되는 넓이의 둘레에 대석을 쌓아 올렸으며,
그 안에 원추 모양의 직경 11m, 높이 2.5m의 봉돈(烽墩)을 쌓았다.
봉수대 중앙부는 역시 석축으로 된 연통(굴뚝)이 구축되어 있다.
연통의 외형은 단경 10m, 장경 12m에 높이가 약 3m되는 원통형이며, 구조는 대소형의 할석을 이용하여 두께 1.5m 되는 석축벽으로 둘러 있다.
현재 영해읍에서 동남쪽으로 직선거리 3㎞, 축산항(丑山港)에서 서북쪽으로 약 1㎞, 해안으로부터도 약 1㎞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다음백과>
대소산 표지판과 봉수대.
동해조망은 기대하지 말라. 그건 어쩌면 사치일런지 모른다.
육각정자를 지나고...
돌탑이 있는 작은 봉우리를...
서래야님은 작은 봉화산이라 명명했다.
망월봉을 향하면...
평상과 잘 꾸며진 체육쉼터를 만나고, 그곳에서 대봉감 아이스 홍시를 얻어 매실주와 모과주도 한 잔 했다.
이제부터 우리는 '목은 이색 등산로'를 따른다.
앞서가던 '소떼'들을 만나니...
'망월봉' 코팅판을 만난다.
안개속 육각정자는...
망월정(望月亭)이다. 망월정에선 뿌연 안개로 인하여 달(月)은 고사하고 참새 한 마리 볼 수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진행방향으로 살짝 내려서는 안부에선...
역시 '목은 이색 등산로'와 '영덕 블루로드'를 따른다.
아스팔트 도로에 내려서기 전 우측...
데크로드를 따라 올라...
구름다리를 건넌다.
구름다리를 건넌 뒤 설치된 안내판은...
영덕 블루로드 C코스 안내판.
이제 '괴시 전통마을(3.4km)' 이정표를 따른다.
룰루랄라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솔숲길.
안부에 내려서면 임도.
'영덕 블루로드' 안내판을 따르다...
이내 우측 산길로 갈아타면 촉촉히 빗물 머금은 산딸기.
솔숲길은 계속되어...
황성개비산을 지나고...
'목은 이색 산책로'를 따라...
평탄한 솔숲길을 이어가면...
체육시설이 나오고...
안내판이 있는 갈림길이 나온다.
현위치는 '괴시 전통마을'과 '관어대' 갈림길.
'목은 기념관'과 '괴시 전통마을'은 빨간 화살표 방향, 하얀 화살표는 '관어대' 방향.
관어대 갈림길의...
이정표.
망일봉(望日峰)시비엔...
고향엔 낙엽이 쓸쓸히 날리겠지만
높은 봉우리에 한 번 올라 해돋이를 보니
금빛 해무리는 하늘과 이어져 있고
수레바퀴처럼 밀려오는 파도는 지축을 쪼개네.
상국의 큰 도량은 산과 바다를 삼킬 듯 넓지만
서생의 크게 뜬 눈엔 천지가 작아 보이는데
만약 겨드랑이에 날개 생겨 날 수 있다면
아득히 먼 만장 구름 위로 한 번 날아 보려네.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선생>
-영해를 그리워 하며-
외가집은 고요한 해변가 마을인데
풍경이 아름답기로 소문이 나 있어
해돋이를 보려고 동녘하늘을 바라볼 제
감격스런 장관이여! 눈시울이 젖어 오네.
황량한 마을에서 하룻밤 단단히 묵으면서
젊은 시절 회포를 자세히 논해보지 못하였는데
회상컨데 몇 년 사이 선배들은 다 떠났고
아침 까치 지저귀더니 어느덧 또 황혼일세.
<목은(牧隱) 이색(李穡)>
남양남씨 묘를 지나...
육각정자를 지나고...
솔숲 비단길을 걸으며...
목은 기념관을 향하면...
우측 솔숲 사이로 목은 기념관이 보인다. * 주요지점이다.
잘 가궈진 목은 기념관을 내려서서...
돌아본 모습.
'목은 이색 산책로' 입구의 이정표와...
안내판.
끄트머리에 기념관이 있고, 앞에는 서당으로 썼던 집.
이 빈 터는 '목은 이색 생가지(生家址)'
한켠에 '가정목은양선생유허비(稼亭牧隱兩先生遺虛碑)'가 부서진 채로 누워있다.
아버지 가정 이곡(李穀)선생과 아들 목은 이색(李穡)선생의 유적을 추모하는 비각으로 1796년 영해면 괴시마을에 세워졌으나 비바람에 돌이 깎이고
떨어져나가 글자를 분간하기 어려워지자 1971년 괴시마을 입구에 유허비를 다시 세웠다.
서당으로 썼던 집.
기념관으로 들어가기 전...
'목은기념관' 글씨는 당대의 명필 '여초 김응현(如初 金膺顯 1927~ 2007.2.1)' 선생이 썼다.
목은 이색 선생 상. 기념관 내부로 들어가...
‘백설(白雪)이 자자진 골에 구루미 머흐레라.
반가온 매화(梅花)는 어늬 곳에 피었는고,
석양(夕陽)에 홀노셔셔 갈 곳 몰라 하노라’
‘백설’과 ‘자자진 골’이라면 ‘고려’는 이미 ‘자자진 골’이란 뜻이며, 그 ‘골’에 ‘조선’이라는 ‘백설’이 ‘고려’를 뒤 덮었다는 것이다.
백설로 뒤 덮인 곳은 그가 믿고 키웠던 ‘고려의 유신’들이 ‘조선의 신하’로 바뀌어 진 것을 말한다.
‘고려’의 땅에 ‘조선’이라는 새 세력이 구름으로 다가와 머물고 있다는 뜻.
'매화(梅花)'는 고려의 우국신하들, ‘반가운’ 그들은 ‘어디에 있는 가?’. 이미 그들의 일부는 조선의 신하로 전락했다.
그래서 그가 ‘홀로' 석양(夕陽)'에 서 있다.
망한 ’고려‘를 ’황혼‘으로 여기며 홀로 ’갈 곳 몰라 하노라‘라고 하고 있다.
-부벽루(浮碧樓)-
- - - - 전 략- - - -
기린마는 떠나간 뒤 돌아오지 않으니
하늘에서 온 사람은 지금 어느 곳에 노니는가?
돌계단에 기대어 길게 휘파람 부노라니
산은 푸르고 강은 저홀로 흐르네
목은 선생의 역사적 위상은 너무나 광대하고 깊다.
목은 선생의 시문집인 '목은집(牧隱集)'은 55권 25책. 목판본. 1404년(태종 4) 아들 종선이 55권으로 간행했다. 서문은 권근과 이첨이 썼다.
선생은 학문과 인품이 뛰어나 훗날 조선성리학의 뿌리가 되신 분이다.
아버지 가정은 이웃 창수 출신의 나옹왕사(懶翁王師)와 매우 친하게 지냈다.
아버지의 절친한 벗이었던 나옹선사가 죽자 비록 왕명이었지만 목은 선생이 비문을 짓고 공신 권중화가 쓴 비가 신륵사에 전해오고 있다한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나옹선사>
목은 선생은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삼은(三隱) 중의 한 사람으로 정치가로서 과거제도를 개혁하고, 토지제도와 국제 외교를 발전시켰다.
또한 교육가이면서 사상가로서 성리학을 발전시킨 분이다.
괴시리 마을은 고려말의 대학자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 선생의 탄생지이다.
현대 사회에는 남녀차별이 존재하지만 고려 시대는 지금보다 여성의 지위가 높았으며, 대부분의 남자들은 처가에 가서 결혼식을 올리고
첫아이를 낳을 때까지 처가살이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태어난 아이도 일정 기간 동안 외가에서 자라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이를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혹은 서류부가혼(婿留婦家婚)이라고 하였다.
고려 때까지는 물론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이 풍습은 상당 기간 유지되었다.
이곡(李穀 1298년~1351년)은 고려 후기 울진 지역을 주제로 시와 기문을 남긴 문신이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보(仲父), 호는 가정(稼亭), 초명은 운백(芸伯). 한산이씨 시조인 이윤경(李允卿)의 6대손이다.
아들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이다.
이곡과 이색은 부자 사이로 모두 고려와 원(元)나라 문과에 급제한 고려말의 거유(巨儒)이다.
목은 선생의 초상화. 단정한 모습의 학자풍이다.
기념관을 나서 솔숲으로 비스듬히 뚫린 '목은 이색 등산로'를 내려다 본다.
부벽루 시비(詩碑)와...
나의 구씨(舅氏 목은의 외숙인 김요(金饒))인 중추(中樞) 치정공(致政公)이 자그마한 못에다 연꽃을 심어 놓고는 장차 그 옆에 정자를 지으려고 하면서,
나에게 급히 글을 보내 정자의 이름과 기문을 부탁하였다. 그런데 내가 요즈음 병으로 시달리는 가운데에서도...<후략>
'영해동명간출일((寧海東溟看出日)'은 '영해 동녘바다 해돋이를 보다'는 뜻의 시다.
영해는 영덕의 옛날 대표 이름이고, 동명(東溟)은 동해(동녘바다)를 가리킨다.
외가댁은 적막한 바닷가 마을에 있는데
풍경은 예로부터 사람들 입에 올랐었네
동녘 바다 향하여 돋는 해를 보려 하니
갑자기 슬퍼 두 눈이 먼저 캄캄해지누나
- - - <후 략>- - -
기념관을 내려서면서...
목은 이색선생 유적지 안내판을 본 후...
괴시마을 전통가옥으로 내려왔다. 골목에서 두서없이 바라보는 'ㅁ'자 형의 고택은...
구계댁(邱溪宅)으로 1805년(순조 5년)에 건립하였다가 1910년경에 중수하였다. 앞면 4칸, 옆면 6칸의 'ㅁ'자 형 집이다.
까치발을 하고 담넘어 고개를 쭈욱 뺐더니...
괴정(槐亭)이라는 편액이 보인다.
1766년(영조 41년) 괴정 남준형이 지은 정자로 1817(순조 17년) 중건하였고, 1876년(고종 13년)에 크게 수리하였다.
남준형은 관직에 나가지 않고 오직 후진양성과 노인을 공경하는 등 민생에 전력하여 칭송이 자자하였다.
괴시전통마을의 담벼락에 능소화가 담넘으로 고개를 내밀고 환하게 반겨주었으면 더욱 좋았겠다.
인적없는 골목의...
전통가옥들은 모두 대문이 굳게 잠겼다.
편액을 살펴보니 '괴시고택(槐市古宅).
굳게 닫힌 문은...
영은고택.
도로로 나와 올려다 보는 괴시전통마을.
도로변에 유허비각(遺墟碑閣)이 보인다. * 유허비는 선현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그들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를 말한다.
현판을 살펴보니 낙관에 '후손 건직 근서(後孫建稙謹書)'
유허비는 아버지 '가정'과 아들 '목은' 양선생의 유허비 '가정목은양선생유허비(稼亭牧隱兩先生遺虛碑)' 이다.
아까 목은 생가지에서 훼손되어 드러누워 있던 유허비를 1971년 새로 세운 것이라고 한다.
이제 대진해수욕장 주차장으로 터벅터벅 걸어가야 한다. 이 길은 해파랑길로서 아스팔트 옆으로 도보꾼들과 자전거도로 겸용으로 따로 설치되어 있다.
진행방향으로 상대산 관어대가 우뚝 솟아있다. 산행 후 괴시전통마을을 답사하겠다고 하였지만 생선회 파티가 있어 취소될 것이라고 보았다.
부지런히 걸었다면 상대산 관어대까지 답사를 마칠 수도 있었을 텐데...쩝.
상대산 관어대를 살짝 당겨 보았다.
2km가 넘는 도로를 빠른 걸음으로 걸으며...
상대산 관어대를 좌로 에두르다...
또다시 당겨보는 관어대. 관어대(觀魚臺)는 바다의 물고기를 바라본다는 곳.
운치있는 소나무와 느티나무, 그리고 쉼터정자가 있는 곳을 지나...
고래불대교를 바라보며...
대교 아래를 통해...
널따란 대진해수욕장 주차장에 도착을 하였다.
우리 버스는 한켠에 주차하여 이미 생선회파티기 벌어지고 있었다.
필자도 소주와 상추를 곁들인 생선회(참가자미와 숭어) 한 상을 받았다.
요기를 마치고 올려다보는 상대산 관어대.
목은 선생은 외가인 영해 괴시마을의 상대산 관어대에 올라 동해바다에서 노는 고기들의 모습을 보고 관어대소부(觀魚臺小賦)를 썼다.
<관어대는 영해부에 있다. 동해 석벽 밑에 임하여 노는 물고기를 셀 만 하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부(府))는 나의 외가며 이를 위하여 소부(小賦)를 지어 중원(중국)에 전해지기를 바라는 바이다.
단양(영해부의 다른 이름) 동쪽 해안, 일본의 서편 물가엔 큰 파도만 아득할 뿐 딴 것이 보이지 않네,
물결이 움직이면 태산이 무너지는 듯 하고 물결이 고요하면 거울을 갈아 놓은 듯하도다.
바람을 맡아 다스리는 신이 풀무질을 하는 곳이요, 해신이 거처하는 집이라 큰 고래가 떼 지어 놀면 그 기세가 하늘이 흔들고, 사나운 새가 외로이 날면
그림자가 저녁노을에 닿네.
그것을 굽어보는 이 대(臺), 눈 아래 땅이 없다.
위에는 하늘, 밑에는 한 물, 망망한 그 사이 천리인가, 만리인가, 대 밑에는 물결이 잔잔하여 뭇 고기들이 모이는데, 같은 놈, 다른 놈들, 어릿어릿대고
꼬리치며 각기 제 멋 대로구나. 임공(任公)의 미끼는 엄청나니 내가 감히 엄두도 못 낼 것이고, 태공의 낚시는 곧았으니 내가 바라지도 못할 것이로다.
아아, 우리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니 내 몸도 잊고 그 즐거움을 즐기며, 즐거움을 즐기다가 편안하게 자연으로 돌아가더라.
외물과 내가 한 마음이요, 고금이 한 이치라, 뉘라서 구복(口腹) 채우기에 급급하여 군자의 버림받기를 달게 여기랴.
슬프도다.
문왕이 이미 돌아갔으니 뜀 가득(於牣)을 생각하나 발돋움하여 볼 길 없고, 부자께서 떼를 타고 오시면 또한 이것을 즐기시리.
더구나 고기가 뛴다는 구절은 중용의 큰 뜻이니 종신토록 그 뜻을 깊이 탐구하면 자사(子思)님을 본받을 수 있으리라.>
고래불해수욕장의 널따란 백사장. 목은 선생은 관어대소부에서 "위에는 하늘, 밑에는 한 물, 망망한 그 사이 천리인가, 만리인가,"라고 하였다.
오전까지 흩뿌리던 비는 그쳤지만 뿌우연 회색기운이 시야를 가려 어디까지가 하늘이고, 또 바다인가?
괴시전통마을로 이동하여 마을의 안내판을 살핀다.
괴시리 전통마을은 200년 된 고옥이 30여 동이나 즐비한 영양 남씨 집성촌으로 마을 전면에는 영해평야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마을을 아늑하게 품고 있는 산으로 올라가면 목은 이색 선생의 생가 터와 기념관이 있다.
이미 산행의 날머리를 이곳으로 하였던 필자는 느긋하게 주위를 둘러본다.
원조 김충(金忠)은 당나라 하남성 봉양부 여남 사람으로서 형주자사를 지냈다.
755년(신라 경덕왕14년, 당나라 현종)에 안염사(安廉使)가 되어 당의 사신으로 일본에 다녀오는 도중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 신라 유린지
(有隣地, 지금의 영덕군 축산면)에 도착하게 되었다.
신라 경덕왕이 이를 알고 당나라에 통보 하였으나 당나라 천자가 김충의 원하는 대로 해주라고 하자 경덕왕이 영양군(지금의 경북 영양군)에 봉하고
여남(汝南)에서 왔다며(일설은 남쪽에서 왔다고해서) 성을 남(南)씨로, 민첩하다하며 이름을 민(敏)으로 해서 하사함으로써 남(南)씨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함께 일본에 다녀오던 그의 첫째 아들인 김석중(金錫中)은 성을 받기 전에 출생 하였으므로 본래의 성을 따라 영양김씨로 하였으며 후에 출생한
자식들은 성를 남씨로 하였다.
그래서 영양김씨와 남씨는 성은 틀리나 원조는 김충으로 같다.
그러나 그이후 몇대에 걸친 후대의 기록이 없으므로 후손인 김충황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영양으로 하였다.
'괴시마을회관'이 있는 동네 한복판에 수령 450년 된 왕버드나무가 서있다.
왕버들은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자라는 큰 나무다.
곧바로 자라는 보통의 나무들과는 달리 가지가 크게 벌어지고, 줄기는 비스듬히 자라는 경우가 많다.
고목이 되면 멋스럽고 운치가 있으며, 나무껍질은 회갈색으로 깊이 갈라지고 작은 가지는 황록색이다.
겨울에는 팥알만 한 붉은 겨울눈이 왕버들의 존재를 알려주는 지표가 된다.
버들이란 이름을 달고 있는 나무들은 좁고 긴 잎을 달고 있는 경우가 많으나, 왕버들은 달걀모양의 갸름한 잎이 특징이다.
왕버드나무가 있는 괴시마을회관앞의 목은이색등산로입구 이정표. 뒤에 보이는 무성한 잎의 나무는 괴시마을의 당산나무.
-영해를 그리워하며-
외가집은 고요한 해변가 마을인데
풍경이 아름답기로 소문이 나 있어
해돋이를 보려고 동녘하늘을 바라볼 제
감격스런 장관이여!
눈시울이 젖어 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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