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의 시인들 | 박정민
머그컵 깨졌다 외
커피잔에 실금이 내리꽂힐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pm 2:00 그라인드 속 원두가 회전하는 동안 고막은 고통의 데시벨을 견디고 있었을까 pm 1:00 떨어진 단추 찾느라 빨래통 안에 머리 넣고 있었을까 pm 12: 30 건조기 안 청바지 꺼내 접고 있었을까 pm 12:00 먹다 남은 김치찌개에 혼자 점심을 먹었을까 am 11:30 엄지발톱에 패티큐어 붙였을까 am 11:00 먼지 터느라 창문을 열고 있었을까 am 10:30 초인종 울리고 먼지 들어왔을까 am 10:00 음식물 쓰레기 버리러 가는 길에 포메라니안 털오리 묻어왔을까 am 9:00 며칠째 해결되지 않는 변비와 변기 사이의 역학관계를 생각하고 있었을까 am 8:30 사과를 깎다가 손가락 베었을까 am 1:00 올린 문자에서 엉뚱한 자음과 모음을 골라내고 있었을까 pm 11:30 신규 확진자 69,953명 늘어 누적 확진자 28,062,679명. 빨강과 파랑 감기약을 더 사 모아야겠다고 생각했을까 pm 11:00 일정 시간마다 배관을 타고 들어오는 담배 냄새에 짜증을 내고 있었을까 pm 7:00 관심 종목들 모조리 파랑의 역삼각, 더 빠질 재산 없는 잔고를 살피고 있었을까 pm 5:00 지나친 신호가 노랑인지 빨강인지 걱정하다가 오른발에 힘을 주고 있었을까 pm 2:00 101동과 102동 사이 소용돌이치는 바람 소리 들었을까 pm 1:30 흔들리는 단추를 꿰맬까 말까 고민했을까 pm 1:00 하루만 더 입자고 빨래통에서 청바지 다시 꺼내고 있었을까 am 11:30 손톱 정리를 하다가 거스러미 너덜한 엄지발톱을 보았을까 am 11:00 새 봉투 헐어 케냐를 갈아 커피를 내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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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숨,바꼭질
큰 키 항아리에서 쌀강정 꺼내고 미역 타래 꺼내고 깨금발 아래 깔린 고춧가루도 끄집어내자 나 하나쯤 들어앉을 공간 생긴다 만취한 아버지 부디 나를 잊기를…어둠이 서늘하게 들어오고 티끌 같은 별 몇 개 들어오고 곰삭은 고춧가루 냄새와 소금 냄새가 빠져 나간다
항아리 한쪽에 숨겨둔 신발을 생각하다가 어둠만 골라 디딘 맨발을 만져 본다 각질은 무사히 어둠 속으로 흩어졌을까 아버지의 슬리퍼는 밑바닥 넓어 어둠 속에 모두 숨겨지지 않을 거라는 아찔한 충격. 눈만 감으면 어둠 속으로 숨어들 수 있을 것 같아 눈을 감고 맨발을 다시 만져 본다 바닥의 각질들은 무사히 어두워졌을까 숨지 못한 별빛 두어 개 어둠을 따라 들어와 나를 부등켜 안고 숨을 참아본다
졸음에 빠진다 꿈 속에서 나는 콩이었다가 참깨인지 들깨였다가 고춧가루였다가 기장 앞 바닷속을 일렁이다가 미역의 뿌리였다가 콩이 된다 아버지 얼굴이 훅 들어와 콩 속에 숨은 나를 찾다가 나간다 나는 콩이어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큰 키 항아리는 나를 통째 집어삼킨 채 빛의 속도로 숙성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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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민
1997년 《문예사조》로 등단했다. 시집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