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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亂中日記)-정유년 일기
6. 정유년 일기(1597년 4월 1일 ~ 12월 30일)
죽은 군졸들을 제사하는 글
웃사람을 따르고 상관을 섬겨
너희들은 직책을 다하였건만
부하를 위로하고 사랑하는 일
내게는 그런 덕이 모자랐도다
그대들 혼을 한자리에 부르노니
여기에 차린 제물 받으오시라
4월
• 1일(辛酉) 맑음. 옥문 밖으로 나왔다. 남문 밖의 윤간의 종의 집에 가서 봉, 분, 울, 사행, 원경들과 오래도록 이야기했다. 지사 윤 자신이 와서 위로해 준다. 비변랑 이순지도 보러 왔다. 울적한 마음 더 한층 이길 수 없다. 기헌도 왔다. 모두 정으로 위로하면서 술을 권하므로 사양치 못하고 억지로 마셔 취했다. 영의정이 종을 보냈고, 판부사 정탁, 판서 심희수, 찬성 김명원, 참판 이정형, 대사헌 노직 동지 최원, 동지 곽영들이 사람을 보내서 문안했다.
• 3일(癸亥) 맑음. 일찍 남으로 길을 떠났다. 금부도사 이사윤, 서리 이수영, 나장 한언향은 먼저 수원부에 도착했다. 인덕원에서 말을 먹이면서 조용히 누워 쉬다가 저물어서 수원으로 들어가 경기 관찰사 홍이상(洪履祥)의 수하에서 심부름하는, 이름도 모르는 군사의 집에서 잤다. 신복룡이 우연히 왔다가 내 행색을 보고 술을 갖추어 가지고 와서 위로했다. 부사 유영건이 나와 보았다.
• 10일(庚午) 맑음. 식후에 흥백의 집에 가서 금부도사와 이야기했다. 늦게 홍찰방, 이 별좌 형제, 윤효원 형제가 보러 왔다. 이언길, 허제가 술병을 차고 왔다.
• 13일(癸酉) 맑음. 일찍 아침을 먹고 어머님을 마중하려고 바닷가로 가는 길에 홍 찰방의 집에 들러 잠깐 이야기하고 있는데, 울이 종 애수를 들여보내어, 아직 배가 온다는 소식이 없다고 한다. 또 들으니 황천상이 술병을 들고 흥백의 집에 왔다고 한다. 홍 찰방과 작별하고 흥백의 집으로 왔더니 조금 있다가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음을 전한다. 뛰어나가 가슴을 치면서 뛰고 뒹구니 하늘의 해도 캄캄하다. 즉시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가 이미 와 있다. 길에서 바라보는 애통함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다음날 대략 적었다.)
• 19일(己卯) 맑음. 일찍 길에 오르면서 영연에 하직을 고하고 울부짖었으나 무엇하랴? 천지간에 어찌 나 같은 일이 있으랴. 일찍 죽는 이만 같지 못하다. 뇌의 집에 이르러 사당에 뵙고 하직을 고하고서 금곡강 선전의 집 앞에 이르러, 강정, 강영수씨를 만나 말에서 내려 곡하고, 그 길로 보산원에 도착하니 천안 원이 먼저 와서 말에서 내려 냇가에서 쉬고 있다. 임천원 한술이 중시를 보러 서울에 가는 길에 앞을 지나다가 내가 있다는 말을 듣고 들어와서 조상하고 갔다. 회, 면, 봉, 해, 분, 와곤 변 주부가 모두 따라서 천안까지 왔다. 원인만도 와서 보기에 작별한 뒤에 말에 올라 일신역에 이르러 잤다. 저녁에 비가 뿌렸다.
• 28일(戊子) 맑음. 아침에 원수가 군관 승경을 보내서 문안하고 또 전하기를, "상중에 몸이 피곤할 터이니 회복되는 대로 나오라." 한다. 또 이제 들으니 친절한 군관이 통제영에 있다고 하므로 편지와 공문을 보내서 나오게 하는 바이니, 데리고 가서 간호하라고 하면서 편지와 공문을 가져 왔다. 순천 부사의 소실이 죽었다고 한다.
5월
• 2일(壬辰) 늦게 비. 원수는 보성으로 가고, 병사는 본영으로 가고, 순찰사는 담양으로 가는 길에 보러 왔다가 돌아갔다. 부사도 와서 보았다. 진흥국이 좌수영으로부터 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원균의 일을 이야기한다. 이형복과 신홍수도 왔다. 남원 종 끝돌이가 아산에서 와서 어머님 영연이 편안하시다고 한다. 또 유헌이 식구들을 데리고 무사히 금곡에 도착했다고 한다. 홀로 빈 동헌에 앉았으니 슬픔을 어이 참으랴?
• 5일(乙未) 맑음. 새벽에 꿈이 몹시 어수선했다. 아침에 부사가 와서 보았다. 늦게 충청 우후원 유남이 한산도에서 와서 원 공의 잘못된 일을 많이 전하고 또 진중의 장졸들이 배반하므로 장차 형세를 헤아릴 수 없다고 한다. 이 날은 단오절인데, 멀리 천리 밖에 종군하여 어머님에 대한 예절을 폐할 뿐만 아니라, 곡하고 우는 것조차도 역시 맘대로 하지 못하고 있으니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보응을 당하는가? 나 같은 일은 고금을 통하여 둘도 없을 것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 다만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한탄할 뿐이다.
• 7일(丁酉) 맑음. 선산 군수 안괄이 한산에서 와서 음흉한 자의 일을 많이 말했다. 안괄이 구례에 갔을 때 조사겸의 수절녀를 사통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놀랄 일이다.
• 11일(辛丑) 맑음. 김효성이 낙안에서 왔다가 곧 돌아갔다. 광양의 전 현감 심 성이 체찰사의 군관이 되어서 화살대를 구하러 순천에 왔다가 나를 보러 와서 근래의 소식을 많이 전하는데, 그 소식이란 모두 흉인에 대한 일이었다. 부찰사가 온다는 기별이 왔다.
• 16일(벼옹) 맑음. 저녁에 남원 탐후인이 와서 전하기를, 체찰사가 내일 곡성을 들러 세우겠다고 했다. 또 말하기를, "은진현에 이르니 그 고을 원이 뱃길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고 한다. 유는 또 말하기를, "중한 죄수 이덕룡을 고소했던 사람이 잡혀서 세차례의 형을 받고 장차 죽을 것이다."라 한다. 놀라운 일이다. 또 과천 좌수 안홍제 등이 이상궁에게 말과 20세 되는 계집종을 바치고서 석방되어 갔다고 한다. 안은 본래 죽을죄도 아닌데 여러 차례 형벌을 받고서 거의 죽게 되었다가 물건을 바치고서 석방된 것이다.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은 것에 따라서 죄의 경중을 결정한다니, 그 결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 모르겠다. 이것이 이른바 돈만 있으면 죽은 사람의 영혼도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 28일(戊午) 흐림. 늦게 떠나 하동현에 이르니 그 고을 원 신진이 서로 만나 보기를 반가워하고 성안 별사로 맞아 들여 간곡한 정을 베푼다. 그도 원균의 미친 일을 많이 말했다. 날이 저물도록 이야기 했다.
• 29일(己未) 흐림. 몸이 몹시 불편했다. 떠나지 못하고 머무르면서 조리했다. 현감이 정다운 말을 많이 해주었다.
6월
• 5일(甲子) 맑음. 서풍이 크게 불었다. 아침에 초계원이 달려왔기에 함께 이야기했다. 식후에 중군 이덕필도 달려와서 함께 지난 이야기를 했다. 거처할 방을 도배했다. 저녁에 이승서가 보러 와서 수직하던 병졸과 복병들이 도망한 일을 말했다.
• 8일(丁卯) 맑음. 아침에 정상명을 보내서 황 종사관에게 안부를 물었다. 늦게 이덕필과 심준이 와서 만났고, 원과 그 아무도 와서 만났다. 원수를 마중 가는 사람들도 10여명이 와서 보았다. 점심 후에 원수가 진에 왔으므로 나도 가서 보았다. 종사관은 원수의 집 앞에서 원수와
한참 이야기했다. 얼마 후에 원수가 박성의 사직하겠다는 글의 초본을 보이는데, 박성은 원수의 하는 일이 소탈한 점을 많이 말했다. 원수는 이것을 마땅치 않게 여겼으나 체찰사에게 글을 올렸다고 한다. 또 복병에 대한 사항 등의 서류를 보고 저물어서야 돌아왔다. 몸이 몹시 불편해서 저녁밥을 먹지 않았다.
• 12일(辛未) 맑음. 늦게 승장 처영이 보러 와서 부채와 짚신을 바치므로 다른 물건을 답례로 주었다. 그는 적의 정세도 이야기하고, 원 공의 일도 이야기했다. 오후에 들으니 중군당이 군사를 거느리고 적에게로 갔다고 하니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내가 원수에게 가보니, 우병사의 긴급 보고에, 부산의 적은 창원 등지로 떠나려 하고 서생초의 적은 경주로 진을 옮긴다고 하므로 복병군을 보내서 그들의 길을 막고 군대의 위세를 올리려는 것이라고 한다.
• 15일(甲戌) 맑다가 비. 어두워서 청주 이 희남의 종이 들어와서, 주인이 우병사의 부대에 입대했기 때문에 지금 원수의 진 근처에까지 왔는데 날이 저물어서 묵고 있다고 말했다.
• 18일(丁丑) 흐리나 비는 내리지 않음. 아침에 황 종사관이 자기 종을 보내서 문안했다. 늦게 윤감이 떡을 해 가지고 왔다. 명나라 사람 섭위가 초계에서 와서 이야기하는데 말하기를, "명나라 사람 주언룡이 일찌기 일본에 사로잡혀 갔다가 지금 처음으로 나와 보니, 적병 10만명이 이미 사자마나 대마도에 왔을 것이요, 행장은 의령을 거쳐 바로 전라도로 쳐들어올 것이며, 청정은 경주, 대구 등지로 진을 옮기고 바로 안동으로 가려 한다."고 했다. 저물게 원수가 사천 갈 일을 알려왔기로 곧 정사복을 보내서 물었더니, 원수는 수군의 일로 해서 사천에 갔다고 한다.
• 19일(戊寅) 새벽에 닭이 세 번 울자 문을 나서니 장차 원수의 진에 도착하려는데 날이 밝았다. 진에 이르니 원수는 황 종사관과 나와 있다. 내가 들어가 뵈니, 원수는 원균의 일로 말하기를, "통제사의 일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조정에 말해서 안골, 가덕을 모두 섬멸시킨 뒤에 수군이 나가서 토벌한다고 하니 이것은 참으로 무슨 심사인가. 이것은 핑계하고 나가지 않으려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까닭에 사천으로 가서 세 수사를 독촉하여 나가게 할 것이니, 통제사는 내가 지휘할 것도 없다."고 한다. 내가 또 임금의 분부를 보니, 안골에 있는 적은 경솔히 들어가 쳐서는 안 된다고 했다. 원수가 나간 뒤에 황 종사관과 한참 이야기하고 있는데 초계 원이 왔다. 작별할 무렵에 초계 원에게 말하기를, 진찬순을 심부름시키지 말하고 하니, 원수부의 병방 군관과 원이 모두 그렇게 한다고 대답했다. 돌아올 때 포로로 잡혀갔다가 도망온 사람이 나를 따라왔다. 이날 땅이 마치 찌는 듯했다. 저녁에 작은 워라말(얼룩말)이 풀을 조금 먹었다. 낮에 군사 변덕기, 변덕장, 변경완, 변경남이 와서 만났다. 진사 이 일장도 와서 만났다. 밤에 소나기가 크게
내려 처마에 떨어지는 비가 마치 물을 퍼붓는 것 같았다.
• 25일(甲申) 맑음. 다시 명령해서 무우씨를 뿌리게 했다. 식전에 황 종사관이 와서 만났다. 해전에 대한 일을 많이 말하고, 또 원수가 금명간 진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한다.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늦게야 돌아갔다. 저녁에 서울 종이 한산에서 돌아왔다. 들으니 보성 군수 안홍국이 탄환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놀람과 슬픔을 이길 수가 없다. 한 놈의 적도 사로잡지 못하고 먼저 두 장수를 잃었으니 통분함을 어찌 말하랴. 거제가 또 사람을 시켜서 미역을 실어 보냈다.
• 29일(戊子) 맑음. 변 주부가 마흘방으로 갔다. 종경이 돌아오고, 이희남, 이방도 돌아왔다. 이중군과 심준이 와서 전하기를, 심유격이 체포되어 갔는데, 양총병이 삼가에 가서 결박해 보냈다고 한다. 문임수가 와서 전하기를, 체찰사가 초계역에 당도했다고 한다.
7월
*이 달의 간지가 잘못되었으나 원문에 따르고 수정하지 않는다.
• 3일(壬午) 맑음. 합천 오운이 와서 산성에 관한 일을 많이 이야기했다. 좌병사가 그 군관을 시켜서 항복한 왜인 2명을 압송해 보냈는데, 청정의 부하라고 한다.
• 13일(壬辰) 맑음. 아침에 남해가 편지를 보내고 음식을 많이 보내서 말하기를, 싸움에 쓸 말을 끌어가겠다고 했으므로 답장을 써서 보냈다. 늦게 이 태수, 조신독, 홍대방이 보러 와서 적을 토벌할 일을 이야기했다. 송대립, 장득홍도 왔다. 장득홍은 자비로 복무한다고 한다. 양식 2말을 주었다. 이날 칡을 캐어 왔다.
• 14일(癸巳) 맑음. 이른 아침에 정 상명에게 종 평세, 귀인과 짐 실은 말 두 필을 주어 남해로 보냈다. 정상명은 전마를 끌어올 일로 보낸 것이다. 새벽 꿈에 내가 체찰사와 함께 한 곳에 가보니 시체들이 즐비한데 혹은 발로 밟기도 하고 혹은 목을 베기도 했다. 아침 식사 때 문인수가 와가채와 동과전을 가져다준다. 방 응원, 윤선각, 현응진, 홍우공 등과 이야기했다. 홍은 그 아버지의 병으로 해서 종군하고 싶지 않아, 나에게 팔이 아프다고 핑계하니 놀라운 일이다. 오전 10시쯤 황 종사관이 정 인서를 보내서 문안하고, 또 김해 사람으로서 왜적에게 붙었던 사람 김억의 편지를 보여 준다. 거기에 보니, 7일에 왜선 5백여 척이 부산으로 나왔고 9일에는 왜선 1척이 합세해서 우리 수군과 영도 앞바다에서 싸웠는데, 우리 배 5척이 두모포에 표류해 갔으며, 7척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들으니 분하고 억울함을 참을 수가 없다. 즉시 황 종사관과 일을 의논하고 그대로 앉아서 활 쏘는 것을 구경했다. 얼마 있다가 내가 탔던 말을 홍대방을 시켜 달려 보라고 했더니 잘 달린다. 날씨가 비올 기미가 많기에 집으로 돌아왔더니 집에 닿자마자 비가 몹시 내리다가 밤 8시경에야 갰다. 달빛이 하도 밝아 낮보다 더하니 회포를 어이 다 말하랴.
• 16일(음미) 혹 비도 내리고 혹 개기도 했으나 종일 흐리고 맑지는 못했다. 아침 식사 후에 손응남을 중군에게 보내서 수군에 대한 소식을 알아 오도록 했다. 그가 돌아와 중군의 말을 전하는데, 경상 좌병사의 긴급 보고로 보아 우리에게 불리한 일이 많다고 하면서 자세한 것은 말하지 않더라고 한다. 탄식스러운 일이다. 늦게 변 의정이라고 하는 자가 수박 두개를 가지고 왔는데, 그 생김새가 몹시 어리석고도 용렬하다. 궁촌에 처박혀 사는 사람이 배우지도 못하고 가난하니 자연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소박한 태도다. 이날 낮에 이희남을 시켜 칼을 갈게 했더니 아주 잘 들어서 적장의 머리를 벨 만하다. 소나기가 급히 쏟아졌다. 아들 열이 행로에 고생될 것을 생각하니 걱정이 된다. 저녁에 영암 송진면에 사는 사삿집 종 세남이 서생포에서 알몸으로 왔기에 그 까닭을 물으니, "7월 4일에 전 병사의 우후가 타고 있던 배의 격군(格軍:사공(沙工)의 일을 돕던 수부(水夫))이 되어 5일에 칠천량에 이르러 자고, 일에 옥포로 들어갔다가 7일 새벽에 말곶을 거쳐서 다대포에 이르러 왜선 8척이 정박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여러 배들이 함께 돌격했더니, 왜병은 모두 육지로 도망하고 빈 배만 남아 있어 우리 수군들은 그것을 끌어내다가 불지르고 그 길로 부산 영도 밖 바다로 향하다가, 마침 적선 천여 척이 대마도에서 건너오기에 서로 싸우려 했으나 왜선들이 피하여 흩어지므로 종시(終始) 이들을 섬멸시킬 수 없었고, 세남이 탄 배와 다른 배 6척은 배를 제어하지 못하고 서생초 앞바다까지 표류하다가 육지로 오르려고 했으나, 거이 다 적에게 죽고 세남만은 혼자 숲 속으로 기어서 목숨을 보전하여 간신히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 듣고 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우리나라가 믿는 바는 오직 해군뿐인데, 해군이 이와 같으니 다시 더 희망이 없다. 거듭 생각할수록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다. 또 선장 이엽은 적에게 잡혔다고 하니 더욱 통분하다. 손 웅남이 집에 돌아갔다.
• 18일(丁酉) 맑음. 새벽에 이덕필이 변흥달과 함께 와서 전하기를, 16일 새벽에 수군이 야습을 받아 통제사 원균이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 수사 최로 및 여러 장수들과 함께 해를 입어 수군이 크게 깨졌다는 것이다. 듣자니 통곡이 터져 견딜 수가 없다. 이윽고 이 원수가 와서 전하기를, 일이 이미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어찌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밤 10시까지 이야기했으나 별 방법이 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직접 해안으로 가서 듣고 본 뒤에 방책을 정하겠다."고 했더니, 원수는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다. 이에 송대립, 유황, 윤선각, 방응원, 현응진, 임영립, 이원룡, 이희남, 홍우공 등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삼가현에 이르니 새로 부임한 원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
• 21일(更子) 맑음. 일찍 떠나 곤양군에 이르니 군수 이천추도 고을에 있고, 백성들로 많이 제 고장에 있어 혹은 올벼를 거두기도 하고 혹은 밀보리밭을 갈기도 한다. 점심 후 노량에 이르니 거제 원 안 위와 영등 조계종 등 10여인이 와서 통곡하고, 피해 나온 군사와 백성들도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는데, 경상 수사 배설은 도망가고 보이지 않는다. 우후 이의득이 보러 왔기에 패하던 당시의 정황을 물었다. 모든 사람들이 울면서 말하기를, 대장 원균이 적을 보자 먼저 육지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같이 육지로 달아나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대장의 잘못을 말하는 것은 입으로 옮길 수가 없고, 그 살점이라고 뜯어 먹고 싶다고들 한다. 거제의 배 위에서 자면서 거제 원과 새벽 2시경까지 이야기했다.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해 눈병이 생겼다.
• 25일(甲辰) 갬. 황 종사관이 편지를 보내어 문안했다. 조방장 김언공이 보러 왔다가 원수부로 갔다. 저녁때 배백기의 병문안을 가보니 고통이 극도로 심하다.
8월
• 3일(辛酉) 맑음.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들어와서 교서와 유서를 전하는데 내용을 보니, 삼도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다. 숙배한 뒤에 받은 서장을 봉해 올리고 곧 길을 떠나서 바로 두치로 가는 길을 거쳐 오후 8시경에 행보역에서 말을 쉬었다. 자정이 넘어서 다시 길을 떠나서 두치에 도착하니 날이 새려고 한다. 박남해가 길을 잃고 잘못 강정으로 들어갔으므로 말에서 내려 불러왔다. 쌍계동에 도착하니 뾰족한 돌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는데 금방 온 비에 물이 넘쳐 흘러서 간신히 건넜다. 석주에 이르자 이원춘과 유해가 복병하고 지키다가 나와서 보고, 적을 토벌할 일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했다. 저물 무렵 구례현에 이르러 보니 온 고을이 쓸쓸하다. 성 북문 밖 전날에 주인했던 집에서 잤는데, 주인은 이미 산골짜기로 피난했다고 한다. 손인필이 곧 와서 보고, 겸해서 곡식까지 지고 왔다. 손응남은 일찍 익은 감을 가져왔다.
• 6일(甲子) 맑음. 아침 식사 후 길을 떠나 옥과 지경에 이르니 순천과 낙안이 피란민들로 길이 가득 찼으며, 남자 여자가 서로 부축하고 가는 것이 차마 볼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그들은 울면서, "사또가 다시 오셨으니 인제는 우리가 살았다."고 했다. 길 옆에 큰 홰나무가 있기에 내려앉아서 말을 쉬게 했다. 순천 이기남이 와서 어디서 죽을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옥과현에 이르니 원은 병을 칭탁(稱託:사정이 어떠하다고 핑계를 댐.)하고 나오지 않았다. 정사준, 사립이 먼저 와서 관아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고, 조응복, 양동립도 나를 따라 이리로 왔다. 나는 병을 청탁(請託:청하여 남에게 부탁함)하고 나오지 않는 원을 잡아다가 곤장을 치려했더니, 홍요좌가 내 뜻을 미리 알고 급히 나왔다.
• 7일(乙丑) 맑음. 일찍 떠나 바로 순천으로 향하는 도중, 고을을 10리쯤 못 가서 선전관 원집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오는 것을 만났다. 길옆에 앉아서 펴보니, 병사가 거느렸던 군사가 모두 뿔뿔이 흩어져 갔다는 것이다. 닭 울 무렵에 송대립이 순천 등지로 다서 적의 정세를 정찰해 가지고 왔다. 석곡 강정에서 잤다.
• 9일(丁卯) 맑음. 일찍 떠나서 낙안에 이르니 5리밖까지 많은 사람들이 나와 본다. 사람들이 흩어져 달아나 까닭을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병사가 적이 쳐들어온다는 말을 퍼뜨리고 창고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기 때문에 인민들이 모두 흩어져 도망했다는 것이다. 관청에 들어가니 조용하여 사람 소리가 없다. 순천 부사 우 치적, 김제 군수 고봉상 등이 와서 절한다. 늦게 보성 조양에 이르러 김안도의 집에서 잤다.
• 12일(庚午) 맑음. 아침에 장계 초고를 수정했다. 늦게 거제, 발포가 들어와 명령을 들었다. 그 편에 배설이 황겁해 하더라는 것을 들으니 괘씸하고 한탄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 아첨이나 하여 제가 감당도 못할 지위에까지 올라 국가 대사를 크게 그르치는데도 조정에서는 이를 살피지 못하고 있으니 어쩌면 좋단 말이냐?
• 13일(辛未) 맑음. 거제 현령 안 위, 발포 만호 소 계남이 인사하고 돌아갔다. 우후 이몽귀가 전령을 받고 들어왔기에, 본영의 군기와 군량을 하나도 옮겨 싣지 않은 일로 해서 곤장80대를 때려 보냈다. 하동 현감이 와서 전하기를, "3일에 내가 떠난 뒤에 진주 정개 산성과 벽견 산성도 모두 흩어져 버리고 제 손으로 불질러 버렸다."고 한다. 통탄할 일이다.
• 16일(甲戌) 맑음. 아침에 보성 원과 군관들을 굴암으로 보내러 피해 달아난 관리들을 찾아내게 했다. 선전관 박 천봉이 돌아가는 편에 나주 목사와 어사 임 몽정에게 답장을 보냈다. 사령들을 박사명에게 보냈더니 사명의 집은 벌써 비어 있더라고 했다. 오후에 활 장인 지이 및 태 귀생, 선의, 대남 등이 들어왔다.
• 25일(癸未) 맑음.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아침 식사를 하려는데, 당포의 어부가 피란민의 소 2마리를 훔쳐다가 잡아먹기 위하여 적이 왔다고 거짓말을 퍼뜨렸다. 나는 이미 이것이 거짓임을 알았기 때문에 배를 굳게 매고 움직이지 않으면서 그자들을 잡아 오게 했더니 과연 예상대로였다. 이렇게 해서 군대는 안정시켰으나 배설은 벌써 도망가 버렸다. 거짓말을 한 두 사람은 목을 베어 효시 했다.
• 28일(丙戌) 맑음. 적선 9척이 갑자기 들어오니 여러 배들이 겁이 나서 달아나려 한다. 경상 수사 배설도 달아나려 한다. 나는 꼼짝 않고 있다가 적선이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려 각지기를 흔들면서 급히 뒤를 쫓으니 적선들은 물러가고 말았다. 갈구까지 쫓다가 돌아왔다. 저녁에 장도로 진을 옮겼다.
• 30일(戊子) 맑음. 벽파진에 머물러서 정찰병을 여러 곳으로 나누어 보냈다. 늦게 배설은 적이 많이 몰려 올 것을 염려해서 도망하려 했으나, 관하의 여러 장수들이 찾기도 하고 나도 또 그 실정을 알기는 하지만,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을 미리 발표하는 것은 장수로서 할 일이 아니므로 그대로 참고 있었다. 이때 배설이 제 종을 시켜서 소지를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해서 조리를 하겠다고 했다. 이에 나는 육지로 올라가서 조리하라고 허락해 주었더니, 배설은 우수영으로 올라갔다.
9월
• 7일(乙未) 맑음. 탐망 군관 임중형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 55척 중에서 13척이 이미 어란포 앞바다에 왔는데, 그 뜻은 필시 우리 수군에 있는 것이다."한다. 이에 여러 장수들에게 전령을 내려 재삼 신칙(申飭:단단히 타일러서 경계함.) 했다. 과연 오후 4시경에 적선 12척이 나타난다. 우리 배들이 닻을 들고
바다로 나가서 적을 추격하니, 적선은 뱃머리를 돌려 도망한다. 먼 바다까지 쫓아가다가 바람과 조수가 모두 거슬리고 또 복병이 있을까 걱정도 되어 끝까지 쫓지는 않았다. 벽파정으로 돌아와서 여러 장수들을 불러놓고 약속하기를, "오늘 밤에는 반드시 적의 습격이 있을 것이니 모든 장수들은 미리 알아서 준비할 것이며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군법대로 시행할 것이다."하고 재삼 타일러 경계하고 헤어졌다. 밤 8시경에 과연 적들이 습격해 왔다. 그들은 탄환을 많이 쏘아 댄다. 내가 탄 배가 바로 앞장을 서서 지자포를 쏘니 강과 산이 모두 흔들린다. 적의 무리들도 대항하지 못할 것을 알고, 네 번이나 나왔다 물러갔다 하면서 그저 포만 쏠 뿐이었다. 그러다가 자정이 넘자 아주 도망해 버렸다.
• 9일(丁酉) 맑음. 구일 명절이다. 군사들에게 음식을 차려 먹이려는데 마침 부찰사 군량 중 제주 소 5마리가 왔다. 녹도 송여종과 안골포 우수를 시켜 그것을 잡아다가 군인들에게 먹이고 있는데, 적선 2척이 감보도로 해서 곧장 들어와 우리 배의 형편을 살피는 것이다. 이에 영등포 만호 조계종이 바짝 추격하자 적들은 당황하여 배에 실었던 물건을 모두 바다에 버리고 달아났다.
• 14일(壬寅) 맑음. 북풍이 크게 불었다. 벽파정 건너편에서 봉화가 오르기에 배를 보내서 실어 왔더니 곧 임준영이었다. 정찰병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 2백여 척 중에서 55척이 먼저 어란으로 돌아갔다." 한다. 또 말하기를, "사로잡혀 갔다가 도망해 돌아온 김중걸이 전하는 말에, 중걸이 이달 초 6일에 밤새도록 산에 의지해 있다가 왜적에게 붙잡혀서 결박되어 왜선에 실렸는데, 다행히 임진년에 포로가 된 김해 사람을 만나서 왜장에게 사정하여 결박을 풀고 같은 배에 있었다. 그러다가 한밤중에 왜병이 깊이 잠들었을 때를 타서 귀에 입을 대고 남몰래 말하기를, '왜놈들이 모여서 의논하는 말을 들으니 조선 수군 10여척이 우리 배를 쫓아와서 혹 쏘아 죽이기도 하도, 혹 배를 불태우기도 했으니 몹시 통분한 일이다. 이제 각처의 배들을 불러 모아서 합세해서 모두 섬멸시킨 뒤에 바로 서울로 가야겠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이 말을 비록 다 믿을 수는 없으나 이런 일이 없지도 않을 것이므로 즉시 전령을 보내서 피란민들에게 타일러 급히 육지로 올라가도록 했다.
• 15일(癸卯) 맑음. 조수를 타고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벽파정 뒤에 명량이 있는데, 수가 적은 수군을 가지고 명량을 등지고서 진을 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기를, "병법에 이르기를, 꼭 죽으려고 하면 살고 꼭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했다. 또 한 사람이 길을 막으면 천명의 적도 두렵게 할 수가 있다고 했다. 이 말들은 모두 지금의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날에는 즉시 군율에 의해서 다스려서 조금도 용서치 않으리라."하고 재삼 엄격히 약속했다. 이날 밤 꿈에 신인이 지시하기를, "이렇게 하면 이길 것이요, 이렇게 하면 질 것이다."했다.
• 16일(甲辰) 맑음. 이른 아침에 특별 부대가 나와서 보고하기를, "적선이 그 수를 알 수 없을 만큼 많이 명량으로 해서 똑바로 우리가 진치고 있는 것으로 온다."고 한다. 즉시 여러 배들에게 명령하여 닻을 들고 바다로 나갔다. 적선 1백 30여척이 우리 배들을 포위한다. 여러 장수들은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대항하는 것은 무리하다고 생각하고 문득 회피할 꾀를 내는데, 이때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이미 2마장 밖에 나가 있었다. 나는 노를 재촉하여 앞으로 돌진하면서 지자, 현자 등 여러 가지 총을 어지러이 쏘니 탄환은 바람과 천둥치듯 쏟아진다. 한편 군관들은 배 위에 빽빽이 서서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적의 무리들이 대항하지 못하고 가까이 왔다 물러갔다 한다. 하지만 여러 겹으로 포위당해서 형세가 장차 어찌될지 알 수가 없어, 온 배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면서 낯빛이 질린다. 나는 부드럽게 타이르기를, "적선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는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을 동요하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라." 했다. 여러 장수들의 배를 돌아다보니 먼 바다에 물러가 있는데,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고자 해도 적들이 이 틈을 타서 더 대어 들것이어서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형편이다. 이에 호각을 불어 중군에게 군령 내리는 기를 세우라 하고, 또 초요기를 세웠더니, 중군장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 가까이 왔고, 거제 현령 안 위를 불러, "안위야!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가면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하니 안위는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한다. 나는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았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수 있느냐. 당장 처형할 것이나 적의 형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한다." 했다. 이 두 배가 적진을 향해서 앞서 나가자, 적장이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2척에게 지휘하여 안 위의 배에 마치 개미 떼처럼 붙어서 서로 먼저 올라가려고 한다. 이에 안위와 그 배 위에 있던 사람들은 각각 죽을힘을 다해서 혹은 모난 몽둥이로, 혹은 긴 창으로 혹은 수마석 덩어리로 무수히 어지럽게 치다가 배 위에 사람이 거의 힘이 다하게 되었다. 나는 뱃머리를 돌려 바로 적에게 들어가서 비가 퍼붓듯이 마구 총을 쏘니 세 배의 적들이 거의 모두 쓰러진다. 이때 녹도 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의 배가 뒤따라 와서 힘을 합해서 쏘아 죽이니 적이 한 놈도 움직이지 못한다. 항복한 왜인 준사는 안골의 적진에서 투항해온 자인데, 내 배 위에 있다가 적의 배를 굽어보더니, "저기 그림 무늬 놓은 붉은 비단 옷을 입은 자가 바로 안골의 적장 마다시다." 한다. 내가 물 긷는 군사 김돌손을 시켜서 갈구리로 낚아서 배에 올리니, 준사는 기뻐서 날뛰면서, "이게 마다시다." 한다. 나는 즉시 명령하여 그놈을 토막 지어 베어 죽이게 하니 적들의 의기가 크게 꺾였다. 우리 모든 배들은 적들이 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일시에 북을 올리고 소리치면서 쫓아 들어가 지자, 현자 대포를 쏘니 그 소리가 산천을 움직이고 또 화살이 비처럼 쏟아져서 적선 31척을 깨뜨리니, 적선은 모두 물러가고 다시 접근해 오지 못한다. 우리 수군은 이 바다에서 정박하려 했으나 수세가 몹시 험하고 바람도 또 거슬러 불 뿐 아니라, 형세가 외롭고 위태롭기 때문에 당사도로 옮겨서 밤을 지냈다. 이번 싸움은 참으로 천행이었다.
• 17일(乙巳) 맑음. 어외도에 이르니 피란선이 무려 3백여 척이나 먼저 와 있었다. 나주 진사, 임선, 임환, 임업 등이 와서 보았다. 우리 수군이 크게 이긴 것을 알고 서로 다투어 치하하며, 또 양식을 가지고 와서 군사들에게 주었다.
• 18일(丙午) 맑음. 그대로 어외도에 머물렀다. 내 배에 탔던 순천 감목관 김탁과 영노 계생이 탄환에 맞아 전사했고, 박영남, 봉학과 강진 현감 이극신도 탄환에 맞았으나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다.
• 19일(丁未) 맑음. 일찍이 떠나 행선 했다. 바람이 부드럽고 물결도 순하여 무사히 칠산바다를 건넜다. 저녁에 법성포에 이르니 흉악한 적들이 육지로 들어와 인가 곳곳에 불을 질렀다. 해질 무렵에 홍농 앞바다에 이르러 배를 대고 잤다.
• 20일(戊申) 맑음. 새벽에 떠나 바로 위도에 이르니 피란선이 많이 닿아 있다. 이광축, 광보가 보러 왔다.
• 23일(辛亥) 맑음. 승첩에 관한 장계 초본을 마련했다. 정희열이 와서 보았다.
10월
• 1일(戊午) 맑음. 아들 회를 보내서 저의 모친도 보고 집안 여러 사람의 생사도 알아 오라고 했다. 병조의 역자가 공문을 가지고 내려와서 아산 소식을 전하는데, 집이 적에게 습격 받아 잿더미가 되어 남은 것이 없다고 한다.
• 9일(丙寅) 맑음. 일찍 떠나 우수영에 이르니 성 안팎에 인가라고는 하나도 없다. 또 인적도 보이지 않으니 참담하기 한이 없다. 저녁에 들으니 흉악한 적들이 해남에 진을 치고 있다고 한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에 김종려, 정조, 백진남 등이 보러 와서 만났다.
• 11일(戊辰) 맑음. 새벽 2시경에 바람이 자는 것 같으므로 비로소 닻을 들고 바다 가운데 이르러 정탐인 이순, 박담동, 박수환, 태귀생 등을 해남으로 보냈더니, 해남에는 연기가 하늘을 덮었다고 하니 이는 필시 적의 무리가 달아나다가 불을 지른 것일 게다. 낮에 안편도에 이르니 바람도 좋고 날씨도 화창하다. 배에서 내려 육지로 올라가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서 적이 배를 감추어 둘 수 있는 곳을 살펴보았다. 동쪽은 앞에 섬이 있어서 멀리 바라볼 수가 없고 북쪽으로는 나주와 영암 월출산까지 통해 있고 서쪽으로는 비금도에 통해서 눈이 훤했다. 조금 있다가 중군당과 우치적이 올라왔다. 조효남, 안위, 우수가 뒤따라 올라왔다. 날이 저물 무렵 산에서 내려와 언덕에 앉았노라니 조계종이 왔는데 그는 왜적의 정세를 말하고 나서 또 말하기를 왜적들은 우리 수군을 몹시 두려워한다고 한다. 이희급의 부친이 와서 뵙고, 자기가 포로 되었던 사실을 이야기하는데 마음 아픔을 이길 수 없다. 저녁엔 날씨가 따뜻해 봄과 같고 아지랭이가 하늘에 날아 비 올 기미가 많다. 초저녁에 달빛이 비단결 같아 홀로 창가에 앉았노라니 회포가 어지럽다. 밤 10시경 허한이 몸을 적신다. 자정엔 비가 내렸다. 이날 우수사가 군량선에 있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무릎을 때렸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다.
• 13일(庚午) 맑음. 정찰선이 임준영을 싣고 왔다. 그 편에 적의 정세를 들으니, 해남으로 들어와 웅거했던 적들이 10일에 우리 수군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11일에 모두 도망했다고 한다. 그런데 해남 송언봉과 신용 등이 적진 속으로 들어가 왜놈들을 데리고 나와 지방 사람들을 많이 죽였다 하니 통분함을 참을 수가 없다. 우수사의 군관 배영수가 와서 보고하기를, 수사의 부친이 바깥 바다로부터 살아 돌아왔다고 한다. 낮에 들으니 선전관 네 사람이 법성포에 내려와 있다고 한다. 저녁때 중군 김 응함에게 들으니, 섬안에서 누군가가 산 속에 숨어서 소와
말을 잡아 죽인다고 한다. 즉시 황득중, 오수를 보내서 수색하게 했다.
• 14일(辛未) 맑음. 새벽 2시쯤 꿈을 꾸니,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다가 말이 실족해서 내 가운데로 떨어졌으나 거꾸러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막내아들 면이 나를 붙들어 안는 것 같은 형용을 하는 것을 보고 깨었다. 무슨 조짐인지 알 수가 없다. 늦게 배 조방장과 우후 이의득이 오고 배의 종이 경상도로부터 와서 적의 상황을 전한다. 황득중 등이 와서 보고하기를, "내수사의 종 강막지라는 자가 소를 많이 치기 때문에 12마리를 끌어갔다."고 한다. 저녁에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 편지를 전하는데, 떼어 보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움직이고 정신이 황난하다. 겉봉을 대강 뜯고 둘째 아들 열의 글씨를 보니, 겉에 '통곡'이라는 두 자가 써 있다. 면이 전사한 것을 마음속으로 알고 간담이 떨려 목 놓아 통곡했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한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만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올바른 이치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이것은 이치가 잘못된 것이다. 천지가 어둡고 저 태양이 빛을 잃는구나! 슬프다, 내 어린 자식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특한 기상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는데 하늘이 너를 머물게 하지 않는가? 내가 죄를 지어서 그 화가 네 몸에까지 미친 것인가? 이제 내가 세상에 있은들 장차 무엇을 의지한단 말이냐? 차라리 죽어서 지하에 너를 따라가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리라. 네 형과 네 누이와 너의 어머니도 또한 의지할 곳이 없으니 아직 목숨은 남아 있어도 이는 마음은 죽고 형용만 남아 있을 뿐이다. 오직 통곡할 뿐이로다. 밤 지내기가 1년처럼 길구나. 이날 밤 9시경에 비가 내렸다.
• 16일(癸酉) 맑음. 우수사와 미조항 첨사를 해남으로 보냈다. 해남 원 유형도 보냈다. 밤 10시에 순천 부사 우치적, 우후 이정충, 금갑 이정표, 제표 주의수 등이 해남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왜적 13명과 적진에 투항해 들어갔던 송언달 등의 머리를 베어 왔다.
• 21일(戊寅) 비가 오다가 눈으로 변했다. 바람이 몹시 차가와 뱃사람들이 얼고 떨 것을 염려하여 마음을 안정시킬 수가 없다. 정상명이 와서 보고하기를, 무안 현감 남언상이 들어왔다고 한다. 언상은 본래 수군에 소속된 관원인데, 제 몸만 보전하려는 계책으로 수군에는 오지 않고 몸을 산골에 숨긴 지 달포가 넘었다가 이제 적이 물러간 뒤에야 무거운 벌을 받을까 겁내어 비로소 나타났으나 그 하는 짓이 몹시 해괴하다. 늦게 가리포 및 배 조방장 우후가 왔다.
• 25일(壬午) 맑음. 종 순화가 배를 타고 아산으로부터 온 편에 집안 편지를 받았다. 초저녁에 선전관 박희무가 유지를 가지고 왔는데, 명나라 수군의 배가 정박하기 적당한 곳을 생각해서 곧 장계하라는 것이었다.
• 28일(乙酉) 맑음. 아침에 여러 가지 장계를 봉해서 피은세에게 주어 보냈다. 늦게 강막지의 집으로부터 지휘선으로 옮겨 탔다. 저녁에 염장의 도서원 걸산이 큰 사슴을 잡아 바쳤으므로 군관들에게 내주어 나누어 먹게 했다.
• 30일(丁亥) 맑으나 동풍이 불고 비 올 기미가 많다. 아침에 집 지을 곳에 내려가 앉았노라니 여러 장수들이 보러 왔다. 해남 원유형도 와서 적에게 붙었던 자들의 짓을 전해 준다. 일찌기 황득중을 시켜 목수를 데리고 섬 북쪽 산 밑에 가서 재목을 베어 오게 했다. 늦게 적에게로 갔던 정은부와 김신웅의 계집 등과 또 왜놈을 지시하여 나쁜 짓을 하게 한 김애남 등을 모두 목베어 죽였다.
11월
• 1일(戊子) 비. 아침에 사슴 가죽 2장이 물에 떠내려왔기에 명나라 장수에게 보내기로 했다. 이상한 일이다. 저녁에 북풍이 크게 불어 밤새도록 배가 흔들려서 사람이 안정할 수가 없었다.
• 7일(甲午) 맑음. 아침에 해남 의병이 왜적의 머리 하나와 환도 1자루를 갖다 바쳤다. 이종호와 당언국을 잡아 왔기로 거제 배에 가두어 두었다. 늦게 전홍산 윤영현과 생원 최집이 보러 와서 군량 벼 40석과 쌀 8석을 바쳤다. 며칠 동안의 양식에 도움이 되겠다. 본영 박주생이 왜인이 머리 2개를 베어 왔다.
• 11일(戊戌) 맑음. 식사 후에 새 집에 올라가니 새로 부임한 평산 만호가 도임장을 바친다. 그는 하동 현감 신진의 형 신휜이다. 전하는 말이 그는 이미 숭정으로 승진되었다고 한다.
• 12일(기해) 맑음. 늦게 영암, 나주 사람들을, 타작을 못하게 했다고 해서 결박지어 왔다. 그 중에서 주모자를 가려내어 처형하고 나머지 4명은 각 배에 가두었다.
• 14일(辛丑) 맑음. 해남 원유 형이 와서 윤단중의 무리한 일을 많이 전했다. 그는 또 말하기를 해남 아전이 법성포로 피란갔다가 돌아올 때 바람을 만나 배가 전복되었는데, 이를 구조하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배 안에 있는 물건을 빼앗아 갔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그를 중군 배에 가두었다. 김인수는 경상도 수영 배에 가두었다.
• 16일(癸卯) 맑음. 아침에 조방장과 장흥 부사 및 진중에 있는 여러 장수들이 모두 와서 보았다. 군공을 조사한 기록을 보니, 거제 현령 안위가 통정이 되고, 그 나머지도 차례로 벼슬을 제수 받았으며, 내게는 상으로 은자 20냥을 보내왔다. 명나라 장수 양경리가 붉은 비단 한 필을 보내면서 말하기를, "배에 괘홍(掛紅:승전을 치하하는 의식) 의 예식을 행하고 싶으나 멀어서 가지 못한다." 했다.
영의정의 답장도 왔다.
• 18일(乙巳) 맑고 따뜻하여 봄날과 같다. 윤영현이 보러 왔고 정한기도 왔다.
• 20일(丁未) 맑음. 송응기 등이 산역군을 데리고 해남 소나무 있는 곳으로 갔다. 이날 밤 순생이 와서 잤다.
• 22일(己酉) 흐리다 맑다 함. 저녁에 김애가 아산에서 돌아왔다. 그는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온 사람으로서, 이달 10일에 아산 집에 들렀다가 편지를 가지고 온 것이다. 밤에 비와 눈이 내리고 큰바람이 불었다. 장흥에 있던 적은 20일에 도망갔다는 보고가 왔다.
• 23일(庚戌) 바람이 크게 불고 눈이 많이 내렸다. 이날 승첩한 장계를 썼다. 저녁에 얼음이 얼었다고 한다. 아산 집에 편지를 쓰자니 죽은 아들이 생각나서 눈물을 거둘 수가 없다.
• 28일(을묘) 장계를 봉했다. 무안에 사는 진사 김덕수가 군량 벼 15석을 가져다가 바쳤다.
• 29일(丙辰) 맑음. 마유격의 차관 왕재가 명나라 군사가 수로로 내려온다고 말한다. 전희광과 정황수가 오고 무안 현감도 왔다.
12월
• 1일(丁巳) 맑고 따뜻하다. 아침에 경상 수사 이순신이 진에 왔으나 나는 배가 아파서 늦게야 그와 함께 이야기하면서 종일 대책을 의논했다.
• 2일(戊午) 맑음. 날씨가 매우 따뜻하다. 영암 향병장 유장춘이 적을 토벌한 사연을 보고하지 않았으므로 곤장 50대를 때렸다. 윤홍산, 김종려, 백진남, 정수 등이 보러 왔다.
• 4일(庚申) 맑고 몹시 추웠다. 늦게 김윤명에게 곤장 40대를 쳤다. 장흥 교생 기업이 군량을 훔쳐 실은 죄로 곤장을 쳤다. 거제 밑인 금갑도, 천성이 타작을 끝내고 돌아왔다. 무안 및 전희광도 돌아왔다.
• 5일(辛酉) 맑음. 아침에 군공을 세운 여러 장수들에게 상품과 직첩을 나누어 주었다. 김돌손이 봉학을 데리고 함평 땅으로 갔다. 보자기 수색의 책임을 맡은 정응남이 점세를 데리고 새로 만드는 배를 검사하기 위해서 진도로 가려고 함께 떠났다. 해남의 독동을 처형했다. 전 익산 군수 고종후가 왔고, 김억창이 오고, 광주 박자가 오고, 무안 나덕명도 왔다. 도원수의 군관이 유지를 가지고 왔는데, "어제 선전관 편에 들으니 통제서 이순신이 아직도 전도로 방편을 좇지 않아 여러 장수들이 민망히 여긴다 하니, 사정이야 비록 간절하지만 국가의 일이 바야흐로 바쁘고, 또 옛 사람의 말에도 전쟁에 나가서 용맹이 없으면 효자가 아니라고 했고, 또 전쟁에 나가서 용맹스럽다는 것은 소찬을 먹어 기력을 피곤해 가지고서는 안 되는 일이다. 예기에도 경과 권이 있다고 해서 꼭 원칙대로만 지킬 수는 없는 것이니, 경은 내 뜻을 깊이 생각하여 소찬 먹는 일을 그치고 권도를 좇도록 하라." 하였다. 또 임금의 분부로 고기음식을 가지고 왔으니 더욱 비통한 일이다. 해남의 죄인들을 함평이 자세히 심문했다.
• 10일(丙寅) 맑음. 해, 열과 진원이 윤간, 이언량과 함께 들어왔다. 배 만드는 곳에 나가 앉았었다.
• 11일(丁卯) 맑음. 경상 수사 이순신 및 조방장 배흥립이 보러왔고, 우수사 이 시언도 왔다.
• 18일(甲戌) 눈.새벽에 해는 어제 마신 술이 채 깨기도 전에 배를 타고 떠났다. 심회가 편치 못하다.
• 21일(丁丑) 눈. 아침에 홍산 윤영현이 목포에서 보러 왔고, 늦게 배 조방장 및 경상 수사가 보러 왔다가 술이 취해서 돌아갔다.
• 22일(戊寅) 비와 눈이 섞여 내렸다. 함평 현감 손경지가 들어왔다.
• 23일(己卯) 눈이 세 치나 쌓였다. 순찰사 황신이 진에 온다는 기별이 먼저 왔다.
• 24일(庚辰) 눈이 오다 혹 개기도 했다. 아침에 이종호를 순찰사에게 보내서 문안했다. 이날 밤에 나덕명이 와서 이야기하는데, 자기가 머무르고 있는 것을 싫어하는 줄을 모르니 한심스럽다. 밤 10시경에 집에 편지를 썼다.
• 25일(辛巳) 눈. 아침에 열이 돌아갔는데 이는 그 어머니 병 때문이다. 늦게 경상 수사와 배 조방장이 와서 보았다. 오후 6시경에 순찰사가 진중에 와서 함께 군사에 관한 것을 상의했다. 연해 19고을은 수군에 소속시키기로 했다. 저녁에 방으로 들어가서 조용히 이야기했다.
• 26일(壬午) 눈. 방백과 방에 앉아 군사에 대한 방책을 조용히 이야기했다. 늦게 경상 수사와 배 조방장이 보러 왔다.
• 28일(甲申) 맑음. 경상 수사와 배 조방장이 보러 왔다. 비로소 들으니 경상 수사가 가지고 온 물건이...(이 아래는 원문을 알 수 없음.)
• 29일(乙酉) 맑음. 영암 좌수는 문초해서 놓아주었다. 오후 8시쯤 다섯 사람이 선두에 왔다고 하기에 시골종을 보냈는데...(이 아래는 원문을 알 수 없음.)
• 30일(丙戌) 입춘. 눈보라가 어지럽고 몹시 추웠다. 배 조방장이 와서 보았다. 여러 장수들도 모두 와 보았는데, 평산 만호와 영등만이 오지 않았다. 부찰사의 군관이 편지를 가지고 왔다. 이 밤은 1년이 끝나는 밤이라, 비통한 마음 더욱 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