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른바 政權을 잡는 것을 '勢道' 라고 한다.반면에 '世道' 는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길을 의미한다.
그래서 위대한 통치자나 학자는 '世道' 를 스스로 감당하면서 한시대의 국가와 사회를 책임지고자 했다.
이와는 달리 '勢道' 는 신하가 강력한 권력을 바탕으로 國事를 좌지우지 하는 정치형태를 말한다.한번 왕
명으로 勢道를 받으면,그사람이 맡고 있는 벼슬의 高下에 관계없이 정승이하 모든 관료들이 '勢道家' 의
명령을 따라야 했다.옛날 이런 세도가(핵관)는 막강한 私兵군단을 가지고 있었기에 반기를 들기도 어려
웠다.그리고 국가의 모든 기밀과 보고 또한,세도가와 먼저 의논한 다음에 왕에게 알려 결정했다.따라서
3정승 6판서 이하 모든 관료들은 자리만 채우고 있을 뿐,허수아비나 인형과 다름 없었다.이런 행태의 세
도(독재)정치가 21세기 한국에서도 핵관들에 의해 자행되고 있다.소통이 사라진지 오래 되었고 약속하
고 언제 그랬냐는 안면몰수의 몰상식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이들은 나라 운영에 자신이 없고 미국과 일
본만 쳐다보고 있다.한국의 전시작전통제권은 미국이 아닌 구체적으로 무기장사들이 가지고 있다.세상
을 휘졌고 있는 이 군산복합체들은 지구촌 어디든 분단과 분쟁이 많을수록 돈벌이가 된다.
2, 민주사회에서 왕(대통령)과 정치 관료(핵관)들은 국민들의 신하적 위치에 있다.즉 심부름 꾼이다.그들
은 이점을 망각하고 자기들 맘대로 하고자 한다.우여곡절 끝에 겨우 정권(세도)을 차지한 세력임에도 성
실성을 말하기 보다 무지와 무능의 자리를 펴고 몰염치,몰상식의 길로 행진을 하고 있다.즉 본인들 입으
로 분명히 한 약속도 신속히 버리고 가능한 돈과 부자들을 가까히 하면서 약육강식,무한경쟁,민영화에
열정적이다.반면에 약자인 국민을 멀리하는 기조를 세우고 있다.그러고도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며 법과
상식,공정을 말하고 있으니 날아가는 새가 다 웃을 지경에 왔다.그들이 생각하는 민생은 일반 시민들이
생각하는 민생과 달리 부자들의 민생을 말하는 것이다.21세기 시민들은 이제 기득층들에 의해 뿌려진
왜곡된 진실,조작하는 정치,조작된 역사,만들어진 神.만들어진 전통 들도 열심히 찾아 공부를 해야 한다.
검찰독재로 칭해지는 이들은 수시로 쓰레기 언론들과 연대해 국민들을 속이고 나라를 犬판으로 만들고
있다.아마 이들의 이런 행보는 신냉전의 주도 세력인 군산복합체들의 지시를 따르는 것일 것이다.
3, 물론 한국의 국방안보권을 미국이 움켜잡고 있고,미국 군사보호령 속의 국가 지도자나 정치인들이 할
일이 란 것에 한계가 있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그래서 내부총질과 토굴만 판다.돈줄은 월가
와 금융자본가들이 좌지우지하고 세계화와 지구촌,시장제일주의와 연계된 신냉전의 신나는 돈벌이는 모
두가 메이저 부자들을 향한 길이자 주장이다.이럴때 시민들이자 국민들은 우크라이나에서 보듯이 난민이
되거나 죽어나가는 것이다.이제 신냉전의 진영논리에 빠져 국제적으로 영향력도 없고 미국의 分店 형태의
군사보호령 한국이 할일은 과연 있을까? 태생적으로 반도에 현재와 같은 권력구조를 만들어준 세력이나
만든 세력은 과연 누구인가?분명 한국인의 재력과 머리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현 한국에서 이런 구조적
문제를 적절히 이용해 좌파(빨갱이)를 팔면서 국민들을 협박하는 이들은 崇米와 親日을 모태로 삼는 기득
층들이다.이들은 지구촌 로마 황제인 미국에 한없이 조아리고,동아시아 지점인 일본에 연일 굽실거리고
있다.이유는 친일과 숭미의 尹정권이 내국인 들에게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4, 비젼도 제시하지 못하면서도 10.29 참사에 희생된 자국민의 국민들에겐 사과도 하지 않고 머리도 조아
리지 않는다.이는 국민을 가볍고 하찮게 여긴다는 뜻이다.국민을 존중할 줄 모른다.이제 뜻도 모르면서 부
자들을 위해 외치는 속보이는 自由는 멈췄으면 한다.이쯤에서 그들이 알아야 할것은 진시황의 秦나라가
생각보다 빠르게 조락한 것이 상앙과 李斯와 같은 융통성 없는 '法家' 들이 너무 설쳤기 때문이란 것이다.
이와 비슷한 자들이 자본의 앞잡이자 인형들이 되어 외세 의존파 자격으로 한국 권력의 주체가 되어 엉터리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이다.즉 이들 정치의 초점은 일반 국민들에게 있지 않고 부자들이나 재벌에 쏠려 있다는
것을 스스로 밝히고 있는데도 이를 눈치채지 못하는 시민들이 있다.자본주의의 神은 돈이지,부처나 예수가
아니라는 것도 핵관들과 동조한 주류 종교인들이 잘 말해주고 있다.여기에 '核官' 이라는 세도가들이 등장해
3355 뭉쳐 자기들 맘대로 전횡을 하면서 이미 세워둔 법과 원칙까지 없에는 행태도 서슴치 않고 있다.핵관
으로 불리는 자들은 우리가 다아는 조력자들과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나라를 카오스로 몰고 가면서,역사의
안동 김씨 세도 60년을 꿈꾸고 있다.
5, 민주주의 사회의 정치란 현재의 한국처럼 그 구성원들의 수준과 입맛에 따르는 것이다.선거전에는 마치
국민들의 입에 넣어줄것 같이 말하던 수많은 정책들은 되고나서는 즉각 폐기되거나 축소되고 있다.즉 정치가
뭔지를 모르고 얼떨결에 권력을 잡아서 인지 뭘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른다.또 新冷戰의 하부 구조의
나라여서 그런지 국민에 의해 뽑힌 정치지도자가 나라의 비젼 제시도 못한체 무책임과 무대뽀로 일관하면서
전정권의 업적 지우기와 티끌 꺼내기에 바뿌다.더하여 자신들의 무지와 무능을 숨기기 위해 오직 법과 원칙
으로만 재단하고 포장하니 정국의 경색은 풀리지 않고 국민 갈라 치기만 열심인 것이다.여기에 前 정권 흠집
내기와 야권지도자 罪 씌우기도 계속하는 것이다.과거 세도정치의 세도가를 현 한국에서는 '核官(핵관)' 으로
부른다,이들은 선배들의 탁월한 민주주의 선택과 규정도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바꿔버리는 등 여러 분야에
서 '勢道' 를 부리고 있다.그래서 정치가 표류하는 것이다.한국은 지금을 검찰독재시대라고 말한다.
이러한 세도정치의 시작을 역사에서 찾아보면 이씨 봉건왕조 시대인 정조 년간 홍국영이 全權을 휘두르면서
시작되었다.정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 홍국영의 보호를 받아 여러번의 위기(외가의 홍인한도 정조를 모해)
를 모면할수 있었다.그래서 즉위하자 마자 전권을 홍국영에 맡겼던 것이다.그러나 실질적 세도정치는 19세
기가 시작되는 순조시대(1800~1834)의 안동김씨로 시작된다고 할수가 있다.
6, 순조시대의 대표적인 세도가는 반남 박씨(순조의 모친 수빈박씨) 박종경,안동 김씨 김조순,풍양 조씨(순조
후비 신정왕후)조만영 이었다.우리 속담에 '10년가는 세도는 없다' 는 말이 있음에도,안동김씨 일문은 19세기
초반부터 60년 동안 세도를 부렸다.안동김씨 60년 세도의 기반은 김상용,김상헌 형제의 충절로 부터 나왔다
고 하나 반드시 그런것 만은 아니다.시류를 잘 이용한 점도 크다.이들은 병자호란(1636)때 척화파로 활동했
지만,김상용은 강화에서 죽었고 김상헌은 청으로 잡혀가 구금생활을 했다.이두사람의 후광으로 김상헌의 손
자인 김수홍과 김수향 등은 영의정에 올랐다.아들 대에 이르러 김창협이 학문으로 대성하고 그 동생 김창흡
역시 명망있는 학자가 되어,이른바 6창(昌集,昌協,昌翕,昌業,昌緝,昌立) 시대를 열었다.청나라의 속국인 상황
에 청나라를 배척했던 반청 척화파들이 대대로 조정의 실세에 올랐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아무튼 이때부터 안동김씨는 '老論' 의 중심(기득권)세력이 되었다.순조초 조정은 여전히 노론의 벽파와 시파
의 갈등이 지속되었으나 순조 4년(1804)에 경주김씨의 대비인 정순왕후가 죽자 시파(김조순의 안동김씨 계열)
가 다시 정치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여기에 김조순의 딸이 순조비가 되어 정권은 경주김씨에서 안동김씨로
넘어갔다.왕의 장인인 김조순이 국왕대신 권력을 휘두르며 헌종,철종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친 60년 동안 왕
실 혼인의 기반을 확고하게 마련했다.따라서 왕실의 전주 이씨들은 힘이 없었다.
7, 그가 죽고 아들 김유근,김좌근,손자 김병기가 있었고,김조순의 7촌 조카인 김문근은 철종의 장인이 되었다.
세도정치의 핵심 인물은 '김조순,김좌근,김문근,김병기' 로 이어졌다.60년 동안 항열로 '淳,根,炳' 자 돌림들이
벼슬을 독차지 했다.안동김씨 세도정권이 오래 지속될수 있었던 이유는 충절과 학문의 숭상도 있었지만 김상
용과 김상헌이 鄭惟吉의 외손자 였기 때문이기도 했다.안동김씨와 동래정씨는 정치적으로 밀월관계를 유지했
다.동래 정씨는 정승을 많이 낸 집안으로 '鄭太和,鄭萬和,鄭致和' 등이 이에 속한다.송시열도 이런 정씨 집안을
'큰기러기와 고니' 라고 하고 자신 집안을 지렁이에 비유할 정도였다.
헌종이 죽고(1834~1849) 후사를 세울때 '鄭元容' 이 안동김씨의 부탁으로 강화에 가서 강화도령 '元範' 을 데려
와 왕위(철종)에 등극시키는데 많은 힘을 더했다.정원용은 정유길의 후손으로 멀리보면 안동 김씨의 외갓집이
되는 것이다.정원용은 순조 초 과거에 급제한후 일찌기 김조순이 발탁해 영의정의 벼슬에 오른바 있다.90세까
지 장수를 누린 그는 3정승을 거친 노회한 정치가로 조정과 재야에 명망이 높았다.철종의 왕비로 안동 김씨의
김문근 딸로 결정되자 영은부원근이 된 김문근이 마침내 모든 정사를 좌지우지 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