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4장2~6절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5.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로마서 14:2–6 강해 임명락 목사
대상: 북한지하교회 사명자
주제: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와 상호 수용
— 양심의 차이와 주의 주권
본문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
(6절 후반은 일반적으로 “주를 위하여 먹으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로 이어진다.)
1. 문맥과 상황적 배경
로마서 12–15장은 복음의 윤리적 함의를 다룬다. 14장은 특별히 ‘강한 자’(πίστις가 강한 자, 음식·절기에 자유로운 자)와 ‘연약한 자’(유대적 음식법·특정 날 준수를 양심적으로 지키는 자) 사이의 갈등을 다룬다. 바울은 이 문제를 ‘adiaphora’(본질적으로 구원과 무관한 사항)로 취급하면서도, 그 차이를 함부로 판단하거나 경멸하는 것을 엄히 금한다. 이는 단순한 ‘관용’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주권과 하나님의 수용(acceptatio Dei)에 근거한 교회론적·종말론적 문제다.
2. 성경적·석의적 해석
2절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은 율법적 음식 규례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반면 “믿음이 연약한 자”는 그 자유를 아직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자로서, 채소만 먹는 실천을 통해 양심을 지키려 한다. 여기서 ‘연약함’은 도덕적 열등함이 아니라, 복음의 자유를 아직 충분히 내면화하지 못한 상태다. 바울은 이 연약함을 무시하거나 억지로 고치려 하지 않는다.
3절
핵심 명령은 이중적이다.
강한 자는 업신여기지 말라(μὴ ἐξουθενείτω).
연약한 자는 비판하지 말라(μὴ κρινέτω).
근거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ὁ θεὸς γὰρ αὐτὸν προσελάβετο). 하나님의 수용이 인간의 판단보다 앞선다. 이 수용은 로마서 15:7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신 것 같이 서로 받아들이라”로 반복되며, 교회 일치의 토대가 된다.
4절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는 신학적 질문이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종(δοῦλος)이다. 그의 서고 넘어짐은 주인인 주님께 속한다.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는 하나님의 보존하시는 능력(conservatio)을 강조한다. 인간의 비판이 형제의 구원 지위를 좌우할 수 없다.
5–6절
날(ἡμέρα)에 대한 태도 차이도 같은 원리로 처리된다.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ἕκαστος ἐν τῷ ἰδίῳ νοῒ πληροφορείσθω).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외적 동일성이 아니라, 내적 확신과 동기(주를 위하여, τῷ κυρίῳ)다. 6절은 행동의 방향성을 ‘주께 대한 지향성’으로 규정한다. 감사(εὐχαριστεῖν)가 그 지향성의 표지다.
3. 신학적 함의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양심
음식과 날은 본질적으로 중립적이다(고전 8:8; 골 2:16–17). 그러나 양심이 연약한 자에게는 그것이 더 이상 중립이 아니다. 바울은 자유를 절대화하지 않고, 사랑으로 제한한다(14:15, 21). 자유는 권리가 아니라 섬김의 기회다.
판단의 금지와 주의 주권
비판(κρίνω)은 종말론적 심판의 권한을 인간에게 이전시키는 행위다. 오직 주님만이 자신의 종을 세우시고 심판하신다. 이는 교회의 치리와 교리 수호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adiaphora 영역에서의 판단 금지를 명확히 한다.
교회론적 통일성
하나님의 수용(προσλαμβάνομαι)이 교회의 기초다. 차이는 분열의 원인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서로 다른 양심을 존중하면서 하나를 이루는 자리가 된다. 이는 훗날 아우구스티누스의 “본질에서는 일치, 비본질에서는 자유, 모든 것에서 사랑” 원칙의 신약적 뿌리다.
종말론적 전망
각자가 “주의 앞에 서리라”(14:10)는 선언은 현재의 상호 비판을 상대화한다. 우리의 판단은 잠정적이며, 최종 심판은 주님께 속한다.
4. 영적 적용
강한 자의 유혹: 자유를 자랑하며 연약한 자를 경멸하는 영적 교만.
연약한 자의 유혹: 자신의 실천을 절대 기준으로 삼아 다른 사람을 율법적으로 정죄하는 영적 율법주의.
양쪽 모두 “주를 위하여”라는 동기에서 벗어나면 자기 의를 세운다.
영적 성숙은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품고도 형제를 주의 것으로 인정하는 사랑에 있다.
5. 철학적 성찰
이 본문은 단순한 상대주의가 아니다. 바울은 “모든 것이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께 대한 지향성’이라는 절대적 기준 아래서 상대적 실천의 공간을 인정한다.
현대 철학적 언어로 말하면, 이것은 ‘후기자유주의적 관용’이 아니라, 신학적 실재론에 근거한 ‘차이의 환대’다. 인간의 양심은 절대적 자율이 아니라, 주님의 주권 아래 있는 상대적 자율이다. 따라서 타자의 양심을 존중하는 것은 상대주의의 승리가 아니라,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행위다.
6. 신학자·목회자를 위한 적용 과제
교회 안에서 ‘강한 자’와 ‘연약한 자’를 구분하는 기준이 복음인가, 아니면 특정 전통·문화·취향인가를 끊임없이 성찰하라.
교리적 본질(복음,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유일성 등)과 adiaphora를 구별하는 신학적 분별력을 기르라.
설교와 목회에서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다”는 선언을 중심으로, 상호 수용의 실천을 가르치라.
자신의 신학적 입장(개혁파, 복음주의, 오순절 등)이 다른 전통을 업신여기거나 정죄하는 도구가 되지 않도록 경계하라.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사랑의 제한을 가르치는 균형을 유지하라.
결론
로마서 14:2–6은 교회가 차이를 다루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정의한다. 우리는 서로의 하인이 아니라, 같은 주님의 종이다. 우리의 판단보다 하나님의 수용이, 우리의 확신보다 주의 주권이 앞선다. 그러므로 강한 자는 겸손히 업신여김을 버리고, 연약한 자는 비판을 버리며, 양쪽 모두 “주를 위하여” 감사하는 삶으로 나아가라. 이것이 복음이 교회 안에 이루는 화평이다.
(참고할 주요 문헌: 칼빈 《로마서 주석》, 바르트 《로마서》, 던(J.D.G. Dunn) 《로마서》, 라이트(N.T. Wright) 《로마서》,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의 양심·자유 관련 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