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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가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아모스박목사
(우)32414 충남 예산군 삽교읍 두리학교길19
기독교대한감리회 삽교교회 원로목사 박 한 응(朴 漢 應)
홈페이지 : http://cafe.daum.net/43ch
E-Mail : park43k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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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4.9. 주일오후예배 설교문
【부 활 주 일】
본 문 : 누가복음 24 : 30 - 35
제 목 : 엠마오 길에서 돌아서라
찬 송 : 150, 148, 525, 527.
할렐루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할렐루야!!
영광영광 할렐루야 영광영광 할렐루야!
영광영광 할렐루야 다 찬양하리라
오늘 만왕의 왕이신 우리 주님께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날을 맞이하여 이 시간 은혜를 사모하여 이 자리에 나오신 성도 여러분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충만하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아 멘!>
오늘 본문 말씀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오후에 글로바라고 하는 사람과 또 한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다가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 마음이 뜨거워져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장면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도 여러분들이 해마다 들었기에 벌써 오늘 본문하고 제목만 보아도 무슨 설교 할 것 대강은 짐작을 할 것입니다.
목사들에게 있어서 설교는 참으로 어렵고도 어려운 것입니다. 그 중에 절기 설교가 가장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1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데 해마다 절기에 맞추어서 설교를 한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교회 다니는 성도들 부활절을 적게는 몇 번에서 많게는 수십 번씩은 다 지냈습니다. 그래서 성경 본문 어디 하면 오늘은 무슨 설교 할 것이다 하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척! 하면 연시 떨어지는 소리, 툭! 하면 땡감 떨어지는 소리, 다 압니다.
다 같이 한번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엠마오 길에서 돌아서라』 오늘의 설교 제목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수차례에 걸쳐 내가 고난 받은 후에 삼일 만에 부활하리라고 말씀을 하였지만 제자들은 이 말씀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지나고 첫날 아침에 난데없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하고 그들은 살 길을 찾아 엠마오로 무거운 발걸음으로 옮겨 걸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는 도중에 주님께서 동행을 하시면서 함께 대화를 하여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주는 것을 받았을 때에야 눈이 밝아져 주님을 깨닫게 되었고 이때는 주님은 홀연히 사라진 다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아까 주님이 동행하시면서 이사야의 글을 풀어 들려주실 때에 마음이 뜨거워졌던 것을 기억하고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24:32) 고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할렐루야!!
1.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은 과연 누구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의 주인공인 두 사람의 이름이 성경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4복음서 중에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만 기록이 되어 있는데 마가복음서 에는 두 사람이라고만 기록이 되어 있고 누가복음에는 24:18절 말씀에 두 사람 중 하나가 글로바라고 기록되어 있고 다른 한사람의 이름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은 채 미궁으로 빠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많은 성서학자들이 그 또 한사람은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닌 본 누가 복음서를 기록한 누가라고 합니다. 누가가 예수님이 부활승천 하신 후 약 30여 년이 지나서 누가 복음서를 기록할 때 이 부분에서 그때 그 사람이 바로 자기였다는 것을 밝힐 수가 없어서 익명으로 처리했다고 합니다.
누가는 복음서를 기록할 때 자신의 믿음 없던 그 시절을 돌이켜 보면서 차마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 그렇게도 기사와 이적을 베풀어 직접 보여주시고 들려주시기를 수없이 하였는데도 그렇게도 믿지를 못하느냐’ 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들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그 시절에 있었다면 과연 여러분들은 제자들보다 더 믿음이 좋아서 예수님을 배신도 하지 않고, 오른편 왼편에 앉혀 달라고도 하지 않고, 베드로처럼 부인도 하지 않고, 도마처럼 만져보아야 믿겠다고 하지도 않고, 가룟유다처럼 예수님을 팔지도 않았을 것 같습니까?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기를
(마23:29-31)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오늘의 나와 여러분들은 주님을 믿는다고 입으로 수없이 고백을 하면서도 탐욕의 엠마오로 가고, 물질의 엠마오로 가고, 향락의 엠마오로 갔던 적이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돈 번 다음에 신앙생활 하겠다고 여리고로 간적은 없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다시스로 간적은 없었습니까? 쉬었다가 교회 다니겠다고 한 적은 없습니까?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은 바로 오늘의 나와 여러분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믿으시면 다 같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 멘!>
다 같이 찬양을 하겠습니다.
<G.S> 눈물의 참회록
1. 지금껏 내가 한일이 주를 위한 것이었는지
지나간 세월 돌이켜 주님 앞에 아룁니다.
이 한 몸 주를 위하여 목숨 버린다 했으나
주의 영광 뒤로하고 나의자랑 앞세웠으니
내가 가는 이 길이 주를 위한 것보다
예수이름을 파는 가롯 유다와 같습니다.
2. 엠마오 길은 누구나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에 대하여 물으실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고백을 하고 얼마나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축복을 받았습니까? 그런데 바로 뒤이어 주님이 십자가에 죽는다고 할 때 “주여! 그리하지 마소서 이 일이 절대로 주님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3) 라고 할 때 주님은 단호하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라고 책망을 하였습니다.
마지막 만찬 때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오늘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고 하셨을 때도 베드로는 그렇지 않겠다고 장담했습니다.
“네가 오늘밤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고 할 때에도 “주여! 죽는데 까지 라도 따라가겠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는 절대로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가룟유다처럼 주님을 팔지도 않겠습니다. 아간처럼 도둑질도 하지 않겠습니다. 아나니아처럼 거짓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장담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오늘의 우리들도 피조물이기 때문에 가룟 유다처럼 베드로처럼 죄지을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다만 깨어서 기도하고 준비하며 사탄 마귀를 대적하면 시험을 당할 때 이길 수가 있습니다.
새가 내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새가 내 머리에 앉거나 어깨에 앉는 것은 막을 수는 있습니다. 더 더욱이 새가 내 머리에 둥지를 트는 것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3. 엠마오 길에서 돌아오는 사람만이 변화되어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엠마오 길로는 누구라도 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엠마오로 간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돌아서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던 날 글로바와 누가처럼 엠마오로도 갈 수도 있고,
돈 벌러 가세! 돈 벌러 가세! 하면서 주일날도 장마당으로 일터로 갈 수도 있습니다.
나오미처럼 잘살아 보세, 잘살아 보세, 하면서 모압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요나처럼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다시스로 갈 수도 있고,
베드로가 디베랴 바다로 고기 잡으러 간 것처럼 옛 생활로 다시 돌아 갈 수도 있습니다. 탕자처럼 세상 향락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얼마든지 이런 가능성을 우리는 가지고 살아가고 있고 또 알게 모르게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백하기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19,24) 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돌아서느냐? 돌아서지 못하느냐? 가 문제입니다.
회개를 하느냐 못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베드로나 가룟 유다는 모두 훌륭한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둘 다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회개하였고 유다는 회개치 못하였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은 가다가 주님을 만나고 마음이 뜨거워져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와 저들이 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라고 부활 예수를 증거 했습니다. 할렐루야!!
돌아서야 합니다. 바로 이 순간이 돌아서야 할 Tuning Point입니다.
돌아서는 순간이 언제입니까? 예수님 만나는 순간이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성령의 체험으로 거듭나는 순간입니다. <아 멘! 할렐루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또 성령이 내게 강림하시는 것을 체험하는 순간입니다.
강력한 믿음의 충격을 받는 순간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진정한 예수를 만나지 못하고 성령체험을 하지 못하고 교회 다니는 사람 많이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도 예수님을 전혀 모르던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건성으로 따라다녔습니다. 오늘날도 건성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 많이 있습니다. (오늘 저녁 여기 온 사람만 빼고)
오늘 이 시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말세에 남종과 여종에게 물 붓듯이 부어 주시마고 약속하신 성령을 충만히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이 체험이 없이 신앙생활 하면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모릅니다.
예수님 만나고 성령체험 하면 인생이 바꿔집니다.
이와 같이 성령 받고 하나님을 만난 다음 그의 인생이 바꿔져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일생을 보낸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모세는 나이 80에 호렙산 기슭에서 양몰이 하다가 하나님만나고 하나님의 일군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는 영도자로 쓰임 받았습니다.
야곱을 보세요 야곱은 루스광야에서 하나님 만나기전까지는 거짓말이나 하고 속이기나 하던 사람이었는데 그가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인생이 바꿔져서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세요 그는 자기 말대로 핍박자요 폭행자요 살인자였으나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 만나고 변화되어 일생을 주님 복음 전하다가 마쳤습니다.
요한 웨슬리도 그랬습니다. 올더스케잍에서 성령 체험을 하고 그는 새롭게 거듭나 새로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4. 어떤 사람이 엠마오 길에서 돌아서는 사람입니까?
(1) 지금까지의 생각과 믿음에서 바꿔져야 합니다.
21세기 문명사적 대 전환점에서 세계는 정치, 교육, 경제,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모두 바꿔지고 있습니다. 바꿔지는 간격의 차이가 점점 좁아지고 있습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꿔지는 것이 300년 걸렸으면 산업사회에서 정보화 산업으로 바꿔지는 것이 30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자고 나면 바꿔집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바꿔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믿음이 바꿔지지 않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바꿔지지 않습니다. 10년 전 20년 전 가지고 있던 열심 없는 믿음 아직까지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고, 10년 전 20년 전 감사헌금 10,000원 하던 것 지금까지 만원입니다. 10년 전 20년 전 주일헌금 1,000원 하던 것 지금까지 천원입니다.
우리의 문화생활은 그때그때 바뀌어 왔습니다. 라디오 듣다가 텔레비죤 나오니까 모두들 서둘러 텔레비죤 샀습니다. 그러다가 칼라TV가 나오니까 흑백TV 버리고 칼라로 바꿨습니다. 14인치만 해도 좋았는데 언젠 가부터 대형화 바람이 불어서 이제는 집집마다 심방가보면 모두 대형TV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디지털 TV로 모두 바꿔졌습니다. 냉장고도 대형으로 바꾸고, 세탁기도 대형으로 바꾸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동네도 에어컨 안쓰는 집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의 생활은 남들보다 뒤떨어질세라 서둘러 바꾸는데 어찌하여 우리의 신앙과 믿음은 10년 20년 전 아니 30년 전 믿음 그대로 가지고 있단 말입니까?
이제는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관념적으로, 추상적으로, 외식과 형식적으로, 해 오는 마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처럼 해 오던 믿음에서 바꿔져야 합니다.
(딤후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돌아서야 합니다.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믿으시면 다 같이 아멘 하세요<아 멘!>
말로만 주여 주여 하는 데서 이제는 행함의 믿음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마7:22-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섯을 때 ‘예수님 내가 교회에서 집사 했어요. 권사 했어요. 장로 했어요. 목사 했어요’ 할 때 주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도무지 모르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라고 하신다면 어쩌시렵니까?
(마3:7-9 말씀에) 세례요한은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외쳤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오늘날 교회에는 아직도 ‘감사’ 라는 말만 나오면 주눅이 들고 자라목이 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아직도 ‘십일조’ 말만 나오면 알레르기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돌이켜야 합니다.
<G.S> 오, 예수님 내가옵니다.
오 예수님 내가 옵니다 못 박히신 십자가 앞에
그 큰사랑 눈물에 겨워 울며 울며 돌아 옵니다
주님 손과 발 못 박혔고 머리엔 가시관 박히셨네
내 모든 죄와 허물 위해 말없이 피흘려 주셨네
오 예수님 나의 손잡고 이제부터 영원까지
내구주가 되옵소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내구주가 되옵소서
(2)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는 사람입니다.
(마16:24)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자기가 저야 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십자가는 고난이요 죽음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나의 형편과 사정이 원활하고 여건이나 조건이 좋을 때 지는 것이 아닙니다. 형편이 어렵고 환경과 조건이 어려울 때 맡겨진 사명 감당하는 사람이 바로 십자가 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어려운 일을 당하고 아니면 큰일을 할 때 한 모퉁이를 담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맡겨진 직분이나 사명이 무겁다고 십자가를 벗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가 무겁다고 벗으려고 하고, 힘들다고 벗으려고 하고, 귀찮다고 벗으려고 합니다. 십자가는 영광이 아닙니다. 고난입니다. 쓴잔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잘 감당하였을 때 하나님은 은혜와 축복으로 갚아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마가복음 15:21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고 골고다 올라가실 때에 자꾸만 쓰러지고 시간은 지체가 되니까 로마 병정들이 마침 예수 옆에 힘깨나 쓸 만한 사람을 붙들어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하였습니다. 그가 바로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가 되는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재수 없는 사람입니까? 그러나 그가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고 나니까 그의 가정이 구원을 받고 아들 루포는 바울의 사랑 받는(롬16:13) 신자가 되었고 BC313년 기독교를 인정하고 국교로 선포한 콘스탄틴 황제가 바로 구레네 시몬의 12대 손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십자가는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행함의 열매입니다.
<예> 배추 한포기를 갖다 놓고 ‘주여 이 배추가 김치가 될 줄로 믿습니다’라고 기도해도 김치가 되지 않습니다. 쌀을 퍼 놓고 ‘주여! 이 쌀이 밥이 될 줄로 믿습니다’라고 기도해도 밥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만용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행하면서 믿음으로 기도할 때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교인들 기도할 때 ‘주님, 우리교회를 부흥시켜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부흥을 누가 시켜 줍니까? 자기가 전도해서 부흥시켜야지요.
(3) 강퍅한 자기의 고집을 꺾고 겸손해 저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이라고 하는 것 다른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고집으로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합니까?
애굽의 바로 왕은 마음이 강퍅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다가 열 가지 재앙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하라! 했으면 하면 되지 무슨 고집으로 불순종합니까?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이제는 돌아서야 합니다. 바로 이 순간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엠마오로 달려가고, 여리고로 달려가고, 다시스로도 달려가고, 모압으로도 달려가고, 애굽으로도 달려갔던, 우리의 발걸음을 이제는 돌이켜 주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지금이 바로 주님께로 돌아올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깨어 근신하여 기도할 때입니다.
돌아와 회개하면 우리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만신창이가 된 나와 여러분도 받아 주십니다. 이제는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추상적이며 관념적으로 믿어오던 신앙에서 돌이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믿음으로 변화되어 이 마지막 말세에 남종과 여종에게 모든 육체에게 충만 충만 부어 주시는 은혜와 성령을 넘치도록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아 멘!>
알리는 말씀을 전합니다.
할렐루야!!
부족한 저의 설교를 사랑해 주시는 전국, 세계의 모든 동역자님들과 주님의 피로 구원받은 성도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설교문을 작성함에 있어서 외람된 말씀이오나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맞추려고도 애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주 수요일 오후에는 나의 카페를 비롯하여 몇몇 기독교 사이트에 업로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황당한 일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나의 설교는 누구나 사용하실 수 있고 인용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설교를 자신의 사이트나 다른 곳에 자신의 설교인양 전제를 하여서 이것을 보신 분들이 내가 그것을 보고 도용을 하였다고 오히려 나를 책망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로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 안되겠습니다. 나의 부족한 설교를 인용도 하시고 전문 사용을 하셔도 좋으나 다른 곳에 전제를 하는 것은 삼가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만약 앞으로 이와 같은 사례가 또 다시 발생할 때에는 어쩔 수 없이 법적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항상 부족한 저를 사랑하는 동역자님들과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임마누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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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가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아모스박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