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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눈을 뜨자>
I. 영과 육으로 보는 메시아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요1:29~34)
오래전에 TV프로그램 중에 특이한 방송을 본적이 있습니다. 각 지역에서 특별한 명인들이 나와서 장기 자랑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한 사람이 나왔는데 병아리 감별사였습니다. 이 사람은 아주 특별한 눈을 갖고 있었습니다. 병아리들이 다 고만고만하고 다 똑같아 보여서 보통 감별사들은 암수를 구별할 때 생식기를 보고서 암수를 감별하지만, 이 사람은 생식기를 통해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보면 암놈인지 수놈인지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신기해하고 주체했던 방송은 그 반응에 맞춰 50마리의 병아리를 암놈과 수놈으로 구별해 보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자리에서 암놈과 수놈을 보자마자 바로 구별해 버리더라고요. 그래서 확인했더니 정확히 암놈과 수놈이 나눠졌습니다.
또 특별한 사람이 나왔습니다. 가공되지 않는 보석이 있는데, 어디에서 온 원석인지 구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원석을 볼 때마다 이것은 어느 나라에서 왔고 저것은 이 나라에서 왔습니다. 이렇게 정확히 구별을 합니다. 우리가 육신의 눈도 있지만, 세상의 눈이 열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눈이 열린 사람이 사업을 하게 되면 사업에 성공해 있습니다. 노름에서도 잘하는 사람은 남의 패를 보지 않고도 무엇을 들고 치는지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믿음의 사람은 믿음의 눈이 떠져야 합니다. 신령한 눈이 떠져야 하는데 이것을 ‘영안’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어로 사람의 눈을 ‘이안’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원천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눈이 곧 원천이다’라는 것입니다. 보는 대로 그의 삶이 인생길이 그렇게 된다 해서 이안 곧 이것은 원천이 된다.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이와 같이 말씀하고 계신데 마태복음 6장22절에서부터 23절에 보면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마6:22~23)
눈은 몸의 등불이니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내 눈이 성하면 온몸이 성할 것이고, 그 눈이 나쁘면 온 몸도 나쁠 것이다. 또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구덩이에 빠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남을 가르치고 인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서 육신의 눈을 통하여서만 아니라 예배를 통하여 영적인 눈도 열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려면 복된 눈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영안인데 이것은 ‘예수를 바라보는 눈’ ‘예수를 바로 알 수 있는 눈’입니다. 이것이 복된 눈입니다.
1. 영의 눈으로 본 예수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을 보니까 세례요한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러 오실 때에 어떻게 바라보았습니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사람의 겉모습을 본 것이 아니라 영안으로 바라보니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서 우리 인간을 구속하시고, 죄사함의 은혜를 주시고자 피 흘려 죽으시러 오신 예수시구나!’ 어린양 예수라는 것을 본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살아오면서 죄 안 지은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죄라는 것이 얼굴 닦듯이 닦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심령가운데 더럽고, 어둡고, 추하고, 상처 받은 모든 것들은 오직 예수의 피만이 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잘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세례요한이 무엇을 보았습니까? “그에게 비둘기와 같은 하나님의 성령이 임한 것을 보라” 예수님에게 비둘기와 같은 성령이 임하는 것을 봤습니다. 저도 예배를 드리면서 바라볼 때에 심령이 어두워져 있으면, 하나님이 기뻐 받으셔야 할 예배가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 것을 봅니다. 그럴 때 저는 예수의 피 뿌리는 찬양을 부릅니다. 그렇게 하면 공기 중에 어수선한 것들이 예수의 보혈이 부어지면 영적인 분위기가 싹 잡힙니다. 제가 괜히 보혈찬양을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교회에 와서 예수의 피를 뿌리지 않으면 틀림없이 딴 생각하느라 예배를 온전히 드리지 못하게 되는데 졸리고, 지루하고, 빨리 집에 가고 싶어집니다. 그렇지만 심령 속에 예수의 피가 뿌려지게 되면 말씀을 집중해서 듣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아가려는 영적인 은혜가 부어집니다. 이런 보이지 않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이것은 보혈의 피와 성령께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보라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언 하였느니라’ 오늘 본문을 보면 세례요한이 예수를 볼 때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라고 합니다. 또 32절에 보면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34절에 보면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합니다.
2. 세상의 눈으로 본 예수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잘 따라 다녔습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볼 때에 잘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라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제자가 ‘선지자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또 다른 제자는 ‘선생입니다!’라고 답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다른 제자들과 다르게 내 구주 내 하나님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베드로의 고백을 토대로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교회를 나와도 예수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을 보면 예수님을 다윗과 솔로몬의 나라처럼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부국강병(富國强兵) 한 시대로 회복해주는 메시아로 바라봤습니다.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이 아닌 정치적 메시아로 본 것입니다. 그때 당시 히브리 사람들의 상황은 로마제국에 억압을 당하던 시기입니다. 우리나라가 일제 36년의 억압을 당한 시기가 있었듯이,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포로 생활을 했던 시기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정치적인 왕이 필요했고, 예수님이 정치적인 메시아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런 것은 해결해 주시지 않으면서 이해할 수 없는 말들만 하시므로 십자가에 못을 박아버린 겁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도 자기의 육신의 어려움만 해결하기 위해, 부유해지기 위해 따라다녔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가룟 유다인데 그래서 은 30냥에 예수님을 팔아버리고 목매달아 죽어버리잖아요.
이것이 예수를 잘 알지 못하고 제대로 바라보질 못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기왕에 신앙생활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예수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잘 볼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언제 임하느냐면 우리가 교회에 자꾸 나올 때에 그 심령가운데 마음의 문을 열어주십니다. 에베소서 1장 16절에서부터 19절까지 찾아보시면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1:16~19)
바울이라는 하나님의 귀한 종이 있었는데, 성도들을 향한 바울이 하나님께 구했던 것은 ‘마음의 눈을 밝히사’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안’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눈이에요. 신앙생활을 하면서 영안이 열려야 하고, 믿음의 눈이 떠져야 합니다. 바울이 항상 기도했던 것은 교회 안에 성도들이 들어올 때에 심령에 눈이 잘 열려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가? 이것을 잘 알기를 원했습니다.
3.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가?
주님이 나를 부르셨는데 그냥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어떨 때 부르셨냐면 고린도전서1장 26절에서 28절을 보면
“형제들아 너희의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1:26~28)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것들과 세상의 약한 것들과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셨다는 겁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게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날씬한 사람, 뚱뚱한 사람, 키 큰 사람, 키 작은 사람, 가정환경이 부유한 사람, 엉망인 사람, 등등등 내가 원해서 주어지는 것들이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을 모른다면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에 이런 환경 속에서 ‘이런 상황 이 모양으로 왜 태어난 것일까?’하며 원망과 불평 속에 신세한탄만 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그런 상황 속에서 예수를 만납니다. 그 아픔 속에서 주님을 의지합니다. 그 곤고함 속에서 ‘아~!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기 위해 그런 상황을 만드시고 그런 연약함을 갖게 하셨구나!’라고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사람 잘 생각해 보세요. 내가 잘 나가고, 편하고, 괜찮을 때에 하나님이 부르셨는가? 아니면 없고, 힘들고, 연약할 때에 부르셨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곤고함과 억압과 문제 속에서 부르십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런 상황 속에서 불평과 원망과 죄밖에 안 짓습니다. 우리 집안은 왜 이래? 우리 집이 가난하기 때문에~~, 내 머리가 나쁘기 때문에~~, 항상 불평합니다. 원망과 불평 속에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아~! 하나님께서 나를 자녀 삼기 위해서 부르셨구나!’ 알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는 거예요. 내 마음의 눈을 잘 밝혀 보세요. 이것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리고 성도들 안에서 그 영광의 기업이 풍성함이 무엇인지 자꾸 믿음의 눈이 떠서 봐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꾸 보이게 되면 성도들 안에서 그 영광의 기업이 풍성함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데, 세상의 기업은 시간이 흐르면 다 없어집니다. 서울대의 어느 교수가 조사를 해봤는데, 100년 전에 세워진 기업 중에 살아남은 기업이 무엇이 있는가? 그런데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대 기업들 안 무너지고 잘 버틸 것 같았지만, 현대그룹 넘어졌고, 대우그룹 무너졌습니다. 그나마 삼성만 안 무너지고 버티고 있지만, 항상 위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2000년 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하셨는데 교회가 영원하신 기업이잖아요. 전 세계 곳곳에 가도 십자가와 그 진리의 성령이 역사하시게 되면 그 교회는 영원한 기업이 되는 겁니다.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니’ ‘바로 죄와 마귀와 세상과 우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은 교회밖에 없다’ 진짜 그렇습니다. 그러니 십자가가 세워진 곳은 어디든 성령이 역사하시면 죄를 이깁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의 권세가 얼마나 강합니까? 오직 진리의 말씀과 성령이 역사하시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에 속하여 세상 안에서 붙잡혀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이길 힘을 갖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영광의 기업이 풍성함을 주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일을 해 갈 때에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를 참 많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믿고 의지해 나갈 때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 때문에 어떤 문제의 회복과 어떤 병의 치유가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교회 복도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간증 문들이 벽에 걸려있습니다. 우리 교인이나 외부 교인이나 목회자나 사모님들을 위해 목요 영성집회를 할 때에 하나님께서 어떠한 문제, 상황, 아픔 속에서 해결해 주시고, 치유해 주시고, 회복하는 은혜들을 주실 때에 그것이 감사하다면서 쓴 간증 문들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로 때로는 제주도를 가게 되면 그곳에 계신 분께서 감사하다며 콘도 같은 숙박시설을 무료로 이용하게 했고, 또 거제도에 집회하러 갔을 때에는 같이 갔던 우리성도들과 다함께 식사대접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을 하다 보니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동대문에서 10년 가까이 저희 교회에 옷을 기증 하시는 분이 있는데 얼마 전에도 풍성하게 기증해 주셨습니다. 이런 것들이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냥 주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 앞에서 회개하고, 나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을 따라가려 할 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치유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기름 부음입니다.
“그의 힘과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시는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1:29)
II. 믿음으로 보이는 실상
‘그의 힘과 역사하심을 따라~’ 이렇게 말을 합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우리 인간들처럼 죄를 짊어진 것 같지만,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하잖아요.
저도 평상시에 밖에 왔다 갔다 하면 평범한 동네 아저씨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예배드릴 때나 집회를 할 때에 기름을 부어주시는 일들이 많습니다. 지난주에도 집회를 다녀왔습니다. 이번에 간 교회는 우리 권사님 집문 바로 앞에 있는 교회에서 불러주셔서 다녀왔습니다. 월, 화, 수 이렇게 3일을 집회하고 왔는데, 이 교회는 좀 오래돼서 성도 수가 좀 많이 있었습니다. 대략 2000명가량 모이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봄, 가을로 해서 일 년에 두 번 정도 부흥회를 한다고 합니다. 이번 집회가 끝나고 교회 목사님과 장로님들과 다과를 할 때에 저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 동안 수많은 집회를 했지만, 최고로 은혜 받았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또한 150억을 들여서 성전을 건축을 하고 있는데, 올 가을쯤이면 완공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목사님 그 때에 한 번 더 와주세요!’라며 요청을 했습니다.
사실 제가 그분들보다 나이가 많거나 학벌이 좋거나 그렇지 않지만 예배드릴 때에 하나님의 성령이 기름부음으로 그런 거예요.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시니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영의 속한 사람은 세상의 눈만이 아니라 믿음의 눈을 떠져 가는 것이 복이거든요.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 앞에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알게 하시고, 깨닫지 못하는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실상인 줄로 믿습니다.
바울도 이것을 위해 구했습니다. 저 또한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고, 그 영광의 기업이 풍성함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하는 거예요. 이것을 알면 이 땅의 현실적인 것에 급급하며 살아가질 않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이 떠지면 하나님 앞에 소망을 품고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서부터 18절에 보면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후4:16~18)
1. 말씀으로 창조된 세계
우리에게는 겉사람과 속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 하셨을 때에 ‘생령이 된지라’ 바로 또 하나의 영의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에 보면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이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장에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하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 된 것이 없느니라” (요1:1~3)
라고 되어 있잖아요. 창세기의 시작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세상의 종교인 불교, 유교처럼 사람에게 좋은 윤리 도덕 철학이 아니라 처음부터 창조의 소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조 전의 세계를 보면 혼돈이 있고, 공허하며 흑암에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엉망진창인 세계였데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은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여 하나님의 세계가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빛과 어둠이 나눠지는 것입니다. 말씀하시는 그 시간 옳고 그름이 나눠집니다. 진리와 거짓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그 순간부터입니다. 바로 시간의 세계가 창조되어지는 것입니다.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은 가운데 있지만, 성령이 역사하셔서 말씀을 듣는 그 순간부터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분별하게 됩니다.
2.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
또 이 우주만물이 얼마나 공허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특별한 공간을 만드셨는데, 하늘위에 궁창과 하늘 아래에 궁창을 만들어 특별한 공간의 세계를 만드시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셋 째 날에 하나님께서 뭍이 드러나라 땅이 생겨라 하셨는데 이 땅의 세계는 모든 물질의 세계가 들어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래서 이런 금이나 철이나 은이나 동이나 모든 물질들을 사람들은 쓰기 좋게 화폐로 만들어서 사용을 하는 것입니다.
넷째 날에는 하나님께서 큰 광명과 작은 광명을 만드시고 식물들이 잘 자라날 수 있도록 기후변화를 통하여 식물의 세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다섯 째 날에는 물속에는 물고기를 만드시고, 하늘에는 새를 만드시며, 다 움직이는 동물의 세계를 만드시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렇게 말씀하셨고요.
마지막 여섯 째 날에는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 하셨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자기의 형상대로 자녀가 태어나잖아요. 그러니까 성격이나 성품이나 비슷한 거예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의 세계를 만드시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렇게 인간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영을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속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흔히 마음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 영은 늙지 않고, 죽지 않고 영원합니다.
수 천 년 전에 기록된 성경이 왜 진리입니까? 그것은 지금도 이 창조의 원리대로 모든 세계가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면 사랑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그랬더니 아내에게 뱃속에 공간이 생깁니다. 그래서 입덧을 합니다. 그리고 병원에 갔더니 조그마한 물질이 생겼다고 ‘축하합니다. 임신입니다!’ 이렇게 말을 합니다. 또 이 조그마한 물질은 4~5개월 동안 자라기만 합니다. 그런데 5개월이 지나니까 동물처럼 막 움직입니다. 열 달이 되니까 사람의 형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만들어질 때에는 성경적 순서에 따라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창조하셨다는 진리를 알지 못하기에 성경을 윤리 도덕으로 밖에 안봅니다. 또한 사람만큼은 창세기 2장7절에 ‘생령이 된지라’ 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하지 않는 사람은 이것을 잘 모릅니다. 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참과 거짓이 무엇인지 몰라요. 그냥 어둠의 자식들이 되어 허송세월(虛送歲月) 시간만 보내는 것뿐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3.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이 운행하게 되면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그리고 성경은 겉사람과 속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있는데, ‘우리의 바라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봐야 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라 했는데 이것은 시간이 지나면 변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강대상 앞에 있는 꽃꽂이가 시들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꽃꽂이를 해주신 분은 울산에서 오신 집사님이신데, 제가 부산에 갔을 때에 울산에 사시는 남편 집사님이 제 책을 읽고서 상담을 하고자 했지만, 시간이 없어서 만나질 못했습니다. 그런데 남자 집사님이 믿음을 키워서 오라며 아내 집사님을 저희 교회로 보내셨습니다. 말씀도 듣고 기도도 하고, 상담도 받으면서 며칠 있다 오라고 했는데 며칠 있으면서 감사하다며 이렇게 꽃꽂이를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처음 꽃꽂이 할 때에는 이렇게 시들지 않았습니다. 젊은 사람처럼 원래는 생생했습니다. 하지만 잠깐 시간이 흐르니까 시들해졌습니다. 권사님들도 마찬가지로 예전에는 생생했습니다. 그러나 나이를 먹다보니 시들어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이는 것을 바라봐야 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질 않는 것을 바라봐야 합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젊음도 잠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인생을 ‘들에 있는 풀과 꽃과 같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우리의 속사람은 영원합니다. 보이지 않게 속사람이 담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소유한 만큼 사람은 인생을 사랑합니다. 이런 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정진희 집사님이 피아노를 칩니다. 그런데 피아노 실력을 어떻게 물질처럼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소유된 능력만큼 나타납니다.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이나 소망이나 사랑은 보여 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어디 있나 들춰보세요. 찾아 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갖고 있는 사람과 그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은 반드시 표현을 하게 되는데 그중에 하나가 바로 전도입니다.
또 그 사랑을 갖고 있고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차량운행을 하고, 영유아 어린 아이들을 위해 20여명이 봉사를 하고, 식사봉사를 하고, 절대 돈 받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랑을 갖고 있기 때문에 또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몸으로서 표현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이 땅에서 잠깐 힘들어도 믿음의 길을 걸어가고,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참고 견디며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보이는 것에 급급하며 살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악심(惡心), 악습(惡習), 악성(惡性)이 들어가 있습니다.
진리가 없으니까 어느 때가 되면 욱하고 성격이 나옵니다. 항상 악한 습관에 잡혀 게임이나 음란이나 노름이나 술 중독에 빠지는 것입니다. 똑같지만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사랑을 갖고 있고,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에 담은 것을 표현하게 됩니다. 그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보이는 대로 살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믿음으로 살아가시겠습니까?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속지 마세요. 현실 상황에 급급하다가 금방 젊음이 늙어버립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면 결국 급급하게 살고, 담고 있는 것은 어둠과 죄악과 상처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통하여 그 영원한 기업의 영광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은 살아가기를 원하는 거예요. 내 힘으로는 안 되지만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보이진 않지만 교회에 와서 주님을 의지할 때에 도우시는 손길이 있습니다. 주님을 의지하시고, 도우시는 손길을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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